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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전사-626화 (625/1,239)

0626 <-- 수도 야전 -->

“흐으···흐으으!”

창병을 쥐고 있는 남부 병사의 숨결이 떨렸다. 시야에 확 들어오는 거대한 올드 카르마를 보고 제정신을 가질 수 있는 병사는 남부에 드물었다. 그리고 그 공포는 퍼져갔으며, 아라온 플래티넘이라고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길 수 없다···”

지휘부에서 나와서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 중얼거림이 입밖에서 나오는 순간 아라온 플래티넘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는 영웅심이 없었고, 그저 지배자로서의 면모만 존재했다. 강적과 싸울 담이 없었다.

“후퇴를 명령해라. 수도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직도 싸우는 장병들이 많습니다. 여기서 후퇴를 한다면···”

“여기서 더 병사들이 죽으면 기반 없는 남부는 끝이다. 동부의 속국이 되어 많은 이들이 고통받게 될 것이다.”

남을 생각하는 듯했지만 오직 플래티넘 왕가의 존속밖에 아라온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그가 남부왕이었다. 아직 즉위식을 열지 않았기에 왕자의 신분이었지만 더는 그 어떤 경쟁 상대도 없었다.

‘내가 마지막 남은 적통이다.’

그렇기에 후일을 도모할 자신이 있었다. 악마는 동부에서도 어찌 되었건 막아야 하는 상대였기에 그들보고 상대하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우리는 북쪽에 있는 남부의 지방을 구하러 간다! 지금 당장!”

아라온 플래티넘이 순식간에 판단을 달리하고, 남부의 지방을 확보하러 떠날 준비를 명령했다. 그 소식은 전령을 타고 곳곳을 누볐다. 중앙을 버텨주던 남부의 병사들이 너도나도 도망치기 시작했다.

“후퇴하라! 후퇴!!”

병사들이 닥치는 대로 후퇴를 입에 담으며 싸질렀다. 대혼란이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후들거리는 다리로 땅을 굳건하게 밟고 있는 것은 변경백의 7천 병사와 동부의 병사들이었다.

길게이가 서둘러 겐 쟝과 만남을 가졌다. 이실레아의 경우에는 주변을 돌며 중형 악마 병졸을 잡거나, 어그로를 끌어서 중앙으로 가지 못하게 하고 있기 바빴다. 이곳에서는 두 사람이 결정을 짓고, 전령을 이실레아와 드낙에게 보내야 했다.

“아라온 왕자가 군대를 물리고 있소! 후퇴하고 있단 말이오! 당장 머리를 돌려 저 간악한 자들을 처리해야 하오!”

거친 말에도 겐 쟝은 덤덤했다.

“후퇴가 아니라, 패주요, 패주. 병사들이 사방팔방 도망가고 있지 않소.”

제대로 된 후퇴가 아니었다. 후퇴하라는 말에 남부 병사들은 이때다!하고 통제에서 벗어나 도망쳤다. 그건 아라온 플래티넘의 아래에 귀속되는 게 아니라, 자유민의 도망과 같았다.

그 어떤 족쇄도 존재하지 않았다.

‘1왕자의 군략은 그리 좋지 않군. 하긴 보좌하는 자조차도 불파겐에 들러붙었으니.’

두갈드 부사령관은 기병 지휘권조차도 아라온에게서 얻지 못했다. 드낙 불파겐의 모략 때문에 그를 믿지 못하게 되어서였다. 권력자는 의심을 항상 달고 사는 수밖에 없었다. 그 속에서 드낙의 무위는 독보적이었다.

“이대로 계속 버티면 개죽음을 당할 뿐이오.”

길게이의 말에도 겐 쟝은 턱을 추켜올렸다.

“우리들의 주군이 저 앞에 떨어져서 홀로 악마와 싸우고 있는데, 어찌 군을 물릴 수 있겠소?”

그 말에 길게이가 질색했다.

“군을 물리는 게 아니오. 배신자를 죽이는 일이오.”

“당장 급한 건 아니오.”

“악마는 악마대로 토벌해주고, 나머지는 모두 일왕자가 취하게 될 것이오.”

“영주님이 살아있으면 괜찮소.”

“현실이라는 건 그렇게 반짝반짝 빛이 나는 곳이 아니오. 저 도망치는 병졸들도 이내 다시 아라온의 밑으로 들어갈 것이오.”

병사 혼자서 무기만 챙기고 도망가서는 될 일도 안 된다. 살고 싶어도 굶을 수밖에 없었기에 다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에 무슨 짓을 할지 뻔했다. 하지만 겐 쟝은 드낙의 무력을 믿었다.

“더는 인간 병졸로는 영주님을 잡을 수 없소.”

“일왕자도 그렇게 생각하기를 빌겠소.”

더는 길게이는 의견을 고수하지 않았다. 대신 보다 생산적인 일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에 화답하듯 겐 쟝이 의견을 냈다.

“중앙 보병이 무너질 것은 뻔하니, 기병으로 뒤를 쳐야 하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단기전이 힘드니, 동부 군대를 빼내서 우회 타격을 해야하오.”

“동부군이 빠진 중앙이 버티겠소?”

“생각보다 변경백 칸의 병졸들이 강군이었소. 휴식시간에도 지켜야 할 건 다 지키는 것을 볼 수 있었소. 보통 체력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중요했기에 제식이 중요해졌다. 제식이 병사의 체력을 앗아갈 정도로 중요해진 역사 또한 이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이 시대는 아직 휘황찬란함보다는 행동거지를 통해서 병사의 질을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였다.

겐 쟝의 눈썰미는 이를 잘 파악하고, 전술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길게이 남부 사령관, 그대의 친위부대가 아직 전선에 들어가지도 않았지 않소.”

“음···”

길게이가 괜히 눈을 돌렸다.

남부의 전력이 도망치는 사이에 남은 인간들은 남아서 싸우기를 결의했다. 인간에게 대단한 위협이 되는 다른 종들과 싸운 세월이 수백 년이 흐른 남부인들은 결코 도망치는 게 사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했다.

그런 건 오직 남부의 기사들과 관리들만 알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그보다는 적통인 아라온의 명령을 듣는 걸 원했다.

“개자식들아!”

북부에서 살다가 자꾸 북부가 털려서 결국 드낙과 함께 동부로 오게 되며 불파겐의 병사로 군적을 새로 둔 베테랑 병사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무기도 버리고 도망치는 창병을 향해서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전황은 압도적으로 인간에게 불리했다. 〈올드 카르마〉의 등장으로 중대형 투석기는 모조리 놈을 향하고 있었고, 마법 마차의 마력은 모두 소진해있었다.

기병이 잘 날뛸 수 있도록 악마 군세의 양익을 찢어버리는 데 썼기 때문이다. 고로 남은 것으로 주무르며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쿠워어어!”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우직하게 들어왔지만, 북부인 출신의 동부 정예병들은 순식간에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자연스럽게 진형 내에 물방울 형태의 포위진이 내부에 자리 잡으며 1마리의 중형 악마 병졸을 창으로 마구잡이로 찔러대었다.

죽어가는 중형 악마 병졸의 뒤로 방패병들이 다른 중형 악마 병졸에게 밟혀서 죽임을 당하는 광경이 한 시야에 들어왔다.

“크에에엑!!!!”

그 사이사이마다 보이는 기사들이 병사들의 관심을 이용해서 악마 병졸에게 피해를 크게 입히기도 했다. 힘줄을 자르고, 눈을 꿰뚫고, 뼈 사이를 갈라 피를 쏟아내게 만드는 광경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병사와 함께하는 기사는 강력한 괴수를 홀로 차례차례 몇 마리나 잡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기사를 대신해서 병사들은 빠르게 죽어갔다.

“흐으, 흐아아악!”

먹혀 죽고, 잡혀 죽고, 날아가 떨어져 죽고 수많은 방법으로 죽어갔다.

〈보기사〉들을 비롯한 기사 전력이 전신갑주의 마법으로 보탬이 되고 있었지만 방패병의 소모율은 너무나도 높았다.

창병으로 중형 악마 병졸을 잡는 것보다 빨랐고, 기사가 중형 악마 병졸을 토벌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런 상황에서 뒤늦게 겐 쟝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변경백은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이미 같은 배를 탔기 때문이다.

대각선으로 몸을 능숙하게 빼는 동부병사들과 그 빈자리를 조밀하게 채우는 변경백의 병사들이 서로 교차했다. 가는 방향이 서로 달랐다. 다만 다행인 것은 길게이 왕자의 강력한 힘인 〈볼레티안 기사단〉이 남았다는 점이었다.

그덕에 중앙은 버틸 수 있었다.

홀로 말 한 필에 의지한 전령은 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의 체력을 회복하고 있는 기병대에 도착하여 겐 쟝의 전술을 전할 수 있었다.

“동부 사령관이 자신을 스스로 미끼로 만들었군.”

실로 존경한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무인(武人)이었기에 누구보다 지금 죽음을 향해 달려가야지만 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길게이를 속이기 위해서 〈우회타격〉이라고 말했지만 실상은 기병이 찔러 들어가기 좋게 한쪽 측면을 인간으로 뒤덮여서 악마 병졸들의 관심을 보다 더 완벽하게 만들고 있었다.

중형 악마 병졸과 싸우는 면적이 넓어지기 때문에 당연히 더 많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때가 늦으면 오히려 역으로 먹히겠어. 생각보다 길게이 놈이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겐 쟝에게 보여줬나.’

길게이의 병사가 도망치게 하는 것보다는 급박한 상황에서 그럴듯한 전술을 내세워 싸우게 만드는 게 더 좋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동부 영지는 5년도 안 된 햇병아리 영지였다.

서로서로 믿을 수가 없었다. 괜히 드낙의 〈세력화 추진 계획〉을 안 막은게 아니었다. 서로서로 믿을 수 없었기에 서로 뜻이 맞거나 그럴듯해보이는 자와 함께하려고 드낙의 세력화 추진 계획에 큰 반대를 하지 않았다.

드낙이 만든 제도를 악용할 수밖에 없었다.

늑대 한 마리, 한 마리가 서로 믿을만한 아군을 가려낼 수 있는 그림을 만들어주었다. 적당한 그림이 만들어졌기에 동부는 안정될 수 있었지만, 결코 그 안정은 오래갈 수가 없었다.

반대로 편을 가른 늑대들의 한계도 명확했다. 암투가 벌어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서로 선을 긋고 피아가 가려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드낙의 권력만이 드높아질 수 있기도 했다.

그 기괴한 구조는 좋고 나쁨의 양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누구나 골치 아파하는 형세가 만들어졌다.

고로, 겐 쟝은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것을 파악한 이실레아 또한 이번 전투에서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투구로 가려진 그녀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범부(凡夫)라면 도망쳤겠지만, 그녀나 겐 쟝이나 보통인물은 아니었다.

다른 인간보다 높은 지위에 오른 것만으로도 개체가 지닌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전령의 말을 듣는 것은 비단 이실레아 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동부 기병대의 독기(毒氣)를 느낀 남부 기병대 또한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임시기병단장 에키네스(Eknes)〉가 그 용맹에 감탄했기 때문에 아직은 후퇴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대가 모시는 자는 도망치고 있소. 병사들이 사방팔방 어린아이 노는 것처럼 와해되어 살길을 도모하는데, 어떻게 할 생각이오?”

“동부의 정예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전장에 서는데 남부인으로 부끄러움을 느끼기보다는 함께 서고 싶소. 안 그런가!”

와아아!!!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선두를 경쟁하는 동부의 정신 나간 기수들의 모습을 본 이상 같은 직종에 몸을 담고 있는 자로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승부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직업은 평생에 걸쳐서 하는 것이었으며 신분이 가로막고 있는 업(業)이기도 했다.

100년, 200년 요리를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다. 다른 걸 하고 싶어도 막혀있었기 때문에 갈 수 없는 것이 신분 사회라는 것이었다. 물론 예외는 있었지만 그건 예외일 뿐이었다.

발룬에 올라탄 이실레아가 천천히 앞으로 나가며 특수 장검을 허리춤에 다시 한 번 고쳐잡고, 불파겐의 깃발을 들어 올렸다. 스스로 기수가 되었다.

“깃발병들은 라이트 랜스를 들어라! 오직 단 하나의 깃발만 따라오라! 우리는 오늘 영원토록 사람들에게 회자 될 역사를 쓰러 간다!”

기수들이 고함 소리를 냈다. 몇몇 이들은 차오르는 열기를 참지 못하고 울먹거리기도 했는데, 그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다.

하나 되어서 역경을 넘어서는 첫 출발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파도처럼 마음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일체감이며, 소속감이며, 종족으로서의 합일(合一)이었으며, 사회적인 동물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쾌감이었다.

모든 생명체가 죽음의 파도에 휩쓸리듯이 그렇게 죽어갔다. 그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영웅도 아니었으며, 그저 불합리한 행운. 오직 운으로 뽑기를 뽑듯이 생(生)과 사(死)를 결정짓는 것이었으며 단 한 순간에 결판이 났다.

인간의 군세와 악마의 군세가 서로 공멸(共滅)되어갔다.

그것은 신을 향한 인신공양(人身御供)과 다를 바 없었다. 흙은 피로 질척거리다가 이내 강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철퍽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진창이었던 땅이 늪으로 변해갔다.

만(萬)의 사상자를 낸 평야는 지옥도나 다름없었다.

그 속에서 드낙의 고함소리가 〈들러붙은 검은 불꽃〉을 뚫고 악마 게페락스의 귀로 선명하게 파고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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