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5 <-- 수도 야전 -->
드낙조차도 움찔할 정도의 거대한 울림이 땅에서부터 이루어졌다. 그리고 수도의 왕성에서 뭔가가 뒤섞인 핏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가 눈을 좁혀 확인하자 악마 게페락스가 실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 나이트의 명성을 들었었지. 인간이 혼자서 언데드 건축물을 토벌했다지?”
비웃음이 뒤섞인 말이었다.
역사 속에 모습을 드러냈기에 드낙의 행보는 이야기꾼들이 부풀렸지만, 그 소스는 분명한 것이었다. 특히나 언데드 건축물을 토벌한 드낙은 실로 대단한 영웅으로 포장되어 한층 더 공이 들여져서 퍼져나갔다.
가장 돈이 잘 되는 게 영웅주의가 가미된 이야기였기에 이야기꾼들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만 명을 막았다고 일컬어지는 장판파에는 수많은 명인의 글이 써진 비석이 가득할 지경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사람인 이상 영웅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보는 오롯이 게페락스에게로 들어왔다. 그리고 〈올드 카르마(Old Karma)〉가 만들어지는 계기를 만들어냈다.
“저것은 인간과 너를 뛰어넘도록 만들어진 시련이다.”
게페락스가 팔을 활짝 피웠다. 그 팔에 들러붙은 팔과 다리가 기괴하게 따라 움직이며 마치 공작처럼 펼쳐졌다. 악마의 피로 진창이 된 땅에서 드낙이 침을 퉤하고 뱉었다.
‘입을 겁나 터네.’
벌써 800합 가까이 싸웠기에 좋은 소리가 나오지 못했다. 가히 수천 명에 달하는 피를 대지에 뿌리고, 살과 근육이 갈라지고 뼈를 잘라냈다. 하지만 여전히 악마 게페락스는 건재했다.
짜증과 욕이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왕성을 무너뜨리며 쏟아져나오는 피가 점점 형태를 이루고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1페이즈가 계속 변모하며 모비딕과 드낙의 장점을 가져가는 악마 게페락스를 떨어뜨리는 것이었고.
2페이즈가 마구잡이로 증식하는 악마를 상대로 공세를 유지하는 것이라면.
3페이즈는 왕성만 한 초대형 악마 병졸의 등장이었다.
‘끝도 없구나.’
드낙이 절로 침을 삼켰다. 악마의 생명력이 어디까지인지 진정으로 가늠이 안 되어서였다. 그 주춤거리는 모습에 악마 게페락스가 킬킬거렸다.
“두려워하는군. 하긴, 하찮은 필멸자가 가진 것이 많다고 해도 어찌 초월자와 견주겠느냐.”
‘그놈의 초월자.’
팔과 다리로 떡칠이 된 모습은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저렇게까지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적혈대검을 곧추세우는 모습을 보며 게페락스가 인간의 군세를 향해 손을 겨누었다.
“모두 올드 카르마에 의해서 죽을 것이다. 네가 막을 수 있을까?”
쿠구구구!
닥치는 대로 수도를 부수며, 액체에 불과했던 것이 거인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높이만 해도 20m는 되어 보였다. 특히나 두려울 만한 부분은 걸어갈수록 제대로 형상이 잡히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노인들의 머리를···”
“크크큭.”
드낙이 놀라운 시력으로 올드 카르마의 비밀을 알아내자 게페락스가 실로 흥겹게 웃었다.
“너도 흑마법에 제법 재능이 있더군. 그렇다면 알 수밖에 없겠지. 올드 카르마에 깃든 업(業)과 그릇을.”
인간은 살면서 업을 쌓는다. 평범하게 살아도 나이가 들면, 이 세상이라는 곳에 살며 온갖 것이 묻으면, 업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이 굴러가는 뜻에 따라서 업은 쌓이고 만다. 그렇기에 악마에게 있어서 늙은이는 가장 좋은 자원이었다.
힘도 약하고, 의지도 나약해서 대량으로 잡아둬도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런데 보유한 업은 다른 인간과 비할 바가 안 되었다. 중립신은 ‘때’가 왔기에 닥치는 대로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며 그 업을 움켜쥐고 있지만 사실 인간에게서 가장 많은 업을 얻는 방법은 늙어 죽이는 것이었다.
물리적인 법칙을 뛰어넘어 피에서 늙은이들의 머리가 툭툭 튀어나와서 둥둥 뜨며 새하얀 머리카락이 밖으로 삐져나왔다. 그게 수만 개가 넘으며 피부처럼 올드 카르마의 곁 표면을 뒤덮어갔다.
안에는 피로 이루어지고, 밖과의 경계가 늙은이들의 머리통이 자리 잡았다. 새하얀 머리카락으로 덮여서 흡사 설인처럼 보였다.
다만, 머리가 없었다. 그 외의 모든 부위는 인간과 형상이 같았다. 대형화된 남자의 생식기에서는 피와 뼈가 떨어져내리며 악마 게페락스가 만든 테마에 맞게 그 자원을 생산하고 있었다.
콰과가가각!
오른손으로 땅을 훑자 주변 건물에 달라붙은 피와 뼈가 함께 딸려왔고, 이내 오른손에 다닥다닥 붙으며 하나의 무기를 만들어냈다. 건물, 피와 뼈, 흙 등이 뒤섞이며 십여 m짜리 곤봉이 만들어졌다.
‘허미 시벌. 무기까지 쓰네.’
완전히 전투태세를 마친 20m의 거체 올드 카르마가 성벽을 무너뜨리며 평야로 나왔다.
드낙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인간을 도와서 올드 카르마부터 토벌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군세는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 있으며, 남부를 지켜낼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무시하고 악마부터 토벌하는 것이다. 인간이 어찌 될지는 모르겠고, 일단 검은 꿈부터 챙기는 일이었다.
모두 장단점이 명확했다. 그리고 드낙에게는 딜레마로 느껴졌다.
‘악마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앞으로의 싸움에서 드낙에게 악마의 육체변화는 반드시 필요한 힘이었다. 특히나 〈그릇〉에 큰 도움이 줄 것이다. 초월자로 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면서도 인간의 모습을 지닐 수 있어 보였다.
반면 이곳에는 동부의 정예와 남부의 반정예급 병사들이 모여있었다. 남부 또한 스스로를 정예라고 말하고 있지만, 마을을 하루아침에 쑥대밭으로 만드는 몬스터와 일백야수를 상대로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 북부인들을 동부로 데려와서 병사로 삼은 동부군보다는 못했다.
중국의 기병 100기가 몽골의 기병 3기에 개 털리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같은 병사라도 그 질은 철저하게 차이가 났다. 버티고 못 버티고의 싸움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절반 정도 정예라고 불릴만했다. 고로 드낙은 이들을 포기하는 게 어려웠다.
‘제국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
삽시간에 북부가 뚫리는 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진퇴양난이나 다름없었지만 결국 드낙은 자기 개인을 위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러한 인간이었다. 특히 제법 팽팽한 싸움이었음에도 도망줄을 놓으려고 했던 악마는 드낙에게 매우 위협적인 인물상으로 여겨졌다.
‘사냥꾼이라서, 사냥꾼이기에 위협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드낙이 사냥꾼이라면 악마는 범(虎)이라고 할 수 있다. 인육을 먹는 호랑이를 사냥꾼이 실패하고 반대로 잡아먹히면, 그 범은 그 뒤로 수백 명의 사람을 습격하는 호랑이가 되어버린다.
단 한 번의 경험.
단 한 번의 승리에서 나오는 경험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악마도 이와 같다. 지금 놓쳐버리면 드래곤 나이트와 공중전을 한 경험과 드낙과 지상전을 경험한 것을 복기하여 더욱 강해져서 나타날 것이다.
‘죽인다면 첫 싸움에서 죽여야만 한다.’
드낙의 살기가 명확해지자 게페락스가 속으로 침을 삼켰다.
‘이게 아닌데.’
그의 의지가 올드 카르마에게로 옮겨졌다. 천천히 걷던 놈이 제법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중형 투석기가 쏜 질량체를 맞았음에도 끄떡없었다.
그 존재감은 실로 드낙의 관심을 끌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드낙은 또 한 가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블러핑을 걸고 있다.’
왜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악마는 자신이 올드 카르마를 토벌하러 가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드낙은 발을 돌리지 않고, 악마를 향해 돌진할 수 있었다.
“쿠왜애액!”
팔근육이 쩍하고 찢어지며 체액이 튀어나와서 드낙의 몸을 노렸다. 누런 고름을 다지고 빻은 것 같은 끔찍한 체액이었다. 드낙은 적혈대검을 쥐고 있는 손을 살짝 비틀어서 검면으로 이를 막으며 걸음을 멈추며 강하게 적혈 대검을 당겼다.
순식간에 대검이 있던 자리에 악마의 팔과 다리가 거센 파도처럼 휘둘러 지나갔으며 손톱이 허공을 할퀴고 지나갔다.
“합!”
당긴 적혈대검을 깊게 찔러 휘둘러지는 악마의 신체들을 단번에 찔러 베었다. 옆으로 향하는 악마의 힘은 찔러지는 드낙에게 그 어떤 반항조차도 하지 못했다.
맹목적인 돌격 속에 숨겨진 변수는 깔끔했다. 그리고 악마에게는 섬뜩함으로 다가왔다. 힘도 방향이 맞아야 상대에게 타격을 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물릴 수 없다. 하지만···!’
되려 게페락스가 갈등했다. 왜냐하면 올드 카르마가 지니는 약점을 드낙이 정확하게 파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왜인지는 몰라도 눈치껏 좋은 곳을 향하는 게 드낙의 장점이었다. 위기 상황이 아니면 도통 보기 힘들지만, 촉은 확실히 으뜸이었다.
“우오오오오오!!!!!”
드낙이 흉성을 터트리며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세리안의 대검 파지법을 배웠고, 세파리아스의 찌꺼기가 있었으며 끝없이 단련에 힘썼다. 마법사에게 무력으로 패배할 수가 없었다.
또한 모비딕과 레우치터가 있었다. 두 손으로 부족한 상황이 오지 않게 도와주고 있었다.
풀썩!
레우치터가 훑고 지나간 육체는 악마 게페락스의 통제를 벗어나고 땅에 떨어져 내렸다. 그 사이에 드낙이 대검을 회수하면서 단번에 갈라내며 레우치터가 훑고 지나간 곳으로 도약해서 자리를 옮겼다.
대검을 휘두를 수 있는 공간을 점유하기 위해서였다.
“미꾸라지 같은 놈!”
악마 게페렉스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자마자 허공에서 흑마법으로 만들어낸 화염구가 비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피로 진창이 된 땅에 마법 불꽃이 들러붙었다.
〈올드 카르마〉가 전장에 투입되면서 인간 군세의 어그로가 대형 악마 병졸에게 확 끌렸고, 게페락스를 돕기 위해서 온 중형 악마 병졸들 또한 흙의 골램을 처리했기 때문에 〈블레이즈 위저드(Blaze Wizard)〉들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채 게페락스가 보낸 정신파로 화망을 형성한 것이다.
“미친놈이!”
드낙이 고함을 질렀다. 자해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드낙 또한 결국에는 인간의 몸. 신성력으로 아무리 육체를 치유해도 고통은 남았다.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하하하하!!!”
반면 자신의 몸에 마력불꽃이 들러붙었음에도 여유를 얻은 게페락스는 쾌활하게 웃어 제겼다. 동시에 팔과 다리의 집합체로 만든 육체 뒤쪽에서 다시 몸을 만들어내며 튀어나왔다.
이번 싸움으로 또다시 모습을 바꾸며 우세를 점할 수 있는 몸을 만든 것이다. 끝없이 진화해나갔다.
“크아아!”
“그르르!”
그 몸은 마치 꼬리처럼 길쭉했고, 온갖 짐승의 아가리가 튀어나와서 으르렁거렸다. 그 끝에서 악마의 검은 뿔을 내세우며 게페락스의 얼굴이 생성됐다.
‘근접전을 하면 나만 손해다. 초월의 힘으로 죽여야 한다.’
수백의 짐승 아가리에서 혓바닥이 날름거렸다. 모두 주문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 형태는 간단했다. 그저 〈들러붙는 검은 불꽃〉이라는 주문이 새겨져 있을 뿐이었으며, 그 주문을 중심으로 불꽃의 형상이 토템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 수백의 짐승 아가리에서 검은 불꽃이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그 모든 아가리가 뱀처럼 튀어나오며 드낙을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섬뜩함이 드낙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드낙은 모비딕부터 챙겼다.
“모비딕! 날아올라라!”
“크롸!”
블랙 스케일 와이번이 뒤로 도망치며 드낙의 적혈 대검에 목이 깔끔하게 따인 중형 악마 병졸을 타고 지나가며 도약하며 단번에 날아올랐다. 그 뒤로 수백의 아가리에서 검은 화염이 드낙을 향해 쏟아져나왔다.
그 화염은 수백평을 한 번에 뒤덮는 큰 화마였고, 일개 인간의 모습을 지닌 드낙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도망친다!’
드낙이 적혈 대검으로 대충 막으며 옆으로 도망쳤다. 물론 화염의 범위가 워낙 커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들러붙는 검은 불꽃〉은 드낙을 그대로 속박했다.
무게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윽!”
드낙이 신음 소리를 냈다. 끝도 없이 검은 불꽃이 드낙에게 들러붙으며 점점 농도가 진해지며 불타는 액체가 되었다. 30걸음을 내리 움직였지만, 그것도 끝이었다.
“크아아아아악!!!”
드낙이 고통스럽게 소리를 내질렀다. 신성력이 끝도 없이 드낙을 보조해주었지만, 화상의 고통은 이미 한 번 트라우마로 남아있어서 더욱 드낙의 멘탈을 깎아나갔다.
“죽어라! 벌레 같은 놈!”
게페락스는 모든 힘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3218년 동안 모은 초월의 힘을 쏟아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