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0 <-- 겨울의 악마 -->
중립신(中立神) 엘 마르토 카사다민(El Marto Casadamin)은 눈을 감은 채 이변을 마주했다.
신의 육과 혼으로 빚어진 것이 이 세상의 드워프와 엘프였다. 그들이 있는데 흑마법사가 악마가 되어 남부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황당한 일이었다. 보통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만변하는 마력과 같이, 천재적인 전략가인 그에게 있어서 현실의 불규칙성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악마는 마신장과 협력할 생각이겠지.’
드워프가 있는 곳의 지하에 숨어 살던 마신장이 갑자기 남부 왕국의 서쪽에 등장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올 수 없었기에 흑마법사의 조력이 있음을 중립신은 깨달을 수 있었다.
악마가 지닌 전략을 고꾸라뜨리기 위해서는 당연히 남부 쟁탈전에서 승리해야 했다.
중립신은 절대 전지전능하지 않았다. 대신이었을 때도 배신당한 경험이 있었다. 아무리 강대한 존재라도 결국 현실의 존재일 뿐이었다.
〈신들의 땅〉에서 도주하기 위해서는 대신 중의 대신이었던 중립신이 많은 힘을 소모했어야 했다. 그 결과는 배신이었다. 그건 단 한 번의 실수였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변할 수 있었음에도 중립신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의 증거였다.
그렇기에 중립신은 완성된 테라에는 신도 없어야 하고, 챔피언조차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테라의 방위에는 챔피언이 필요했다.
다시 한 번 대신으로 올라선 중립신이 스스로 희생하여 만드는 테라라는 행성은 초월자라면 군침이 돋아날 정도였다. 새로운 신들의 땅이나 다름없었다.
‘확실하게 승리해야 한다.’
그런 확신을 얻으려면 드낙에게 별의 힘을 내어줘야 했다. 십이천칭의 별이 아니라, 중립신의 육과 혼으로 만들어진 이 차원계만의 특징적인 별의 힘을 하사해야 했다.
이미 15개의 특징적인 별들이 모두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하지만 하나로 합치지는 않았는데, 엘프에게 들킬 수 있어서였다.
중립신이 손에 쥔 별을 움직여서 엘프를 염탐하려고 했지만 〈폭풍의 요람(Cradle of the typhoon)〉 때문에 실패했기에 매우 조심스러웠다. 주변 대기에 있는 마력을 끌어당기는 도시 시스템인 폭풍의 요람은 생각외로 강력했다.
‘그렇기에 엘프는 나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불멸자(不滅者)라고 스스로를 높이고 있었다. 그리고 완벽한 방어 수단이며 강력한 공격 수단인 폭풍의 요람을 만들어냈다. 그 빈틈은 당연히 주변에 대한 정보 습득의 부재였다.
중립신이 15개의 별을 획득했음에도 모르고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엘프가 강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발전 정도를 제어하고, 드워프의 몰락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지하에 숨어있던 마신장을 그저 방관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종족이 아득바득거리는 걸 지켜보고, 그들이 멸망해도 이 세계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그들은 강했다.
‘그게 약점이 될 줄은 몰랐겠지.’
처음 신의 반열에 올라선 신들이 가장 많이 죽는다. 주체를 못 할 정도로 〈권능〉의 강력함에 도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립신은 아니었다.
그는 드낙이라는 챔피언을 통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 큰 차이였다.
‘드낙에게 힘을 실어주면 엘프는 움직일 수밖에 없다. 제국이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결국 드워프의 서부로 향해야 하는 드낙에게 엘프는 손을 대어도 원정대 한 부대 정도.’
중립신은 고민 끝에 드낙에게 3개의 별을 확실하게 밀어주기로 했다. 악마를 확정적으로 토벌하기 위함이었다. 악마와 마신장이 힘을 합치면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보유하게 될 것이 뻔했기에 여기서는 100%, 확실하게 해야 했다.
살성(殺星)은 죽여야 하는 별이므로 현재 아주 잘 써먹을 수 있었기에 당연히 선택되었다.
예성(譽星)은 드낙에게 부족한 인복과 존경을 받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일을 잘해도 칭찬받지도, 기대를 받지도, 아무것도 쥘 수 없고 그저 두려움과 차별만 받게 되는 인간이 드낙이었다.
마지막은 중립신조차도 제법 고민을 해야 했다. 결국 저주성(咀呪星)을 조금 수정해서 드낙의 정수리 위를 따라다니도록 만들었다.
저주성은 불완전한 레우치터가 드낙에게 호감을 느끼도록 해주고, 레우치터를 다루는 데 있어서 드낙이 조금 편하고, 수월함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힘의 우위가 존재하는 한 레우치터는 그저 도구에 불과했기에 중립신은 이를 공식적으로 허락해주었다.
‘주력을 통한 저주는 핏빛쥐들에게도 잘 맞는다.’
중립신은 매우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분기점은 〈악마를 토벌 했을 때〉.
박호훈이 스스로 선택하게 될 것이다.
중립신의 손에 죽을지. 그게 아니라면 지금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지.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중립신이 드낙에 내리는 시험이었다. 배신당한 신의 시험이었고, 배신을 당하며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는 자에 대한 시험이었다.
*
전략적 패배.
그것은 상대적인 패배였다.
악마 게페락스의 지연전을 이겨내지 못한 인간 군대는 이를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인정하고 나면 편해지는 법이었고, 다른 선택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게 인간의 장점이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을 노렸다.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생각했다.
“하으아!”
고함을 지르며 병사가 망치를 내려쳤다. 못이 한층 더 바위에 깊게 들어갔고, 이내 옆에 있는 병사가 고함을 질렀다.
“뒤로!”
망치를 휘두르던 병사가 반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망치를 지팡이처럼 쓰며 땀을 닦았다. 물을 뿌리고, 박혀있는 복을 확인한 다음에 다시 망치질이 시작되었다. 큰 바위를 쪼개서 가져가기 위함이었다.
“넘어간다!”
나무를 통째로 벌목하는 병사도 있었다. 그들은 나뭇가지도 따로 모아놨고, 모은 곳에서는 시들었지만 붙어있는 나뭇잎을 치고, 쓰지 못하는 작은 나뭇가지를 쳐내는 작업을 끝내고 크기 별로 두 개로 나누고 있었다.
여기서 라이트 랜스가 만들어졌다. 물론 속이 꽉 찬 나무였다. 목재로 된 라이트 랜스를 수레에 담아서 옮겨서 도착한 곳은 억지로 땅을 파서 크기와 깊이를 넓힌 계곡이었다.
푸더더덩!
그곳에 라이트 랜스를 던져 놓았다. 둥둥 더 있는 라이트 랜스가 많았는데, 물을 먹이기 위함이었다.
수많은 곳에서 자원을 획득하고, 전쟁 물자를 만드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식량 또한 깡그리 모으고 있었다. 겨울이었음에도 노력하면 얻을 수 있었다.
거친 밧줄 또한 가득 자리 잡았다.
물론 이런 건 아주 적은 부분에 불과했다. 바위를 캐는데 가장 많은 인력이 투입되고 있었다.
인간은 전략적 패배를 당했음에도 오히려 그걸 역이용하여 확실하게 싸움을 다시 한 번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는 악마가 더 우세해 보였다.
두두두두두!
거칠게 말들이 뛰었다. 경기병들은 뒤로 가면서 허리를 홱 돌리며 활을 쏘았다. 단궁에 다리가 맞은 키메라가 그대로 고개를 땅에 처박으며 나뒹굴었다. 등에 튀어나온 촉수가 소금을 뿌린 미꾸라지처럼 거세게 꿈틀거렸다.
“아리에이리히에이야아!”
노래를 부르듯이 선두의 경기병 기수들이 신호를 주기 시작했다. 활을 쏘거나 다른 일에 집중하던 기수를 위해서 신호를 준 것이다.
경기병이 없는 중기병은 밥일 뿐이고, 중기병이 없는 경기병은 무기가 빼앗긴 전사와 같았다. 최소 20%의 중기병을 보유해야지만 제대로 된 기병의 힘을 낼 수 있었다.
“꾸어엉!”
이실레아를 태운 발룬이 언덕에서 벼락처럼 떨어져서 키메라를 피떡으로 만들며 그대로 키메라 무리의 측면을 돌파했다. 길쭉한 형세를 지닌 채로 경기병들을 쫓았던 키메라들의 진형은 측면에서 보면 아주 얇은 진형이었다.
“우와아아아아!!!!!!”
깃발을 든 중기병이 고함을 내지르며 적당히 경사진 곳을 내려갔다. 멀리서 보면 실로 느려 보였지만 그 육중함은 가까이서 봤을 때, 공포나 다름없었다.
망아지를 비롯해서 소와 말의 육(肉)과 울타리 그리고 촉수가 뒤섞인 키메라가 멀어지는 경기병에게서 고개를 홱 돌려서 중기병에게로 덤볐다. 발룬이 돌파한 곳에는 키메라들이 양쪽으로 서로 가려고 해서 뒤엉켰다.
그곳을 정확하게 중기병들이 찔렀다. 수백의 중기병이 기차처럼 하나가 되어서 지나가기 시작했다.
“게헥!”
정면은 뭘 하지도 못하고 돌파당했고, 양옆의 키메라 무리가 덤볐지만 단 1기의 중기병도 잡아내지 못했다. 고슴도치처럼 툭 튀어나온 랜스들은 만일을 대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후웁!”
숨을 참으며 배에 힘을 빡 주면서 허리를 틀며 단번에 라이트 랜스를 근거리에서 투척하는 중기병들 때문이었다.
퍼걱!
손에서 떠난 랜스는 금방 아래로 축 처졌지만 그런데도 몇 걸음 뻗어 나갈 정도는 되었다. 당연히 뼈까지 부수며 안으로 깊게 파고 들어갔다. 달리는 방향을 이용해서 비스듬하게 그 운동력을 함께 쏟아붓기 때문이었다.
꼬치가 되어버린 키메라가 고꾸라졌다.
돌파가 성공했기 때문에 좌우로 덤비는 키메라들은 시체만 남게 되었다. 중기병들이 빠졌을 때, 경기병들은 다시 되돌아가서 양분된 키메라 한쪽에 화망을 형성하며 단궁을 쏘았다.
돌파한 중기병은 다시 속도를 줄이며 경기병 쪽으로 움직였다. 말들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불과 50~100걸음의 전력질주였음에도 전투마들은 미친 듯이 숨을 내뱉고 있었다.
반면 기동성에서 우위인 경기병들은 중기병이 천천히 빠지자 앞으로 치고 나갔다. 몇몇 경기병 기수들은 소형 악기를 꺼내 들어서 소음을 크게 냈다.
슈슈슉!
키메라들이 다가오자 준비한 자벨린을 투척했다. 물을 잔뜩 먹인 나무로 된 자벨린은 무겁기도 무거워서 사거리가 고작 30~50걸음에 지나지 않았다. 이 자벨린으로 75걸음 이상을 쏠 수 있으면 장사라고 불릴만했다.
앞열이 자벨린에 쓰러지자 뒤에서 뛰어넘어도 속력이 줄어들었고, 그때 경기병이 다시 빠지면서 중기병 300기가 5갈래로 나뉘어서 닥치는 대로 키메라들을 휩쓸어버렸다. 후방을 치는 것과 다름없었다.
중기병을 보조하는 경기병들의 전술 덕분에 완급 조절을 수월하게 한 중기병은 말끔하게 800마리에 달하는 소형 키메라를 죽일 수 있었다.
그 이후에는 키메라의 시체를 모아서 불태웠다. 이런 국지전에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숲에서는 중보병이 활약했고, 언덕과 평지에서는 기병들이 주름을 잡았다.
악마 게페락스가 피로 얻고 있는 시간 속에서 소형 키메라와 소형 악마 병졸의 완전한 전멸 또한 인간들이 지금 이 시각에 해야 할 일이었다.
후방이 완벽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안전해지고 나서야 인간 군대가 앞으로 나아갔다. 본래 도착 예정이었던 3일에서 일주일이 추가로 더 지나 10일 만에 수도 앞의 평야에 인간의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
병사들이 너도나도 입을 나발처럼 튀어나오게 하며 아주 낮은 저음을 내며 길게 우소리를 냈다. 이내 잠깐 숨을 들이쉬는 시간이 왔다. 작곡으로 치면 쉼표다.
아!
거대하고 짧은 함성이 숨을 들이켜면서 생긴 침묵 속에서 활화산처럼 튀어나왔다.
우~~
아!
그 소리는 천지를 요동시켰다. 주변에서 함께하는 병사들은 거대한 함성에 공기가 떨리는 것을 느끼며 온몸에서 뜨거운 것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대규모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병사는 온몸에 전율감이 계속해서 아! 할 때마다 쫙 쫙 뻗어 가는 걸 느껴야 했다.
하나의 동일한 행위를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고, 강하게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은 섬뜩한 광경이었다.
드낙은 모비딕을 탄 채로 저공비행을 하며 군대를 지나갔다.
“으아아아아!!!!!”
병사들이 무기를 추켜올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드낙 또한 함성을 꽝꽝 뱉어냈다.
그 모습을 내성의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게페락스가 등에서 박쥐 날개를 넓게 펼쳤다. 3m가 넘는 거체를 날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날개의 길이는 한쪽당 3m는 넘었고, 6m에 달했다.
내성에 펼쳐진 박쥐의 날개는 누구나 볼 수 있었다. 전망대 위에 눕혀진 6m짜리 장식이나 다름없었다.
대치가 이루어졌다. 인간들은 곧바로 중대형 투석기를 조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악마 세력은 그 어떤 원거리 공격도 감행하지 않고 있었다.
수도를 뒤덮은 피와 뼈 그리고 살점들이 꿈틀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투구덩!
1시간의 조립 시간을 마친 투석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성벽에 부딪혔고, 부풀어 오른 종양 같은 것이 피떡이 되어서 성벽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뒤에는 성벽 너머로 들어갔다.
“앞으로!”
대형 투석기의 공격이 시작되었음에도 반격이 없자 보병들이 700m까지 접근했고, 소형 발리스타가 배치되었다. 도르레를 이용해서 밧줄을 감으면 발리스타의 시위가 팽팽하게 당기는 반 기계식 소형 발리스타였다.
마치 새총을 크게 만든 것과 같았다. 성인 남자의 주먹만 한 주먹돌이 올려졌고, 그대로 발사되었다.
투엉!
높게 올라간 주먹돌이 포물선을 그리며 성벽으로 넘어갔다. 고층 빌딩에서 벽돌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은 엄청난 물리력을 지닌 강력한 공성 병기 중 하나가 소형 발리스타였다.
장애물 또한 세워졌고, 땅을 파기도 했다.
밤을 준비하며 곳곳에 화덕이 자리 잡고 횃불이 불이 꺼진 채로 꽂혔다. 그리고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