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7 <-- 겨울의 악마 -->
결국, 수도에 있는 악마 군대의 상황에 따라서 결정하게 되었다. 드낙은 거칠게 남부를 밀어붙이지 않았는데, 미래를 생각하면 남부도 어느 정도는 존속을 해줘야 했다.
인간이 가진 장점은 소비하는 존재라는 점이었다.
다른 지성종족보다 더 욕망이 컸고, 이를 이용해서 경제를 크게 부흥시킬 수 있었다. 주제도 모르고 끝도 없이 욕망이 사용될 수 있었다. 자신이 사는 땅이 오염되어 농사짓지 못해도, 강이 썩어 똥물이 되어 물고기가 살지 못해도 그 욕망은 끝을 모르는 게 인간이었다.
그건 단점으로 보이지만 〈종족 경쟁〉에 있어서는 가장 큰 장점이었다.
중립신이 여러 가지를 언급해줬기에 드낙은 거기까지 생각을 하고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 배려가 남부를 존속하게 만들어주었다.
회전과 수도로의 진입.
두 가지 모두 준비되었으며 중대형의 숫자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3일의 저녁 회의 이후에 변경백 칸은 본격적으로 불파겐에게 붙었다.
“후방으로! 개인 소지품을 다시 한 번 확인하라!”
이사 가듯이 움직였다. 몇몇 깃발병들은 늦장을 부리다가 급하게 깃발을 교체하고 있었다. 남부 왕국의 깃발이 제거되고, 불파겐의 깃발이 올라갔다. 병사들의 모습만으로도 변경백이 불파겐에게 돌아섰다는 걸 남부도 알게 되었다.
‘괘씸한···’
일왕자는 절로 욕이 나왔다. 하지만 대놓고 나무라지는 못했다. 변경백의 영지를 주인 없는 땅으로 만든 것부터 이미 변경백의 실각은 예상된 것이었으며 남부의 지휘관들은 그를 죽은 권력처럼 여겼다.
그 소외감을 일왕자는 적당히 도와줬지만 땅 없는 변경백은 그저 관리 중 한 명에 불과했다. 말로만 그럴 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다.
꺼져버린 불씨에서 훨훨 날아오른 변경백의 모습은 배신자나 다름없었지만, 불파겐의 가호를 받은 순간부터 이미 일왕자의 손을 떠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왕자님! 불파겐 자작이 두갈드 부사령관에게도 독대를 했다고 합니다!”
“뭐라!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닌가!”
아라온 왕자가 펄쩍 뛰었다. 자신도 모르게 경박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상가를 주름잡는 부상이 상도덕도 잊어버린 호로상놈의 보부상을 보는 태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노하는 이유는 제대로 역린이 찔렸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놈이! 힘만 믿고, 아주 막 나가는구나!’
남부 왕국의 무인들과 문인들은 모두 땅을 가지지 못한 관리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귀족도 아니었다. 남부의 실무진들은 사실상 드낙에게 노다지나 다름없었다.
‘동부는 아직 개발이 안 된 곳이 많다.’
도로 사업에 불파겐 자작이 자신의 돈을 지원해주기까지 하면서 지방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 계약에 묶이고, 다시 불파겐 자작에게 세금을 내야함에도 장원 기사가 되고 싶은 자들이 수두룩했다.
‘두갈드 부사령관도 넘어갈 수 있다.’
그 정도 되는 사람이면 직책을 주고 봉토(封土)를 내어주기까지 할 수 있었다.
‘아니, 넘어갈 수밖에 없겠지.’
영토를 가지면 군대를 보유해야 하기 때문에 톱니바퀴 돌아가듯이 권력이 한순간에 급상승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마을 촌장조차도 외부인들에게는 강력한 지역유지로 보이는데, 성주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당장 가야겠다!”
아라온이 늦은 밤임에도 서둘러 군막 밖으로 나갔다. 이미 그가 갔을 때, 드낙은 두갈드 부사령관과 이야기를 끝내고 가버린 지 오래였다.
“왕자 전하 아니십니까.”
두갈드 부사령관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켕기는 것이 있었기에 조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가 무슨 제안을 했소?”
“왕자 전하···”
“남부의 발전된 문물을 버리고, 허허벌판으로 가지는 않을 것 아니오. 뭔가 다른 제안을 했겠지. 안 그렇소?”
두갈드는 그 말에도 평정심을 유지했다.
“많은 것을 권했지만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제 고향은 남부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오.”
아라온은 자정을 넘길 때까지 두갈드와 술을 대작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의 마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취기가 오른 아라온이 군막을 나가자 두갈드는 빈 술잔을 들어서 지긋이 바라보았다.
‘악마의 손에 수도가 파괴된 남부냐, 개발이 덜 된 동부냐.’
그 눈에는 감정 하나 깃들지 않았다. 공명(功名)을 떨치는데 사사로운 감정은 쓸데없는 감상에 불과했다. 그리고 드낙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방을 헤집었다. 진짜 목적을 흐리기 위함이었다.
마치 경박하게 한 놈만 낚이라는 기분으로 행하는 것처럼 보이게 해서 아라온을 방심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돈 많이 주는 곳에 이직하고 싶은 건 모든 사람의 이치다.’
보급을 맡았던 자들까지 합치면 뻥을 좀 넣어서 십만대군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던 것이 남부 본대였다. 이를 도맡아서 진행한 것이 두갈드와 그의 측근들이었다.
‘부사령관만 낚아내면 나머지는 다 따라온다.’
물론 두갈드와 그 측근 그리고 변경백 칸만 드낙의 목표였다. 나머지는 그저 들러리에 불과했고, 그들은 드낙과 같이 가고 싶어도 못 가게 될 것이다. 박쥐의 최후를 맞이할 것들이었다.
잔혹했지만 그만큼 드낙은 아라온의 정치력을 견제하고 싶어 했다.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겠지만 알바가 아니었다.
그런 드낙의 인재욕심에 아라온은 휘둘리기 바빴다. 관리들을 단속하는데 시간을 할애했고, 자연스럽게 두갈드 부사령관에 대한 관심도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그 덕에 두갈드는 자신의 측근들과도 회동을 가질 수 있었다.
수도와 3일 거리를 앞두고 나서 드디어 남부 왕국의 보급이 끊겼다. 주변에는 짐승에게 습격당한 성과 마을이 보였다. 드낙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확인을 위해 모비딕을 타고 나섰다.
자연스럽게 세리안이 드낙의 뒤에 탔다. 호위하기 위함이라는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날고 싶어서였다.
“아주 대놓고 자신을 드러냈네.”
드낙이 아쉬운 투로 말했다. 반면 세리안은 웃음기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제대로 한 번 싸워보려는 것 같아서 난 마음에 드는데? 역시 한 방 싸움이 최고지.”
그 말에 드낙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습으로 단번에 악마에게 피해를 주고 시작해서 쉽게 이기는 길을 안 걷고 싶어하는 세리안은 드낙의 상극이나 다름없었다.
“목장을 운영하던 마을인 것 같은데.”
털과 가죽이 많았다. 하지만 짐승 소리는 들리지 않았기에 드낙은 자연스럽게 목장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사냥꾼으로서의 촉이 왔다.
왜애애앵!
파리의 날갯짓이 거세에 들려왔다. 드낙은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목장을 살폈다. 울타리가 무너져 있어서 모비딕을 타고 왔을 때,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세리안은 흙을 한 줌 쥐고 냄새를 맡았다.
“피냄새야. 여기서 악마 병졸을 만든 것 같은데. 뭔진 모르겠네.”
피에 절은 땅의 범위가 매우 넓었다. 높이까지도 확인하고 싶어서 드낙이 모비딕에게 명령을 내리려고 했는데 갑자기 모비딕이 고개를 추켜 올리며 울음 소리를 터트렸다.
하늘에 검은 점이 보였다.
“적이다. 빨리 올라타!”
드낙의 말에 세리안이 가볍게 뛰며 모비딕에 올라탔다. 모비딕은 땅을 뛰면서 속력을 높인 다음에 날개를 펴서 날아올랐다.
〈지성 종족〉의 문화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특별한 것이 가축이었다. 사냥하지 않고, 육류를 얻는 방법이 가축을 기르는 것이었고 이는 어느 문화에서나 볼 수 있었다.
당연히 차원계를 침공한 악마는 가축이라는 자원을 잘 사용해야만 했다. 적은 면적에 많은 생명체가 대량으로 길러지기 때문이었다.
육체(肉體)를 통해서 힘을 휘두르는 악마였기에 당연한 과정이었다.
“꺼억! 꺼어억!”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목에서 트림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툭 튀어나온 가축의 아래턱만 바짝 말라서 육포처럼 덜렁거리고 있었다.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플라이 레더 캐틀(Fly Leather Cattle)〉의 몸은 가죽을 거꾸로 뒤집은 것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조류의 날카로운 발톱 대신에 둔기처럼 뭉툭한 다리가 길게 툭 튀어나와있었다.
날아다니는 속력을 생각했을 때, 상당한 충격을 줄 수 있어 보였다. 골족(骨足)은 충분히 흉악한 무기로 보였다.
그 숫자가 천은 넘었는데, 이게 바로 플라이 레더 캐틀의 장점이었다. 가축의 육으로 악마 병졸을 만들기 때문에 상상 이상으로 단시간에 많은 숫자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약해보이는데.’
반면 그런 숫자에도 드낙은 겁을 먹지 않았다. 주문을 읊었다. 굳이 광역 마법을 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악마가 드낙의 마법 능력을 관측한다면 골치 아프게 될 수 있었다. 특히 초월적인 육체를 보유하게 된 드낙의 눈에 들어오는 독특한 놈이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가장 먼저 뿔이 있었다. 판타지 세상에서는 뿔하면 힘이다. 발룬도 그러했고, 핏빛쥐도 그러했다. 당연히 뭔가 있어 보였다. 또한 전투능력이 전혀 없어 보였다. 머리통에 날개만 붙여져 있는 상태였다.
그 덕에 드낙이 경계할 수 있었다. 마치, 저 호른 머리를 호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호른 윙헤드(Horn Wing Head)〉라는 악마 병졸로 악마 전령의 일종이었다. 시야가 좋기 때문에 멍청한 플라이 레더 캐틀을 그럴듯한 공중 병력으로 운용할 수 있는 지휘관이기도 했다.
악마의 말을 실시간으로 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만드는 데 힘이 많이 들어갔다. 보통 통솔력이 있는 존재의 육을 사용하는 악마 병졸이라 생각보다 그 가치가 높았다.
“세리안, 검을 뽑아라. 돌파하며 단숨에 적 지휘관으로 보이는 놈을 죽인다.”
“알았어.”
그녀는 돌파한다는 말에 신이 나서 대답했다. 공중전은 처음이었기에 기대심도 바짝 추켜 올라왔다. 드낙은 얼굴을 앞으로 돌리며 음흉하게 웃었다. 〈강철이 흐르는 검〉으로는 공중전에서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해봤자 모비딕한테 달라붙는 놈들을 처리하는 게 고작이지.’
두 다리가 딱 붙어있는 상황이었기에 세리안은 적혈대검을 휘두르는 드낙보다 많이 못 죽일 것이 분명했다.
“가자! 모비딕!”
드낙은 주문을 읊어서 모비딕의 피부를 강화하고, 얼굴 주위에 바람의 방어막을 펼쳤다. 내구력은 낮은 방어막이지만, 주변을 살필 수 있어서 좋은 게 바람의 방어막이었다.
흑마법인 보이지 않는 방어막은 쉴드 계열의 최강 가성비를 자랑하지만 세리안을 앞에 두고 마력을 검은 불꽃으로 바꾸는 건 미친 짓이었다.
꺼억! 꺼어억!
〈플라이 레더 캐틀(Fly Leather Cattle)〉 천 마리가 모비딕을 향해서 돌진했고, 반대로 호른 윙헤드는 그대로 도망쳤다. 하지만 강력한 화살이 몇 마리의 플라이 레더 캐틀을 꿰뚫으며 하늘로 높이 솟구치더니 이내 낙하하며 정확하게 도망치는 호른 윙헤드의 머리통 중심에 그대로 박혔다.
신궁(神弓)이라고 불릴 정도로 정신나간 궁술이었다. 〈셔토이언트의 단궁(Chatoyant`s Shortbow)〉.
매서운 거인의 단궁이라 불리는 강력한 활이었다. 활촉이 부러지더라도 바위에 깊게 박힐 정도의 장력을 지닌 단궁이었다.
영웅을 앞에 두고 도망을 칠 수 있는 놈은 몇 없었고, 거기에 호른 윙 헤드는 해당하지 않았다.
땅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보며 세리안이 활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지휘관 잡았다.”
그 말에 드낙이 인상을 팍 썼다.
*
“크아아악!”
공물로 바쳐진 인간이 허리뼈와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죽지 않았고, 몇 번이고 고통은 되풀이됐다.
발라쿠는 인간이 고통으로 기절하자 그제야 입으로 가져갔다.
으적!
단번에 사람이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백발이었던 마신장(魔神將) 발라쿠의 머리카락은 사라지고, 탐스러운 적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부 왕국의 공물이 만들어낸 효과였다.
인간 5만 8천명과 가축 30만 마리 중 절반이 발라쿠의 입으로 들어갔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범죄자와 부랑자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발라쿠에게는 소중한 회복 수단이었다.
‘때가 됐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
원수인 드워프를 상대로 그릇이 붕괴된 채 싸울 수는 없었기에 인간들을 침공했던 게 발라쿠였다. 그에 도움을 준 흑마법사들은 도망치고 없었지만, 아직도 그들이 만든 보급로는 건재했다.
발라쿠에게 진심으로 돕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한 장치였었다. 그 장치 때문에 발라쿠는 흑마법사들을 놓치고 말았다.
깊은 지하에 있는 거대한 동공에 새하얀 백골에 검은색의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해골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그림자처럼 곳곳을 누빌 수 있고, 속력이 높은 〈백인백골기사(百人白骨騎士)〉였다.
정예 처단자로 불리는 마수(魔獸)이며 던전에서 죽은 전사들 100명의 힘이 깃든 두개골이 마수의 본체였다. 전신갑주의 색에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능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무기는 기본적으로 상체를 가리는 큰 사각방패와 숏소드를 지니고 있으며, 등에는 대검보다 훨씬 짧지만 검폭이 대검처럼 넓은 클레이모어를 짊어지고 있는게 특징이었다. 검신을 줄여서 등에 짊어질 수 있도록 설계된 양손검이었다.
마수의 힘으로 한 손검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기에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되는 마수였으며, 마수들의 지휘관계급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마신장님.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잘했다.”
“하지만 한 가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남부 왕국의 2왕자인 폼포스 플래티넘에 대한 것입니다.”
“풀어줘라. 인간들이 하나로 합치기 힘들 게 만들어야지 후방이 편하다.”
“예. 쇠사슬 괴인 1명과 긴목 마수개 10명으로 호위하여 남부 왕국에 인도하겠습니다.”
그 말에 백인백골기사가 대답하며 그림자로 변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