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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전사-616화 (615/1,239)

0616 <-- 겨울의 악마 -->

칸은 드낙의 무례한 행동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무례함을 질러본 것도 드낙의 노림수이기도 했다. 미리 한 번 떠본 것이다.

프라이드가 높은 귀족들을 봤기에 생각할 수 있는 간단한 트릭이었다.

“내가 찾아온 게 이상하지 않나?”

그런 말에도 변경백 칸은 거침없이 말했다.

“이런 깊은 밤에 갈 곳 잃은 저를 찾아오셨다면, 절 쓰기 위해서 아닙니까?”

드낙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금 왕가에게 버림받은 저를 어디에 쓰시려고 하십니까?”

“새로 얻은 땅에 써야지. 원래 주인 아닌가?”

“그저 소작농일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변경백은 뒷말을 이어붙였다.

“그래도 여전히 그 밭을 갈던 농부가 잘 일구는 법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네. 우린 서로 잘 맞는 듯한데.”

드낙이 그 말을 받아주었다. 사뭇 변경백 칸을 영입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듯한 모습이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등용한 자는 많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툭 튀어나온 이가 적었다.

백명, 천명은 다스릴 수 있어도 그 이상을 다스릴 수 있는 자가 적었다. 그나마 기대주가 있다면 도렌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꾸준히 성장하는 인간은 그 혼자뿐이었고, 이스핀은 진작에 그 한계에 도달했다.

“내 검이 되어주고, 내 방패가 될 생각이 있는가?”

드낙이 다시 한 번 물었다. 확답을 듣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변경백 칸은 잠시 침묵했다. 이 상황을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함이었고, 드낙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쉽게 잡히는 사냥물은 겨우 그 정도에 불과하지.’

이미 마음은 정해져 있었지만, 일부러 뜸을 들였다.

일왕자가 자기만 살겠다고 바로 손절해버렸기 때문에 변경백 칸은 갈 곳 잃은 유랑민이나 다름없었다. 작위를 받은 이상 그는 더는 〈주인 없는 땅〉에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남부에서 자리를 펼 수 있을 리 없다.’

강자가 약자가 되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뿐이다. 일왕자의 군대조차도 보급로를 걱정하는데 변경백의 7천 군사가 전쟁 이후에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해산은 이미 정해져 있는 수순이었다.

‘지금이야말로 기회다.’

7천 군대의 재량권을 가지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변경백의 몸값이 가장 높을 때였다. 그들의 병사는 백금 왕가에 충성하기보다는 변경백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제 병사들이 쥐고 있는 깃발부터 교체하고 싶습니다. 불파겐의 깃발 여분이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

그 말에 드낙이 씨익 웃었다. 후퇴하는 것조차도 훈련이 필요하다. 제대로 후퇴하지 못하면 다시 뭉칠 일은 없다. 변경백의 병사들은 정신력은 낮아도 훈련도는 높았다. 충분히 강병이라고 불릴 만했다.

‘그 강병은 꼭 필요하지.’

숙련병이 되려면 최소 3년 최대 7년이 걸리기도 했다. 또 훈련을 받아도 실전에 따라서 차원이 달라진다. 유목민족 3명에게 평범한 기병 100명이 털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실제 역사에서 보여주는 기병의 무서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판타지에서 기병의 위상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데도 대단했다. 중기병 30기면 죽기를 각오하고 돌격한다면 트롤이 여럿 몰려와도 단기승부를 볼 수 있었다.

‘동부에는 숙련된 보병이 없다.’

이실레아는 초기부터 기병부터 키웠다. 동부는 땅이 안 좋기는 해도 평야와 언덕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건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었다. 고질적인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변경백의 병사는 실로 상황에 맞았다.

“달라지는 것은 없을 거다. 충성을 바칠 주체가 바뀌는 것 분이다.”

“믿고 따르겠습니다.”

“혹, 필요한게 있는가?”

그 말에 변경백은 가감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세금을 5년 면제해주시고, 군대의 유지에 도움을 주십시오.”

“보급을 말하는 건가?”

실로 무리한 요구였다. 그래서 드낙이 되물었다. 이에 변경백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미 주군을 모시는 모습이었다.

“예. 하지만 약탈과 노획품에 대한 것은 잊겠습니다.”

드낙의 귀가 솔깃했다. 확실히 변경백을 영입한다면 그의 영지에서 약탈한 것, 노획한 것을 다시 다 걷어서 내어줘야 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엄청난 행정력이 소모될 것이 분명했다. 아니, 손을 놓아야 할 지도 몰랐다. 이미 노획품의 3할을 병사들에게 허락했기 때문이다.

드낙에게 줬다 뺏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다른 이들이 걱정이었다.

“그렇게 하지. 대신 남부의 상인들이 동부에 잘 오도록 노력해주게.”

“열과 성의를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드낙은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변경백은 고개를 들었다.

‘됐다. 이걸로 내 영지의 시민들은 오로지 나만 믿고 따를 것이다.’

노획품을 받으면 그 처리에서 변경백도 감당이 안 된다. 하지만 그런데도 말한 것은 당연히 불파겐 세력을 욕처먹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변경백의 영지에 살던 시민들은 불파겐을 아주 개새끼로 보게 될 터였다.

반면 플래티넘 왕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동부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변경백은 그런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서 움직였다고 변명하면 그만이었다.

양쪽보다는 그간 제법 처세가 좋았던 변경백 칸을 좋게 보는 시민이 많을 것이고 이는 변경백의 지위를 유지해줄 터였다. 그의 영지가 그를 신임할수록 적어도 내쳐질 일은 없었다.

‘만성인력부족인 곳이니까.’

동부로 향하는 상인들에게 많은 정보를 얻은 게 그였다. 그렇기에 순식간에 다른 주군을 모실 수 있었다.

드낙은 다음날 행군하면서 고려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제장들과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서 양쪽 세력이 모여 전략회의를 열었다.

전에 보여줬던 500명의 간부보다는 숫자가 많이 작아진 상태에서 회의가 이루어졌다.

아라온 왕자는 드낙이 보이자 다가와서 말했다.

“우리 쪽은 실전 경험이 적은 지휘관들이 많아서 잘 부탁하오.”

자신들을 깎아내리면서 드낙을 추켜올려줬다. 당연히 그냥 칭찬이 아니었다. 속은 시꺼먼 색으로 가득 찬 칭찬이었는데, 주도권을 잡고 전략을 적극적으로 만들면 자연스럽게 책임을 떠넘길 수 있어서였다.

총대를 메고 알아서 가장 힘들게 놀라는 소리였다. 물론 드낙도 지지 않았다.

“아는 것보다는 하려는 마음이 중요한 것 아니겠소? 자신들의 고향이 악마에게 짓밟히고 있는데···가만히 지켜보시오. 누구보다도 열정적일 것이오.”

모두가 들으라고 드낙이 제법 성량을 키워서 말했다. 가만히 있으면 자기 목숨이 중요한 소인배가 되는 꼴이었다.

회의의 진행은 두갈드(Dugald) 부사령관이 맡았다. 상석에는 일왕자가 앉았는데, 아직 남부왕국의 작위를 받은 드낙 불파겐 자작은 이곳에서 상석에 앉을 명분이 없었다.

“유례없는 화합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서로서로 노려보았지만 이제는 하나가 되어서 악마를 토벌해야 할 때입니다.”

상투적인 말이 시작되었다. 한창 그렇게 열을 올리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드낙이 가장 먼저 말했다.

“악마 군대는 현재 크게 두 개로 나누어져 있소. 하나는 지방의 악마 군대들이고 다른 하나는 수도에 있는 악마 군대요. 나누어져 있는 만큼 각개격파를 하기 좋소.”

드낙은 최소 성 8개가 박살났다는 〈쉐도우 위스퍼〉의 정보를 공개하지는 않았다. 만약 말한다면 이 연합은 붕괴할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성 8개가 악마 군단에 의해서 무너졌다는 것은 큰 사건이었다.

그의 모든 제장들이 그 정보를 숨기기를 원했다. 드낙 또한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수도만 지켜봤자 소용이 없다.’

남부의 인간들이 후일을 도모하려면 지방을 지키는게 오히려 좋았다. 수도 하나만 폐허가 되는 것과 개발된 지방이 폐허가 되는 것의 면적 차이는 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 입장에서는 연합이 나뉘어서는 안 된다.’

하나 되어 부수는게 이득이었다. 남부 군대를 소모하는 건 어느 선택지와 같았지만, 나뉘면 불파겐 또한 홀로 전투를 감당해야 했다. 당연히 싫었다.

‘반대로 지방으로 갈 수 없다.’

핏빛쥐의 첩보로 적어도 지방의 악마 군대에게서 〈악마〉가 관측되지 않아서였다. 고로 불파겐은 수도를 노려야 했다. 악마를 죽이고 그 업을 통해서 강력한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있어 보였다.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것을 주던가.’

드낙은 대량의 신성력을 얻고 싶었다. 상황에 따라서 주는 양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수도를 재탈환하면 의용군도 얻을 수 있고, 성전대의 합류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의 세력은 자연스럽게 수도 공격에 힘을 주었다. 일왕자 세력은 큰 가닥은 잡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막연하게 수도로 가야 한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일왕자는 또한 건드리기 힘든 것에 대해서 말했다.

“남부에서 성전대의 궐기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오. 대부분이 부패한 사제들이라···”

“허···”

탄식이 동부의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왔다. 특히 성기사 케이슨을 비롯한 900명의 사제와 성기사로 이루어진 성전대가 동부와 함께하고 있는 상황이라 더욱 그러했다.

부끄러워서 시선을 돌리거나 헛기침하는 남부인들이 많았다.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다. 수도를 탈환해서 오는 의용군 중에 사제 전력이 없다는 걸 알아야 했다.

‘하지만 바뀌는 건 없다.’

“수도로 오라고 악마가 기대하고 있으니, 이를 역으로 이용해서 기습할 수 있소.”

드낙의 말을 두갈드 부사령관이 받았다. 실제로 〈악마 게페락스〉의 실수는 이용하기 좋았다.

“메시지 마법을 받은 지 5일이 흘렀으니, 이미 수도의 상황은 모두 알 것입니다.”

“성문이 열리면 들어가서 외성지역부터 소탕을 벌이면서도 우직하게 내성으로 달려야 할 것입니다.”

짧은 시간 내에 모든 것을 챙겨야 했다.

“속력이 필요하다면, 안으로 들어가서 단번에 넓은 범위를 타격하는게 좋지 않겠소?”

달려가는 시간을 줄일 수 있도록 깊게 들어간 다음에 일을 벌이는 게 좋았다. 하지만 그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군대를 들여보내 줄 리가 만무하오. 온갖 변명을 해서라도 내성 안으로 들이게 할 것이오.”

악마는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빈틈은 있었지만 그게 멍청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남부왕을 지배하면서 수도의 인구를 모두 집어삼킬 기회를 얻어서 생겨난 빈틈이기 때문이다.

“방심은 금물이오. 불파겐 자작.”

일왕자가 다시 한 번 드낙이 방심하지 말라고 말했다. 실제로 드낙은 패배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엘프라면 이해했겠지만, 인간들은 그런 드낙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다.

“알겠소. 하면 마지노선이 외성지역이라고 보면 되오?”

“외성지역 절반을 손에 쥐었을 때, 악마 군대도 상황을 파악하고 본격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할 겁니다.”

“내성에 쐐기를 강하게 박는다면 외성지역에서의 저항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겐 쟝이 의견을 냈다. 하지만 이실레아가 즉각적으로 반대했다. 여기에서 쐐기는 기병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기병하면 이실레아의 직속 부대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기병 전력을 보병 보호 없이 쓸 수는 없습니다. 악마 병졸 중 기병을 상대할 중형 악마 병졸이 없다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역으로 당할 공산이 큽니다.”

“그렇다면 내성문을 봉쇄해야 하는데, 알아두셔야 할 것은 수도에는 마법사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흑마법을 쓰는 악마 병졸을 상대로 내성 봉쇄를 진행하는 건 미친 짓이오.”

남부의 지휘관들이 소리를 높였다.

드낙이 원탁을 치면서 뜨거워진 열기를 잠시 식혔다.

“이래도 손해, 저래도 손해라면 회전(會戰)은 어떤가.”

“회전···”

모두 잠시 고민에 빠졌다.

“와이번을 타고 정찰하면 능히 덩치 큰 악마 병졸은 보이기 때문에 미리 판단할 수 있으니, 회전도 생각해두는게 나쁘지 않을거라 생각하오.”

드낙이 다시 한 번 말을 보충하자 몇몇 의견이 나왔다. 남부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중대형급 악마 병졸을 두려워했다.

“중대형 악마 병졸의 숫자가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마법 마차가 있어도 평지에서 악마 군대를 상대하는 건 위험한 일 아니겠습니까? 자칫 돌진이라도 허용하게 된다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악마 병졸이라도 있으면 큰일입니다. 병사들은 앞을 보는 것보다 하늘을 보기 바쁠 겁니다. 외성지역에서 농성하듯이 싸우는게 더 좋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이 부정적이었다. 그 모습에 북부 출신들은 하나같이 인상을 찡그렸다. 특히 세리안은 대놓고 그들을 욕했다.

“인간은 평지에서 가장 강하다. 모인 군세가 3만이 넘는데, 회전에 대해서 불만인 놈들은 정말 이해가 안 되는군.”

“세리안.”

드낙이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며 눈총을 쏘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이미 남부인들은 욱해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호위하는 자가 이 무슨 무례요!”

“발언을 허락한 자도 아니거늘!”

의자에 앉은 이들만 발언권이 있는게 보통의 원탁회의였다. 다른 이들은 그저 귓속말로 앉은 이들을 보좌하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했다는 것은 실로 위험한 발언이었다.

쿵!

일왕자 아라온 플래티넘이 주먹으로 원탁을 쳤다.

“조용히하라! 지금 상황이 어느 때인데 아무렇게나 각을 세우려고 하느냐!”

“하, 하지만 왕자 전하! 원탁 회의의 규율이라는 것이 있지 않사옵니까.”

그 말에 아라온이 드낙을 보며 말했다.

“자작은 어떻게 생각하오.”

“이번에는 우리들의 실수이니 양해바라오. 그녀의 무례를 용서하시오.”

그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드낙의 말 한 마디는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도 회전은 남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차라리 외성지역에서 벌이는 난전이 좋았다.

‘회전으로 결정되면 정면은 우리가 막아야 할 게 뻔하다. 반드시 피해야 한다.’

드낙의 세력과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게 그들이었고, 연합의 한계였다.

타협점이 나오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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