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5 <-- 겨울의 악마 -->
속도가 늦은 〈병렬 16 보석 결집체〉가 엘프의 손으로 들어왔다. 이는 곧 엘프 도시에서 막대한 마력을 대기에서 끌어당기고 있는 〈폭풍의 요람(Cradle of the typhoon)〉을 통해서 단번에 엘프 상위 위원회로 흘러들어갔다.
새하얀 백발에 늙은 피부. 하지만 죽지 않는 엘프 장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숫자는 수만 명에 달했다.
여동생에게 죽음을 맞이한 중립신의 육신과 그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서 만들어진 세상의 지배자는 명백하게 엘프들이었다.
“모두 정보를 열람했을 것입니다. 제국의 내전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알아서 몰락하는데 굳이 우리가 나설 문제인가 싶습니다.”
스스로를 불멸자라 여기는 엘프들은 고고한 만큼 대규모로 움직이지 않는 걸 좋아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엘프 군대를 보여주면 그 모든 것을 모방해서 따라 하는 게 인간들인데, 그리 위험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창조보다 모방이 쉬웠다. 제국이 〈마도 사회〉를 이룩하려는 것 또한 엘프를 따라 하는 것 중 하나였다.
“열등하지만 마력 화력을 획득한 제국입니다. 지금이라도 〈폭풍 결집(Storm gathering)〉으로 그들을 멸망시켜야 합니다.”
그 말에 모두 웃음 지었다. 엘프 도시마다 하나씩 있는 폭풍의 요람이 지닌 강대한 마력을 통한 장거리 타격 마법이 폭풍 결집이었다.
그 힘은 엘프의 번영된 도시의 숫자만큼 강했다.
“보기 불편해도 그들 또한 중립신의 후손들. 우리가 그들을 멸망시킬 수는 없습니다.”
“중립신은 영원토록 이 땅에서 흐르는 물이 되고, 드높은 산이 된 지가 오래인데. 오랜 전통을 이제 바꿀 때가 되었습니다.”
땅땅땅!
나무망치가 나무판을 치는 소리가 났다.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만 하십시오.”
“이미 인간 제국의 마력 보유 인간 개체수는 임계점을 넘은 상태입니다. 내전을 통해서 다시 줄어들겠지만, 그 개체수 증가에 대한 노하우가 존재할 겁니다. 엘프 원정대로 그 지식을 소각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너무 큰 행보입니다. 못해도 30개의 엘프 원정대를 투입해야 합니다. 본말전도입니다.”
“지금 내전인 상황에서는 은밀하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투입하는 원정대의 숫자에 비하면 목적이 너무 작소.”
고민 끝에 엘프 상위 위원회는 주목표를 제국 중요 도서관을 전소시키는 것으로 정하고, 부목표를 마력 보유 인간 개체 상승에 대한 지식을 제거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이는 도시에 있는 위원회로 다시 내려갔다.
*
5일 후
“드디어 왔구나.”
1만 8천여 명에 달하는 불파겐의 대군이 일왕자 아라온 플래티넘의 눈에 들어왔다. 그 숫자는 3만5천의 남부 본대와 견주면 2배나 차이가 났지만, 한 사람의 개인적인 눈으로는 대군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복잡한 감정이 아라온의 눈에 담겼다. 하지만 그의 눈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수많은 종류의 깃발 중에 남부 왕국의 깃발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플래티넘 왕가의 깃발이 아닌, 귀족과 왕의 연합체의 깃발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노골적인 모습은 아라온을 불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는, 이실레아를 비롯한 다른 제장(諸將)들의 노림수이기도 했다. 드낙은 그런 사소한 것을 캐치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당장 그 눈에 보이는 건 악마, 마신장, 제국 정도였다.
드낙이 건국을 하면 또 자신들의 공과 지위가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드낙이 왕이 되면, 직책이 아니라 작위까지도 만들어서 내려줄 수 있었다.
고로 드낙을 상대해야 하는 일왕자에게 보내는 무언의 편지나 다름없었다. 일왕자는 그게 불파겐의 뜻이라 여겼지만, 여우가 호랑이의 권세를 빌려 주먹질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아라온을 비롯한 그의 무인과 관리들 오백 명이 모두 말에서 내린 채 드낙을 기다렸다. 이건 아라온이 드낙에게 베푸는 행사와도 같았다.
간부 500명이 오직 드낙을 위해서 마중을 나왔다. 그걸 알아주길 바라며 서로 좋게좋게 가자는 뜻이기도 했다.
‘믿을 수 있어야지.’
다만, 아쉬운 것은 북부 또한 드낙을 겉으로는 대우를 잘 해줬다는 점이었다. 속으로는 등에 칼을 찌르고, 내장을 호시탐탐 노리며 침을 삼켜도 적어도 찌르기 전까지는 드낙은 귀족이라는 것에 집착할 정도로 그들을 동경했다.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지.’
선두에 나서는 기사를 보고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인간도 아니었다. 과거 드낙이 용병이 되고 만난 게실리안 지휘관과 아크온 고위기사는 드낙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놓았었다.
그렇기에 배신감도 컸다. 드낙은 더한 것을 원했다.
그는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로 아라온의 환대를 맞이했다.
“반갑소. 아라온 왕자. 악마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다고 들었는데, 실로 그러한 것 같소.”
그 모습에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침을 삼켰다. 아라온이 어떻게 나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어서였다. 당장 병력 차이만 해도 2배였다. 딴마음을 품기도 좋은 환경이었다.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소.”
그런 예상과 다르게 아라온은 목례를 하며 감사를 표했다. 그러더니 아라온은 되레 가만히 있는 자신의 아랫사람에게 호통을 쳤다.
“뭐하는가! 대의(大義)를 위해서 전쟁조차도 한숨에 마무리하고 악마를 처단하기 위해서 달려온 대영웅이다!”
눈치 빠른 자들이 고개를 숙이자 다른 이들도 똑같이 숙였다.
그 모습을 본 드낙은 흡족하게 웃었다. 역시 조건 없이 잘 해주면 안 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구렁이 같은 놈들.’
반면 세리안은 살기를 숨기지 않았다. 몇몇 기감이 좋은 이들은 닭살이 돋을 정도로 시리도록 차가운 살기였다.
‘힘의 차이가 있을 때, 누구보다 좋은 아군이 될 수 있는 게 남부지.’
북부는 명예를 한 손에 쥐며 살다 보니 간덩이가 부은 짓거리를 자주 한다. 곰을 상대로 페이크를 넣으며 왼쪽으로 신들리게 움직이며 달려드는 정신 나간 복서나 다름없었다. 반면 남부는 차이가 있으면 고개를 숙이고, 때를 본다.
드낙이 살아있고, 불파겐의 힘이 건재하는 순간까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왕자마저 드낙에게 고개를 숙이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는데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황금이라도 그냥 내어주고 목숨을 부지할 생각을 가질 것이다. 불파겐이 몰락하는 조짐이 나올 때까지.
‘반대로 예상하기 쉽지.’
변수를 만들기보다는 만들어진 변수를 이용하는 게 백금 왕가의 스타일이었다. 수동적이지만,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행동이었다. 도전은 너희가 하고, 성공하면 그때 판에 뛰어든다는 마인드와 비슷했다.
아라온과 간부들이 고개를 숙였으니, 드낙이 말에서 내렸다. 이에 다른 이들도 말에서 내렸다.
“아라온 일왕자. 그대의 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소.”
“고맙소. 앞으로 동부와 남부는 계속해서 화합해야지만 수많은 위험을 헤쳐나갈 수 있소. 우리는 북부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하오.”
북부를 언급하기도 했다. 실로 영악했는데, 북부에 감정이 많은 드낙에게 매우 효과적인 화술이었다. 오십보백보지만 북부와 비교하면 그래도 남부는 똥은 묻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길게이 남부 사령관은 걱정하지 마시오. 그는 동부의 남쪽을 책임지는 것만으로도 바빠 죽을 것이오.”
드낙은 말로 확답을 내어주기도 했다. 이런 교통정리는 아라온이 가장 듣고 싶어 했던 것이었다. 악마 병졸들에게 남부 지방이 쓸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개발이 된 지 수십 년이 지난 게 남부였다.
꿀이 떨어지는 땅이었다.
그 말에 길게이는 욱했지만 그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이 아라온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눈을 내려깠다. 그 모습에 아라온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막내 녀석이 눈을 까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은 꾹 하고 짓눌러졌지만 길게이는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남부 사령관이 된 것만 해도 충분하다.’
오히려 감사해야 했다. 2왕자가 그렇게 허무하게 마신장의 포로가 되면서 객사해도 이상하지 않았던 길게이였다. 현재는 충분하다고 여겼지만, 동부의 남쪽을 개발하며 생기는 힘이 충분히 축적되었을 때는 달라질 여지도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소.”
아라온이 직접 드낙의 옆에 서서 대형 군막으로 향했다. 미리 준비해둔 곳에는 근처 마을을 약탈해서 가져온 싱싱한 육고기들이 구워져 있었다. 술도 많이 준비되어있었으며 꼼꼼하게 테이블에 깨끗한 붉은 천이 깔려 있었다.
“편하게 앉으시오.”
아라온은 제법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자신은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아직 모든 것이 안 끝나도 적어도 불파겐에게 목따이는 경우는 지울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드낙이 호탕하게 먼저 그의 지위를 인정해줬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동부의 개발이 아직 안 끝났다는 것이겠지. 아직 남부가 필요하다는 뜻이고.’
내실을 다질 시간도 없었던 것이 동부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최소 10년은 걸리는 게 땅의 개발이고, 국력을 다지는 일이었다. 광산이라고는 대산 너머로 왕복 1달이 넘는 거리를 오가는 광산이 전부인 동부는 특히나 남부의 조력이 필요했다.
“이번에 보급을 도와준다면, 사용한 보급물품에 대한 대금을 어음으로 일단 받아들이고, 매년마다 갚아나가겠소.”
“기한은 몇 년 정도로 여기시오?”
“마음 같아서는 20년으로 하고 싶소만···.”
드낙의 눈이 다른 이들에게로 향했다. 이실레아는 싫은 눈치였고, 다른 이들은 나쁘지 않다는 눈빛이었다. 세리안이 은근슬쩍 몸을 기울었지만 드낙이 혀를 차자 입맛을 다시며 뒤로 물러갔다.
불파겐 내부 원탁 회의에서는 세리안의 월권도 넘어가 주었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드낙은 적어도 남부인들에게는 다른 이들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20년으로 하지만, 매년 최소한의 한도를 정하고 싶소.”
“좋소.”
동부의 군량은 밀 한 포대에 동화 15닢이라는 비싼 값으로 책정됐는데, 겨울이기 때문이며 아라온이 살기 위해서 남부에게 책임을 전가했기 때문이다. 그 어떤 반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죽어나가는건 남부의 농부들이 될 것이다.
인간의 전쟁은 그러한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주니, 내 마음이 참 좋소.”
드낙이 웃어 보였다. 아라온도 냉큼 받아주었다.
“군량을 받는데, 그냥 받으면 뭐가 되겠소? 당연한 것을 했으니,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일왕자는 마치 자기가 밭을 일구어서 밀을 갚을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 여유로운 표정도 드낙의 이어지는 말에 싹 사라졌다.
“허나, 나는 괜찮지만 악마를 토벌하면서 병사들이 많이 죽을 것인데. 그들에게 줄 것이 적어서 참으로 고민이오.”
모병제는 참으로 돈이 많이 들어가는 제도였다. 오죽하면 중세에서 병사를 키우기보다는 용병들을 고용해서 대리전쟁을 치르겠는가?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이곳의 병사들은 정신무장이 대단했다. 동부 또한 북부의 그런 점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죽은 병사는 그 시체라도 반드시 가지고 가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산 병사는 더욱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장례식의 비용을 남부보고 내라고 하는 말에 아라온이 신음을 흘렸다.
“괜찮소. 괜찮소. 어려우면 어쩔 수 없지.”
드낙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아니오! 당연히 타지에서 피를 뿌리는데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소?”
결국 아라온은 병사들의 사후 비용에 대해서도 지급을 하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드낙이 남부 군대와 합류하는데 걸린 시간은 5일.
그 사이에 남부 지방의 성들이 차례차례 악마 군단에게 함락당했다는 소식이 들어오고 있었다.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나중의 일은 나중이었다. 언제든지 거짓으로 쳐서 관리를 매수해서 수작질을 벌이는 방법 또한 가능했다.
“좋소. 아주 좋소.”
드낙이 크게 고개를 끄덕여주며 아라온의 결단을 칭찬했다. 하지만 드낙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갔다. 왜냐하면 한 발, 두 발 물러났으니 한 걸음 더 나가는 게 당연했다. 자신을 등 처먹인 놈들을 그대로 닮게 되었다.
‘단체와 단체의 교섭에는 감정이 깃들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이득과 손해만이 있을 뿐이었다. 남들은 드낙을 욕하겠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분리해서 생각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악마 토벌에 나서는 대가로 변경백의 영지를 할양해주시오. 어차피 주인 없는 땅으로 두기로 했으니, 어려운 것은 아닐 것이오.”
가만히 지켜보던 변경백 칸의 어깨가 들썩였다. 7천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에 있는 그의 움직임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변경백 칸이 눈을 감았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나 다름없었다.
그 외에 모두가 웃는 자리가 되었다. 아라온은 자신의 지위를 챙겼고, 드낙은 얻을 수 있는 모든 걸 얻었다. 그리고 드낙은 늦은 저녁에 변경백 칸의 군막을 몸소 방문했다.
불완전한 레우치터에 감싸져서 어둠을 친구 삼아 누구도 모르게 도착한 드낙은 능숙하게 의자에 앉은 채 침대에 누워서 자는 변경백 칸의 이름을 읊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나며 베개 밑에 있던 단검을 쥐어들었지만 드낙의 얼굴을 보고 단검을 내려놓았다.
“이 늦은 밤에 무슨 일이십니까?”
“할 말이 있어서 왔지. 왜 왔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