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4 <-- 겨울의 악마 -->
일왕자가 보낸 사절단이 도착했다. 그들은 새하얀 복장을 입고 있었고, 전투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말까지 백마였다.
“아라온 플래티넘 왕자 전하의 명을 받고 이곳에 왔소. 불파겐 자작과 협상을 하고 싶소.”
“기다리시오.”
사절단은 곧바로 들어가지 못했다. 병사는 가장 먼저 드낙에게로 향했지만, 그런 과정에서 다른 병사에게 이실레아에게도 보고를 올렸다.
겐 쟝의 경우에는 가진 돈이 없어서 병사들을 휘어잡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실레아는 드낙을 대신해서 많은 부분을 관리하며 일복이 터졌지만 동시에 그만큼 청탁을 많이 받아 재물이 넘쳐났다.
몇몇 병사들을 돈으로 제어하는 건 매우 쉬운 일이었다.
이실레아가 가장 먼저 도착해서 사절단과 마주했다.
“불파겐 영주님을 뵙고 싶다고?”
“예. 왕자 전하께서···”
이실레아는 혀를 차며 손사래를 쳤다. 그 무례함에 사절단의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역정을 냈다.
“감히 어디서 누구를 만나겠다고? 병사! 이들을 저 옆에서 기다릴 수 있도록 조치를 해두어라. 결코 안으로 들이지 마라.”
“예!”
병사들이 우루루 몰려와서는 창으로 위협하며 사절단을 말에서 내리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그제야 분노보다는 낭패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주제를 모르는 놈들.’
남부에서 발생한 악마 궐기가 끝나면 동부는 새로운 왕조를 열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공국이 되며 남부 왕국에 세금을 내지 않게 될 것이며, 북부에 손을 내밀며 그들 또한 플래티넘 왕가에 세금을 내지 않도록 명령할 수 있었다.
동부와 단교한 북부로서는 냅다 절을 하며 머리에 이마를 처박으며 피까지 낼 것이다. 더 이상 드낙이 호구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렇게 수순이 이루어지면 백금 왕가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될 터였다.
한발 늦게 드낙과 세리안이 도착했다. 이실레아가 간략하게 있었던 일을 말해주자 드낙이 흡족하게 미소를 지었다.
‘시건방진 놈들.’
북부나 남부나 동부나 똑같은 놈들 투성이었지만, 그래도 동부는 자신을 위해서 일을 해주고 있었다. 세리안이 드낙의 뒤에 있다가 한 걸음 다가와서 속삭였다. 착 가라앉은 여성의 목소리는 드낙의 귀를 간지럽혔다.
“많이도 왔네. 한둘 죽이고 시작하면 협상에서 유리하겠는데?”
드낙은 질색했다. 입만 뻥긋하면 피로 이득을 취하려고 환장한 모습은 세파리아스를 떠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내용과 달리 착 가라앉은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그 내용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 또한 문제였다.
“반말하지마.”
“상황보고.”
그렇게 말했지만 세리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혈연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적어도 속삭일 때, 존대를 할 생각은 없었다.
이실레아는 뒤에서 드낙에게 속삭이는 세리안을 곱지 않은 눈으로 봤다.
“일단 원탁회의를 열겠다. 사람들을 모아줘.”
“예.”
이실레아가 대답했다. 세리안은 능숙하게 오른손을 〈강철이 흐르는 강〉의 손잡이에 걸치며 드낙을 따라갔다.
모든 이들이 빠르게 모였다. 할 일이 많이 없어서였다. 주변에 있는 동물이란 동물은 싹 잡아들여서 보기사 이상의 계급은 병사 관리만 하면 되었다.
“예상보다 상황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적어도 한 번 부딪치고 저희를 부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겐 쟝이 일왕자가 싸우기도 전에 동부를 끌어들이려는 모습을 지적하며 이번 협상을 유리하게 가져가야 할 근거로 삼았다.
〈성전대(聖戰隊)〉를 다시 한 번 일으킨 성기사 케이슨은 그 근거가 썩 좋게 들리지 않았다.
“고통받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불파겐 영주님. 부디, 정의를 움켜쥐고, 빛으로 향하시길 바랍니다.”
그 말은 실로 위선적이었으며, 비현실적인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케이슨을 경멸하지 않았다. 남들이 걷지 않는 길을 스스로 걷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 강제적이지 않고 그저 부탁조에 불과했다.
그저 바랄 뿐,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은 사람의 마음에 깃든 양심을 쿡 찌르며 동시에 가슴을 간질거리게 하였다.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런 힘을 지니게 된 것이 케이슨이었다.
물론 드낙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는 현실에 살고 있었고,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가 말하는 길은 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케이슨의 말에 드낙을 호위하던 세리안이 다시 귓속말을 했다.
“전쟁은 현실이야. 모르지는 않겠지?”
“알고 있어.”
드낙이 세리안을 밀어냈다. 그녀는 쉽게 물러났다. 그 모습에 모든 이들이 불편한 기색을 가졌다. 하지만 찍소리도 못했다.
자주 드낙과 각을 세우며 자신의 존재감을 기득권층에게 보여준 이실레아조차도 각을 세우지 않았다.
그런 불편한 기류를 즐기는 세리안의 모습을 본 드낙은 진심으로 변태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불파겐의 또 다른 후예를 나 몰라라 하거나 책잡는다면, 자신의 혈통에 스스로 가래침을 뱉는 격이었다.
“도와주는 건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흘리는 피만큼 대가를 받아야만 한다. 죽은 이들에게 보다 많은 것을 주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드낙은 상투적인 말로 케이슨 성기사의 근거를 지워버렸다. 케이슨은 조금 실망한 눈치였지만 그럼에도 두말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중앙 신전에서 크다가 이상론으로 내쳐진 경험이 있었기에 참을 줄 알았다.
애초에 드낙만큼 친신전 성향도 없었다. 신전이 토지를 받은 것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한두 번의 실망으로 손절하기에는 너무 큰 이권을 주고 있는 게 드낙이었다.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내, 이야기는 뭘 얻느냐로 이어졌다.
“분명, 백금 왕가는 자신들의 지위를 인정해달라고 할 겁니다.”
길게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드낙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고로 드낙은 진정으로 백금 왕가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세간의 시민들이 인정을 해주게 될 것이다. 이는 백금 왕가 또한 더는 동부를 자신들의 영토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공국으로 독립하라고 인정해주는 꼴입니다.”
“아마, 사절단 또한 이를 보상으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조삼모사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속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드낙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잘 돌아가는 게 보기가 너무 좋았다.
“변경백의 영지를 할양하도록 요구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실레아의 말에 모두 그럴듯하게 수긍했다. 이들이 간과한 것은 〈악마 게페락스〉의 강함이었다. 3218년의 고행이 만들어낸 힘은 그 누구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핏빛쥐들조차도 몰랐다.
제대로 그 힘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인간을 위해서 핏빛쥐들이 희생을 할 리가 없었다.
최소한의 정보만이 수집되어 드낙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서 세리안이 다시 몸을 기울였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플래티넘 왕가를 죽일 수 기회인데 뭐 하는 거야? 이럴 거면 그냥 사절단을 돌려보내거나 목을 자르고 보내서 파토를 내. 남부 군대가 큰 피해를 입거나 박살이 나면 그때 무혈입성하면 되는 거 아냐?”
“리스크가 너무 크잖아.”
“마신장도 잡을 놈이 대악마도 아닌 악마 나부랭이를 무서워하다니.”
‘응. 안 통해.’
세리안이 그렇게 드낙을 도발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8살 난 어린이한테도 넙죽 절을 할 수 있는 게 드낙이었다. 그런 도발은 그에게 절대 통하지 않았다.
‘근데, 배신은 또 하고 싶네.’
배신만큼 수익률이 높은 게 없었다. 여름에 탄산음료가 잘 팔리니 가격을 올리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경제학적으로 매우 합리적인 것과 같은데 배신이었다.
‘여지를 두는 게 좋겠어.’
“상황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겠지만, 일단은 그렇게 정하고 진행시켜. 협상에는···”
드낙이 주변을 훑었다. 하나같이 자신을 뽑아달라는 표정이었는데, 그만큼 실패를 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는 공이 적은 겐 쟝에게 일임했다. 길게이는 당사자였기에 사적인 감정이 깃들 수 있었다.
*
둥! 둥! 두웅! 둥!
평야에 제국의 군대가 들어섰다. 그 숫자는 가히 5만이 넘었는데, 수많은 깃발에 〈제9군단〉의 깃발이 펄럭거렸다. 그 많은 깃발 중에 제국의 황제를 뜻하는 깃발은 하나도 없었다.
이들 모두, 흑황제 〈제넬루 바르시아〉를 타도하려는 자들이었다.
〈보헴 셀 막시밀리안(Bohem Shel Maximilian)〉가 말을 탄 채로 앞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수도로 향하는 첫 관문인 〈라 글로리아(la gloria, 영광) 관문〉에 도착했다.
이 병력 구성 중에 보병은 단 6천의 중보병이 전부였고, 기병은 1만 2천이 전부였다. 그리고 마법사 전력만 2만이었으며, 나머지 1만 2천은 징집병 내지는 기술자들과 공병들이었다.
드르륵! 드르럭!
강철로 된 바퀴가 굴러갔다. 그저 위로 철골만 성성하게 나 있는 괴이한 수레였음에도 바닥을 당기고, 관절을 꺾자마자 전방을 방어하는 그럴듯한 방패막이 되었다. 그 숫자가 수천을 헤아렸다.
〈마법 방어 방차〉라 불리는 것이었고, 5천 대가 운용되며 예비 부품은 3천 개 분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공병들이 투석기를 배치했다.
“에이~~!”
두르럭! 두르럭!
도르레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공병이 독특한 소리를 내자 조정하던 공병들이 물러났다.
“발사!”
투구덩!
단번에 투석기가 바위를 투척했다. 멀리 갔지만, 엉뚱한 곳에 올라갔다. 다시 한 번 조정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조정을 다른 투석기도 받았다. 서로 차이가 있겠지만 비슷하게 명중률이 어느 정도 맞춰지기 때문이다.
군대의 후방에는 짐말이 이끄는 통철로 된 수레가 자리 잡았다. 천막으로 덮인 수레를 걷어내자, 수레의 곳곳에 박힌 보석이 보였다. 연금술로 반짝이는 액체가 딱딱하게 굳은 채 튀어나와 〈양각(陽刻) 마법진〉을 이루고 있었다.
“점검에 철저히 하라!”
마법 공성 병기의 종류 중에 하나인 〈3.5세대 보석철차〉였고, 그 수량은 1만 대가 넘었다. 다만, 3열에 있는 이유는 예비 부품이 없어서 보석철차를 취급하는 데에는 마법사가 항상 1명이 자리 잡고 있을 지경이었다.
9군단의 약점이라고 부를만한 게 마법 공성 병기의 예비 부품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수량이 적은 방차를 아낌없이 동원하게 되었다. 동시에 경기병의 절반은 후방을 지키고 있을 정도였다.
“시작하라.”
마도시대의 전쟁은 오로지 마법 화력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다른 것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게 군사학서에 적혀진 내용이지만 현실은 달랐다.
“투석기 공격을 방어하라!”
묵직한 질량체인 투석 공격은 마력을 매우 효과적으로 소모시키는 용도였다. 마도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력이기도 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마력을 가장 많이 소모시킬 수 있는 질량체를 투척하는게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다.
방어막을 돌들이 두들겼다. 명중률도 수준급이었으며 무엇보다 투석기들은 성벽을 노리지 않았다. 관문의 너머에 있는 마법 병기들이 주목표였다.
관문 너머에 있는 민가가 무너지고, 동시에 길가에서 마법 방어 방차를 끌고 가던 병사 수명이 그대로 파묻혔다. 관문에서도 마법 공격이 이루어졌지만, 미리 마법 방어 방차를 앞에 두었기에 소용이 전혀 없었다.
천혜의 요새로 불리지만, 동시에 협소해서 질량체를 던지는 공성 무기는 소형 발리스타가 전부인 것이 라 글로리아 관문의 약점이었다. 이걸 9군단장인 보헴 셀 막시밀리안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온종일 투석기 공격을 감행하고, 단번에 끝장낸다.’
상대의 약점만을 파고드는 전략을 유지했다. 관문의 방어 마법이 사라진 건 그로부터 15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군단장님! 관문의 방어막이 사라졌습니다.”
“마법 공격을 감행하라.”
“성벽만 노립니까?”
“바보 같은 소리! 놈들은 관문 너머의 민가를 중심으로 게릴라를 준비하고 있을터다. 싸그리 날려버려라.”
“예!”
보석철차가 어둠을 틈타서 앞으로 나아갔고, 투석기는 해체되어서 뒤로 물러갔다. 동시에 마력빛이 번쩍이며 관문을 향해 수많은 화염마법이 쏟아졌다.
쾅!
화염구가 부딪치며 굉음과 함께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불똥은 정확하게 사람을 노렸다. 어떤 불똥은 나무만 노렸고, 마치 질주하듯이 나무를 타고 뻗어 나가면서 길쭉하게 태우기 시작했다.
물리력을 동반한 화염 마법은 인간을 상대로 가장 효과적인 마법일 수밖에 없었다.
날이 밝아오고, 조용한 관문을 별동대가 성벽을 타고 넘어가서 열었고, 중보병들이 진입했다.
단 하루 만에 제국의 수도를 지키는 관문이 넘어갔다. 이 소식은 수많은 제국인들을 움직이게 할 것이 분명했다.
*
엘프원정대의 〈집정관 블리스 휴 플로렌스(Bliss Hue Florence)〉는 이 모든 것을 관측하고 인간들이 실로 불쌍하게 여겨졌다.
“자신들이 발전시킨 것을 자신들이 파괴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그랬다면 그들이 괜히 필멸자라 불리겠습니까?”
“그건 그렇구나.”
〈병렬 16 보석 결집체〉에 보고서를 넣고, 날려 보냈다. 속도는 빠르지 않지만,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마법 물체였다. 둥근 구체에 보석들이 박혀 있고, 최소한의 요격 시스템과 도주 수단이 새겨져 있는 아티팩트였다.
보고서에 담긴 내용은 진짜 내전임을 확인했다는 것. 민간인 피해가 엄청나게 증가 중이라는 것. 제국 국력의 소모가 예상치의 3배를 넘었고, 계속 증가 중이라는 것. 수많은 기득권층이 흑황제를 고꾸라뜨리고 권력을 잡으려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 등이 담겨 있었다.
“인간들은 정말 어리석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잘 보존을 해야지요. 저렇게 열등해도 중립신의 피를 받은 종족 중 하나 아닙니까?”
“그래도 전 멸종시켰으면 좋겠습니다. 보면 볼수록 역겹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