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3 <-- 겨울의 악마 -->
왕을 잡은 악마 게페락스는 이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수도의 마법 방위 체계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그 혼자만은 간단하게 수도로 들어올 수 있었지만, 다른 악마 병졸들은 아니었다. 이는 악마의 독특한 힘 때문이었다.
성장하고, 업을 먹으면서 힘을 키우는 것이 악마였다. 악마 중에는 행성만큼 커진 대악마도 존재했다. 그들은 힘이 세질수록 자신의 특성에 따라서 육체가 성장하기 때문이다.
게페락스는 행성만큼 커질 수 있었지만, 속이 텅텅 빈 빈껍질에 불과했다. 그의 육체는 몸집이 커지는 게 아니었다. 이 행성을 집어삼킨다면, 〈변모의 대악마〉라 불리게 될 것이다.
흑마법사들의 흑마법이 검은 불꽃으로 변하며 강해지는 이유 또한 이런 악마의 육체성장 때문이었다. 육신을 소모하여 초월의 힘과 동시에 담을 용기조차도 내어주기 때문에 인간을 초월한 키메라를 만들 수 있었고, 같은 마력을 소모해도 강한 위력을 보일 수 있었다.
“왕께서 참으로 불안해하는 것 같구려.”
수도를 책임지는 마법사들이 한곳에 모였다. 그 순간에 모든 것이 검게 변했다. 원탁이 썩어 문드러지며 검은 진액이 흘러내리며 바닥을 젖게 만들었고, 바닥은 늪처럼 변해서 마법사들을 발부터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흐, 흐아악!”
아무런 마법 보호 장비를 착용하지 않고, 태평하게 온 마법사의 몸이 검은 불꽃으로 뒤덮였다. 그가 지닌 마력을 게페락스가 손아귀에 단숨에 쥐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그를 도와줄 마법사는 단 1명도 없었다.
서로 자신을 보호하기 바빴지만, 그 이기심으로 그들은 차례차례 죽어가야 했다.
“〈충격의 주먹(Fist of Shock)〉!”
검게 변한 벽에 푸른빛을 내는 주먹이 내려꽂혔지만 출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되려 자극을 받았는지 벽에서 짐승의 아가리가 튀어나오며 그대로 마법사의 머리를 집어삼켰다.
푸쏴아!
목에서 피가 솟구쳐올랐다. 검은 늪에서 굵직하게 살이 오른 거머리 같은 것이 벼룩처럼 튕겨오르며 몸을 파고들어갔다.
20인의 총괄 마법사는 그렇게 죽어갔다.
검은 늪, 검은 벽과 천장까지 모조리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그 중심에 게페락스가 키를 줄인 채 모습을 드러냈다.
스윽.
하나 둘, 마법사들이 일어났다. 이들은 하나같이 피부가 박피가 된 것처럼 변했고, 온몸에서 검은 불꽃이 작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알아서 주문을 읊더니, 인간과 똑같은 피부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고급 악마병종이며, 생전의 능력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지는 악마 병졸들이었다.
‘좋군.’
게페락스는 〈블레이즈 위저드(Blaze Wizard)〉들의 수준을 보며 흡족해했다. 〈흑마법〉을 쓰기 때문에 보통 마법사라고해도 무조건 그 수준이 뻥튀기가 되기 때문에 실패할 수가 없었다.
물론 뛰어난 마법사라면 더 대단했다. 만약 뛰어난 마법사가 있었다면, 살을 떼어내서라도 〈반악마 마법사(Half Devil Wizard)〉로 만들 가치가 있었다. 물론 이 중에는 없었다.
‘중책을 맡는다고 모두 뛰어난 마법사인건 아니지.’
오히려 그 외적인 부분이 뛰어나야 했다.
“수도에 대한 마법 방어를 유지하되, 마법진을 수정해서 악마를 공격하지 못하게 만들어라.”
“명을 받듭니다.”
마법사들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들은 차례차례 자신의 친한 사람부터 집어삼켜 똑같은 악마 병졸로 만들 것이다.
생식기가 없는 악마 병졸은 번식하기 위해서 다른 생명체를 습격해서 그 생명체를 악마 병졸로 만들어야 했다.
곰이라도 마력을 지니고 있다면, 〈블레이즈 위저드(Blaze Wizard)〉에 의해서 블레이즈 위저드가 될 수 있고, 아무리 인간 마법사라도 최하급 병졸인 〈헤드리스(Headless)〉에게 당하면 마법을 쓰는 헤드리스가 될 뿐이었다.
이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악마 설비가 필요했고, 그것을 관리할 관리자도 필요했다.
‘수도는 충분히 〈악마의 영토〉가 될 수 있다.’
악마성채(惡魔城砦)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악마 병졸과 악마에게 좋은 환경이라기보다는 그 외의 것들에게 나쁜 환경을 조성하는 게 주목적이었다.
유황(Brimstone), 화염(Flame), 피와 뼈(Blood and bone), 맹독(Poison), 썩은 것(Rotten Thing), 그림자(Shadow), 어둠(Darkness) 등 수많은 테마가 있고, 보통은 2개 이상을 조합한다.
고대 악마들은 유황과 화염을 좋아했다. 높은 온도가 유지되는 땅은 생명체의 체력을 단번에 빼앗는다. 동시에 땅에서 때때로 뿜어내는 화염은 유황을 태워 독가스를 배출한다.
훌륭한 방법이지만, 마법을 쓰는 종족에게는 잘 통하지 않고 기술력이 높은 종족에게도 대단하게 여겨지지 못한다. 또, 육체가 강고한 종족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인간 사냥용 테마라고 폄하 당하고 나서는 수많은 종류의 테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 더욱 고르기 어렵지.’
〈대악마 아카타베루〉의 힘을 빌고, 그에게 인신공양을 하며 얻은 악마의 지식이 게페락스에게 있었지만, 테마를 고르는 일은 그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악마 병졸과 게페락스의 특징이 서로 갈리기 때문이다.
변하기 쉬우므로 게페락스에게는 그림자와 어둠의 테마가 좋다. 하지만 악마 병졸들은 그런 테마에서 얻는 게 없었다. 고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병졸 자체를 게페락스가 설계해야했다.
‘그럴 힘과 시간이 없다.’
다른 악마들이 설계한 악마 병졸을 쓰는 게 현재로서는 최선이었다. 결국 게페락스가 생각한 테마는 당장을 위한 테마였다. 2가지가 아닌, 1가지에 불과했다.
‘피와 뼈(Blood and bone)의 영토를 수도에 세운다.’
수도의 강하지 않은 인간들을 〈헤드리스(Headless)〉로 만들기보다는 모조리 중형 악마 병졸로 만들 생각을 가졌다.
‘인간을 상대할 때, 중형 악마 병졸만큼 좋은 게 없지.’
트롤 하나를 잡지 못해서 기사를 부르는 게 인간 종족이었다. 확실하게 인간들을 잡고, 그 힘으로 제국까지 넘볼 생각을 가졌다. 제국 내전이 서서히 본격화되고 있었기에 보다 빠르고 확실하게 남부 왕국을 처리할 생각을 가졌다.
“명령이다! 명령!”
조용한 걸 좋아하며, 은퇴할 날 때까지 떨어지는 낙엽조차도 조심하던 〈내외성채장군〉이 남부왕의 명령이라며 무관들을 소집했다.
“오늘부터 밤에 하는 순찰을 없앤다! 전하의 어명이시다!”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들은게 전혀 없고, 쌩뚱맞은 명령이었다. 하지만 내외성채장군은 능숙하게 변명거리를 말했다.
“겨울에 군대를 동원하는데, 어떻게 여유가 있겠나?”
“아···”
야근 수당의 지급이 어렵다는 뜻이었다. 모두가 말귀를 알아들었다. 불평하는 병사들이 나오겠지만, 별수 없는 일이다. 지방의 군대까지 수도에 입성해서 대기하고 있었다.
아낄 건 아껴야 했다.
소수의 병사들만 성문을 지키게 되었다. 외성벽의 경우에는 최소한의 순찰만 하도록 변경됐다. 인원이 적었기에 순찰 도는 시간은 딱딱하게 정해진 시간에만 돌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쥔 횃불빛 너머로 입이 틀어막힌 사람의 억압된 숨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병사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둠 저 건너편에서는 시체 씹는 소리도 들려왔다. 부랑자는 불현듯 깜짝 놀라서 일어났지만, 달빛마저 들어오지 않는 골목길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다시 드러누운 그의 머리를 강하게 짓누르는 뭔가를 느꼈지만,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목이 물어뜯겼다.
*
아라온 플래티넘(Araon Platinum)은 메시지 마법을 받고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남부왕의 판단이 손바닥 뒤집듯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회의를 열겠다. 필요한 이들을 모두 모으도록 해라.”
“예.”
원탁회의는 금방 열렸다. 갑작스럽게 메시지 마법이 들어왔기 때문이며 그 명령조차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는가?”
두갈드(Dugald) 부사령관이 먼저 말했다.
“총사령관께서도 이미 느끼고 계시겠지만, 이렇게 말씀을 번복하셨다는 것은···”
그가 말을 줄였다. 이건 아라온의 입으로 말해야 했다.
“수도가 악마의 손에 떨어졌다. 내지는 아바마마가 넘어갔다.”
“으음···”
모두가 탄식했다. 하지만 메시지 마법에 담긴 내용 때문에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악마가 준동했는데 대군을 통해서 동부와 협상을 제대로 하고 수도로 돌아와라? 남부왕답지 않았다.
모두가 느낄 정도로 위화감이 있는 명령이었다. 그만큼 수도가 먹음직스러웠고, 남부왕을 잡아먹으며 그에 대한 기대감으로 흥분해서 명령했었다.
“가장 먼저 기병을 다시 불러 들어야 합니다.”
“악마는 시간을 벌기를 원하는데, 바로 소식을 접해서 기병으로 견제하여야 합니다.”
“잡아먹힐 뿐이오! 지금 간다 하여도 수도의 반절이 먹혀있을 게 분명하오.”
“무슨 소리를! 수도의 방위가 얼마나 대단한데!”
“밖에서 보면 그렇지 안에서는 그저 구조만 복잡할 뿐!”
두갈드 부사령관과 변경백 칸이 맞섰다. 아라온 플레티넘이 이를 중재했다.
“보통 악마가 아니다. 기병을 불러들이는 게 맞다. 뭐라도 일이 있었다면 누구라도 찾아왔을 터다. 하지만 그게 없다.”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악마는 큰 힘을 지니지 않았다. 그만큼 악마의 힘은 천지차이였다. 게페락스가 버틴만큼, 그와 함께한 흑마법사들을 잡아먹은만큼, 그는 강했다. 세월을 보내며 살기 위해서 버린 것도 잃어버린 것도 있지만, 그는 다른 악마와 달랐다.
“일단은 선두의 기병들을 다시 불러와라. 적어도 겉으로라도 동부와 협상하기 위해서 군대를 크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예!”
서둘러 명령이 이루어졌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더 있는가?”
“남부 북쪽 지방을 돌며 군대가 수도로 향하는 걸 막아야 합니다. 악마에게 잡아먹힐 뿐입니다.”
“악마가 간파할 가능성은?”
“수도는 거대합니다. 다른 지방에 눈 돌릴 시간은 없을 겁니다. 애초에 악마 군단도 수도 근처에 오지도 못했습니다.”
전령이 곳곳으로 내달렸다. 지방의 군대가 수도로 집결하는 걸 막는 건 매우 중요했다. 그들이 모두 악마 병졸이 될 수 있었다.
다음은 가장 민감한 내용이 거론되었다.
“불파겐에게 원군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 말에 아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들이 들어오면 남부는 끝이다.”
“하지만 수도가 뚫렸습니다. 왕자 전하.”
“그의 말이 맞습니다. 대군을 한 곳으로 결집시킬 장소를 잃었습니다. 불파겐과 합쳐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동부에는 길게이가 있다.”
불안하게 눈이 흔들렸다.
“협정을 통해서 막으십시오. 유명하지 않습니까? 길게이 왕자는 드낙 불파겐 자작으로부터 직책을 받으며 스스로 왕자를 포기하고 그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어찌 플래티넘 왕가를 대신하겠다고 말하겠습니까?”
“오직 드낙의 마음만 돌리면 됩니다.”
그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지금 당장 결정할 수 없다.”
아라온이 딱 잘라 말하자 변경백 칸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게 악마의 노림수입니다. 모든 게 메시지 마법에 있습니다.”
“자세히 말해보라.”
칸은 침을 삼키며 입을 뗐다.
“동부와 군사 대치를 하고 제대로 협상하라는 뜻은, 불파겐과 척을 지라는 소리입니다. 저희와 불파겐이 힘을 합치기를 싫어하는 게 악마입니다.”
“그리고···다급한 것이 절로 보였습니다. 만약 저라면 그 어떤 메시지 마법도 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어차피 수도에 올 것이고, 그때 몰살시키면 끝입니다. 긁어서 괜히 부스럼을 낸 꼴입니다. 이 빈틈을 이용해야 합니다.”
“기만술일 가능성은?”
“고려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교육받지 못한 티가 납니다.”
칸의 말에 두갈드 부사령관 또한 일어나서 간곡하게 말하였다.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노력한다면 능히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악마를 토벌할 기회를 말입니다.”
그 외의 이유들도 속속들이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나왔다.
“낌새를 알아차리면 보급마저 끊을 것입니다. 그런 일을 대체하기 위해서는 불파겐의 보급로가 필요합니다.”
아라온이 그 말에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적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전략의 제1원칙 아닌가? 그대들의 말을 수용하겠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만큼 수도가 악마의 손에 떨어졌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불파겐에게 사절단을 보내라.”
“예!”
아라온 플래티넘이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이미 자신의 손으로는 수습할 수 없게 되어버렸음을 직감했다.
‘굽히면 정도껏 하겠지.’
가볍게 생각한 것도 있었다. 결혼 동맹을 맺은 상대에게도 얻어터지는 게 불파겐 자작이었기 때문이다.
2년 안 되는 시간 동안 승승장구해온 드낙이었지만, 그 결과물보다는 형편없고, 씹기 좋은 멍청한 면모가 특히나 부각 되어있는 게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