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2 <-- 겨울의 악마 -->
대규모 피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드낙의 제장(諸將)들이 모였다. 왕자를 포기하고 드낙에게 직책과 직급을 받은 길게이 남부 총사령관부터 시작해서 이실레아와 겐 쟝이 들어섰다.
후방에서 보급의 시작을 적당히 챙겨주던 겐 쟝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후방 보급은 도렌과 게제라스 및 베바란스가 맡고 있어서였다. 특히 도렌과 베바란스의 실무 능력은 경험이 없어서 계속 부딪히고 있었다.
이스핀은 잠시 마을을 떠나 북부와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서쪽으로 향한 상태였다. 그쪽은 특히나 동부 기득권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어서 중앙의 영향력을 잃기 쉬운 지점이었다.
남부 왕국에서 북부가 계속 세금을 플래티넘 왕가에게 적게 주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인재가 부족해.’
성주급 인재가 부족한 것이 동부의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공을 세우지 않은 자들을 마구잡이로 올려줄 수도 없었다.
검증된 인재를 찾아야 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도 게제라스 총관의 제도가 빛을 발했는데, 지방에 대한 중앙의 기구이기도 한 〈장원 기사 제도〉는 이를 훌륭히 해결할 수 있어서였다.
마을마다 확실하게 지방정권이 들어섰다고 해도 무방이 아니었으므로, 보석을 보기 충분했다.
나가는 싸움에는 드낙이 있기에 지기 힘들고, 지키는 싸움에 유능한 사람을 선별하기도 좋았다.
도적떼는 언제나 들끓기 때문이었다. 이실레아가 야수와 몬스터를 청소하고 남은 자리에 사악한 인간들이 그 빈자리를 채우는 건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마을조차도 순식간에 도적소굴로 변할 수 있는 게 이 바닥이었다.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버려야 합니다. 특히 지금은 겨울이라 실로 그 말을 중요하게 쓰기 좋습니다.”
이실레아가 운을 뗐다.
대규모 피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을 완곡하게 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하고 있었다. 이미 서로 의견 교환을 한 번 하고 난 뒤였다.
‘이번 전쟁은 얻을 것이 많다.’
무주공산이 된 변경백의 영지는 암암리에 마을을 자신의 영향력으로 삼아서 힘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자본금은 이번 전쟁으로 얻어야 하는 게 자명했다.
〈쌓아올린 토성〉만해도 그 노획품이 엄청나게 많았다. 약탈품의 3할이 병사들의 손에 들어갈 정도였다. 많이 베풀어도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남부에는 발등이 떨어졌고.’
악마의 준동!
만약 플래티넘 왕가가 원군을 요청한다면 엄청난 재력이 동부의 상위 20%의 손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난민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물론 이실레아는 결코 이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들을 받아들이면 치안이 크게 문제가 될 겁니다. 굶주린 자가 담을 넘는 법입니다. 군대를 돌려 피난민의 관리에 써야 합니다. 적어도 1만 명의 피난민에 1천 명의 병사가 필요합니다.”
총이 있었다면 100명으로도 충분했겠지만, 이곳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천 명의 병사를 위한 보급로까지 또 하나 만들어야 합니다. 이는 현재 상황에 전선을 하나 더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치안 문제 다음에는 보급로의 추가로 인한 손실을 이야기했다. 루트와 거리가 멀어질수록 밀 한 줌 쥐어가는 놈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청렴(淸廉)이라는 단어는 가진 자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단어에 불과했다. 모두 어디서건 크고 작은 비리를 저지른다.
“그렇다면, 그들을 그냥 남부에 돌려보내라는 소리인가?”
“굶주린 폭도가 죄 없는 작은 마을을 핏물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식량을 주면 될 일 아닌가. 노획품도 많다며?”
드낙은 인구를 폭발적으로 얻는 방법에 항상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만약 게제라스가 여기 있었다면 능히 찬성했을 터였다. 육중론(六重論)에 속해있는게 인구였다.
박호훈 또한 인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내수로는 살 수 없는 국가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닥치는 대로 인구를 받아들이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신다면 논공행상은 무엇으로 하실 생각이십니까?”
노획품을 피난민에게 주면 사비를 털어서 이곳에 온 이들은 목표를 잃을 것이 분명했다. 이를 이실레아가 지적했다.
“다른 이들의 의견은 어떤가?”
드낙은 반박을 하기 전에 다른 이들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남쪽에 대한 권리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는 길게이는 이실레아의 말에 찬성했다. 군대에 동원된 남쪽의 병사들 때문이었다.
‘급료만해도 무시 못 하는데, 홀라당 털어버리면 난 뭐가 되나?’
“중앙 사령관의 말이 실로 현명합니다. 지금은 겨울입니다. 식량을 찾고 싶어도 찾지 못하니, 사람에게서 빼앗고, 도둑질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겐 쟝은 전혀 다른 의견을 내세웠다.
“일단은 받아들이고, 그들에게서 소모된 재화를 플래티넘 왕국에게 요구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애초에 그들이 잘못했기에 생긴 일 아닙니까.”
책임 전가를 통해서 인구도 얻고, 소모된 자원도 얻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지금 동부의 힘이라면 능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에 이실레아가 절충안을 내놓았다.
“피난민 1만 명을 받아들이는 게 마지노선입니다. 나중에 받아낼 수 있다고 해도 그건 어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악마가 준동한 남부의 상황을 전혀 모르지 않습니까?”
핏빛쥐들의 소식은 그저 무슨 마을이 파괴되었다. 성이 함락했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자세한 정보를 얻기가 매우 힘들어지는 듯했다. 혹은, 악마 하수인들이 지하 세계로도 뻗어 나가며 전투를 벌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드낙은 가만히 고민하다가 이미 모든 답이 나와 있음을 깨달았다.
“왜 쌓아올린 토성에 그렇게 많은 재물이 있었는지 모르는 자가 있는가?”
모두 침묵했다. 그야 백금 왕가의 블러핑 때문이다. 동부는 결코 자신들을 선제 공격하지 않으며, 드낙에 대해서 악소문을 퍼뜨렸다.
멍청한 영주라는 이미지와 세속적인 이미지는 실로 그 시너지가 좋았다.
“백금 왕가의 그런 면모를 우리도 한 번쯤 써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떤가?”
모두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일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끼칠 득과 실을 생각했다. 실로 이기적인 모습이었다.
“정확히 어느 정도로 하시는 걸 원하십니까?”
이실레아가 보다 자세한 것을 원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이 피난하는 이유가 백금 왕가 때문이라고 한다면 동부에 대한 적개심은 줄어들 것이다.”
“줄어든다고 해도 배고 고픈 건 여전한 것 아니겠습니까?”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망이 대상이 플래티넘이라고 선동해도 배고픈 건 여전하다.
“받아들이기만 할 뿐 도와주지는 않는다. 살아남을 놈은 살아남을 것이고, 그러지 못하는 놈은 죽는 거지.”
모두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15m짜리 오러블레이드를 슝슝 휘두르지 못하는 것이 이 세상의 강자들이었다. 닥치는 대로 피난민들을 받아주면서 도와주지는 않는다니, 심각했다.
“감자 하나를 천금같이 여기는 자들이 있으니, 소작농으로 살게 하든, 도로 공사에 동원하든, 그렇게 써먹으면 될 일 아닌가?”
그 말을 듣자 원탁에 앉은 이들의 표정이 싹 변했다. 실로 오싹한 일이었다. 드낙의 말은 인간의 탐욕스러운 부분을 삭삭 긁었다.
‘미쳤어. 하지만 거부할 수 없다.’
이 시대에 유례없는 사람 장사가 시작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트코인에 눈이 벌겋게 된 이들처럼 돈 좀 있는 사람이면 사람을 사들이게 될 것이다. 피난민 중에 그 손길을 벗어날 사람은 20%도 안 될 터였다.
“밀값이 폭등할 수 있습니다.”
이실레아는 끝까지 잘못되었을 경우를 언급했다.
“그것도 제어하지 못하면 안 되지. 내가 괜히 〈상단 연합〉을 만들었겠나. 그들을 공인시킨 건 우리다.”
거기까지 드낙이 말하자 그녀가 눈을 질끈 감으며 자리에 앉았다.
“중요한 건 선동이다. 그들이 굶어 죽고, 노예가 되고, 도로 사업에 헐값에 동원되어도 모두 플래티넘 왕가를 탓하게 해야 한다.”
길게이가 거기에 살을 덧붙였다.
“최소한의 지원금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딱 도둑질을 하지 않을 만큼만 조절하고, 작은 마을에 훈련병이라도 파견한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후방 보급에 힘쓰는 기사들에게 또 하나의 공로를 주는 것과 같으므로 모두 열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노예에 거부감이 있는 자들은 숨어서 살거나, 행인들을 덮칠 것인데. 용병단을 통해서 이를 또 경제로 돌릴 수 있습니다.”
한 명이 드낙의 말을 받쳐주자 너도나도 받쳐주었다. 그중에는 이실레아도 있었다.
남부 피난민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드낙은 이번 악마 준동을 놓치기 싫었다. 동시에 게제라스의 육중론을 알고 있었기에 인구 또한 받아들이고 싶어졌다.
그렇게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동부의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렇게 결정이 나버렸다.
“내가 말한 것을 토대로 진행시켜.”
드낙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해결방법이 나왔지만 얼마만큼 서로 어디까지 헤처먹을지를 결정짓는 게 남아있었다. 호랑이를 앞에 두고 늑대들끼리 고깃덩어리를 두고 싸우는 꼴이었다.
*
“성문을 열어라!”
“성문 개방!”
수도에서는 연일 크고 작은 군대가 들어왔다. 성문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으며, 마법사가 만든 〈검열기구〉가 하나하나 그들을 확인했다.
신분에 비해서 마력을 지닌 자들을 내치기 위해서였다. 1차 검증 뒤에는 상처를 내서 악마의 육체를 지닌지도 확인했다.
이런 철저한 검열 때문에 수도는 〈악마 궐기〉에 비해서 그나마 잘 굴러가고 있었다. 동시에 지방의 군대가 들어온다는 뜻은 플래티넘 왕가가 수도 외의 모든 것을 버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시민들은 포기한다. 힘을 모아서 단번에 악마를 토벌한다.’
그것이 남부왕의 해결 방법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성이 하나 함락된 순간부터, 이미 주도권은 악마에게 있었다. 적당히 모은 군대를 동원해서 찾아가면 이미 성 몇 개는 악마 군대에 의해서 약탈이 진행된 상황일 터였다.
‘이미 늦은 것이지.’
괜히 3218년을 존버한 흑마법사가 상을 엎어버린 게 아니었다. 그만한 확신이 있었다.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게냐! 대체 일왕자는 뭘 하고 있는가! 하루가 다르게 악마의 힘은 나날이 커지고 있거늘!”
남부왕이 분노할 때마다 비싼 집기(什器)가 부서졌다. 시녀가 피떡이 되어서 실려 나가고 나서야 남부왕은 현자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모두 나가 있거라!”
홀로 생각하기 위해서 남부왕은 다른 이들을 모두 물렸다. 그리고 술잔에 술을 따르고 그것을 손에 쥐며 굴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불파겐의 힘을 빌려야겠어.’
악마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몰랐기 때문에 죽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남부왕의 어깨를 누군가가 짓누르며 입을 틀어막았다.
“크흡?!”
콧김이 거세게 나왔다. 반항을 하려고 했지만 무의미했다. 사람의 손이 커지면서 거무튀튀하게 변했다. 점막마저 흘러나오며 단단하게 남부왕의 입을 틀어막는 액체가 되었다. 점성이 대단했고, 신축성도 뛰어났다.
그 점액을 붙인 게페락스가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가 남부왕의 머리를 그대로 집어삼켰다. 그의 피가 온몸을 타고 흘렀다.
실로 허망한 죽음이었다.
“입구만 그렇게 주구장창 지키고 있으면 쓰나.”
육체를 변화시켜서 하수구로 슬라임처럼 들어온 것이 게페락스였다. 물론 모든 악마가 그같은 육체를 지닌 건 아니었다. 그건 그의 삶을 투영해서 만들어진 〈그만의 악마 육체〉였다.
매번 변하고, 또 변하고 그렇게 도망치고 다른 곳에 적응하며 살아간 흑마법사 게페락스의 삶이 만들어낸 육체였다.
머리통이 사라진 곳에 악마 게파락스의 아가리에서 해골이 하나 튀어나왔다.
툭.
바닥에 떨어진 두개골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촉수가 튀어나오더니 남부왕의 다리를 조이며 올라가 목 위에 안착했다. 촉수가 꿀렁꿀렁거리면서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해골은 남부왕의 얼굴이 되었다.
옷을 갈아입은 남부왕에게 게페락스가 말했다.
“동부로 간 군대에게 불파겐을 끌어당길 협상을 진행하라고 명령해라. 절대 하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군대로 압박해서 서로서로 비슷하게 협상을 끝낼 수 있어야 한다.”
“예.”
게페락스는 그사이에 수도를 홀로 집어삼킬 생각이었다. 그가 만든 악마 군단은 백금 왕가가 버린 수많은 곳을 침략하며 인간을 사냥하고 있었다.
악마 군단은 수도 밖을 돌아다니고, 게페락스는 수도를 홀로 친다.
‘왕 다음에는 중앙 대신을 내 말로 삼으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도 쉽게 수도의 인간을 모조리 내 병졸로 만들 수 있다.’
은밀하면서도 치명적이었다.
무력이 낮은 봉건제의 왕이 판타지 세계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