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7 <-- 세리안戰 -->
세리안은 드낙이 다가오자 투구를 벗고, 망토 아래에 집어넣었던 붉은 머리카락을 꺼냈다. 긴 머리카락이 모습을 드러냈고, 겨울의 강한 바람에 휘날렸다. 드낙은 단발에서 약간 긴 정도에 불과했기에 투구를 벗어 보였다.
서로 머리카락의 색이 비슷했다.
“오우거를 잡았나?”
마신장의 농도가 비슷하자, 세리안이 물었다. 수백 년이 흐른 불파겐의 후예가 드낙이라 고 생각하고 있었고, 당연히 머리카락의 붉은색이 흐려져야 마땅했다.
서로서로 불파겐의 후예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드낙은 대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했다. 공부하기 싫어서 〈계승〉도 먹고 싶은 것만 먹은 드낙이었다. 이것 또한 현대에서 배운 것이었다. 이름하여 〈뷔페식 계승〉.
배우고 싶은 것만 배우는 계승이었다. 귀족의 화법, 예절만큼 재미없는 게 없었고, 드낙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고로 세리안의 질문에 휘둘리는 건 사양이었다.
‘시작부터 크게 간다.’
무엇보다 한 방, 한 방 자극적으로 가야 하는 게 불파겐을 대하는 방법이었다. 세파리아스와 검은 꿈에서 자주 지내면서 알게 된 것이기도 했다. 살짝 간만 본다든가, 여러 가지 근거를 차근차근 쌓아올리는 건 아주 잘못된 접근방법이었다.
사이다만 마시면서 사는 불파겐에게 물을 건네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탄산이 터트려지듯이 이야기가 터질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사이다패스나 다름없었다. 일단 문제가 생기면 터트리고 본다. 고로 터지기 전에 터트려야 했다.
“〈오거 야크트(Oger Jagd, 오우거 사냥)〉를 계승받았다. 모든 불파겐의 후예에게 이를 전해주는 게 나의 임무다. 계승 받겠는가?”
“당연히 계승 받는다. 하지만 그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나.”
세리안이 대검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십이천칭의 힘을 부여해주는 강력한 강화 아티팩트인 〈홀그린의 펜던트(Hallgreen`s Pendant)〉덕분에 소리가 매우 컸다.
“싸울 필요가 있나? 지금 남쪽에서는 악마가 준동했다. 이를 기회로 삼아···”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위계질서다. 〈계승〉을 받았다면, 너도 알 것이다. 불파겐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과 서열을.”
드낙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파겐의 후예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파악했기 때문이다. 무력서열은 불파겐 가문의 내전이기도 했다. 기사들끼리 힘에 따른 서열을 매기는 것이다.
이는 무력이 강한 세파리아스로서는 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다른 분야에서 아무리 뛰어나도 무력서열이 낮으면 지배받을 뿐이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세파리아스가 무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불파겐의 규합력을 강하게 만들 수 있어서였다.
‘오직 그만의 방법이지.’
힘으로 모든 걸 결정하는 무협의 마교와 비슷했다. 천마라는 무력에 뭉친 자들이 불파겐이었다.
‘날 이겨서 단번에 자신의 권력을 획득하겠다. 이건가?’
드낙의 눈이 좁아졌다. 그는 다시 투구를 착용했는데, 세리안 또한 따라서 투구를 썼다.
스르릉.
〈강철이 흐르는 강(Steel flowing river)〉이 드낙의 손에서 뽑혔다. 그의 무장은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롱소드 한 자루가 전부였다. 투척 단검 같은 건 이제 졸업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초월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어서 당연하기도 했다. 이제 그는 오만한 자가 될만했고, 세파리아스만큼은 아니지만, 작은 일에도 자신의 프라이드를 걸 정도로 자존감과 자존심이 높아져 있었다.
‘굴복시키고, 내 휘하에 둔다.’
마신장을 잡으러 갈 때, 부관으로 쓰기도 적합했다. 무력만큼은 불파겐을 따라올 자가 없기 때문이다. 호위로 두기에 가장 좋은 자였다.
‘군대를 맡길 생각은 없다.’
드낙을 호위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아무렇게나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다.
“지금 말하는 거지만, 넌 날 이길 수 없다.”
드낙의 말에 세리안 또한 받아쳤다.
“너무 뻗대지 마라. 목이 날아가면 누가 내가 널 이겼다는 걸 증명해주나?”
드낙이 단번에 한 걸음 옮겼다. 아무리 고위기사도 자신의 힘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정면으로 달려드는 드낙의 모습을 보며 세리안은 〈적혈대검(Red blood Two-Handed Sword)〉을 조작했다.
자신의 키보다 높은 대검을 운용하는 일은 어렵고 난해하다. 그렇기에 대검수는 자연스럽게 파지법(把指法)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긴 손잡이를 어디에 어떻게 잡느냐가 180cm가 넘는 검신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손잡이의 길이만 해도 45cm에 달했다. 총 225cm의 대검은 세리안보다 머리 한 개 반은 더 컸다.
멀리서 봐도 사람이 쓸 수 있는 무기로 안 보였고, 가까이서 봐도 사람이 쓸 수 있는 무기로 안 보이는 게 바로 대검이라 불리는 중병기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세상의 인간은, 기사는 대검에 집착했다.
“후우욱!”
숨을 깊게 내뱉고, 다시 한 번 전의를 담아서 숨을 들이켰다. 다가오는 드낙에게 단번에 대검을 내려쳤다. 실로 정직한 내려치기였지만, 그 속에는 음흉한 수법이 담겨 있었다.
언제든지 손이 움직여서 다른 궤적을 만들 수 있어서였다.
‘피하지 않아? 미친놈인가!’
세리안은 우직하게 그대로 달려들며 대검을 받아치려고 하는 드낙을 보며 경악했다. 병신 중의 병신스러운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이기도 했다.
“우아아아아아아!!!!”
드낙이 달리는 속도를 더욱 붙였다. 그렇다고 자신이 가진 모든 종류의 힘을 쏟아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려고?’
걱정이 하나 있었다. 상대가 죽는다는 걱정.
실로 오만했지만, 인간과 1:1 승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너무 강하게 여겨졌다.
제국 전신갑주의 무게와 합쳐진 체중에서 나오는 돌진. 그 운동력을 롱소드에 담았다. 시작부터 그 힘 때문에 휘어지는 롱소드가 내려쳐지는 대검과 부딪쳤다.
나약한 고막이 그대로 청각을 잃었고, 웅웅거림만이 들려왔다. 그만큼 대단한 충격음이었다. 물론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이걸 막았다고? 내 힘을?’
체급이 세리안보다 월등히 높은 드낙은 무엇보다 하향 조정되었지만 오크의 신체능력이 스며들어있었다. 대검을 밀어내야 정상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해서 오는 놀람이 있었다.
반대로 세리안 또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내려쳐지는 대검을 정면으로, 그것도 롱소드로 막아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2.25m+사람의 팔이 합쳐진 긴 길이로 만들어내는 원심력은 방패를 들고 방어하는 사람 째로 쓰러뜨리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어서였다.
가가가각!
놀라기도 잠시, 서로 무기가 맞닿은 상태에서 드낙이 대검을 밀어냈다. 부딪칠 때는 원심력 때문에 동등했지만, 운동력이 상실된 상태에서는 근력과 무게가 우세인 드낙이 밀어붙일 수 있었다.
단번에 대검을 밀어붙이자, 거리가 가까워졌고 세리안은 손잡이의 위쪽으로 양손을 움직이더니 손등이 하늘을 향하도록 만들어내며 단번에 양팔을 들어 올렸다. 대검이 아래로 향하며 드낙의 투구를 노렸다.
캉!
강철이 흐르는 강과 적혈대검에서 불똥이 튀기며 서로의 무기가 튕겨졌지만, 적혈대검과 다르게 롱소드는 드낙의 무식한 힘 때문에 그 반동을 죽이며, 단번에 뱀처럼 세리안을 노렸다.
쐐액!
대검이 막아서려고 했지만 〈전초극의 오른팔〉이 기괴하게 비틀렸다. 드낙은 통증마저 느꼈다. 그만큼 세리안의 수비를 뚫으려면 ‘인간 외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관절이!’
경악하는 세리안의 왼팔이 서둘러 내려갔다. 동시에 롤레온의 방패가 알아서 아래로 향했다.
코앞까지 당도한 검 끝을 〈롤레온의 방패(Rollleon’s Shield)〉의 뭉툭한 부분이 아슬하게 닿으며 휘어지는 롱소드를 짓눌렀다.
“그윽.”
드낙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 전초극의 오른팔에서 섬세하게 신경을 천천히 짓눌러서였다.
쿡.
짓눌러지는 검이었음에도 기어코 휘어진 검 끝이 세리안의 투구의 틈으로 들어가서 코 옆, 눈 밑을 찌르고 회수되었다.
‘됐다.’
고통스러웠지만 드낙이 일희(一喜)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세리안은 투구 밑으로 흐르는 피를 손에 묻혔다.
‘관절을 희생하고 나에게 이런 작은 피해를 줄 의미가 있나?’
냉정하게 판단했다. 그것은 비전이라고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뼈를 주고 살을 내어주는 격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에게 피해가 더 가는 한 수였다. 허나, 드낙의 기고만장한 모습에 판단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팡!
심지어 드낙은 오른팔로 허공을 때리며 콩알만 하게 묻은 세리안의 피를 퍼뜨렸다. 그 모습에 세리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게 어때? 그런 큰 대검을 쥐고 있어 봤자, 날 결코 못 이긴다. 거기에 넌 전신갑주도 입고 있지 않잖아.”
“시건방진 놈. 어디서 그 주둥아리를 함부로 지껄이는 거냐? 거기에 그 행동은 뭐냐? 감히 네가 세파리아스 불파겐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허공에 〈엘라스티쉬 제스트렁(Elastisch Zerstorung, 탄력적인 파괴)〉를 하며 검에 묻은 피와 이물질을 모조리 없애는 건 세파리아스의 독특한 습관이었다. 다른 이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검이 이물질에 무뎌지기 전에 지쳐서 물러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오직, 그만이 전투 중 혹은 전투 후에 검의 기능을 최대한 빨리 회복시킬 이유가 있었다. 그의 적은 셀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지금 상황과는 맞지 않았다.
드낙의 경박함은 세리안을 분노시키기에 충분했다.
고작 콩알만 한 피를 털어내기 위해서 그런 모습을 보인 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바로 자신이 세파리아스 불파겐과 견줄 수 있으니, 항복하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리안에게 있어서 그런 도발은 눈앞에서 아버지를 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런 생각은 드낙에게 전혀 없었다. 세파리아스와 대련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같은 습관이 스며든 것에 불과했다.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역시 불파겐답다. 의심할 여지가 없네. 그놈의 후예가 뭐가 다를까.’
바람이 한차례 크게 불고, 쥐죽은 듯이 바람이 사라졌다.
쿵.
대검이 바닥을 찍었다. 돌과 부딪치며 소리가 났다. 세리안은 단번에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서 망토에 다시 집어넣었다. 서슬 퍼런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세리안이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뭔 병신같은 짓거리를 하는지, 화가 났다. 하지만 그럴 가치가 있다고 여기며 여기까지 왔다.”
세파리아스의 〈계승〉을 받은 또 다른 후예였다. 그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세리안은 사람들에게서 불파겐에 대해서 빠짐없이 묻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
필요에 의해서 했겠지.
그런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강철이 흐르는 강〉을 쥐고 있는 불파겐의 후예는 그의 아버지의 것을 받아들인 자였기 때문이다.
‘세월이 이렇게 야속할 줄은.’
지금의 불파겐은 그때의 불파겐이 아니었다.
“그저 힘에 휘둘리는 개새끼에 지나지 않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는 세파리아스가 내어준 힘. 그리고 그가 보여준 행보. 거기에 매료되어 그를 모방하며 과시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의 습관조차도 피로 점철된 습관이었는데, 그걸 단순히 쇼로 치부하는 모습은 그를 경멸하게 하였다.
“그 경박함이 너를 죽이게 한다. 그것만은 알고 죽어라.”
드낙은 대답 대신에 롱소드로 그녀를 겨누었다. 왼손으로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자신이 한 방 먹였으니, 이번에 세리안에게 공세를 양보한다는 제스쳐였다.
그녀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에 불과했다. 엘프의 피는 시리도록 차가웠고, 불파겐의 분노를 순식간에 식혀버렸다.
세리안이 그대로 돌진했다. 드낙은 가볍게 복싱선수처럼 총총거렸다. 첫 격돌로 자신이 승리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전초극의 오른팔이 저 불파겐의 후예에게 통했다는 게 주효했다.
“어이어이! 그렇게 천천히 달려와서 되겠어?”
드낙의 도발 속에 서로의 무기가 휘둘러졌다. 하지만 드낙은 상황이 달라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전과는 다르게 전초극의 오른팔은 세리안에게 전혀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검과 검이 부딪치면서 드낙의 입이 꾹 다물어졌고, 반대로 세리안의 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위 기사가 왜 중병기(重兵器)를 고집하는지, 그 이유를 아느냐?”
“······”
드낙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세리안은 그가 제대로 된 〈계승〉을 받지 못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첫 격돌때는 드낙이 물러났지만, 두 번째는 세리안이 스스로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