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1 <-- 동남 전쟁 -->
‘운이 좋군.’
이실레아가 군막에서 양피지를 훑으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운이 좋다.’
드낙을 만난 뒤로 그녀는 정말이지 운이 좋았다. 운이 겹쳐서 운을 또 만들어냈다. 그 흐름을 탔다. 한 번 잘되면 끝도 없이 잘 되는 법이었다. 뭘 해도 되는 상황일 지경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이실레아는 선봉대에 섰다. 이는, 본대가 만들어갈 공훈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최고 공로는 어찌 되었든 큰 싸움에서 승전보를 올리는 자들에게 돌아간다. 그녀는 본래라면 모든 자원이 빼돌려진 요충지를 점거하는 선에서 끝났어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금광을 캔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렸다.’
운이 좋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드낙에 대한 좋은 소문이 퍼지는 게 싫은 백금 왕가가 만들어낸 불파겐에 대한 소문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제법 엘리트라고 자부하는 상인들이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돈을 굴리면서 사람들을 등쳐먹는 게 상인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오히려 등이 베였다.
도망치면서 가져가야 할 화폐와 패물 외에도 지하에는 그들이 쌓은 더러운 재화가 많았다. 자신들의 상관에게 주지 않고, 착복한 비밀창고들이었다.
그 모든 것이 불파겐의 손으로 들어갔다.
이실레아의 공적이었다.
동부와 남부 사이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첫번째 요충지〉를 보유하게 됨으로써 얻은 이득만으로도 전쟁을 장기전으로 갈 정도로 이득이 있었다. 그만큼 수많은 전쟁물자와 재물을 손에 얻었다.
부패한 자들의 금고를 얻는 것만큼 확실한 이득도 없었다.
“사령관님. 가르푼 부관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예.”
군막의 천막이 펄럭거리며 가르푼이 안으로 들어섰다. 양피지를 바로 건넸다.
“보기사들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어떻던가?”
“생각보다 병사에 대한 영향력이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보기사들은 지방의 힘이며 영향력이 된 〈장원 기사〉의 반댓말로 중앙에서 활동하는 부사관급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전투과 시험에서 통과한 이들이며, 이번 전쟁에 처음 투입되었다.
“예상치를 넘었나?”
“예. 못해도 3년 내지는 5년마다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유기사가 된다는 것은 몰락한 가문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는 걸 뜻한다. 평범한 재능으로는 그럴 수 없었다. 고로 자유 기사는 돈으로 재능을 인증받은 자들이었다. 어디에서든지 활약할 수 있었다.
이실레아는 보기사들의 신임을 받아야 했지만 동시에 그들을 견제해야 했다.
모순적이지만 그게 정치였다. 함께 해야 하면서도 서로 적인 것이다.
“보기사들 중에서 정치력이 있는 자들을 판별해야겠어.”
“그들을 어찌할 생각입니까?”
“부관. 겐 쟝 사령관이 장원 기사들 중 자신 말고 다른 자가 그들을 따로 설득하여 휘하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어찌할 것이라 보나?”
“그가 현재 표방하는 것들을 생각한다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이며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처리할 것으로 생각하옵니다.”
충신인 척을 하는 것인지 충신인 것인지 이실레아는 몰랐다. 하지만 그런 자도 자신의 자리는 소중한 법이었다. 가르푼 부관은 단번에 그 말을 알아들었다.
“중앙의 보기사를 지방의 장원기사로.”
“지방의 장원기사를 중앙의 보기사로 전환하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그가 쌓은 모든 커리어와 세력은 와해되고 말 것이다.”
세월을 쌓아서 만든 든든한 친구라도 거리가 멀면 소원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영주님께서 허락하시겠습니까?”
“허락하고말고. 지금의 체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사람이 오르면, 그것만큼 귀찮은 것이 없다. 안 그런가? 나와 겐을 동부와 중앙 사령관으로 만들었는데 교체를 하게 된다면 또 권력형태가 변한다. 그릇에 담긴 물의 색이 달라지고 만다.”
그런 귀찮은 짓, 그가 할 리가 없었다.
남이 고인물이면 게워내서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소리를 꽥꽥 질러도 자신이 고인물이나 기득권이 되면 절대로 새로운 물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법이었다.
“이번에 게제라스 법관도 마찬가지다. 명령하면 인사를 새롭게 할 수 있어. 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지.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실각한 자를 추켜올렸다.”
그게 방아쇠가 되어 이번 일을 추진하게 하였다. 확신을 준 것이다. 동부의 기득권층이 확실하게 자신들의 자리를 굳히는 일은 겐 쟝조차도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 이득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큰 공로를 얻었고, 동시에 보기사의 첫 시작에 그들의 목줄을 채운다.’
그녀의 새로운 부관인 가르푼 브릴리언트는 침을 꼴깍 삼켰다. 필요하기에 남겨두지만, 그 내부를 속속들이 파헤쳐서 정치에 싹을 자른다는 이실레아의 계략은 실로 음흉했고, 철저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라이벌로 부쩍 상승하고 있는 겐까지 끌어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구나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
“히히힝!”
모비딕의 발톱에 움켜쥔 말이 기겁했다. 기수는 이미 낙마한 지 오래였다. 단순한 천이 아니라, 촘촘하게 만들어진 체인메일 형식의 마갑을 입은 중갑마였다. 핏물이 주르륵 떨어지며 아래서 달리는 경기병들에게 뿌려졌다.
“푸하! 흐으으!”
기수가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닦으며 덜덜 떨었다. 하지만 손에 쥔 화살을 더욱 단단이 쥐었다.
화살이 모비딕에게 부딪쳤지만, 비늘 하나 부수지 못했다. 도리어 성을 돋구기만 했다.
“쿠아아악!”
거친 포효에 대열이 흐트러졌다. 말들이 감당하지 못했다. 산개된 대열이 흐트러지면서 여럿 뭉치게 된 지점이 드낙의 화염구가 그대로 작렬했다. 충격파가 터져나가며 사람이 날아갔다.
뜯겨져 나간 손가락이 제법 멀리 있던 중기병의 말머리를 치며 떨어졌다. 작게 묻은 피를 중기병 기수가 보며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건 없었다. 지상을 찢고, 정예 창병들이 만든 방진에 라이트 랜스를 투척하여 때려 박아 요리하는 건 자신 있었지만, 와이번을 상대로는 무기력했다.
백여 기를 죽인 와이번이 하늘 멀리 날아오르며 고도를 높였다. 천천히 구름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거리감이 만들어내는 여유로움은 실로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상황 보고! 상황 보고!”
중기병 85기가 죽었다. 경기병들은 아예 상대도 하지 않은 모습이었고, 이제 마법 또한 평범한 〈다수 마법〉에 불과했다. 산개하고, 뭉쳐도 3~5기 이상 뭉치지 않기 때문이었다.
‘상황은 절망적이다. 설마 이렇게까지 불합리적인 상황에 직면하다니.’
지휘관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숲에서는 기습 때문에 큰 사상자가 났다고 생각했지만, 평야에 오고 나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피로 이어진 길을 걸었기에 결국 남부 별동대는 후퇴하기로 했다. 어중간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법 마차〉가 아니면 와이번을 막을 수 없었다.
‘도달한다고 해도 일전(一戰)을 벌일 수 없을 터다.’
“루트는 세 곳이다. 그곳을 경유하여 보급품을 획득하고, 다시 본대로 모이면 된다.”
기병을 셋으로 나누었다. 더욱더 흩뿌려지기 위함이었다. 억지로 잠을 청하고, 동이 트기 전부터 기병들이 서둘러 후퇴했다. 물론 드낙은 여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웅!
바람 마법으로 만들어진 방어막을 지나가는 광풍 속에서 드낙은 드디어 올 것이 왔음을 느꼈다.
‘역시, 평범하게 혼자서 5천을 잡아먹을 수는 없나.’
아무리 강해도 드낙은 개인일 뿐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이길 수 없었다. 엘프조차도 〈폭풍의 요람(Cradle of the typhoon)〉의 영향권 내에서만 공간 이동을 할 수 있었다. 그 외에는 비행 마법을 통해서 이동해야 했다.
당장 산개만 해도 광역 마법의 살상력이 떨어진다. 범위 내에 들어가는 기병의 숫자가 줄어들기 때문에 소비되는 마력에 비해서 죽일 수 있는 숫자가 적었다.
‘다수 마법은 시간이 걸리지.’
똑같은 마력을 소비했을 때, 광역 마법은 한 번으로 족하지만, 다수 마법은 수백 번을 써야 했다. 〈간략화〉된 마법이 아니기에 주문을 읊어야 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입술이 닳아서 터질 정도였다. 물론 재생이 되었지만, 인간을 포기하지 못한 드낙의 한계는 명확했다.
병력 구성을 군사학서에 나온 대로 정석대로 하는 지휘관이다. 규정대로 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었다. 그 덕에 별동대를 이끄는 지휘관은 1200기의 기병을 잃고도 지휘력을 상실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다.
그만큼 정석이 가진 힘은 강력했다.
‘산개에 이어 병력을 세 개로 나누어서 후퇴.’
드낙을 겨냥한 것이나 다름없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훌륭하다. 무엇보다 그런 즉흥적인 후퇴 전략을 짤 수 있을 정도로 남부가 풍요롭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남부에 뿌리를 내린 〈붉은혀 리전(Red tongue Region)〉에게 더 많은 정보를 들어봐야겠어. 생각보다 더 대단해.’
전쟁을 겪지 않은 토지가 얼마나 살찌울 수 있는지 드낙은 아직도 파악하지 못했다.
‘더 이상 쫓는 건 비효율적이야.’
가장 비싼 병과인 중기병을 1200기나 죽인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화살도 제법 소비시켰다. 이 세상은 화살이 소비품이 아니었다. 될 수 있다면 회수해서 쓰고, 고쳐 써야 하는 무기였다.
“모비딕! 돌아가자!”
“크롸롸!”
말고기를 냠냠하면서 최근 기분이 최고조로 오른 모비딕이 드낙의 말에 얼른 대답하며 날개를 한 번 펄럭이며 더욱 높이 올랐다. 상승기류를 타기 위함이다.
되돌아간 드낙은 제법 그럴듯하게 언덕이 생겨난 무너진 토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이실레아를 만났다.
“보고하라.”
“예.”
토성에서 획득한 노획품만으로도 이번 전쟁을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말에 드낙이 혀를 내둘렀다. 역시 현대가 자본주의로 나아간 것처럼, 돈이 만들어내는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데. 왜 그렇게 많은 거지?”
“이곳은 경유지입니다. 남부와 동부를 연결하고, 두 지방의 자원을 교류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위험한 곳이기도 하기에 상단의 주인이 직접 관리는 하지 않습니다.”
“자원은 많은데, 총책임자가 맡지 않는 곳이라는 건가.”
“8할 이상이 더러운 짓으로 얻은 것일 겁니다.”
질척한 비리가 이루어진 창고를 획득한 셈이었다.
“본대는 언제 도착한다고 하지?”
“사흘 전 본대의 기수가 도착했습니다. 2~3일 내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드낙과 이실레아는 그 뒤로 수많은 것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이 토성에서 잭팟을 터트렸기 때문에 드낙은 약탈에 특히나 관심을 가졌다. 이실레아는 그런 드낙을 부추기듯이 여러 곳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계곡을 통째로 조각하여 관광지로 만들며, 오색 보석을 파는 〈영광의 계곡〉은 특히나 드낙의 관심을 일으키게 하였다.
‘동부에는 보석 원석이 나는 곳이 1곳도 없는데, 이 남부는 왜 한 곳에서 여러 개의 보석이 튀어나오는 거지?’
절로 화가 났다. 가지지 못한다면 뺏어서라도 챙기고 싶었다. 검은 문에 대한 생각은 싹 사라진 지 오래였다.
현대인은 돈의 노예기 때문이다. 100원, 100원 아끼다가도 십만 원, 이십만 원 한 방에 지르고 후회하는 게 박호훈이었다.
‘업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솔직히 돈보다는 못하지.’
드낙이 수전노처럼 자신도 모르게 손을 파리처럼 싹싹 비볐다. 챙길 수 있을 때, 챙겨야 했다. 동화가 없어서 대형 썰매장의 건설을 제때 할 수 없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돼.’
남산타워처럼 〈불파겐 타워〉도 짓고 싶은 게 드낙이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재미가 있는 관광 명소를 산에다가 지으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했다.
‘마신장이고 나발이고, 지금 지어야 한다.’
나중에 중립신에게서 노후자금을 두둑이 받고 은퇴해서 짓는다면 너무 늦었다.
*
갈래꼬리 왕(Forked-tail king).
꼬리가 두 개인 핏빛쥐며, 11의원회 중 1명인 핏빛쥐였다. 그리고 남부 지역(Southern Region)을 책임지는 〈붉은혀 리전(Red tongue Region)〉의 대장이기도 했다.
슬림한 몸을 지녔지만 키가 큰 것이 붉은혀 리전의 특징이었다. 팔다리가 쭉쭉 모델처럼 뻗어있는 것이 그들 리전의 공통된 속성이기도 했다.
쿵! 쿵! 쿵!
큰 키를 지닌 핏빛쥐들답게 긴 장창이 주무기였다. 보조무기로는 숏소드와 버클러가 혁대에 걸려있었다.
“보아라! 보아라! 우리들의 신을!”
돌을 깎고, 물과 거칠게 만든 금속을 통해서 부드럽게 만든 석로(石路)를 걸으며 갈래꼬리 왕이 양손에 단창을 두 개 쥔 채로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소리를 내질렀다.
돌로 된 길의 끝에는 드낙의 모습이 새겨진 금으로 된 석상이 있었다.
남부의 풍부한 광석 자원 또한 이곳에 똬리를 튼 핏빛쥐들의 것이 되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들어라! 들어라! 그분의 목소리를!”
뀌에이에에엥!
핏빛쥐들이 악기를 꺼내 들어 불었다.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드디어 자신들의 땅에 자신들을 만든 창조주가 왔기 때문이다.
수많은 리전 중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리전이 붉은혀 리전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드낙과 함께 싸울 날만을 기다리며 지하 세계를 점령한채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함께 싸우지도 않았지만 그가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잔치를 벌일 정도로 흥분해있었고, 기대하는 것도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