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0 <-- 동남 전쟁 -->
“흐음···”
거친 바람이 드낙이 펼친 방어막에 막혀서 옆으로 지나갔다. 야수 기사가 내어준 두꺼운 군사학서에서 기병에 대한 걸 뽑아 적은 양피지를 드낙이 꼼꼼하게 훑었다.
오답 노트 혹은 시험 족보나 다름없었다.
그 두꺼운 책을 3독이나 했지만, 실전에 적용하고, 응용하는 건 또 달랐다.
‘수학 문제나 진배없다!’
답을 보면 쉽게 풀 수 있는데, 답안지가 없으면 똑같은 문제도 못 푸는 괴이한 상황이 일어나는게 군사학이었다.
높은 고도에서 마법을 통해서 기병 무리를 먼저 확인했다. 총력전을 겉으로 표망하고 있기에 기병의 숫자는 3천~5천이 넘어 보였다. 정확한 숫자를 알 수는 없었는데, 자세히 봐도 수천의 기병을 제대로 세 알릴 수가 없었다.
그냥 매우 많을 뿐이었다. 기껏해야 천(千)과 만(萬)을 구분할 수 있었고, 첩자나 염탐해서 숫자를 알 수밖에 없었다.
드낙도 마찬가지였다.
‘기수의 숫자는 수백이고, 경기병이 중기병보다 배는 많다.’
그는 몰랐지만 정확하게 정석을 지키고 있는 게 남부의 기병들이었다.
500기의 기수.
중기병 1500기.
경기병 3천.
깃발이 많으면 절로 용맹해지는 법이었고, 명령을 하달함에도 눈에 확 들어온다. 남부 왕국의 깃발은 일백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명령하달을 위한 기수들이었다.
확실하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제어하겠다는 모습이 보였다. 그만큼 전투중 군의 통솔은 어려운 일이었다. 제대로 된 부장이 없으면 전술을 펼치기 힘든 경우도 많았고, 병사의 수준이 낮은 시대에는 맹장(猛將) 메타가 가장 으뜸이었다.
고로, 판타지 세상에서는 이에 대한 대처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기수들은 다섯 종류의 소악기를 지니고 있어서 시각, 청각으로 명령을 하달할 수 있었다.
‘수천이라···평지에서 바로 싸우는 건 좀 에바지.’
드낙은 덫을 놓기로 했다. 이실레아는 드낙을 맹장이라 평하고, 다른 이들도 그러했지만 지금의 드낙은 수천을 상대로 맹장질을 할 인간이 아니었다.
토성에서의 전투만 봐도 피를 묻히기보다는 얍삽하게 모비딕의 그림자 속에 숨었다. 자신의 노출도를 최소화했다.
마법으로 원거리 타격 이후에도 모비딕을 활용했으며, 군대에 다음을 맡겼다.
성향의 차이를 드낙이 지닌 파괴력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지, 그는 빠르게 예전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당장, 양피지에 필요한 지식이나 단어, 문장을 적어온 것만 해도 드낙이 달라졌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루 뒤에 작은 숲을 지나는 기병을 드낙이 급습했다. 구름에서 내려와 기병들의 후미를 노렸다. 길이 좁았기에 수천의 기병이 길을 통과하기 위해서 사각진을 여럿 잡아놓고, 순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삭막한 가을 바람에 갈 곳 잃은 불씨가 거칠게 춤추는 것처럼···”
와이번이 하강하면서 드낙 또한 마법을 준비했다. 고르곤의 심장을 통해서 마력을 증폭했지만 전과 같이 무리하지 않았다.
드낙의 광역 마법이 모비딕보다 먼저 사각진을 이루고 있는 중기병을 노렸다. 이 또한 배워서 알고 있었다. 모르면 중기병부터 노릴 수가 없었다. 아무렇게나 마법을 사용해서 닥치는 대로 죽였을 것이다.
‘나도 이제 지식인이다. 이 말이야.’
중기병은 창이고, 검이며, 돌진하는 괴물이다. 용도는 오직 그것밖에 없었다. 반면 경기병은 실로 만능의 기병이었다. 가볍기에 어느 정도 험지에서도 움직일 수 있고, 쉽게 지치지 않기에 다양하게 쓰일 수 있으며, 오랫동안 싸울 수도 있었다.
경갑을 입고 있기에 기수는 활 또한 쏠 수 있었다. 보급이 부족하면 중갑을 입은 비싼 전투마보다는 경기병의 말을 부러뜨리는 것이 좋았다.
요는 별동대를 이끄는 것은 경기병들이었고, 별동대의 검이 중기병이었다. 고로,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검을 부러뜨리는 것이 먼저였다.
드낙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기병을 최대한 적극적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기병이 다 죽으면 중기병은 물러날 수밖에 없다.’
뚱뚱한 돼지나 다름없는 중기병은 다른 병과의 도움이 필요했다. 차징조차도 50보 내외에서 시작하는 게 중기병들이었다.
‘그래서야 안 되지. 내가 다 죽인다.’
인간을 죽여서 얻는 업은 인신(人神)이기도한 중립신에게 모두 들어가지만, 드낙이 죽임으로써 더 많은 업이 그에게로 향할 수 있었다.
‘실력있고, 혈통있는 기사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토성에는 그런 게 없었다. 고로, 검은 문도 하나 나오지 않았다. 어느 수준에 들어가면서 드낙은 도통 검은 문을 볼 때가 드물어졌다.
‘중립신이 차단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허접한 궁술을 검은문을 통해서 배웠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검은문이 없다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마치 이 이상 드낙이 성장하는 걸 막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 이번 전투로 확실하게 한 소리 해야겠다.’
드낙은 작은 불만을 잠재우고, 큰 불만이 되기를 기다렸다. 상대를 확실하게 후려칠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 상대는 자신이 모시는 신이었다.
“〈날뛰는 불꽃( rampaging fire)〉.”
강렬한 열기가 아래에서 바닥에서 쏟아져나와서 날뛰었다. 태풍이 휘몰아치는 호수의 물결처럼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키히히힝!”
말들은 뜨거움에 펄쩍 뛰었다. 큰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끔찍한 열기가 목을 비롯한 기관지에 화상을 입혔다. 눈이 번쩍 뜨이는 고통에 기수가 그대로 떨어졌다.
“컥!”
말에 치이면서 앞으로 고꾸라진 기수의 투구가 큰 발굽에 걷어차여서 찌그러졌다.
쿠당, 퍽!
마법 불꽃이 전신에 들러붙은 말이 앞으로 내달리다가 이내 혼절하며 머리부터 땅에 처박았다. 그 뒤로 버둥거리는 기수를 들이받으며 같이 넘어지는 말도 보였다.
화르르르!
중기병 수백기가 화염 마법에 휩싸였다. 그들 중 대부분은 살아남을 수가 없었고,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게 되었다. 강철은 강한 고열을 그대로 내부에 있는 착용자에게 전해주었고, 피부가 화상을 입어서였다.
“아아아아악!”
아무리 빨리 벗어나도, 마법 불꽃은 시간이 지나야지만 꺼질 수 있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화염마법에 집중되고, 혼란이 일어나고 동시에 통제가 이루어지기 전에 모비딕이 도착했다. 그 누구도 거대한 와이번의 존재를 몰랐다.
드낙의 광역 마법이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다. 완벽한 티키타카였다.
모비딕이 다른 사각진을 펼치고 있는 중기병의 후미에서 앞으로 지나가며 브레스를 쏘았다.
구리의 만티코어가 자기보다 낮은 곳에 있는 모비딕을 노리기 위해서 부채꼴로 브레스를 분사한 것처럼, 모비딕 또한 부채꼴 브레스를 뱉어냈다.
경험만큼 강한 성장 도구도 없었다. 브레스의 형태를 바꾼 만티코어의 모습에 모비딕 또한 그렇게 되었다. 매번 쏴본 브레스였기에 금방 다양한 형태의 브레스를 쏘게 되었다.
물대포처럼 먼 거리에 대량의 산액 브레스를 쭉 쏠 수도 있었다. 브레스 형태에 대한 다양성을 만티코어를 통해서 배운 게 모비딕이었다.
드낙보다 더 많은 중기병이 부채꼴 브레스에 휩쓸렸다. 단번에 이를 지난 모비딕이 길을 지나 적당한 곳에 내려앉으며 발톱으로 기수를 우악스럽게 짓눌렀다.
“컥!”
핏물이 입에서 울컥 쏟아나오며 기수가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 으득거리는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갈비뼈가 으깨졌다.
목을 빳빳이 세운 모비딕이 다시 한 번 브레스를 토해내며, 꼬리를 좌우로 채찍처럼 휘둘러, 뒤에 있는 기병을 빗자루로 쓸어버리듯이 후려쳐서 날려보냈다.
수백kg에 달하는 전투마가 나무 위로 날아가며 나뭇가지와 함께 뭉텅이로 바닥에 떨어졌다.
“날아올라!”
드낙의 말에 모비딕이 쿵쿵 뛰면서 날개를 쫙 폈다. 몸통에 맞은 기병이 엉망진창으로 넘어지고, 받쳐서 옆으로 퉁겨지듯이 날아가 굴렀다.
펄럭!
모비딕의 안쪽에 있는 입체적인 깃털에 바람이 들어오며 부양력을 크게 만들어냈고, 단번에 날아올랐다.
‘무리할 필요는 없지.’
한순간에 800기의 기병이 죽거나 전투불능에 빠졌다. 다친 이들을 데리고 간다면, 드낙은 더욱 저들에게 숨통을 내어줄 것이고, 그들을 버리고 간다면, 지휘관보다는 다른 기병을 노리는 데 집중하면서 계단식처럼 사상자를 늘려갈 생각을 가졌다.
숲으로 사라진 모비딕은 언제 잡아챘는지 몰라도, 양발에 움켜쥔 말 두 마리를 마갑째로 씹어먹었다.
그 사이에 드낙은 손을 싹싹 비비며 마음을 가지런히 하며, 자신이 만든 주술 토템에 손을 대었다. 나뭇잎에 바람이 스쳐가며 드낙의 의식이 자유롭게 앞으로 뻗어 나갔다.
목캔디를 먹은 목의 상쾌함이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청량감에 신경이 짜릿해졌다.
‘쩐다.’
〈자연의 주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에게 이로웠다. 이는 오크들이 왜 주력을 주된 힘으로 사용하는지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뭇잎을 타고 흐르는 바람.
나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드낙은 가만히 그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봤다. 부상자를 버리라는 소리가 나무를 타고 드낙에게로 스며들어왔다. 그것은 귀로 들어오는 게 아니었으며, 몸을 통해서 나무에게서 흘러나오는 수액 같은 걸 마시는 것과 같았다.
실로 이상한 감각이었다.
나뭇잎을 타고 드낙의 의식이 곳곳을 누볐다.
결국 그들은 부상자를 버리기로 했다. 단 10기의 경기병을 놔두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는데, 공적에 미쳐버린 결정이라고 기수들이 분통을 터트렸다.
‘와이번을 이길 수단은 없는데, 역시 경기병을 믿고 있는 것이겠지.’
오래 활동하지 못하고 돌아간 와이번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제 기병들을 더 깊이 끌어내고, 잡아먹고 도망치는 기병을 골라 먹으면 끝날 것이다.
나무의 그림자에 가려진 드낙은 훌륭한 사냥꾼의 모습 그 자체였다. 결코 전력으로 상대와 부딪치지 않았고, 사냥의 과정을 즐기고 있었다.
같은 인간이라도 똑같았다. 오히려 인간 혐오에 걸린 게 드낙이었다. 아무리 함께해도 결국에는 자신을 위해서 움직이는 게 인간이었다. 그러지 않은 인간이 있을 수 있겠지만, 권력과 힘을 탐하는 놈들 중에는 그런 놈을 본적이 없었다.
*
“어으이! 어으악!”
병사들이 악을 내지르며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겼다. 잔해를 쌓고, 쌓아 언덕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한쪽에서는 망치를 든 병사가 있는 힘껏 땅을 내려쳐서 툭 튀어나온 벽돌이나, 땅을 내려치고 있었다.
“하나!”
하나할 때는 왼손이 앞으로 가고, 둘 할 때는 손을 바꿔서 오른손이 앞으로 갔다. 그때마다 허리를 펴고 발을 바꾸었다. 허리힘은 물론이고, 옆구리 힘을 사용하기 때문에 한쪽으로만 치면 오래 칠 수 없었다.
쏴아아!
마력을 회복한 수습 마법사들이 강철로 된 판에 구리를 녹여서 만든 마법진에 마력을 집어넣자, 물이 쏟아져나왔다.
병사들이 서둘러 나무 지팡이나, 작대기로 흙을 집어넣었다. 진흙이 된 흙을 수레에 담아서 언덕으로 향했다. 진흙을 쏟아붓고, 고루 흩뿌렸다. 이것만으로도 내구력이 높아질 수 있었다.
물론 적당히 진지를 꾸리는 것 외에도 할 일이 많았다.
“꾸우!”
발룬이 잔해더미를 밀면서 무식하게 전진했다. 나머지는 병사들의 힘으로 치워졌다.
“발견! 15번째 지하통로 확인! 보기사님!”
양피지에 표시된 것을 쥐고 있던 보기사가 서둘러 달려왔다. 〈전투과 대시험〉에서 합격한 부사관급의 인사가 〈보기사〉라는 직책이었다. 이들은 7급관이었다.
일반 병사는 9급 무관이고, 베테랑 병사는 8급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몇몇 년수가 많은 베테랑들은 여기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7급으로 진급할 기회가 자신들에게 전혀 쥐어지지 않아서였다.
기술관처럼 무관들 또한 그들을 위한 교육기관이 필요했다. 기사들이 워낙 큰 인재라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는 자들이 없었다. 베테랑 병사를 교육해서 준기사급으로 만들기보다는 자유 기사를 그냥 보기사로 임명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드낙은 애초에 기사가 많으니, 당연히 병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노획물의 절반은 소유한 자의 것이다! 병사간 살해, 폭력 사태가 일어난다면 없었던 말로 한다.”
“예!”
병사들이 열기를 뿜어냈다. 자신들이 발견했기에 이 지하통로로 향하여 있는 건 자신들이 취할 수 있었다.
“피난 권고를 내렸음에도 인정에 기대어 아무것도 하지 않은 놈들이다! 자비를 베풀지 마라! 반항하는 자는 죽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포승하여 데려와라!”
“예!”
군의 특성상 항복을 받아내고, 그다음에 모아서 천으로 얼굴을 덮어 부러뜨리는 것이 편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무는 법이었다. 이에 대한 대책이 포로를 잡는 척을 하는 것이다.
실로 영악했다.
“노획한 물품 중에서 회수될 수 있는 물품이 있을 수 있다. 확실하게 말은 못 해주지만 적어도 화폐나 패물은 억지로 회수하지 않겠다는 이실레아 중앙 사령관님의 말씀이 있었다.”
모두가 입이 귀에 걸렸다. 가장 좋은 노획품을 이실레아가 정해놓은 50%의 회수 외에는 결코 다른 이유로 회수하지 않겠다고 보장했기 때문이다.
보기사가 앞장섰고, 그 뒤로 병사들이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