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6 <-- 동남 전쟁 -->
남부와 동부를 가르는 국경지로 불파겐의 경기병들이 질주했다. 그들은 마을 곳곳을 돌며 가장 먼저 벽보를 붙였다. 그 이후에는 목소리로 주변인들에게 3번 똑같은 내용을 전파했다.
“오크의 대군을 상대로 인류를 위해서 막았음에도 백금 왕가가 내어준 것은 수천 명의 목숨보다 가벼운 것이었다! 이를 가만히 두고 본다면, 다시는 오크를 위해서 검창을 들어 올릴 사내는 줄어들기만 할 것이다! 대의를 위해서 일어섰지만, 승리 끝에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모래 섞인 빵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경고, 또 경고하는 걸 잊지 않았다.
“살고 싶다면 피난하라! 불파겐의 검은 남아있는 모든 것을 죽일 것이다!”
“저, 전쟁이다!”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다. 서둘러 살림살이를 챙겼다. 창고에 묵혀두었던 수레를 꺼내기도 했다. 이미 전쟁의 여파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강도와 도적이 들끓었다. 가진 게 없어서 더는 피난을 가지 못한 자들은 숲이나 야지에 눌러앉았고, 지나가는 이들의 배에 단검을 박아넣는 악인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몇몇 불파겐 경기병이 〈물의 전투 요새〉에 도착했다. 이 주변은 수원이 적어서 전투 요새임에도 병사를 오랫동안 주둔시킬 수 있게 물을 생성하는 것밖에 못 하는 전투요새였다.
남부를 지나 동부에 근접하는 땅들은 하나같이 살기 힘든 척박한 땅이었다.
화려하게 타오르는 문화의 꽃에서 가장 먼 곳에 살아가는 〈변경백 칸(Kan)〉은 순식간에 병사를 꾸렸다.
“병사를 풀어라! 전략 물자를 징발하라! 겨울 전쟁의 혹독함을 시민들에게 알려 불만을 최소화하라!”
“예!”
수많은 도로를 내달리며 기병들이 닥치는 대로 남부 왕국 국경선 인근에 있는 마을들을 찾아다녔다. 당연히 그들을 대피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아악! 안 돼요! 안 된다고요!”
전령들은 인근 마을을 빠짐없이 돌며 겨울 전쟁을 준비했다. 전략 물품을 징발하였다.
“세금은 분명 내지 않았습니까! 이게 전부입니다! 제가, 제 가족이 가진 전부입니다!”
음머어!
“불파겐이 선전포고했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서다! 시민들은 협조하라!”
검을 뽑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칸의 카리스마 때문에 시민을 죽이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불파겐의 소식을 듣기도 전에 병사들에게 식량부터 금속까지 모조리 빼앗겨야했다.
필요한 모든 것이 징발당했다. 자연히 국경선 인근의 혼란은 커져만 갔고, 수많은 약자가 죽임당하고, 굶어 죽었으며, 버림받았다. 그 숫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크르르···”
늙어 무리에서 쫓겨난 늑대가 숲을 헤매다가 굶어 죽은 소년의 시체를 물어뜯어 먹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숲에 불이 지펴지고, 배를 채운 늙은 늑대가 도적에게 죽임을 당하여 모닥불 위로 얹어졌다.
〈물의 전투요새〉에서는 보유 마력을 소진하여 무리해서라도 메시지 마법을 발동시켰다. 마력은 최소 일주일 이내 수도와 연결될 수 있을 터였다.
드낙이 무슨 수를 쓸지 몰라서였다. 최대한 이 소식을 알려야 했다. 수도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특히나 변경백 칸도 속아 넘어갔기 때문에 늦으면 늦을수록 수습할 수 없었다.
‘길게이 왕자가 미쳤구나.’
절로 손이 떨렸다. 동부의 남쪽에 똬리를 튼 길게이 왕자 때문에 방심한 것이 컸다. 동부 내부에서 싸우기보다 남부를 노렸다고 여겨졌다.
‘허를 찔렸다.’
드낙 불파겐은 항상 한 대 맞으면 되갚아준다는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이번 겨울 동남 전쟁은 아니었다. 그 스스로 먼저 칼을 뽑아들었고, 어금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남부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선빵을 양보하는 병신이 제정신을 차리고 먼저 적을 선제타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칸은 물의 전투 요새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선봉기사를 불러라!”
“예!”
시종이 서둘러 나갔다. 곧, 꼬장꼬장한 노기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단신(短身)이라 전사로 보기 힘들었다. 그의 부관은 그와 반대로 엄청난 떡대였다.
“주군. 부르셨습니까.”
“상황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병사 500명을 가려 국경선의 고지에 병사를 배치시켜라.”
“기사는 몇을 데려갑니까?”
“없다. 상황을 보고 바로 빠져라.”
“예.”
〈선봉기사 워런(Warren)〉이 야밤에 수색에 능하고, 눈이 좋은 병사 500명을 가려 서둘러 물의 전투 요새를 빠져나갔다.
이들은 고지에 망루를 설치하고, 먼 곳까지 향하여 맞불을 놓아 시야를 넓혔다. 적이 나타나면 바로 인지할 수 있도록 신경을 크게 썼다.
메시지 마법은 6일 만에 수도에 닿았다.
소식을 듣자마자 중앙 대신들이 대전으로 향하였다. 황금으로 치장된 대전에는 이미 남부왕이 도착해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는가! 전쟁이다! 전쟁! 불파겐이 검을 뽑아들었다!”
상석을 거칠게 후려치며 소리를 냈다. 주먹이 얼얼했지만, 통증조차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제대로 한 방 먹었다.
‘겨울의 군사대치를 화려하게 복수한 것이나 다름없다! 남들의 눈에는 얼마나 백금 왕가가 허술하게 보이겠느냐 말이다!!!’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소리를 마음속으로 하며 남부왕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걱정했던 일이 일어났다.
“어찌 해야 하는가.”
그 말에 중앙대신들이 너도나도 떠들어대었다. 하나같이 영양가가 없었지만, 온갖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겨울입니다. 많아 봤자 3천 명 이하의 군세일 것입니다. 지금 당장 물의 전투 요새로 병력을 집중시킨다면 능히 대처할 수 있습니다. 수성전 아닙니까?”
정론을 이야기했는데, 드래곤 나이트를 범주에 두지 않고 있었다.
“동부의 호수 마을은 국경선으로부터 보름 거리에 있소. 아무리 생각하더라도 전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저희를 겁주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기만술입니다!”
기만술의 목적도 알 수 없었음에도 표면적으로만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기도 했다. 그만큼 드낙의 한 수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오우거를 토벌하겠다고 해놓고서 이렇게 배신을 하다니, 시민들에게 이를 명명백백히 가려내어 의용군을 뽑아 힘으로 찍어누르시옵소서!”
말이 의용군이지 강제 징병 될 것이 뻔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전은 조용해졌다. 누구도 화친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러면 목이 달아날 뿐이었다. 엄한 사람이 죽고, 죽고, 또 죽어서 어느 정도 결과가 나와야지 못 이기는 척 화친할 수 있었다.
그건 중앙 대신도, 남부왕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수도에 있는 중앙의 인간이었다.
판단 하나하나에 다른 이들이 우월감을 느끼게 만들어야 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막을 수 없다.’
“총력전을 하는 것처럼 보여서 서둘러 전쟁을 종식하게 만드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들 또한 겨울에 오래 싸우는 건 득이 없다고 여길 게 분명합니다.”
“병참이 가능하겠는가.”
그 말에 중앙 대신 중 하나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변경백 칸은 실로 주도면밀한 자입니다. 분명, 적에 대한 정찰을 먼저 하기보다는 주변 시민들의 재산을 징발하였을 겁니다. 현지 조달을 통해서 충분히 대군을 운용할 수 있을 겁니다.”
남부왕은 그 말에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동부 경제 침략이 있지 않습니까? 상인들에게 어음을 내어주고, 전쟁 보급을 대라고 하십시오. 그럼 병참은 해결될 것입니다.”
거짓 장부가 쓰이겠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서둘러 변경백에게 이를 알려라. 거짓 총력전이다.”
수도와 메시지 마법이 연결되자마자 수도에 있는 마력으로 메시지 마법이 유지되고 있었다. 알리는 것은 쉬웠다. 이미 연결된 메시지 마법은 전파보다 빠르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다.
*
불파겐 마탑의 하루는 정오부터 시작된다. 워낙 늦게까지 연구하는 마법사들이 많아서였다. 특히 그들 중에서는 제법 명성이 있거나 대대손손 마법사였던 가문인 자도 있었다.
이런 그들이었지만, 오늘은 새벽부터 일어나서 불파겐 마탑의 밖으로 향했다. 하나씩 자신들의 짐을 들고 있었다. 오늘부터 불파겐 마탑은 사실상 휴업을 하기 때문이었다.
이 마탑에서 마법사들을 묶어두고 있던 〈심장〉이 뽑히는 날이었다. 고로 더는 마법사들이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모두 나왔는가!”
“예···”
드낙이 소리치자 마법사들이 쥐꼬리만 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드낙은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마법사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페리에 러셀! 인원 파악을 해보라!”
“예!”
〈일법사(一法師) 페리에 러셀(Perrie Russell)〉. 불파겐 마탑의 첫 정규직원이었다. 그녀는 초기에는 마탑주로 활동했고, 이제는 다른 마법사와 분업을 하고 있었다. 불파겐 마탑의 법사 넘버링은 이미 일백을 넘어섰다.
수익 또한 대단해서 드낙이 똥을 싸도 마탑은 망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모두, 〈심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심장이 떼어진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마탑의 심장은 뛰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각지에 퍼져서 경험을 쌓든, 무엇을 하든 마음대로 하면 된다.”
마법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넘버링은 일백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제자까지 합치면 수백 명에 달했다.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며 작별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드낙의 횡포는 사나웠고, 예상치 못한 것들 투성이였다.
“대산 쪽에 약초가···”
“나는 서쪽으로 향해서 북부의···”
드낙은 마법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흘러 들으며 홀로 불파겐 마탑 안으로 들어섰다.
곳곳에 마법의 흔적이 보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람. 알아서 먼지를 치울 정도로 강렬한 바람이 바닥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낮은 바람을 내기 위해서는 단순히 바람 마법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바람의 온도도 낮춰야 하지.’
뜨거운 공기는 위로, 차가운 공기는 아래로.
물리학을 몰라도 알 수 있는 경험이었다. 발을 타고 흐르는 바람은 사람의 입에 먼지가 토씨 하나도 가지 않게 해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공기를 계속해서 순환시키고 있었다.
지하로 내려간 드낙은 구동하고 있는 심장을 바라보았다. 거무튀튀한 색으로 죽음의 색채를 띠고 있는 심장은 사람 머리보다도 컸다.
그 어떤 혈액도 지나가고 있지 않았음에도 거칠게 맥동하고 있었다. 거대한 지하 공간이 마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고르곤의 심장〉.’
심장이라기보다는 마력 발전소에 가까운 기관(機關)과 같은 것이 고르곤의 심장이었다. 그 심장은 불파겐 마탑의 동력원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마법진의 용도는 단순. 고르곤의 심장을 활성화하는 것뿐. 하지만 얻어낼 수 있는 마력은 상상을 초월하지.’
이 집중을 하지 못해서 남부 왕국에는 마탑이 없었다.
마력이란 자원은 대량으로 쓸 수 있어야지만 가치가 높아질 수 있었다. 높은 수준의 마법에는 대량의 마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큰 철을 써도, 출력이 낮을 수밖에 없으니까.’
두루두루 마법 기술이 발달해야지만 마탑을 세울 수 있었다. 이를 드낙은 무식한 방법으로 해치웠다. 죽음의 숨결을 내뱉는 강력한 고르곤을 퇴치하며 그 심장을 소재로 쓴 것이다.
마도학이 고등해진 제국에서도 비싸게 팔리는 게 고르곤의 심장이었다. 어린 고르곤만 겨우 유통되는 게 전부였는데, 드낙은 성체 고르곤을 잡았으니 말 다했다.
이제 이 고르곤의 심장을 다시 써야 할 때가 왔다.
‘공포에 몸을 떨어라. 백금 왕가의 개들아.’
대마력을 지닌 드낙이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 고르곤의 생체 마력 기관은 마력이 많은 드낙과 천생연분이나 다름없는 소재였다.
심장을 손으로 집어 들자 주변에 반짝거리던 푸른빛이 사그라들었다. 거대한 지하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의 마력빛이 사라지며 불파겐 마탑이 정전이 되듯이 모든 마법 활동이 멈췄다.
심장을 회수한 드낙은 불파겐 마탑을 떠나려고 했지만, 마법사들이 모두 와이번과 거리를 벌려놓은 채 잔뜩 모여있었다. 신경질적으로 변한 모비딕이 콧김을 내뿜으며 마법사들을 위협했다.
“왜 모여있는가?”
“블랙 스케일 와이번의 비늘은 매우 희귀한 소재라서···”
마법사들이 우물쭈물했다. 포기하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드낙에게 부탁하기도 뭣해서 어정쩡하게 모여있는 것뿐이었다. 드낙은 한숨을 내쉬며 모비딕을 바라보았다.
‘마법사들에게 상이 필요하겠지.’
불파겐 마탑에 신경을 못 써준 세월을 생각하면 드낙이 내리는 상이 있어야 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마법사들은 고르곤의 심장 때문에 마력을 펑펑 썼다. 드낙에게 감사함이 있었다.
모비딕은 결국 100개가 넘는 비늘이 뜯겨야 했다.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았다. 와이번의 통각은 생각보다 무뎠기 때문이다. 괜히 몬스터라 불리는 게 아니었고, 괜히 용족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나는 겹비늘이다!”
당첨된 것처럼 마법사 한 명이 소리를 꽥 질렀다. 비늘이 겹쳐져 있었는데 남들보다 두 배를 더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