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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전사-594화 (593/1,239)

0594 <-- 동남 전쟁 -->

이실레아가 처음 들은 내용은 길게이가 드낙에게 독을 풀었다라는 소식이었다. 동남 전쟁을 통하여 남부에 새로운 전공을 얻는다는 계획이었다. 실로 그럴싸했다. 다만, 그렇게 한다면 진짜 내전으로 번질 공산이 컸다.

‘그렇게 쉽게 전쟁을 판단할 자가 아니다.’

무인(武人)에게 지급된 청색의 망토를 집었다. 망토의 뒤에는 마법으로 처리된 검이 역십자가처럼 그려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는 빛나고, 햇빛 아래에서는 오색으로 반짝인다.

어중이떠중이들이 청색 망토를 얻는 건 쉽겠지만, 내구력이 약한 망토에 마법 처리를 할 수는 없었다. 그냥 마법사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철판을 붙이거나, 사슬을 안 보이는 곳에 엮어서 하찮게 따라 하는 게 전부였다.

연금술사는 돈이 부족할 상황이 없었으므로 그런 나쁜 짓을 도와줄 리도 없었다.

무인의 경우에는 방어구 정도는 차고 내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에 관복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드낙이 망토를 내어줬다. 문인의 경우에는 망토가 아니라 붉은색의 관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적색이 무인에게 어울렸지만, 드낙은 한사코 붉은색을 문인들에게 내어주었다. 그 고집을 꺾을 정도로 관복색이 중요한 게 아니라 기사들은 그러려니 넘어갔다.

직급에 따라서 계급장 같은 브로치를 만들었는데, 이실레아는 중앙 사령관 1급관이었으므로 1급관의 브로치인 백금으로 된 사자 브로치를 집어 들었다.

망토를 입기 전에 전신갑주의 어깨에 걸쳐놓은 푸른천이 가슴팍까지 쭉 내려와 있었다. 거기에 브로치를 걸었다.

전신갑주를 입는 것만으로도 기사임을 알 수 있었기에 최대한 입고 다니는 게 좋았다.

“가주님. 불파겐 영주님께서 모든 세력의 장(長)들에게 소집을 명령했습니다. 내성 대전으로 향하셔야 합니다.”

“알겠다. 다른 소식은?”

“불파겐 영주님이 길게이를 반협박하여 왕자직을 버리도록 하고, 남부 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며, 동남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이실레아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무슨 생각이신지···’

지금 와서 왜 남부와 전쟁을 해야 하는지 이실레아는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서둘러 대전으로 향했다.

“이실레아 중앙 사령관님이 아니십니까!”

실로 존경심이 담긴 목소리에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무인으로 보기에는 뱃살이 튀어나와있었고, 문인으로 보기에는 피부가 제법 탔다.

업무에 시달리는 이실레아였지만 그 얼굴을 보고 몇 초 만에 누군지 떠올릴 수 있었다.

“술 취한 통 상단이 부름을 받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수완이 좋군.”

“상단연합의 뜻입니다.”

‘남부 몰락 귀족과 누구보다 사이가 좋을 것이니···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이름값으로보나 활동한 연수를 보나 술 취한 통 상단보다는 실버즈 상단이었다. 하지만 이실레아는 실로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전쟁에 상인이 전면으로 나서는 경우는 없었는데, 이렇게 드낙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파이살 상단주도 벌써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경험이 없는 곳에 나서기에는 그의 나이가 너무 찼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게 있을 것이오.”

이실레아는 하나의 세력으로 드낙에게 인정받은 상단 연합의 대표자를 대우해주었다. 서로 같이 걸으며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파이살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실레아는 상단연합의 돈이 필요할 때를 생각해서 관계를 높일 수 있는 이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초대받은 자와 그런 자를 보좌하는 이들이 대전에 북적거렸다.

〈동남 전쟁〉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사전에 협의하고 이곳에 올 수 없었기에 더욱 시끄러웠다.

이실레아가 도착하자마자 지방의 힘이라 할 수 있는 장원 기사들의 신임을 받는 동부 사령관 겐 쟝이 다가왔다.

“이실레아 사령관. 어찌 생각하시오?”

“조용히 지내시던 분이 길게이 왕자에 대한 처우를 스스로 구하며 다니셨던 걸 기억하시오? 그렇다면 이미 마음을 돌리기에는 어렵소. 내가 드릴 말씀은 이게 끝이오.”

그것만으로 큰 짐을 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방향성이 결정된 것만으로도 힘을 합칠 수 있어서였다.

상석에는 드낙이 앉아야 할 곳이었고, 차석에는 이실레아가 앉았다. 삼석에는 베바란스 총관이 앉아있었다. 사석에서 사람들의 판단이 갈리겠지만, 그곳에는 종이가 놓여 있었다.

이실레아는 시종을 시켜 뭐가 적혀져 있는지 보고 오라고 명령했다. 게제라스가 도착했음에도 그곳에 앉아있지 않아서였다.

시종은 다녀와서 이실레아에게 속삭였다.

“쉐도우 위스퍼라고 적혀져 있습니다.”

“으음···공석으로 둘 수도 있고, 올 수도 있겠는데.”

이실레아는 후자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또한 한 번 실각하면 단번에 자리가 달라짐을 알 수 있었다.

외척 모두가 초대를 받지 않은 건 아니었다. 레이시아 플래티넘과 안젤리카 에오윈같은 이들이 부름을 받았다. 레이시아의 경우 신전과 나란히 함께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길게이보다 상석이었다.

이 때문에 길게이는 드낙을 기다리는 내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모두 자신의 이름이 적혀진 곳에 앉았다. 보좌하는 이들은 그들 의자의 뒤에서 대기하거나 벽에 붙어서 다른 보좌관들을 통해서 암약하는 모습도 보였다.

“부울파겐 자작님께서 들어오십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세 번 쩡쩡 울렸다. 모든 이들이 일어났다. 숨조차도 죽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수백 명이 들어간 대전이었음에도 드낙의 발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짜릿하다.’

그 모습에 드낙은 팔뚝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분위기에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드낙은 자신이 가진 것이 있고, 쌓아올린 것이 있었기에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모두 앉으시오.”

그제야 제법 소음이 났다. 드낙이 이번에 소집한 이유를 말하고, 동남 전쟁의 준비에 필요한 안건을 제시하도록 했다. 이에 중앙 사령관이자 차석의 자리에 앉아있는 이실레아가 일어났다.

드낙이 일의 진행을 다른 이에게 맡기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다. 이실레아는 드낙이 있었기에 하오체를 쓰지 않고, 존대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용 가능 병력을 먼저 결정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겨울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현재 동부의 형편으로는 많아야 5천 명이 전부입니다.”

겨울에 쓸 수 있는 병력은 보통 때보다 절반 이하에 달했고, 때에 따라서는 그 이하도 될 수 있었다.

여름에 1만, 2만을 쓸 수 있다면 겨울에는 5천, 3천을 쓸 수 있었다. 그 이상을 쓴다면 전투에서 나오는 사상자보다 얼어 죽는 병사가 더 많았다.

겨울에 땅바닥에서 자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하고, 많은 준비가 필요했기에 자연스럽게 병사에 쓰이는 자원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태우게 된다.

“5천으로 전투 요새를 넘볼 수 있겠습니까? 공성 무기부터 마법이 부여된 마차를 운송해야 한다면 엄청난 식량이 소모될 수밖에 없습니다.”

겐 쟝 동부 사령관이 반대했다. 그와 함께하고 있는 12가문은 북쪽, 정확히는 북동쪽에 몰리게 되었다. 장원 기사들은 고루 퍼져 있었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이런 세력 형세를 봤을 때, 남쪽을 치러 가는 데에는 도움을 많이 줄 수 없었다. 반전쟁파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어줘도 병사나 식량이 전부고 후방에 배정될 것이 뻔했다.

병참만큼 중요한 것이 없지만, 병참만큼 공을 적게 받는 것도 없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와이번을 통해서 전투 요새의 성벽을 무너뜨리는 건 내가 할 것이다.”

드낙이 가슴을 치며 호언장담했다.

이실레아는 이야기를 되돌렸다.

“이야기를 병사로 돌리겠습니다. 5천을 쓴다면, 동북부에 있는 병사들은 그래도 제법 훈련이 되어있고, 실전 또한 잘 치렀습니다. 그들을 사용할지 아니면 전쟁터에서 가까운 남쪽에서 소집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길게이가 나섰다. 동남 전쟁이라면 무조건 남쪽에 있는 이들을 써야 했다. 드낙이 있었기에 무조건 이기는 전쟁이었다.

“나, 길게이 남부 사령관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길게이는 자신을 왕자라고 칭하지 않았다. 드낙이 내려준 직책을 입에 올렸다.

“동부의 상황을 보면 아직도 곳곳에서 건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상인들이 많이 오가지만 전쟁이 시작되면 그게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북부에서 상인들이 많이 올 거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식량 문제를 거론했다. 겨울에도 돈 때문에 도로 공사를 하는 곳마저 있을 정도였고, 이주민들은 손을 호호 불면서도 자신들의 집을 짓고 있었다. 목재를 지원해주는데 집을 안 지을 병신은 없었다.

물론 모두 갚아야 할 돈이었지만, 무이자였기 때문에 무조건 하는 이들이 많았다.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동북부의 병사들을 남쪽까지 내려가게 하는 것만 해도 큰돈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남쪽의 병사들을 써야 합니다.”

정론이었다. 식량은 언제든지 부족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동부를 너무 얕잡아보는 말이었다.

베바란스 총관을 비롯한 중앙 관리들은 호수 마을에 적을 두고 있었다. 드낙은 모든 곳을 한곳에 모을 생각이 없었기에 여전히 호수 마을에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행정은 동북부. 세금은 중앙. 법은 미정인 상태였다. 마탑이 남쪽에 있는 걸 생각했을 때, 법은 서쪽에 배치될 가능성이 컸다.

행정청의 경우에는 길게이를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 남쪽이 크게 득세하면 자연히 호수 마을은 도태될 뿐이었다.

“총관인 제가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허락을 권하고 베바란스 총관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어디의 병사를 쓰는 것만으로도 불이 활활 타올랐다.

“동북부의 경우 오히려 식량이 많이 적재되어있습니다. 그에 반해 남쪽이 오히려 식량이 적어서 병사들을 소집한다고 해도 생돈이 날아갑니다. 적재한 식량이 적기 때문입니다.”

“확실한가?”

드낙이 타이밍 좋게 물었다.

“예. 동부로 온 이주자들이 호수 마을 근처에 터를 잡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상인들은 이곳에 식량을 팔러 오고 있습니다.”

가져오는 대로 팔리다 보니 어느새 상행의 법칙처럼 여겨졌다. 이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길게이의 발언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풍년이 오면서 가장 이득을 본 곳이 어디라고 한다면 동북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남쪽에도 물론 풍족했지만 동북부만큼은 못했다.

쟁점이 정해지자 다른 이들도 발언했다. 모두 끼어들고 싶어 했다. 이것을 중재하는 것은 드낙이 될 수 없었다.

모든 사정을 두루 살피지 못하는 자가 이 복잡한 이권을 정리하리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저 자 하나대로 국경선을 자르는 것만큼이나 편협한 짓이었다. 특히 누구나 앞서고 싶었기에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싸우는 길을 택했다.

탕탕.

드낙이 상석을 치면서 활화산처럼 들끓는 상황을 조용히 시키기를 세 번. 이제는 보급로가 어지럽게 변해버렸다.

동북부에서 2천. 서쪽의 장원 기사들이 1천. 남쪽에서 나머지 2천을 움직이도록 하니 보급로가 3곳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이 집중되는 남쪽 보급로는 다시 여러 갈래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큰 도로가 없어서였다.

“이건 미친 짓이오!”

베바란스 총관과 게제라스 법관이 비명을 질렀다. 이렇게 보급로가 엉망진창이면 될 것도 안될 수밖에 없었다.

무인들의 욕심으로 보급관이 어지럽게 변하면 병참이 힘들 수밖에 없고, 이 병참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앞서 나간 병사들이 굶을 수도 있었다.

곧 사기가 무너지니, 승리가 패배로 변할 것이 분명했다. 드낙 또한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야수 기사라 불리는 그라돈 토치라이트의 사족이 들어갔지만 훌륭한 군사학서를 틈틈이 읽었기에 기본은 할 줄 알았다.

병참이 어지럽게 변하면 안 좋다는 걸 잘 알았다.

“보급은 상단연합에 맡기는 것이 어떤가.”

그 말에 일순 대전이 조용해졌다.

“파이살 천단주는 발언하라!”

“예옛, 켁!”

드낙의 외침에 의자가 들썩이며 그대로 뒤집혔다.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지만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가만히 있는 것으로 반반 가려고 했던 파이살 천단주가 허둥지둥 일어나다가 의자의 다리에 걸려 넘어지는 걸 수행원이 받쳐주었지만, 워낙 뚱뚱해서 그대로 깔려버렸다.

“끄흐응.”

이실레아가 야릿한 소리를 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저, 저는!”

파이살 천단주가 입에서 소리를 냈지만 싸늘한 분위기에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구를 따라야 할지를 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최, 최대한 병참에 차질이 없도록···보급과 운송에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말은 병참을 책임지겠다는 소리입니까?”

이실레아의 말에 파이살이 깜짝 놀랐다.

“혼자서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금 거론된 보급로가 부드럽게 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분을 적당히 도와주는 식으로다가···”

실로 겁쟁이 같은 발언이었다.

줏대도 없었고, 그런 행보를 걷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장점도 없었다. 포지션을 엉망으로 잡은 전사나 다름없었다. 전위로 갈 거면 전위로 가고, 후위로 갈 거면 아예 후위로 가야 하는 게 옳았다.

물론 다른 자들 입장에서는 베스트였다. 이용당하는데로 이용당하고 공은 적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판단이 안 서는 것 같습니다.”

이실레아가 드낙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드낙은 오히려 상단 연합의 힘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단호하게 결정해버렸다.

“상단연합은 보급로 중에 하나를 맡아라. 그리한다면 적어도 병사가 굶주리지는 않게 될 것 아닌가. 무엇보다 모두 병참 하기를 꺼리니, 큰 짐을 덜게 하는 것 아닌가?”

“허나···!”

겐 쟝이 목소리를 높였다. 상인에게 공로를 확실하게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적당히 두루 돕는다면 눈에 띠이지도 않을 공로였지만 〈보급로 하나를 맡는다〉는 건 확실하게 큰 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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