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3 <-- 동남 전쟁 -->
3왕자에서 이제는 플래티넘 왕가와 완전히 척을 지고 도망친 길게이 플래티넘은 호수 마을을 바라보았다. 멀리서도 확실하게 보일 정도로 번성해있었다.
‘처음에는 마을이었는데, 이제는 내성도 있다.’
드낙은 중부로 향하고 싶었지만, 현재 있는 곳 중에서 내성이 있는 번성한 곳은 호수 마을이 유일했다. 명칭조차도 바꿔서 불러야 할 정도였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이들이 많아서 여전히 호수 마을이었다.
‘불파겐 자작이 칙령을 내려서 명칭을 바꾸면 모를까.’
이미 중부에 불파겐 마탑과 대형 대중 목욕탕을 만들었기에 사실상 불가능한 칙령이었다. 중부에 힘을 주면서 동북부에 똬리를 틀게 한다? 일관성이 없었다.
‘분명 또 시답잖은 변덕에 시달리거나, 손에 놓았겠지.’
정무(政務)를 보는 드낙의 모습은 실로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천생 불완전한 계승을 받은 반귀족이며, 타고난 황소다. 총괄하기보다는 앞서나가 길을 뚫는 장수에 어울린다.
“이렇게 보면 불파겐이라는 이름이 정말 대단하지 않나?”
길게이의 말에 불릿 경이 무겁게 대답했다.
“어느 누가 불파겐을 낮게 보겠습니까. 그렇기에 쌓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불파겐의 이름으로 많은 적을 물리쳤다. 수많은 이들이 동부의 개발단계에 발을 내밀지 못했으며, 현재 동부의 기득권들을 보면 대부분이 신흥세력이다. 그것만으로도 가진 자들은 볼멘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반면 길게이 왕자의 경우 몰락한 남부 귀족들의 자본을 끌어들이고, 그들을 동부의 남쪽에 자리 잡도록 만들었다.
드낙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받은 만큼 그들은 수많은 것을 쥐게 되었다. 길게이가 괜히 호수 마을로 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첩자의 말에 의하면 마치 길게이에게 내줄 것처럼 남쪽 사령관 1급관 자리는 공석으로 남아있어서였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겠지. 그러니까 많은 걸 고려하고 들어가야 한다.’
길게이의 눈에는 호수 마을이 마경처럼 보였다. 온갖 악귀들이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충신의 모습으로, 공신의 모습으로, 그럴듯한 모습으로 자신들의 욕망을 숨기고 있는 곳이었다.
‘내가 가져가야 할 것은 남부 사령관이라는 직책.’
본래라면 거기서 끝나겠지만, 북부에 있으면서 듣지 못한 정보를 이곳에 오면서 많이 들었기에 자연스럽게 추가될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런 결함품따위를 총애할 줄이야.’
코웃음이 나왔다.
‘초월의 힘을 몸에 적용받지 않기 때문에 좋은 혈통이 나올 수가 없는데···’
레이시아에 대한 드낙의 총애는 인위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혈통이 중요한 이 세계에서 레이시아는 결함품 중에서도 결함품이었다. 또한 플래티넘 왕가 자체의 혈통도 그리 좋은 게 아니었다.
‘날 견제? 웃기는 소리지.’
길게이 플래티넘의 치세는 뛰어나다. 있는 놈들만의 리그였다. 그렇기에 레이시아를 총애하는 드낙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고로 레이시아에게 경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실레아 중앙 사령관과도 잘 지내야겠지.’
사실상 드낙의 대리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드낙을 위해서 일을 하는 한, 드낙은 동부에 피를 뿌리지는 않을 터였다. 고로 이실레아와 친하게 지내기 위해서 마음 같아서는 조공이라도 해야 할 정도였다.
마치 정치 게임의 부보스인게 이실레아였다. 그녀를 쓰러뜨리면 드낙이 나타나는 식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가 스스로 이실레아를 내치는 것이 가장 좋은데.’
어디 밑바닥에서 구른 자가 동부를 총괄하고 있으니, 그녀만 몰락해도 동부는 엄청나게 자유로워질 것이 분명했다.
그 외에도 길게이가 호수 마을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가 없었던 기간만큼 이권을 탐해야 했다.
드낙은 기다리다가 지쳐서 목이 빠질 지경이었다. 길게이는 그 어떤 시간적인 여유도 없이 곧바로 드낙을 만나러 내성으로 향해야 했다.
‘제법 높이가 적다고 여겼는데, 생각보다 부실한 성이네.’
길게이가 호수 마을의 내성을 낮게 평가했다. 그만큼 서둘러 지은 티가 나고 있었다. 내부로 들어가서 대전에서 드낙과 마주하게 되었다. 길게이의 수행원들만 해도 십여 명이 넘었다.
이제는 어디를 가든 그 정도를 거느리고 다니게 된 것이다. 길게이 왕자의 위상을 잘 보여주었다.
“실로 오랜만이오.”
드낙이 익숙하지 않은 하오체를 쓰며 길게이를 반겨주었다. 상석에서 스스로 일어나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길게이 또한 드낙을 대우해주며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길게이는 드낙과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았다.
“본래라면 집무실에서 봐야 하는데, 게제라스 법관이 무조건 대전에서 하라고 해서 말이오.”
“한 번 물러났던 자를 다시 한 번 쓰시는 모습에 많은 사람이 놀라고 있다고 들었소. 정말로 2급관이 된 것이오?”
“그렇소. 제도에 관해서는 나무랄 데 없는 자니, 이번에도 잘하리라 생각하오.”
길게이는 몇 명의 법지식이 대단한 자들을 언급했지만 드낙은 게제라스에게 명단을 보내라는 소리만 할 뿐이었다.
‘안 통하네. 미리 언질을 받은게 틀림없다.’
생각보다 길게이를 상대로 드낙이 많은 준비를 한 것 같아 보여서 길게이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기색을 눈치 빠른 드낙이 못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녀석. 넌 딱 걸렸어.’
실제로 단단히 준비한 것이 드낙이었다. 연금술을 통해서 마력과 주력의 퓨전이라고 할 수 있는 〈더블 파워(魔呪力)〉를 연구함과 동시에 많은 이들을 집무실로 불러 길게이를 상대로 조심해야 할 것들을 자문한 것이 드낙이었다.
답안지를 보고 수학문제를 푸는 것과 같았다.
배경이 적은 게제라스부터 망치질을 하려는 길게이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생각보다 드낙의 날카로움에 놀라서 이어나가지 못한 게 주효했다.
“이번에 크게 작위 개편을 하셨다고 들었소.”
그 말에 드낙이 손사래를 쳤다.
“작위 개편이라니, 누가 들으면 크게 오해하겠소. 그저 직책과 직함을 재정립한 것에 불과하오.”
“아, 그렇소? 완전히 새로운 형태라···”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오. 직책은 몰라도 직급을 정하는 건 반대도 많았소.”
정작 고생한 건 밑에 사람들이었지만, 드낙은 태평하게 마치 자신이 그 반대를 헤쳐나간 것처럼 굴었다. 그만큼 직급을 정하는 건 매우 무례한 처사였다. 공작과 후작이라도 서로 배려하고 대우해주는 게 귀족의 사회였다.
어차피 서로 귀족이라는 타이틀 안에 있어서 서로 좋게좋게 가는 것인데 이를 드낙이 직급을 통해서 잘라냈기 때문이다.
귀족 내에서, 기득권층 내부에서도 경쟁하라는 소리였다.
자연스럽게 직책과 직급 이야기로 길게이가 주제를 이어나가자 드낙이 이내 답을 내어주었다. 오래 질질 끄는 건 드낙의 취향이 아니었다.
“남부 사령관 1급관. 어떻소?”
“그냥 주는 것은 아닐 테고, 원하는 것이 있지 않겠소?”
길게이가 질문을 질문으로 답했다. 은근슬쩍 드낙에게 직책을 받는 것을 빨리 넘겨버리기 위함이었다.
“직책을 하사받는 게 어떠냐고 물었소.”
“···준다면 그 직책이 지닌 권리만큼 동부를 발전시켜 보이겠소.”
길게이의 말에 드낙이 따분한 표정을 지었다.
‘끝까지 쥐려고 하는구나.’
왕자라는 지위를. 백금 왕가조차도 버린 그 지위를 통해서 드낙과 맞먹으려 하는 게 엿보였다.
“길게이 왕자. 나는 백금 왕가가 주는 상을 받기 싫어서 그대에게 공을 양보하고 나왔소. 이 이상 내가 더 물어야겠소?”
드낙은 백금 왕가의 신하가 더는 아님을 북부 논공행상을 받지 않음으로써 표현했다. 이제 길게이의 차례였다.
왕자로 남던가.
남부 사령관으로 남던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드낙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레이시아 공주가 있기 때문이었다.
‘굳이 백금 왕가의 왕자와 공주가 있을 필요가 없지. 둘 중 하나만 있어도 된다.’
어디서든 명분으로 쓸 수 있었다. 둘 다 있는 건 과잉이었다. 척하면 척이라고 길게이가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술잔을 기울며 드낙은 술을 마시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이를 지켜보는 수행원들 또한 침조차도 삼키지 못했다. 목이 뻑뻑해지는 자들도 있었다. 그만큼 길게이 플래티넘이 지닌 왕자라는 지위는 중요했다. 그것을 이제 완전히 손절하고 동부의 가신으로 남으라고 드낙이 말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남부 사령관 1급직은 포기하라는 소리고.’
길게이가 깊은 들숨을 했다. 생각보다 길어질 수 있는 문제였지만 길게이는 기세를 타는 것으로 빠르게 결정했다. 오래 끌어봤자 드낙에게 안 좋은 인상만 남길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제를 잘 알았다.
“남부 사령관이 되겠습니다.”
“좋다. 길게이 남부 사령관.”
드낙은 준비했던 양피지를 펼쳐서 그대로 쓱쓱 임명장을 써내려갔다. 또한 연금술로 만든 가루가 양피지에 스며들며 양피지의 마력 용량을 높이고 나서 마법 처리를 했다. 이를 받아들인 길게이가 임명장을 쓱 읽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가장 큰 언덕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길게이는 왕자를 버렸기에 드낙에게 또 다른 요구를 했다.
“이번에 백금 왕가로부터 노예 5천 명을 받게 되었는데, 이를 받아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려운 부탁은 아니네. 호수 마을로 데려와. 대산 너머에 이주를 시킬 생각이다.”
“그게 가능합니까? 거리가 멀고 도로도 좋지 않은데···”
길게이 남부 사령관이 걱정했다. 드낙은 어깨를 으쓱했다.
“중앙 사령관이 식량을 취급하는 상인들을 요즘 자주 만나더군. 잘 해결되리라 본다.”
“아···”
길게이가 납득했다. 잡담을 통해서 분위기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길게이를 드낙이 막았다.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났다.”
“예.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초봄이 되기 전에 남부를 친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미 다 이야기가 된 겁니까?”
드낙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 처음 입 밖으로 내었다.”
“불가능합니다. 갑자기 전쟁이라니요. 그것도 지금은 겨울입니다!”
남부 왕국의 여름은 선선하고, 겨울은 더욱 혹독하다. 자연히 최악의 수라고 여겨졌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드래곤 나이트가 있지 않나.”
“······명분이, 명분이 없습니다. 적어도 북부의 논공행상에서 플래티넘 왕가는 모든 걸 막아냈습니다.”
길게이의 말에 드낙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자네는 제대로 된 공을 받지 못했네.”
“예?”
“백금 왕가는 오크 대침공을 막은 일등공신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주지 않았어. 그러니 전쟁을 해서 제대로 받아내야지. 아주 괘씸한 놈들 아닌가.”
길게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억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길게이가 그렇게 말을 해야 했다. 욕을 드낙과 함께 먹게 되는 것이다.
“노, 노예들이 5천 명 이곳으로 오게 될 텐데, 남부인들은 모두 그 광경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말에 드낙이 되려 역정을 냈다.
“노예 5천 명을 겨울에 보내는 것 또한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들을 먹여줄 식량만 해도 얼마인가? 겨울에는 밀값도 올라간단 말이네. 저런 개수작질을 그냥 놔둘 수는 없다.”
남들이 들으면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그건 일반인이나 고개를 끄덕일 법했다. 드낙 정도면 수천 명을 한 계절 동안 먹여 살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이 길게이를 대신해서 받아주겠다고 확답마저 줬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거면 노예를 나중에 받아준다고 순서를 바꾸던가.’
말의 앞뒤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크게 변했을 터였다.
“정말로 전쟁을 할 생각이십니까? 원하시는 게 뭡니까? 굳이 전쟁이 아니더라도 얻을 수 있습니다.”
초월적인 힘을 얻으며 기고만장해진 드낙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무엇보다 남부의 역량을 떨어뜨려 동부를 침략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자신은 오우거를 잡으러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냥 남부를 두들겨 패는 것뿐이다. 동부를 넘보기 전에 선제 타격해서 국경선 인근의 전투 요새와 요충지를 파괴할 생각이다.”
“······”
길게이가 또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큰 선언을 계속해대었기에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백금 왕가에게 불만을 표시해. 그럼 내가 이를 통해서 선전포고를 할 테니까.”
“그건···”
길게이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쿵!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드낙이 때를 맞추며 의자를 쳤다.
“길게이 남부 사령관.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제 친필 서한을 써드리겠습니다.”
드낙이 만족스럽게 일어나서 먼저 대전을 나가며 병사를 불러 명령했다.
“전쟁 준비를 해라. 당하기 전에 먼저 친다.”
마신장을 토벌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이미 남부 총사령관의 임명장을 받은 길게이는 남부를 비호하기보다는 드낙의 편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평판이 낮아지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호랑이의 권세를 써도 내 것은 아니구나.’
허망함마저 들었지만, 남부에 있을 때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그곳보다는 이곳이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