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2 <-- 대산을 넘어 -->
캐러반(caravan)이 호수 마을의 옆에 자리를 폈다. 수많은 마차와 짐마차에는 문양이 반드시 하나는 있었다. 은으로 된 새가 날개를 접은 채 옆모습을 비추고 있었고, 부리로 은화를 물고 있었다.
〈실버즈 상단〉은 남부의 수도에서 활동하는 상단이었고, 연수가 오래되어서 남부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 정도로 메이져 상단이었다.
‘저런 대상단까지···’
보부상이 그들의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보부상과는 비교하는 것도 불가능한 엄청난 양의 동화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남부의 은화를 동화로 환전해서 여기로 가져와서 다시 은화로 바꿀 생각을 지닌 게 뻔히 보였다.
그 외에도 식량부터 시작해서 강철 무구까지 천막에서 살짝 보였다.
“퍼디난드!”
“예!”
“확실하게 용병들에게 돈을 지급하도록 하여라!”
“예!”
파이살 상단주는 창고장에게 명령을 내리고, 니키타 부상단주에게 자리를 잡는데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불파겐 영지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자를 찾아갔다.
드낙은 사실 기득권층에게는 암군이나 다름없었고, 변덕스러운 행보를 보였기에 폭군으로 여겨져 있었으므로 당연히 제외되었다. 무엇보다도 세세한 것에 신경을 안 쓰는 점이 가장 마이너스였다.
상인에게 있어서 파트너가 될 수 없는 게 드낙의 성품이었다. 무엇보다 인간을 초월하고 나서는 그 강함을 표출하기 위해서 와이번을 타고 뻔질나게 돌아다녔던 게 드낙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구리 광산을 발견하기 위해서였지만, 그걸 믿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실버즈 상단의 파이살 상단주라고 합니다. 중앙 사령관님과 만날 수 있을까 하여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병사가 안쪽 울타리에 있는 뭔가를 조작했다. 잠시 뒤에 시종 1명, 수습 시종으로 보이는 어린 시종이 2명이 이실레아의 대저택 입구로 나왔다.
“본인이십니까?”
“예.”
말로만 신분 증명이 끝나지 않았다. 이실레아의 위상은 드낙 다음이었고, 기득권층에게 있어서는 1순위라고 해도 무방했다. 엄청난 업무에 시달리는 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파이살 상단주는 몇 가지 증명할 수 있는 걸 내보였다.
“병사님.”
“예. 잠시 몸수색을 하겠습니다.”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기에 병사는 강압적인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신체가 가지는 우월감을 돋보일 뿐이었다. 묵직한 저음은 이 경비병이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서 발탁된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돈도 많이 받겠지.’
그의 눈이 병사의 목에 걸린 금목걸이로 향했다. 돈으로는 결코 매수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줬다.
양팔을 벌리고, 두 다리를 적당히 벌리자 병사의 거친 손길이 파이살의 전신을 지나갔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파이살 상단주는 직책에 맞지 않게 병사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이 병사는 그럴 자격이 있었고, 브릴리언트 가문에서 그런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에 맞춰줘야 했다.
독불장군처럼 모든 것에 변화하지 않는 딱딱한 잣대로는 상인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때로는 병사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어야 했다.
“여기서 기다려주십시오. 선객이 있으셔서.”
“예. 알겠습니다.”
파이살 상단주와 그 수행원 2명이 대기실에서 앉았다. 수행원은 묵직한 은함을 두 개 들고 있었는데, 이내 그것을 내려놓았다.
1시간 남짓 뒤에 파이살은 이실레아와 만날 수 있었다. 복도를 지나가는 도중 다른 무리와 마주쳤는데, 저들이 선객인가 싶었다.
‘척 봐도 상인이군.’
스쳐 지나가면서 파이룬은 코를 킁킁거렸다. 고소한 향이 났다. 식량을 취급하고, 때로는 가공까지 해서 파는 상인이 분명했다.
‘이 주변에 식량으로 대상인이 된 자가 있는지 알아봐야겠어.’
그와 친해질 수 있으면 곧 그가 지닌 관계도 이용할 수 있다. 이는 곧 이실레아 브릴리언트에게로 향하는 또 다른 다리를 가지는 격이다.
똑똑.
시종이 먼저 들어갔다. 파이살은 또 기다렸다. 시종이 문을 열며 파이살을 들여보냈다. 이실레아의 집무실은 대단히 넓었다. 한쪽에는 나무로 창을 내어 가리고 있었는데, 집무실에서 휴식할 수 있는 공간 또한 만들어놓은 듯했다.
고풍스러운 범이 가죽이 걸쳐져 있는 의자가 가장 눈에 확 들어왔다. 그다음에는 원목으로 된 책장이었다. 큰 나무를 통째로 써서 만든 것이라 조각내거나 이어붙인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제법 희귀한 책장이다. 크기도 크고···’
조각상부터 그림까지 집무실을 꾸미고 있는 게 많았고, 바닥부터 시작해서 천장까지 닿아있는 창문과 함께 반쯤 그려진 그림 또한 보였다. 취미로 그림까지 그리는 듯했다.
곳곳에서 귀족다움이 흘러넘쳤다.
“실버즈 상단의 상단주 파이살이라고 합니다. 브릴리언트 중앙 사령관님을 뵙습니다. 대단한 영광입니다.”
“인사치레는 됐다.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터다. 시간을 많이는 못 내준다.”
이실레아가 그리 말하며 자리조차도 권하지 않았다. 자신과 만나는데 시간 약속도 잡고 오지 않은 파이살이었다. 그 무례함은 그냥 돌려보내도 될 정도였다.
귀족이라함은 자신의 가치를 높일수록 더욱 대단하게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아무렇게나 만날 수 있다면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파이살은 자신이 남부 왕국의 수도에서 활동하는 상단주라서 이렇게 만날 수 있었음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상대는 똑똑하다. 하지만 실용적이기도 하다.’
보기 드문 상대라면 상인이라도 할지라도 약속을 쪼개어 만난다. 이건 큰 재산이었다. 아무나 만나주지 않던 귀족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를 만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든 시간에 만남이 예약되어 있어서였다.
“약소한 선물도 가져왔지만, 동부에서 활동을 하고 싶어서 인사차에 들렀습니다.”
“받은 선물만큼은 해주겠다. 동시에 동부에서 활동하는 규모에 따라서도 차등을 두고 있다.”
“보여주지 못한 선물 또한 있습니다.”
“무엇인가?”
이실레아는 무표정하게 물었다. 패물은 썩어나도록 넘쳐나고 있었다. 받은 만큼 해주기 때문에 안 해줄 때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뇌물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브릴리언트가 자신들을 쥐어패는걸 막기 위한 납세나 다름없었다.
“남부 왕국의 전투마 종마입니다. 다섯 마리를 데려왔습니다.”
“전투마 종마? 어디의 종마인가.”
“지울프 후겔(Zwolf Hugel)의 종마입니다.”
이실레아가 그 말을 듣자마자 시종에게 말했다.
“아루잔(Aruzhan) 경과의 만남을 취소시켜라.”
“병사 파견의 건은 어찌하면 됩니까.”
시종이 마치 파이살 상단주가 들으라는 것처럼 말했다. 이실레아가 얼마나 큰 사람과의 만남을 취소하는지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취소시켜.”
“예.”
시종이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갔다. 동부의 병사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드낙 대신에 처리하는 이실레아였다. 천재적인 역량으로 동부를 제대로 안전하게 만들면서도 사적으로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드낙에게 들키더라도 도로 사업을 위한 치안 확보라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많은 분야에서 능력치가 높다는 것은 수많은 것을 홀로 조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거···동부가 불파겐 자작의 것이 아니었나? 아닌 것 같은데?’
파이살 상단주가 절로 고개를 숙였다. 표정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동요했다. 사적으로 병사를 운용하고 패물을 먹다니? 〈쉐도우 위스퍼〉라는 단체가 있다는 건 헛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대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보다 종마를 받는 대신 뭘 원하나?”
남부의 전투마 중에서도 으뜸인 지울프 후겔의 종마라면 천금을 줘도 부족했다. 특히나 비전처럼 종마를 〈제대로 된 이름〉으로 부른 것부터가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열두언덕의 종마입니다. 그 가치를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연한 것을···”
이실레아의 말에 파이살 상단주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감 없이 말했다.
“조건 없이 천단주로 절 올려주십시오. 그리고 불파겐 마탑의 근처에서 활동하고 싶습니다.”
“불가(不可).”
이실레아가 칼같이 잘랐다.
“어느 것이 마음에 안 드시는지요.”
“첫째는 불파겐 영지에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나의 전례는 수많은 문제와 다양한 불만을 만들어내고, 그 책임이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 뻔하다.”
“허면 3년으로 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실레아가 대차게 웃었다. 여자가 내는 웃음소리가 아니라 대장부가 내는 소리였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천단주가 되고 싶다면 그만큼 세금을 내면 된다.”
‘끙.’
파이살 상단주가 입을 꾹 닫았다. 이실레아는 충분히 기다려줬다. 남부의 전투종마를 획득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허면, 불파겐 마탑에서 활동하는 것은···”
“다른 상단들에게 내 친필 서한을 보내주지. 하지만 독점으로 폐해가 나와서 영주님께서 칼을 뽑아들면 네 목을 치는 것은 내가 될 것이다.”
문제가 나오면 칼같이 벌을 준다는 소리였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조금 약하지. 다른 부탁은 없는가?”
기병은 전쟁터의 꽃이었다. 그 꽃의 전력이 남부를 뛰어넘게 되었는데 단순히 한 지방에서의 독점권을 주는 것만으로 끝낼 수가 없었다. 특히나 문제가 생기면 커버도 쳐주지 않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장원마다 도로 사업을 준다고 난리 통인 것으로 압니다.”
“그 지분을 원하나?”
“예.”
이실레아가 턱을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매만졌다. 맨손이었기에 이상한 곳에 나 있는 굳은살이나 흉터들이 파이살 상단주의 눈에 절로 들어왔다.
“······”
침묵이 내려앉았다. 생각보다 그녀의 생각이 길어져서였다.
“길게이 왕자가 며칠 내로 호수 마을에 도착한다. 그 답은 그때 하고 싶은데, 괜찮겠는가?”
“제가 어디 감히 불만을 가지겠습니까.”
파이룬 상단주가 물러갔다. 그는 그 길로 천단주가 되기 위해서 엄청난 세금을 쏟아부었다. 그 행보에 〈상단 연합〉은 서둘러서 그와 관계를 맺었다.
남부에서 빤스런을 쳤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실버즈 상단이라는 이름값 하나만으로 파이살은 동부에서 단번에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
향상심(向上心).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커지는 자신감과 같은 마음.
사업이 커지면 그만큼 우쭐해지는 자존감처럼 커지면 커질수록 사람을 미쳐버리게 하기도 하는 마음.
드낙은 오랜만에 그 기분에 빠졌다. 그간 업을 쌓기 위해 달려왔지만 정작 검은 문의 능력을 재점검할 시간이 없었는데, 지금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검술 하나만 보기에는 내 수준이 보인다.’
불파겐에게서 얻어먹을 힘은 이제 몇 가지 남지 않았다.
칠주(七主)를 완숙하며 삼류 불파겐 기사 딱지를 떼고, 이강(肄講)을 통하여 인간 검사가 낼 수 있는 모든 공격 과정을 몸으로 익히며 머리로 이해했다. 그로 인해 이류 불파겐 기사에 오를 수 있었다.
‘남은 건 〈일류의 흐름〉.’
곧 〈와흐르 마이스터(Wahr Meister, 眞達人〉.
영화에서 보듯이 상대가 마치 합을 맞춘 것처럼 죽어주는 광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사가 될 수 있었다. 전투의 모든 것이 자신의 입맛대로 만들 수 있는 경지였다.
허공을 찔러도 그곳에 상대가 목을 들이미는 광경.
인간보다는 뛰어난 신체능력을 지녔지만 결코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한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홀로 수백의 기사를 썰어넘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에만 걸 수도 없지.’
드낙은 검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 무엇보다도 〈초월의 힘〉에 집착하고 있었다.
최근 가장 힘을 쓰고 있는 것은 〈범용성의 마력〉을 이용하여 주력이나 신성력을 치환하는 데 노력하고 있었다.
마력은 잘 회복되지만 주력은 잘 회복되지 않아서였다. 레우치터를 확실하게 힘으로 두기 위해서는 효율성이 좋은 치환율이 절실했다.
쪼르르륵.
맑은소리를 내며 연금술로 만든 액체가 유리병에 담겼다. 그곳에 단단히 뭉친 마력이 담긴 작은 철 구슬을 하나 던져 놓았다.
녹색과 갈색으로 빛나는 액체 속에 푸른 빛이 가미되었다. 연금술로 만든 액체는 주력과 마력이 최대한 잘 섞일 수 있도록 만든 특수 액체였다.
‘어?’
드낙은 한순간이지만, 갑자기 증폭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푸른 빛이 녹색으로 빛나며 마력이 주력으로 변하면서 순간 느껴졌던 증폭된 힘이 사라졌다.
“······”
‘이거,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마력을 주력으로 변환하는 도중에 느낀 강력한 증폭 현상.
‘퓨전이다.’
모 애니메이션이 절로 생각났다.
‘퓨전이야!’
치환하여 하나의 힘에 몰빵하는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드낙은 다시 한 번 주력과 마력을 고정된 환경 속에 집어넣으며 그 현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천재였다면 연금술 필요 없이 그저 바로 하나의 힘으로 융합시킬 수 있었겠지만, 드낙에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는 범인이었으며, 남의 재능을 탐하는 짐승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