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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전사-591화 (590/1,239)

0591 <-- 대산을 넘어 -->

달빛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새빨간 털을 지닌 핏빛쥐의 털색이 시리도록 차가운 은빛에 다른 색으로 변해갔다.

“길게이 왕자가 백금 왕가로부터 받은 게 무엇이냐?”

드낙은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그것으로 자신이 폭군 내지는 암군이라 불리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선물하는 상대의 머리통을 후려쳐 갈기게 될지도 몰랐다.

“공작의 작위를 내려줌과 동시에 금궤 10관과 백금 3관을 하사했으며 노예 5, 000명과 밀 10만 포대를 추가로 내려줬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상이었다.

드낙이 의문을 품었다. 괴이할 정도로 자신의 방향성을 짓밟고, 자신이 생각한 그림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명분을 안 주려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길게이 놈, 중재를 놨구나.’

자신에게 많은 재화를 주는 것만으로도 동부는 남부에 싸움을 걸지 못한다고 호언장담을 했을 것이다. 드낙이 그에게 공로를 양보했으므로 그 말을 믿을 수 있었다. 제법 총애를 받는다고 여겨질 테니까.

남의 위세를 빌려 쓰는데 도가 튼 모습이었다.

실로 간악했다. 동시에 성공할 수밖에 없는 자의 유형이었다. 몇 번을 실패해도 남을 이용하기 때문에 피해가 작기 때문이다. 얍삽하지만 확실한 이득이 존재하는 삶의 방식이었다.

드낙은 괘씸함이 들었지만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자신을 진정시켰다. 길게이가 받은 것은 동부의 남쪽을 개발하는 데 자연스럽게 사용될 것이다. 그렇게 여기고 또 그렇게 여겼다.

마인드 컨트롤 이후에는 남부의 역량을 재조명했다.

‘남부의 역량은 생각보다 크다. 함부로 황폐화해서는 안 되겠어. 남부 왕국의 가장 큰 힘일 수도 있다.’

가장 큰 공장을 스스로의 힘으로 박살 낼 수는 없었다.

‘이렇게까지 내어주다니, 하지만 함정도 있다. 길게이가 이를 받은 이유는 〈불파겐 마탑〉을 믿어서겠지.’

견습 내지는 수습 마법사의 빠른 배출은 동부에 어중이떠중이 마법사들의 숫자를 크게 증가시켰다. 그 덕에 어디서든지 풍년이 들 수 있었다.

‘노예의 처리.’

노예 5천 명이 바로 함정이었다. 맨파워라는 것은 무조건 있으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모두 생산력을 높이는 데 쓴다면 이처럼 좋은 게 없었지만, 할 일이 없을 때는 밥만 축내는 가축보다 못했다.

평범한 동부였다면, 개간으로 노예들을 쓰더라도 그들이 먹는 걸 생각하면 손이 떨릴지도 몰랐다. 고작 노예 5천 명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학교 20곳의 전교생을 떠맡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충격과 공포였다.

‘백금 왕가가 동부의 특성을 잘 아네. 물론 옛날의 동부에 대한 것이겠지만.’

상식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드낙이 발견한 은 광산만 해도 동부의 동북부 끝자락에 있는 대산을 넘어 보름을 가야 했다. 평범하게는 은광산을 발견할 수도 없고, 발견한다고 해도 큰돈을 들여서 오가고를 해야 한다.

드낙이 대산 너머를 깡그리 청소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남부의 수작질은 파훼 될 수밖에 없었다.

‘노예 5천 명을 모조리 구리 광산에 투입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어깨춤이 절로 추고 싶어졌다. 그들에게 사유재산을 허하도록 하여 상인들 또한 재미를 볼 수 있게 해준다면, 대산 너머에 인간의 세력이 크게 생길 수 있었다.

‘모두 남자 노예도 아닐 터다.’

백금 왕가가 그렇게까지 동부를 챙겨줄 리 없었고, 길게이에게 남자 노예만 줄 리가 없었다. 노예라는 계급 내에서는 남자 노예가 가장 값이 비쌀 수밖에 없었다.

‘백금 왕가가 노력했지만, 계획 변경은 없다.’

드낙이 흉흉한 눈초리를 했다.

암군이라 불리는 한이 있더라도 남부 왕국의 침공이라 불리는 리스크를 없애는 게 중요했다. 명분은 만들면 그만이고, 역사는 승리자의 입맛대로 쓰인다.

‘길게이를 내세워 남부를 친다.’

플래티넘 왕국의 동부침공 역량을 완전히 박살 내고, 자신은 때를 기다리다가 서쪽으로 향하여 마신장을 토벌한다.

‘그럴싸한 계획이지.’

드낙이 양피지에 다시 한 번 계획을 정리했다. 동부의 안정화에만 더욱 시간을 할애하면 될 것 같았다. 그의 그림자에서 불완전한 레우치터가 튀어나와서 드낙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주력을 빚어서 주술로 만듬과 동시에 짐승의 뼛가루를 한줌 쥐어서 원시주술을 발현했다. 뒤섞인 그 술법은 심약한 자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멀미를 일으켰다. 그 본질은 결국 어둠과 그림자의 존재인 레우치터이기 때문이었다.

힘을 먹은 불완전한 레우치터가 다시 드낙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좋은 정보를 물고 와주었구나. 이건 내 선물이다. 받아라.”

드낙이 함에서 브로치를 하나 꺼내서 핏빛쥐의 혁대에 달아주었다. 핏빛쥐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왜 이렇게 급하게 뛰어왔느냐. 쉬엄쉬엄해라.”

“뜨, 뜨낙!”

주력은 레우치터의 완성을 위해서 써야 했으므로, 오로지 마법과 연금술로 만들어진 마법 브로치였다. 효과는 단순 명료하며 즉효성을 지니는 것들이었다.

“주홍색의 브로치는 화염의 브로치다. 적을 덮치는 아가리다.”

“가, 감사합니다.”

핏빛쥐가 소중하게 혁대에 매달린 브로치를 만지작거렸다.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명필이 쓴 글과 같았다.

삼대시험에 대한 준비는 모두 완비되어있었고, 드낙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금방 개최되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는 자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거지 같은 문인이나 마을 밖에서 지내는 자유기사들 등 수많은 이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고, 드낙이 와이번을 타고 온 날부터 열기 또한 잔뜩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시험은 호수 마을 밖에서 이루어졌다.

병사들이 경비를 섰고, 서로 간격을 넓혔다.

문과 시험은 총 3곳에서 치러졌는데, 이실레아의 판단 때문이었다. 드낙은 부재였기에 자연스럽게 그녀가 지휘봉을 잡았다.

“하나의 시험지로는 제대로 된 인재를 구별할 수 없다.”

베바란스 총관과 도렌 그리고 이번에 복직된 게제라스가 서로 나누어져 각 분야에 따른 실용적인 시험문제를 냈다.

법, 행정, 세금에 따라서 시험을 따로 치게 되었으며 중복은 불가능했다. 자연스럽게 독기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개개인에게 있어서는 불행이었지만, 영지에 있어서는 시험을 치르는 사람들을 절박하게 만드는 게 더 이득이었다. 자신이 들어가는 단체나 조직에 대한 자부심은 시련에서 오기 때문이다.

이는 곧 학연과 지연을 만들어낼 것이다.

‘내가 할 일이 없네.’

드낙은 개최식에만 크게 등장하고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이실레아가 드낙이 너무 오지 않아서 계획을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호통을 치기에는 그녀의 일처리가 뛰어났다.

‘구경이나 다녀볼까.’

범인은 그 작은 완장 하나로도 으름장을 놓고 다니고,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권력의 짐승이다. 직책이 담긴 의자에 앉아보겠다고 아귀다툼하고, 그렇게 앉은 의자를 이용해서 남들을 짓밟고, 자신의 위대함을 느끼는 게 인간이었다.

재수생들의 스터디에서조차도 스터디장이라고 하는 그 하찮은 권력을 실로 대단하게 여기는 자들이 많았다.

하물며 드낙은 동부의 영주다. 드래곤 나이트이기도 했기에 남들에게 자신을 내비치고 싶어 해서 안달이 난 변태나 다름없었다.

하루 동안 연예인이 되면 명동 거리를 돌아다니며 우월감에 빠지고 싶은 자들은 밤하늘의 별 개수만큼 많았다.

“부, 불파겐 영주님이시다.”

붉은 머리카락을 대놓고 보여주며 호수 마을의 대로를 걸었다. 많은 사람이 모였기에 그 사람들에게 상품을 팔고 돈을 쥐려는 자들이 너도나도 드낙을 바라보며 냉큼 고개를 깊이 숙였다.

‘백화점 이사가 된 기분이랑 비슷한데?’

백화점 직원들이 임원에게 반듯하게 고개 숙이는 모습과 비슷했다. 절로 흥이 났다. 드낙은 호수 마을 밖을 나가서 시험장으로 향했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들어가 봐도 되겠지?”

“예.”

병사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게제라스의 경우에는 순찰자들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법원 행정 업무를 할 자들을 가려낼 생각에 빠졌기에 드낙을 제어하지 못했다.

‘어디어디···’

드낙이 시험지를 훔쳐보았다.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문인 따위는 존재감을 죽인 드낙의 천부적인 암살자의 면모 앞에서 무기력했다.

[도로 수복의 기발한 절세 방법에 대해서 서술하시오. (내용 제한 없음.)]

베바란스 총관이 내건 시험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주관식이라니, 미쳤네.’

박호훈이 몸을 떨었다. 한국인의 역린이 바로 주관식이었다.

‘거기에 내용 제한이 없다고? 미친 거 아니냐. 이거···’

허허벌판에 바람막이만 있고, 질 나쁜 종이를 묶어놓은 곳에 문인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척 봐도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윽, 개 같은! 역겨워.’

문제가 너무 역겨웠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이 시험을 치르는 문인들의 고통이 느껴졌다. 드낙이 끔찍함을 느낄 때 베바란스 총관이 다가와서 인사를 건넨 다음 가까이 다가와서 속삭였다.

“영주님! 여기에 오시면 다른 문인들이 제대로 재능을 펼칠 수 없습니다. 본인의 위대함을 살펴주십시오.”

“으음···미안하다.”

드낙은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떠났다. 한 시라도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서였다. 가볍게 떠나는 드낙의 뒷모습을 보며 베바란스 총관은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동부 전국에 대한 도로 사업!’

어떤 인간이 그런 이상론가 다운 생각을 냈는지는 뻔했다. 도로는 마모되고, 바스러지는 소비재다. 그 기간은 기술에 따라서 편차가 존재한다. 당연히 중앙 행정관인 베바란스에게 인재(人災)나 다름없었다.

‘반드시 절세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게제라스 법관 2급관이 임명되고, 드낙에게 전국의 도로 사업을 들었을 때, 밤잠을 설쳤던 것이 그였다.

인프라와 로마 제국의 환상에 사로잡힌 드낙은 결코 막을 수 없었기에 최대한 피해를 최소화시키는데 노력할 뿐이었다.

드낙은 베바란스 총관이 낸 문제에 학을 뗐지만, 원인은 오히려 드낙에게 있었다는 걸 꿈에도 몰랐다. 그만큼 도로의 정비는 큰돈이 들어가는 사업이었다.

‘문과는 안 봐도 되겠다. 재미가 없어.’

드낙은 서둘러 이실레아가 주도로 행하고 있는 전투과로 향했다. 전투과는 문과와 다르게 시험이 3일간 치러졌는데, 하루는 부사관급의 중간 간부를 택하는 시험이었고, 나머지 2일은 병사를 가려내는 시험이었다.

‘조용하네. 불안하다.’

똑같이 바람막이가 설치된 곳에 드낙이 들어가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곳 또한 문인들과 다르지 않게 종이에 뭔가를 끊임없이 쓰고 있는 자유기사들이 보였다. 몇몇 이들은 용병으로도 보였지만 가만히 있다가 이내 시험지를 그대로 두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시험을 포기한 모습이었다.

‘이건 지독한데.’

중앙 기사를 뽑는 일인데, 글을 써야 한다니. 드낙은 이 실용적이지 못한 모습에 절로 화가 났다. 하지만 더욱 독하게 이실레아를 몰아치기 위해서 장비를 옆에 벗거나, 이를 통해서 종이를 고정한 채 글을 쓰는 자유기사의 뒤를 점하고 시험지를 훔쳐봤다.

[전략적으로 우세할 경우 전략가가 가져야 할 철칙을 다섯 가지 쓰시오. 반대로 버려야 할 철칙을 다섯 가지 쓰시오.]

[전술적으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역사적 전투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전투를 세 가지 서술하시오. (반드시 본인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서술할 것.)]

‘니미.’

문제를 읽자마자 드낙은 경박한 욕을 속으로 냈다.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모호하기 짝이 없는 문제였다. 만약 수능에 이런 게 나왔다면 교육청은 학부모의 손에 불타서 재로 변했을 터였다.

‘문과보다 더 악독한데?’

드낙은 외곽을 돌아서 이실레아에게 다가갔다. 꼿꼿이 선 채로 마법 시야를 통해서 컨닝하는 자들을 잡아내던 이실레아 또한 드낙이 다가오자 스스로 걸음을 옮겨 인사를 했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왜 시험 문제가 이렇지? 너무 모호하잖아.”

“전쟁과 전투는 항상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실레아가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래도 시험 의도를 모르면···”

“제가 시험 문제를 낸다고 벽보까지 내놓았는데, 모른다면 눈치가 없는 것입니다.”

“······”

촌철살인을 당한 것 같은 기분에 드낙이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영주님. 중앙의 군사력은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저에게 일임해주십시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중앙의 선택을 존중하는 군대가 필요합니다. 그게 중앙군입니다. 모호한 상황에서도 뚝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뚝심은 주관이 강한 자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독단적인 지휘관을 양성할 것 같은데.”

“말씀드렸다시피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그 또한 제어해야 합니다.”

말은 그럴싸했다. 하지만 주관이 강한 무인들이 드낙을 더 좋아할지, 이실레아를 더 좋아할지는 뻔할 정도로 답이 나와 있었다. 하지만 드낙은 거기까지 내다보지 못했다.

사람을 관리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리 당하는 입장이었다.

용병단을 꾸려나가던 세월이 길었다면 몰라도 드낙은 1년도 용병 생활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지방보다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동부를 철저하게 안정화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간부들이 똑 부러진 자들이라면, 그 아래의 병사들도 강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마법과는 가지 말자.’

삼대시험이 잘 되는 것으로 만족했다.

호수 마을의 중심부를 다시 헐어서 만들어진 내성에서 드낙은 검술을 수련하며 시간을 보냈다. 중립신이 내어준 과업을 완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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