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0 <-- 대산을 넘어 -->
드낙은 다음 날 게제라스를 불렀다. 병사가 게제라스의 집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누구신가.”
졸린 눈으로 게제라스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냉수를 퍼부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불파겐 영주님께서 부르십니다. 게제라스 전총관님.”
“전총관이라니···문인으로 족하네.”
“예. 게제라스 문인님.”
이미 모든 것이 끝났을 거로 생각하던 게제라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드낙의 집무실로 향했다.
‘왜?’
도저히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특히 집무실로 부른다는 것에서 혼란이 왔다.
드낙의 노림수이기도 했다. 생각 많은 놈들에게 하도 당해보니, 헛짓거리를 잘하게 되었다.
대전을 고르지 않은 이유는 게제라스에게 미리 기대감을 주지 않게 해서 더 깜짝 놀라게 하려는 드낙의 악질적인 감정이 깃들어있었다.
물론, 조용조용 일을 진행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대전이라는 장소에 다른 이들이 가진 생각이 강해서였다. 무엇에든지 의미를 담는 게 중세인들이었다.
“삼대시험이 치러지는 중요한 시기에 어쩐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게제라스 문인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스스로 선을 긋는 모습이었다. 놀아보니 그것만큼 재미난 것이 없을 것이다. 특히나 기절할 정도로 꿈을 향해서 노력하고 나서 누리는 휴가는 꿀맛보다도 더 강렬한 단맛을 내고 있었다.
드낙 또한 게제라스와 다를 바 없었다.
근 2년을 중립신을 위해 개처럼 일했다. 휴가도 없었고, 검은 꿈의 마약과도 같은 쾌감에 절어서 흑우처럼 채찍질 당하며 달리기만 했다. 낚시부터 시작해서 레이시아와 함께하는 밤과 대형 썰매장의 건설 등은 그로 인한 반작용과도 같았다.
‘사적인 이야기로 선을 당겨볼까.’
“연애를 시작했다며? 예쁜 여자던데, 날은 잡았고?”
게제라스가 펄쩍 뛰었다. 뒷조사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예? 아니, 그건 또 왜 조사를 하셨습니까.”
감히 소리는 치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역효과였다. 하지만 드낙은 뚝심 있게 이어갔다.
“결혼하면 큰 선물을 줘야 하니, 미리 알아둬야지. 안 그런가?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하겠나?”
“그건···”
확답을 줄 수 없었다. 드낙의 손속은 언제든지 잔혹하게 변할 수 있었다. 겉으로는 가신들을 크게 건드리지 않고, 프리하게 놓아주지만 언제든지 태풍처럼 휘몰아칠 수 있었다.
드낙은 게제라스가 땀을 삐질 흘리자, 웃으면서 술을 권했다.
“그간 뭐 하고 지냈나? 편히 쉬었다는 걸 듣기는 해도 자세히 물을 수는 없어서.”
“아···”
게제라스는 자신에 관해서 이야기를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연애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숨기는 모습은 청순하기 그지없어서 장난을 치고 싶을 정도였다.
‘숨기긴 왜 숨겨.’
덧없는 알리바이를 횡설수설하는 게제라스를 보며 드낙이 음흉하게 웃었다.
“아무튼, 그렇게 지내왔습니다. 절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 죄인 아닙니까.”
스스로 죄인이라고 말할 정도로 살판나는 게 게제라스의 일상이었다.
찾아오면 돈을 쥐여주고.
찾아가서 문자 몇 자 가르쳐주고 온갖 것들을 받고.
예쁜 여성과 사랑을 하는 것도 재미났다. 며칠 전에는 빵을 같이 구우면서···
탁탁!
드낙이 예전과 다르게 물렁물렁해진 게제라스를 보며 술잔으로 탁상을 쳤다. 그제야 게제라스가 드낙과 눈이 마주쳤다.
“행정 제도를 적당히 갖춘다고 세상일이 끝나는 게 아니더라. 그래서 불렀다.”
“하지만 시스템으로 어느 정도 안정되었으니, 적어도 남부 왕국에서는 적수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드낙의 말에 게제라스가 한 걸음 물러섰다.
이미 동부의 제도가 만들어내는 이득은 범인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단순히 토지 제도를 새로이 하는 것만으로도 국력이 달라진다. 행정 제도를 새롭게 만든 게제라스의 공로는 재상으로 받들어도 어렵지 않은 공로였으며, 그 제도가 남부 왕국으로 퍼지기라도 하면 역사에도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목화 하나 가져와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 있듯이, 이 또한 다를 바 없었다.
“그래. 그래. 자네가 해준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네.”
“결코 그런 뜻으로 말씀을 드린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근데, 그거 아나? 마을마다 법이 다르고, 영지마다도 법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나 싶어서.”
“······”
게제라스가 순간 말을 잊지 못했다. 드낙이 하려는 것은 그 법을 하나로 만들기 위함에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드낙 불파겐의 법전〉의 제작! 그것만큼 위업을 달성하기 좋은 것도 없었다.
“제가 법에는 까막눈이라···”
“지금부터 배우면 되겠지. 킹슬레이 쪽에서 어찌나 그렇게 제국 법전을 많이 가졌는지···취미로 서적을 모으는 것이라던데.”
“저보고 킹슬레이의 은혜를 입으라는 소리입니까?”
“안 될 게 뭐가 있나.”
드낙이 태평스럽게 대답했다. 실로 간단한 일인 것처럼 굴었다. 솔직히 다른 외척과는 다르게 킹슬레이는 그나마 드낙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맺고 있어서였다. 허나 다시 외척과의 관계를 진전함에 있어서 게제라스를 쓰는 건 실로 위험했다.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날 믿어주다니···남들에게 스스로 검을 뽑아 날 받들어주는 것과 같다.’
외청이 매음굴로 변한 데에는 외척의 입김이 없다고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철저한 흑막으로 여겨졌기에 꼬리자르기식의 판결에서는 모습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죄인이 된 자들도 감히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못했다.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를 척으로 지는 건 죽는 것보다 무섭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한 번 게제라스와 킹슬레이를 드낙이 엮으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똑같은 죄를 저질러도 게제라스를 지켜주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왜 말이 없나?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나. 계약서는 여기 써놨다. 생각보다 레이디 케이샤의 수완이 좋아서 말이다. 개인 도서관이지만, 협상은 가능하다고 운을 띄워줬다.”
게제라스가 드낙의 빠른 움직임에 감탄하며 계약서를 훑었다. 킹슬레이와 드낙 그리고 게제라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전부터 생각하고 계셨던 것인가.’
법원의 설립에 외척이 끼어들고 드낙이 주최하고 게제라스가 공사에 들어간다. 그림 자체는 예쁘고 나무랄 곳이 없었다. 하지만 게제라스는 이 상황을 이용하고 싶었다.
‘법을 정하는 건 하루 이틀로 끝나서는 안 된다.’
동부는 수많은 곳에서 몰려온 자들이 함께 섞여 살고 있었다. 마을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다른 마을로 향하는 이들도 있었다. 같은 지방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모두 만족해할 만한 법령을 만드는 건 어려웠다.
전통이 있고, 악습이 있었다. 그렇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게제라스의 마음에서 열정이 피어올라 왔다.
“저 같은 죄인에게 대업을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디어 할 마음이 들었나.”
드낙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게제라스는 더욱 허리를 숙이며 말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동부는 결코 영주님의 독단으로 인선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일관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굽혀주십시오.”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라. 무엇이 일관성이 없는 것이냐?”
게제라스가 허리를 들어 올려 드낙과 눈을 마주치며 강한 어조로 말하였다. 양팔을 쫙 펼치기까지 했다.
“세상의 모오든 실력자들아! 모두 내 밑으로 들어와서 그 꿈을 펼쳐라! 실력이 있다면 중용할 것이고! 돈이 부족하다면 돈을 내어줘 그 꿈을 펼치게 해주겠다! 이게 현재의 동부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맞지.”
드낙은 어정쩡하게 답했다. 게제라스의 함정에 걸린 기분이었다.
“맞습니까?”
“그래. 맞다.”
“맞습니다! 그런 방향성을 지니고 동부는 굴러가고 있습니다. 장원 기사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제도에 묶여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지방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몇 없는 지역유지들 또한 밀어낼 것입니다.”
그것은 곧 지방관리의 득세였으며, 중앙의 힘이 저 먼 곳까지 뿌리를 내린다는 뜻이기도 했다. 〈장원 계약 기사〉라는 제도는 지방에 대한 강력한 쇠사슬이었다.
“그렇기에 중책에 있어서 영주님의 결정이 언제나 커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이들이 영주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중앙으로만 오고 싶어 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그래도가 아닙니다. 정책과 영주님의 태도가 일관되어야지만 영지가 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이실레아 같은 자들도 중앙 사령관으로 임명했지 않은가.”
“같은 자는 없습니다. 이실레아 사령관은 공신 중의 공신이지 않습니까. 그녀가 천금을 받든, 만금을 받든 불만을 겉으로 표출할 자는 없습니다.”
“자네도 충분히 공신 아닌가?”
게제라스는 칼같이 고개를 저었다. 수많은 이들을 강하게 휘어잡고 있는 통치자와 같은 이실레아와 문인인 게제라스는 전혀 달랐다.
“문인을 물어뜯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입니다. 병졸 하나 다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음.”
드낙은 그 말에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저에게 법을 만들게 하고 싶다면, 저의 부탁을 두 개 들어주십시오. 영주님께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말해보라.”
“하나는 지방을 위한 중앙이라는 것을 명명백백히 보여주소서. 동부는 대륙이고, 강이 좁고, 깊지 못하여 배를 운용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도로를 방방곡곡 빽빽하게 건설하여 지방의 힘이 중앙으로, 중앙의 힘이 지방으로 잘 흐르도록 해주십시오.”
게제라스는 그렇게 대의를 말하면서도 음흉하게 웃었다.
“마을에서 마을로 그 길을 닦는 공사는 장원 기사에게 맡기십시오. 돈이 지방으로 향한다면, 기사들은 언제고 영주님께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굶어서까지 충절을 지키는 자들은 적다. 세금 도둑을 핏빛쥐를 통해서 판별할 수 있는 이상, 중앙으로 향하는 세금은 언제나 풍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돈을 지방의 관리라고 할 수 있는 기사들에게 주는 건 큰 이점이 있었다.
‘나쁘지 않네.’
모든 길은 로마로 향한다. 그런 명언을 드낙은 들은 적이 있었다. 인프라가 한창 유행했을 때, 들은 명언이었다. 역사를 통해서 현재를 해석하는 일은 언제나 있는 일이었다.
“좋다. 다른 하나는 무엇이냐.”
“신념이 높고, 숭고함을 숭상하던 순찰자들을 법의 수호자로 만들어주십시오. 그들이라면 훌륭히 마을 곳곳에서 좋은 판결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와.”
드낙이 입을 쩍 벌리며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법!
법이라는 건 국경선 너머 오크를 상대로 하는 것과 같이 매우 숭고하게 여겨질 수 있는 일이었다. 순찰자들은 이걸 결코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고 드낙은 감히 판단할 수 있었다.
이미 당첨 번호가 적혀진 로또 1등을 보는 기분이었다.
숭고한 자를 움직이는 데에는 숭고한 일을 맡기는 게 가장 좋았다. 정법 중의 정법이다. 하지만 정석이기에 오히려 하기 힘든 일이었다. 실제로 드낙은 순찰자의 영입을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꺾이지 않는 신념을 지닌 레인저들에 대한 로망 때문에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이걸 게제라스가 낚는다고?’
“순찰자들의 신념은 대단한데, 감히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고 보는가?”
“범죄자를 추적하고, 증거를 수집하고, 이를 통해서 죄를 묻는다. 실로 사냥꾼다운 방식 아닙니까?”
그 말에 드낙이 실로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마치 형사와 같았는데, 증거 하나 없는 이런 곳에서 제대로 된 법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은 힘들었다. 고로 순찰자라는 전력이 필요했다.
‘순찰자를 쓴다는 말을 들으면 생각하기 쉽지만, 난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법에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힘없는 법은 갈대처럼 바람이 부는 곳으로만 굽을 뿐입니다. 굽히지 않아 부러지더라도 그런 자들이 필요한 곳이 법이라는 곳입니다.”
순찰자에 대한 로망을 지닌 것이 드낙이었다. 게제라스의 말을 그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좋다. 두 가지 모든 부탁을 들어주마.”
“감사합니다.”
게제라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표정은 이상을 꿈꾸는 헛된 망상가의 표정이나 다름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게제라스가 동부에 남아 열심히 달린 것은 남부 왕국이라는 야만국에 제대로 된 제도를 도입함에 있었다.
단위를 확실시하여 농가에 대한 철저한 규격화는 물론이고, 온갖 것들이 게제라스의 손에서 바로 세워졌다.
그런 자는 현실보다는 이상에 더욱 발을 깊게 담그고 있기 마련이었다.
큰 꿈을 쫓는 만큼 다른 것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
어둠이 내려앉고, 드낙의 집무실에 핏빛쥐가 튀어나왔다. 드낙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것에 대해서 말하기 위함이었다.
“뜨낙! 우리의 창조주를 뵙습니다.”
“말해라.”
“북부의 논공행상이 끝났습니다. 길게이 왕자는 일주일 내에 호수 마을로 들어설 것입니다.”
“그래? 생각보다 빨리 끝났군.”
“예. 창조주께서 으름장을 놓았지만, 그게 북부 논공행상에서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길게이 왕자의 수완은 보면 볼수록 대단하군. 독이 잔뜩 오른 놈처럼 날뛰고 있지 않은가.’
드낙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유복하게 지낸 것처럼 보였는데, 확실하게 자신의 잇속을 챙겼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드낙의 위세를 제대로 이용하는 면모마저 보여주었다.
보면 볼수록, 죽이고 싶은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