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전사-584화 (583/1,239)

0584 <-- 대산을 넘어 -->

〈세리안 불파겐〉의 이동속도는 무시무시했다. 혈통 탓에 신체능력이 인간 중에서도 뛰어난 탓도 있었지만, 가혹한 불파겐의 교육을 받은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나, 세파리아스의 눈에는 여성이 지닌 단점은 꼴도 보기도 싫어서 더 가혹하게 다루어졌다. 똑같이 먹어도 근육이 붙는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특전사를 뛰어넘는 강인한 이성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긴 기간을 놓고 보았을 때, 세리안만큼 이동할 수 있는 인간은 손에 꼽았으며 짐승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았다.

배려해줄 동료도 없었기 때문에 거침없이 제국을 횡단했다.

‘객장(客將)으로 활동하고, 남부 왕국으로 향하여 불파겐 방계를 짓누르고 통일전쟁에 승리한 다음, 다시 제국을 노린다.’

짧으면 3년. 길면 10년을 잡았다.

스스로를 불멸자라고 생각하는 엘프에게 있어서는 짧은 기간이었다. 이런 시간 감각의 차이로 엘프는 실로 둔하기 짝이 없어 보였지만, 결국 승리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엘프들이 될 것이다.

그걸 잘 알았기 때문에 세리안은 엘프들의 계획을 찬성했다.

성폭행 전과 14범의 인권을 챙겨주며 다른 인간과는 다르다는 우월감을 느끼며 자신을 더 높은 존재로 여기게 하는 인권주의자들처럼 엘프들 또한 인간과 같은 저열한 지성종족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것으로 스스로를 더욱 높이고 있었다.

이 우월주의는 엘프 종족이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렇기에 이용할 수 있고, 어느 정도는 믿을만하다.’

프라이드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약속을 지킬 것이다. 세리안이 선을 넘지 않는다면.

〈술집 아스페로(Aspero)〉에 세리안이 들어섰다. 전과는 다르게 두꺼운 로브를 입고 있었다. 털가죽까지 쓰고 있었기에 실로 야만스러웠다.

제국인은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기 때문에 털가죽을 옷 안으로 숨기는 걸 즐기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다분히 눈길을 이끌었다.

“동부 뜨네기인가?”

제국 동부에서 잘 나오는 흑돼지의 털가죽을 쓰고 있는 걸 보며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이들이 숙덕거렸다. 이방인의 모습을 보며 출신지를 추측하는 건 안줏거리로 삼기 좋았다.

몇몇 테이블에서는 내기하기도 했다.

평소의 술집이었다.

자리를 잡은 세리안은 수준 낮은 종이를 꺼냈다. 이곳에 제국 9단장이 몰래와서 술을 마신다는 정보가 적혀져 있었다.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겠지만, 세리안은 자신에게 운이 따라준다고 믿었다.

그런 삶을 살았다.

똑같은 일을 해도 성공하는 자와 실패하는 자가 있고, 세리안은 전자의 사람이었다.

〈보헴 셀 막시밀리안(Bohem Shel Maximilian)〉은 3명의 비밀 수행원을 이끌고 술집에 나타나서 테이블을 거침없이 잡았다. 대부분의 제국인들은 그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공식석상에서는 올백 머리에 올리브유를 검은 머리카락에 촤악 발라서는 인상마저 확 바꾸게 하지만 사석에서는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있는 게 그였다.

“흐아암!”

하품마저 떡하니 하는 모습은 실로 교양 없는 모습이었다.

“여기 얼음 맥주에 꼬치 모듬! 4인분으로!”

“예. 주문받았습니다.”

접대하는 여자가 대충 대답했다. 술집이라도 무조건 제대로 된 먹을 것이 있어야 하는 게 제국의 술집이었다. 반면 세리안은 술만 마실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다른 민족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덕에 시비가 걸릴 때도 있었지만, 아스페로는 그런 분위기가 적었다. 서로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싸구려 술집치고는 분위기가 좋네.’

약간 경계선에 선 술집이었다. 싸구려지만 조용하게 마시고 싶은 술집을 찾는 소수의 사람만 즐기러 오는 곳이었다. 그 덕에 여자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테이블도 그녀의 눈에 보였다.

얼음이 들어간 맥주가 든 잔을 손에 쥔 세리안이 거침없이 일어나서 보헴 셀 막시밀리안이 있는 곳으로 정직하게 향했다.

보헴 셀 막시밀리안은 전과 다르게 상당한 중책을 맡고 있었기에 비밀 수행원까지 데리고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당연히 세리안이 다가옴을 알고 있었고, 일어서며 간격을 만들었다.

검을 휘두를 간격을 만들어 무슨 짓을 해도 벨 수 있어야 했다.

자연스럽게 다른 테이블에 앉은 이들을 밀어내야 했다. 단련된 제국 기사의 하체 힘에 형편없이 밀려났다.

“어! 악! 이런 씹!”

테이블이 엎어지고, 술잔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미친놈이, 이게 무슨 짓이야?”

떡대가 욕부터 날렸다. 남부 왕국이었다면 주먹부터 날렸겠지만, 제국은 일단 말로 승부하는게 기본이었다. 그러나 떡대는 입을 꽁꽁 다물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제국 기사!’

검은 로브를 벗어던진 제국 기사의 문장을 봤기 때문이었다.

“멈춰라, 이방인!”

술집에 들어오자마자 주변인을 훑은 제국기사였다. 그녀는 명백히 이방인이었다. 제국 기사들이 만든 검의 사정거리에서 딱 한 치밖에 멈춘 세리안은 로브를 벗어던졌다.

차분하게 가라앉는 생머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붉은 머리카락!’

“불파겐!”

“군단장님을 모셔라!”

제국 기사의 진형이 순식간에 변모했다. 3명이 삼각형처럼 꼭지점에 자리 잡아서 사방을 경계했지만 〈자 형으로 세리안을 반쯤 포위하듯이 섰다.

“술잔을 들고 왔는데, 그 잔에 피를 담을 생각인가?”

“맥주가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피를 담아?”

시리도록 차갑지만, 그만큼 성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호흡의 엇박자를 노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흣!”

억지로 들이쉬려던 호흡을 중단하며 제국 기사의 검이 그녀를 정확하게 노리고 막았지만, 강철 글러브로 무식하게 들이밀며 간격 안으로 들어갔다.

탁!

맥주잔을 테이블에 놓으며 세리안은 거침없이 자리에 앉았다.

“무식하군.”

“어렸을 때, 불파겐에 대해서 듣지 못했나?”

보헴은 코로 깊게 숨을 내쉬며 손을 흔들었다.

“검을 집어넣어라.”

“그럴 수 없습니다.”

세리안은 그 말에 술을 마시며 말했다.

“상관없다. 겁쟁이들은 많이 봐왔으니까.”

“지금···”

입을 열려던 제국 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상관이 그녀와 대화를 하고 싶은데, 자신이 개입해서 감정을 흩트려 놓는 건 잘못된 일이기 때문이다. 살짝 보헴 군단장에게 고개를 숙이고 그다음에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물론 검의 사정거리 안에 그녀를 놓았다.

다른 이는 그녀가 한 걸음 내디뎠을 때, 최상의 간격을 보일 수 있는 곳에 움직였다. 마지막 한 명은 퇴로를 막았다.

실로 치밀한 진형이었다. 모두 오른손잡이였기 때문에 모두 공격할 수 있는 곳을 만들 수 있었다. 이 또한 계산된 진형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객장이 되고 싶다. 내전을 준비하고 있지 않나. 실제로 수도 근처에서 전투가 발발했다고 들었는데?”

“헛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사이에 술집 주인은 손님들을 내보내고 있었다.

“불파겐의 무력은 절대적이다. 내전을 승리로 이끌려면 필요한 전력이지. 그리고 군단장도 알고 있을 텐데? 그대들이 상대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야. 영혼과 마력으로 짜깁기된 키메라지.”

“많은 걸 알고 있군.”

보헴은 그녀를 죽일지 말지를 고민했다. 불파겐은 제국인에게 있어서 죽은 역사에 불과했다. 세월은 흘렀고 마도사회를 만들어낸 제국에게 있어서 무력은 2순위에 불과했다.

압도적인 마법 화력으로 밀어버리는 게 제국의 새로운 전쟁 체계였다.

“자신의 실력과 영향력을 너무 과신하는 것 아닌가?”

“뭣하면 시험해봐도 좋은데? 여기에 있는 3명을 다 죽이면 믿을 수 있겠지?”

그녀의 도발에도 제국 기사들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실로 관료적인 집단이었다.

“대가는?”

“모든 일이 끝나고 병사를 빌려줬으면 한다. 남부 왕국에 거짓된 불파겐이 있거든.”

그 말에 보헴이 흥미로운 눈을 했다. 제국이 내전으로 휘말릴 때, 남부왕국 또한 혼란으로 만들 수 있는 패가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흐하하!”

그에게 있어서 실로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큰 웃음을 내는 그는 이내 술을 들이켰다. 술을 마시고 난 다음에는 기세를 키워서 세리안을 노려보았다.

“넌 제국인을 뭐라고 보는 거냐? 타국에서 제국민이 피를 흘리는 선택을 내가 할 것처럼 보이는가?”

“흠···그렇다고 제국이 다른 민족에게 짓밟히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기는.”

술잔을 보헴이 들어서 바닥에 내던져서 깨버렸다. 유리잔이 박살이 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제국의 문제는 제국으로 해결한다! 외세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한다면 제국민 모두가 등을 돌릴 것이다.”

단일민족의 단점이기도 했고, 장점이기도 했다.

“그리고 불파겐은 제국 군단장을 죽인 가문이기도 하지. 내가 지금 널 안 죽여야 할 이유가 있나?”

“안 죽이는 게 아니라 못 죽이는 거겠지.”

보헴 9군단장이 검을 뽑자 다른 제국 기사 3명의 위치가 변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양옆을 돕고, 나머지 하나는 발로 의자를 끌어서 왼손에 쥐었다.

“검을 휘두르는 순간, 모든 것이 망가질 거다.”

세리안이 등에 멘 대검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되려 제국 기사들은 반걸음을 더 그녀에게 집어넣었다. 사거리가 긴 것이 대검이기 때문에 롱소드의 간합을 포기하고 더욱 근접한 것이다.

“물러서라.”

보헴의 위협에 세리안이 턱짓을 했고, 퇴로를 막던 제국기사가 옆으로 피했다.

‘제국 녀석들, 진짜 꼴통이네.’

힘은 그저 힘이다. 외세의 힘이라니 뭐니 지껄이는 병신들의 머릿속을 세리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면서 방해되는 것들을 발로 차면서 조금씩 이동하더니 이내 로브로 머리카락을 가리고 술집 밖으로 나갔다.

“군단장님. 불파겐의 또 다른 후손입니다. 잡아서 죽여야 합니다.”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불파겐을 불파겐으로 제압한다. 말은 좋고, 달콤했지만 그게 거짓일 수도 있었다.

“놔둬라.”

보헴은 자신의 촉을 믿었다.

검은 비늘 와이번을 탄 드낙은 순식간에 빤스런을 쳤다. 영지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조직이 가진 힘을 이용하고 싶었지만 일은 하기 싫었다.

세를 받아먹는 건물주의 마음! 누구나 원하지만 질투하면서도 기회가 되면 무조건 하고 싶어하는 그러한 마음!

항상 박호훈이 원했던 것이기도 했다.

대산의 중턱에 와이번이 나무들을 뭉개버리며 내려앉았다.

“크앙!”

울음소리를 내며 꼬리를 좌우로 움직여서 달리면서 날아갈 수 있는 공간도 만들었다. 실로 무식했다. 보통 조류라면 몸무게가 낮아서 못하는 일이지만, 용족인 와이번은 가능한 일이었다.

‘날아다니는 탱크나 다름없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런 세상에서는 가능했다.

“도노야! 도노!”

드낙은 도노를 불렀다. 카이야는 언제나 드낙의 곁에 있었지만, 도노는 대산의 수비를 맡기고 있었다. 그의 자손은 주력을 다루며 푸른 불꽃을 입에서 토해낼 수 있게 되면서 늑대들의 전투력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다.

‘독립세력이 될 능력이 충분하지.’

몇 시간이 지나도록 도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만큼 활동반경이 커졌음을 드낙은 알 수 있었다. 결국 카이야를 내보내서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까악!”

카이야는 몇 번 투정을 부리다가 깃털이 하나 뽑히고 나서야 날아올라 갔다.

‘하여간 날이 갈수록 뺀질거리네.’

드낙은 다시 한 번 와이번을 타고 카이야를 쫓아갔다. 주력을 받아먹으며 큰 카이야는 시력이 굉장히 좋았다.

이내 드낙은 도노의 무리와 마주할 수 있었다.

“쿠워어어억!”

등에 곰의 머리통이 세 개나 자라나 있는 기괴한 일각수와 싸우고 있었다.

푸화악!

주력으로 생성된 불꽃이 도노를 비롯한 그 자손들의 입에서 뿜어지고 있었고 일각수는 화염에 불타면서 닥치는 대로 달려들어 부딪치고, 양팔을 휘저으며 모든 걸 부쉈다.

‘눈이 타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가 보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막타는 내꺼다!!!’

와이번이 그대로 굵직한 발톱으로 일각수의 옆구리를 후려치며 옆으로 넘어뜨렸다. 멧돼지의 몸을 지닌 일각수는 형편없이 고꾸라졌다. 블랙 스케일 와이번의 내려 찍히는 힘을 감당하지 못했다.

“하압!”

드낙이 그대로 뛰어내리며 두개골에 검을 쑤셔 박았다. 롱소드를 끝까지 찔러넣었다.

단번에 절명했다. 드낙이 있는 곳에만 주력불꽃이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는데, 실로 기괴한 광경을 만들어냈다.

걸으면서 사그라지는 주력 불꽃에서 빠져나온 드낙에게 도노가 빠르게 달려왔다. 덩치가 곰같이 변해있었다.

‘대산의 정기를 먹은 발룬처럼, 도노도 대산의 덕을 봤나?’

어떻게 산의 힘을 받아먹는지 드낙은 알 수 없었다. 서로 부둥켜 안자 카이야가 도노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도노가 허겁지겁 고개질을 쳤다.

서로 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항상 장난을 치는 건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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