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전사-580화 (579/1,239)

0580 <-- 겨울의 논공행상 -->

베바란스 총관을 제외하고 다른 이들은 모두 물러갔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드낙의 경우 기사들을 통치하는 사람이나 무인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조금 심했기에, 제도나 행정 같은 것에 있어서는 총관과 관리들을 부리는 스타일이었다.

기사들이 침투하는 분야를 철저하게 가른 것이다. 그 파이는 생각보다 컸으며, 베바란스 총관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왜 안 된다는 건가?”

사지가 멀쩡한데 구걸하는 놈들은 드낙에게 있어서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억지로라도 노동을 시켜서 그 인력을 쓰고 싶었다.

도둑질을 일삼기도 했기에 감옥에서 굶은 채 구류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동부의 경우 이주를 할 여력이 되는 자들만 왔지만, 그중에서도 일이 잘 안 풀려서 부랑자로 떨어진 자도 있었다. 혹은 햇병아리 용병이나 상단과 함께 흘러들어온 가난한 자들도 많았다.

상업적으로 큰 가치가 있는 게 동부였다. 동부에 풀린 은화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남부와 비교하면 은화의 가치가 낮아졌고, 이는 곧 은화의 차익을 노리고 남부 상인들이 동부로 오게 하였다.

베바란스 총관 또한 이를 들어서 드낙의 구휼 제도를 막아섰다.

“그저 구해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안 그래도 은화를 많이 소비하고 있습니다. 언제 재정이 바닥을 보일지 모릅니다.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은화의 가치를 올려야 합니다.”

총관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드낙이 납득했다. 물론 개떡같이 알아들었다.

‘결론은 화폐를 쓰면 안 된다는 소리구나!’

“그럼 조금 조정해야겠다. 〈보금(報金) 제도〉라고 하면 좋겠네.”

돈으로 갚는다는 뜻을 지닌 제도였다.

“결론은 돈을 쓰지 않고, 도와주면 되는 일 아닌가. 총관 말대로 그냥 도와주면 안 되겠지. 빚으로 달아두는 것이다.”

“그게···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드낙이 어깨를 으쓱했다.

“집 없는 자들에게 집을 내어주고, 노동하게 하여 그걸 갚게 하면 되는 일 아닌가?”

베바란스 총관의 얼굴이 뺨 맞은 것처럼 변했다. 곧이곧대로 들으면 제법 건실한 말이었다. 일자리를 내어주고 자립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속내를 찬찬히 보면 결코 그렇게 좋은 제도가 아니었다.

‘고리대금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아니, 그것보다 질이 더 나쁘다.’

영주가 주관하는 노예제도? 그러기에는 명분이 똑바르고, 일반 시민들에게 도움이 된다. 거리가 깨끗해지기 때문이다. 구걸하는 자가 없어지는 것만으로도 평온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독특하다. 한번 진행해보고 싶다.’

사회시험과도 같았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것 뿐이라서 그 학문적 흥미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돈을 빌려주지 않지만, 집부터 시작해서 밭을 빌려준다. 그리고 받은 상대는 그걸 갚아야 한다.”

드낙의 말에 베바란스 총관이 뒷말을 집어넣었다.

‘심하면 광산으로도 끌고 가겠지.’

분명 드낙의 성정이라면 그럴 공산이 컸다. 거기까지 생각한 베바란스 총관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드낙의 득의양양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동부를 봐! 땅이 넘쳐나지 않나! 돌도 많고, 척박하지만 그거야 하나씩 개간하면 될 문제고!”

자기가 개간하는 것도 아니면서 말은 쉬웠다. 이것저것 노동력을 대량으로 쓸 수 있다는 소리를 들으며 베바란스 총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낙의 기세에 압도된 것도 있었지만, 화폐를 안 쓰는 고리대금업으로 노동력을 대량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해도 괜찮지 않나? 발전된 거리의 뒷골목에 있는 것들을 청소할 수 있는 명분도 되지 않나?’

치안의 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굶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놈들을 강제로 농지 개간으로 보내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깨닫는 바가 있어서 베바란스가 드낙에게 떡밥을 던졌다.

“일하지 않는 자는 어떻게 선별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거야 자네가 알아서 해야지.”

드낙의 말에 베바란스 총관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확실히 좋았다. 거리가 청소되면 시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쉐도우 위스퍼〉의 도움을 얻고 싶습니다. 부랑자들이 진짜 일을 하고 있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영주께서 가지고 계신 정보 조직을 이용하는 게 좋지 않습니까?”

이미 베바란스 총관과 쉐도우 위스퍼는 공조를 몇 번 한 적이 있었다. 겨울을 맞이하며 세금을 정확하게 내지 않은 자들을 가려낸 것이 쉐도우 위스퍼의 목록이었다. 그 리스트대로 정확하게 탈세범들을 잡고, 세금을 두 배로 내게 했다.

그 일은 제법 총관에게 힘을 실어주었지만, 드낙이 만들어낸 태풍에 순식간에 휩쓸려서 사라져버렸다. 영지로 들어오는 돈을 세금으로 확실하게 회수를 해야 다시 여러 가지 공공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기에 돈에서만큼은 드낙 또한 집중해서 탈세범들을 조져버렸다.

“그렇다면 언제나처럼 목록으로 전해주겠네.”

“예.”

중책을 맡은 자도 쉐도우 위스퍼의 인물들과 만날 기회는 없었다. 오직 어린 아이의 심부름을 통해서만 그 목록이 전해질 뿐이었다.

드낙의 기세게 밀린 베바란스 총관은 밖으로 나와서야 자신이 결국 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 돼. 물론 하고 싶은 일이긴 해도 경력에는 큰 도움이 안 돼.’

부랑자와 얽히는 것보다는 권력자와 자주 만나는 게 더 이득이었다. 드낙은 정말로 자신에게 사제 3명을 붙여주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일에 짓눌릴지 몰랐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한다!’

그 또한 이 일을 맡길 인재를 찾기 위해서 발 빠르게 움직였다. 외청 관리 중에 한 명을 중용하여 크게 끌어올릴 생각을 가졌다.

살기 위해서 총관의 권한을 그 또한 다른 놈에게 끼얹어야 했다. 총관대리든 뭐든 덤터기를 씌워야만 했다.

‘안 그러면 정말 게제라스 전총관처럼 되는 수가 있다!’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다그닥. 다그닥.

형편없는 길을 짐말이 느긋하게 밟으며 걸었다. 행군속도는 느리기 짝이 없었다. 여유롭다고 하기에는 겨울의 칼바람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짐말은 온갖 책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군사학부터 행정을 비롯한 정치 기본서까지 들어가 있었다. 가치만 해도 금화 수십 닢은 받을 정도로 고가치 서적들이었다.

책의 표지에는 브릴리언트 가문의 문양과 필사한 가문원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가문의 것이었기에 훔쳐도 장물로 되팔려면 양질의 양피지가 필요했으므로 어중이떠중이는 훔쳐도 어찌할 수가 없는 물건들이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말의 앞으로 경장비를 입은 경기병이 둘 있었는데, 불파겐 영지에서 경기병은 곧 이실레아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다.

특히나 질 좋은 전투마의 늠름한 모습은 더욱 확실하게 이들이 브릴리언트 가문의 입김을 받는 병사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선두에는 전신갑주를 입은 기사가 숏소드를 허리춤에 매고, 버클러를 팔뚝에 걸치고 강철로 된 단창을 등에 고정한 채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또한 그 기사의 옆에는 비슷한 체형의 기사가 함께하고 있었다. 기사 2명에 병사 2명. 실로 비대칭적인 구조였다. 거기에 배치도 이상했다. 본래라면 상관인 기사가 후방에 있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은고을 마을〉에서 빠져나와 논공행상에 참가하려는 도렌의 무리였다.

“드디어 대산을 지난 겁니까?”

“아니. 저 앞에 보이는 게 대산이다.”

“정말 대산 너머의 산세는 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기에 그럴싸한 길이라도 만들어놓다니···”

“전에도 와봤잖나?”

도렌과 그의 부관인 고트하르드(Gotthard)가 잡담을 떠들며 움직였다. 고트하르드 브릴리언트는 이실레아가 도렌에게 붙여준 수재급 인물이었다.

천재는 하나를 알면 열을 짐작할 수 있지만, 수재는 하나를 알면 하나를 아는 정도의 인재를 의미했다. 하나를 알면 하나를 까먹는 범재와는 차원이 다른 재능을 지닌 자였으나, 인간의 숫자는 별의 개수만큼 많았기에 천재와 비교하면 그 수준을 폄하 받기 쉬웠다.

그 덕에 고트하르드는 도렌과 죽이 잘 맞았다.

말에 실려진 온갖 책들로 도렌은 은고원 마을에서 매우 값진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이실레아의 안배이기도 했다.

전쟁을 경험하면서 도렌 또한 공을 세웠다. 은광산을 잘 유지한 것만으로도 공신대접을 받을만했다. 특히나 외진 곳이라 가만히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추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외국에서 3년을 관리직으로 보내고 본국으로 돌아와 승진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주인공은 될 수 없지만, 시스템적으로 꼭 필요했기에 보다 높은 공으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후임자 또한 정해졌고, 인수인계도 마쳤다.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호수 마을은 혼돈 그 자체였다.

하루를 이실레아의 저택에서 머문 도렌은 다음 날에 드낙과 마주할 수 있었다. 기분 나쁘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드낙이 환대를 해주며 그를 맞이했다.

“많이 변했네. 특히 분위기가 변했어.”

드낙은 착 가라앉은 도렌의 분위기를 느끼며 말했다. 비유하자면 동굴 속에 고여있는 물과도 같았다. 따스함과 인간미가 철철 넘쳐흐르던 것과는 달랐다.

“은광산을 관리하다 보며 많이 느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렌이 깔끔하게 대답했다.

“그런가. 많이 심심했을 것 같았는데···”

“전혀 아닙니다. 일이라는 게 찾으면 끝도 없었습니다. 하루는 광산의 나무기둥에 물이 차서 썩은 게 그대로 기울어졌었는데···”

도렌은 그간 있었던 일을 말했고, 드낙 또한 자신이 했던 일들을 말했다. 서로 스케일은 천지 차이였다.

드낙이 광역 마법으로 천의 오크 무리를 죽였다면, 도렌은 낮에는 은광산의 총책임자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한 게 전부였다.

‘이렇게 짧은 순간에 사람이 변하다니.’

드낙의 눈이 부관 고트하르드에게로 향했다. 그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저 친구는?”

“레아가 저에게 붙여준 부관입니다. 어찌나 아는 것이 많던지, 처음에는 게제라스님에게서 공부하던 시절이 생각날 정도였습니다.”

“레아라고 부르는구나.”

드낙이 짓궂게 말했다. 도렌이 들썩였다. 그 모습은 예전의 도렌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거센 반응이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서 실언했습니다.”

그 말에 드낙이 도렌의 어깨를 쳤다.

“우리 사이에 무슨! 괜찮다! 오히려 그렇게 따로 지냈는데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안심이다.”

드낙의 태도에 도렌도 웃음 지었다. 그가 한 실수 덕분에 다시 두 사람은 서로의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이내 늦은 밤이 되도록 술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에게는 큰 짐을 맡기게 될 것 같다.”

“어제 레아에게도 들었습니다. 중부 사령관으로 그녀를 발탁하셨다고.”

“맞다. 그리고 이실레아는 이번에는 너와 같은 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지.”

그 말에 도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하면 너무 큰 힘을 지니게 되는 것 아닙니까?”

“모르지. 너희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중립신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 뿐이라서 드낙은 조언을 해줄 수 없었다. 그가 명령했음에도 목적을 밝히지 않았기에 도렌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광산에서 일했으니, 세금을 관리하는 게 수순에 맞겠지.”

“세금 말씀이십니까?”

“그래. 영지의 세금이 제대로 들어오는지를 관리·감독하는 일이다. 국세청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 것이다.”

도렌이 침을 삼켰다. 세금이라는 분야는 엄청난 권력이었다. 그걸 잡는 순간, 모든 이들이 조심스러워하고, 좋은 관계만 맺으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이실레아에게 큰 도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난 오우거를 잡으러 가야 한다. 플래티넘 왕가는 개 같은 놈들이지만, 이주는 엄두도 못하고 태어난 곳에서 그냥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무슨 죄냐?”

드낙의 말에 도렌은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착하게 살았지만, 적극적으로 영웅이 되려고 하지 않은 게 그였다. 엉겁결에 미모에 홀려서 이실레아와 결혼했지만 부관인 고트하르드를 통해서 현실이라는 놈을 제법 알게 된 것이 도렌이었다.

현재 그의 가장 큰 고민이 이상과 현실에 대한 것이었다.

“맡겨만 주십시오. 제 몸에 오물이 묻더라도 동부를 지켜보이겠습니다.”

“그래. 공부만 하지 말고 브릴리언트 가문의 비전이라도 많이 배워라. 언제든지 써먹을 날이 올지 누가 알겠어?”

“그렇게 하겠습니다.”

드낙은 도렌을 돌려보냈다. 뒤에서 지켜보던 고트하르드 또한 고개를 푹 숙이며 내성을 빠져나갔다.

“고트. 어떻게 생각하느냐?”

도렌의 말에 고트하르드는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제가 의견을 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가주께 말씀을 드려보는 게···”

“그 정도란 말이지.”

도렌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점점 큰 운명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은고원에서 수련을 할 때는 마치 모든 걸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호수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감당키 어려운 것이 떡하니 쥐어졌다.

‘영지의 세금을 관리···’

대체 그는 어디까지 자신의 권력을 남에게 주려고 하는 것인가? 도렌은 감사함과 두려움과 그가 지닌 대범함에 마음이 엉망진창으로 변하는 걸 느꼈다.

이실레아는 자정에 도렌과 마주 해야 했다.

“영주님이 뭐라고 했는지 듣기 전부터 불안한데···”

능숙한 그녀의 태도에 도렌이 쓰게 웃었다. 하지만 이실레아의 냉철한 이성을 마주하면서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그녀만큼 강인한 여성은 보기 힘들었다. 도렌은 그것이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