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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논공행상
이실레아 브릴리언트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새벽이었지만, 그보다 더한 추위가 느껴지고, 겨울답지 않은 공기가 코로 맡아졌다.
‘비가 오겠다.’
겨울비는 썩 좋지 않았다. 비가 내린 뒤에 웅덩이는 밤에 차가운 빙판이 되기 때문이다. 길을 점검해야 했고, 이는 순찰병들이 담당하는 게 보통이었다. 자연히 치안의 안정성 또한 떨어진다.
군이 담당하는 업무를 해소해야 하지만, 동부는 지금 오크 대침공으로 인한 논공행상 준비로 바빴다. 드낙이 비 내린 웅덩이에 관심을 가질 리가 만무했다. 거기에 이실레아가 병사들이 해야 할 일이 줄어들게 놔둘 리 없었다.
밑에 병사들은 곤욕이지만, 위에 사람에게 있어서 업무는 그 세력이 지닌 힘이었다.
‘비가 왔다고 해서 치안이 무너져서는 안 되겠지.’
기회만 된다면 성인 남자 상체만 한 빵도 훔쳐가는 게 이 세상 시민들의 일상이었다.
새벽수련을 하고 있던 이실레아는 병사의 방문을 받았다. 시종이 없는 불파겐은 병사로 대충대충 드낙의 전언을 돌리고 있었는데, 정말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오전에 내성 원탁회의실로? 직급이 아직 해결되지 않아서 답답해진 건가.’
벌써 직급문제로만 5일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원탁회의 때만 열정적으로 할 뿐, 그 외의 시간에는 모두 다른 곳으로 관심이 가 있는 게 현실이었다.
드낙이 벌여놓은 일을 생각하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직급을 결정하는 건 물론 중요하지만, 결국에는 협의가 이루어지는 문제였다. 반면 조각난 권리를 먹기 위해서는 이번에 새로 득세한 세력과의 연계가 필요했다.
‘하나하나 찢어졌지만, 못 모으는 것도 아니야.’
<상인연합>부터 <물의 기술관>에 레이시아 공주를 통해서 <신성한 방패>의 사제들마저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으니 눈이 돌아갈 만했다.
특히나 이실레아는 거의 모든 세력과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드래곤볼을 가장 빨리 모을 수 있는 건 그녀였다.
내성으로 향하는 길에 이실레아는 겐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또한 항상 먼저 움직이기에 만나는 건 필연과도 같았다. 서로 성실했다.
“오늘 직급의 주요 쟁점이 해결될 것 같지 않소?”
“지방과 중앙의 힘이 서로 다른데, 영주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
동부 불파겐의 서쪽을 지키는 서사령관.
중앙을 지키게 될 것인 중앙사령관.
그 직급을 정하는 건 이실레아와 겐에게 중요했다. 누구보다 그 자리에 어울리는 두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겐은 시작부터 충신 포지션을 꾸준히 유지해오고 있었기에 정치적으로 중립노선을 달리고 있었다.
이실레아와는 전혀 반대되는 길이었다.
그 외의 쟁점이라면 문무에 따른 직급의 차등이었다. 귀족 중 무인 출신이 많았기에 관리들의 직급은 형편없을 정도로 낮게 매겨지고 있었다.
드낙은 이것 때문에 몇 번이나 으름장을 놓았지만, 피를 뿌린 길을 걷는 기사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가 결코 사사로운 일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물론 전쟁터에서는 필요하다면 어린이도 죽이는 게 드낙이었다.
하지만 내성의 원탁회의장은 전쟁터가 아니었다.
먼저 입장해서 시종들을 통해서 다른 것을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많은 이들이 참석했고, 의자에 앉지는 못하지만 초대받은 이들 또한 많았다. 문인과 자유기사도 보였다.
넓게 만들었음에도 사람들로 가득 찰 정도였고, <오크 대침공>의 주조역들은 모조리 모였다고 해도 무방했다.
드낙은 상석으로 올라갔다. 베바란스 총관과 함께 왔는데, 총관의 표정이 심각할 정도로 좋지 않음에 이실레아는 또 하나의 태풍이 왔음을 직감했다.
“오늘 이렇게 와주어서 고맙다. 이곳에 모인 자들은 오크의 대침공에서 활약한 자들이다. 하나같이 그 공이 가볍지 않지만 세상은 그에 차등을 두고, 공을 논할 수밖에 없다는 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상투적인 말이 오가고, 그는 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그간 시간을 충분히 줬음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내가 직접 일을 해결하려고 한다. 반대는 받지 않을 것인데, 혹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있는가?”
주변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꾸중부터 해놓고 저렇게 말하는데 감히 입을 열 자는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게제라스 문인뿐일 것이다. 이상에 빠진 채 현실을 못 보는 멍청이들이나 분노한 권력자에게 대들 수 있었다.
“먼저 이 자리에 초대된 자들은 모두 장원 기사를 추천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한다. 베바란스 총관! 명단을 말하라!”
“예!”
베바란스 총관이 일어나자 뒤에 있던 관리가 긴 양피지를 건네주었다. 실로 양피지가 주르륵 연결되어있었는데 상당한 길이였다.
‘저 정도로 길다면 미리 적었을 터.’
창백한 총관의 모습을 봤을 때, 그 또한 당일 알았을 터였다. 그 말은 저 번거로워 보이는 긴 양피지를 드낙이 남몰래 준비했으며, 친필로까지 모든 공적자를 쓰고, 그에 대한 보상 또한 준비했다는 뜻이었다.
“크리안 폰발라! 추천인 2명!”
이름이 호명될수록 일희일비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건 한 마디로 <장원 기사 계약서>를 뿌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부에 기사가 없는 마을이 많다고 해도 중요한 지방에 있는 마을은 한정되어있었다.
“마지막으로 이실레아 브릴리언트! 추천인 30명!”
탄탄대로를 달리며 드낙의 옆에서 실수 하나 하지 않은 이실레아는 가장 많은 장원 계약서를 따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전혀 밝지 못했다.
‘미쳤어. 이건···수습할 수가 없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음으로는 기술과 대시험을 내후년으로 미룬다!”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2년 뒤에는 많은 이들이 기를 쓰고 역량을 올릴 것이 뻔했다. 거기에 신분의 차이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물의 기술관을 설립한다. 관리는 에오윈 가문과 엘라한 가문이 맡는다.”
“자, 잠시! 영주님!”
이실레아가 일어났다. 이렇게 많은 자 앞에서 말하는 것은 공인이며, 되돌릴 수 없다.
“이미 사대시험을 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번복한다면 명예가 실추될 겁니다.”
“괜찮다. 시민들을 위해서 2년의 교육 기간을 만들기 위함이다.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럴 말을 할 처지인가!”
드낙이 눈알을 부라렸다.
“내가 그렇게 시간을 많이 줘도 적당히 하지 않은 건 그대들 아닌가?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알아서 잘했어야지! 이렇게까지 날 움직이게 하다니, 나는 정말 그대들에게 실망했다!”
“······”
‘내가 신이야? 그걸 알게.’
이실레아는 화딱지가 났지만 참았다. 보통 꼴통이 아니었다. 기침을 했다고 머릿속에 악마가 들었다니 뭐니 지껄이며 철퇴로 머리를 치는 놈이나 다름없었다.
“베바란스 총관! 이실레아 경! 겐 경! 그리고···”
드낙은 총 15명의 주역과 조역들의 이름을 성심성의껏 불렀다.
“이들 15명은 3일 내로 논공행상을 끝내도록. 아직도 직급에서 어물적거리고 있느냐! 그게 안 된다면 내가 독단으로 모든 걸 결정하겠다. 이상! 모두 되돌아가라!”
드낙은 그대로 원탁회의를 파(破)했다. 사실상 통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너도나도 외쳤다.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다려주십시오! 영주님! 윽!”
상석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온 드낙은 무식하게 인파를 지나갔다. 감히 잡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고, 앞을 막아섰지만, 코앞까지 드낙이 밀고 들어오면 눈을 내리깔고 옆으로 피했다.
그런 상황에서 베바란스 총관이 허둥지둥 이실레아에게 다가가서 외쳤다.
“이실레아 경! 어떻게 할 수 없소? 이대로 되면 끝이오! 끝!”
그녀는 베바란스를 힐끗 보더니 고개를 돌려서 그대로 회의장을 나가버렸다. 베바란스 총관은 나가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총관! 잠깐 나 좀 봅시다!”
“베, 베바란스 총관! 중부는 반드시 내가 가져가야 하오!”
베바란스는 밀려드는 기사들을 보며 눈을 감았다.
‘지옥이다. 이건. 지옥이 분명해.’
옷깃이 잡아당겨 지고, 머리카락이 뜯겨야 했다. 그 정도로 기사들은 눈이 멀어있었다.
굶어있는 곰에게 생닭을 던져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베바란스 총관은 저항을 포기했다. 여기서 수습을 하려고 하면 상황은 더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상의가 다 찢어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진정할 수 있었다. 물론 스스로 진정한 것은 아니었다.
“허, 허헉. 수, 숨이···!”
인파에 휩쓸려 후끈한 공기 때문에 답답함을 느끼면서 패닉에 빠진 총관이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쓰, 쓰러졌다! 사제를 불러와라!”
“내가 잘 아는 연금술사가 있다! 어서 이쪽으로!”
“어딜!”
기사들의 땀과 외치면서 튀는 침으로 범벅이 된 베바란스 총관은 혼이 나간 채로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이실레아는 입구에서 고개만 돌려서 그 지옥도를 보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성큼 내성밖으로 향했다.
‘남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노력해도 그 성과는 낮다. 지금은 밖에서 해야 할 일을 선점해야 한다.’
*
드낙의 명령으로 벽보가 교체되었다. 당연히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기존의 기술자들이 불만을 품고 내성문으로 몰려왔다. 당연히 드낙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아랫것들이 알아서 처리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권력을 양도했다.
세금도, 마을도, 군대도.
모두 분배할 마음을 먹었다. 권력을 주워 먹었으면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해산해라!”
“이실레아 기사님! 저희들의 말씀을 들어주십시오!”
‘벌레같은 놈들.’
그녀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지금도 레이시아 공주와 독대를 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내 부관이 사정을 보고, 들을 것이다!”
<가르푼 브릴리언트>이 말을 탄 채 다가왔다.
“웃···”
대장장이를 비롯한 기술자들이 너도나도 뒤로 물러섰다. 가까이서보면 신장의 차이가 두 배 가까이 나는 게 사람과 기병이었다.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일렬로 빨리 서라! 이름과 연락이 가능한 주소를 기입해라.”
진정시키기에 최고로 좋은 방법은 일을 하는 것처럼 기만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러는 척을 하는 이상, 화가 누그러지고 그 이후에는 적당히 안 된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불같이 타오르는 분노는 강렬한 만큼 빠르게 식을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조용히 모든 걸 해결해야 해.’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곳곳에서 일어나는 소동을 잡기 위해서 움직였다. 그녀의 머리 위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혼란은 비와 함께 싹 사라졌지만, 술집이나 여관마다 떠드는 소리는 빗소리에 상관없이 커지기만 했다.
특히나 기사 계급은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날 추천을 안 해준다고! 내가 식량을 대주지 않았나!”
“하지만 다른 이들에 비하면 적은 수준이었다.”
“그래도 내가 있었기에 병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
“그마안! 나는 4명을 선택할 수 있고, 네가 가장 순위가 낮아!”
오크 대침공을 통해서 공을 얻은 기사와 그렇지 않은 기사로 나누어진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특히 내쳐진 자유기사들의 독기는 심상치 않았다. 그들의 숫자 또한 많았고 이들은 병사를 뽑는 전투과로라도 진출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몇몇 자유기사들은 공신이라 불리는 자들에게 방문했지만, 그들은 그럴 곳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직책, 직급, 문무를 다르게 하면서 복장은 통일하는 것 등을 빠르게 결정해나갔다.
드낙의 행보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기사들이었지만, 가장 큰 혼란을 겪은 것은 관리들이었다.
“추천제가 있는데 왜 안 된다는 건가!”
드낙이 명령했지만, 그것을 이행하는 것은 행정을 보는 관리들의 몫이었다.
“이미 그 마을을 장원으로 두겠다고 하신 장원 기사가 계십니다.”
“웃기는 소리! 그 기사의 공적 순위는 몇 위인가? 거기에 맞춰서 순차적으로 나가야지!”
“예? 하지만 영주님께서는···”
“말 한마디를 했고, 그것을 현실화하는건 관리의 몫 아닌가! 이건 엄연히 베바란스 총관의 실책이다!”
관리들이 기사들을 상대로 쩔쩔매고 있었다.
“뇌물을 먹었다고 다 이야기할까? 꼭 그렇게 해야겠나?”
“예? 무슨 뇌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너희 가족에게 뿌린 뇌물말이다! 내가 얼마나 썼는지 알아!”
“무, 무슨···!”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가족에게 뇌물을 떠맡기고 와서는 협박하는 기사도 있었다.
“여기는 마을이 없습니다만···”
“곧 생길걸세.”
“아니. 그렇게 말씀을 하셔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안 되는 법이 어딨나! 꼭 이 동부에 남아야 해! 그게 아니라면 여기 중부 쪽에 이곳은 어떤가?”
“마을이 없는데 거기에 권리를 주장하시다니요.”
“앞과 뒤를 바꾸는 것뿐이지 않은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빨리 일 처리를 해야 하지 않나.”
억지로 마을을 공(空)으로 세우고 나중에 마을을 만들려는 기사 때문에 갈팡질팡하기도 했다.
베바란스 총관은 15인의 상위 공적자들에게 먼저 우선권을 줬기에 그나마 혼란이 적었다. 거기까지 하지 않고 진짜 드낙의 말대로 공평하게 했으면 내청이건 외청이건 폭발했을지도 몰랐다.
“역시 공정한 총관이오.”
눈 밑이 검게 변한 이실레아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서로 짙은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담을 나누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일을 해주고 있었다.
“기사들에 대한 건 감사드립니다.”
그 말에 이실레아가 빙긋 웃었다. 드낙이라는 자연재해 앞에서 싸울 수는 없었기에 타협한 것에 불과했다. 이렇게보면 결국 베바란스 총관도 경험이 적었다.
“이럴 때 도와야지 언제 돕겠소? 그리고 그대도 직책을 공식적으로 받으면 직급이 정해질 테니, 아무에게나 존대하지 마시오.”
“예···”
베바란스 총관의 눈이 그녀가 들고 있는 계약서로 향했다.
그녀는 중부에 많은 장원을 얻길 원했다. 동부에는 자신의 가문이 있었기에 크게 투자하지 않았다.
힘을 모으기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두루두루 곳곳에 자신들의 세력을 집어넣는 게 더 중요했다.
‘게제라스와는 다르게 확실하게 뭐가 중요한지 안다.’
만약 그였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겠지만, 더 수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눈치가 없기 때문이다. 강한 자가 더 큰 것을 받는 게 공정하다는 걸 몰랐다. 그저 공평하게 나누는 것에만 집중했을 터였다.
이실레아는 성큼걸음으로 상인 연합으로 향했다. 기술과가 2년으로 미뤄지면서 상인연합은 기술자들을 빠르게 돈으로 매수하려고 하고 있어서였다.
‘정도를 모르는 놈들.’
당연히 막아야 할 일이다. 그러면서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드낙이 약속했던 논공행상 당일은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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