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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논공행상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인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안젤리카의 말에 페슬라 엘라한의 표정이 밝아졌다.
‘됐다.’
외척 중에서 가장 힘이 없었기에 다른 가문에 흡수될 날만 기다렸을 정도로 에오윈 가문의 식솔은 숫자가 적었다. 자연스럽게 개수작질을 하는 외척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작께서도 거부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오히려 상으로 적합하다고 여길 겁니다.”
“가만히 있어서 받는 상이라니. 조금 우습지 않습니까?”
“그만큼 다른 외척이 세력으로 개인을 누르려고 한 것입니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그렇게 믿은 놈들은 정치적으로 목이 달아났다.
그렇기에 에오윈 가문에게 불파겐은 상을 내려줘야 할 정도였다. 그것으로 확실하게 외척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다.
‘가만히 있는 것으로도 상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어필할 수 있지.’
가만히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워야 할 일인가? 그 면모는 자연스럽게 불파겐의 품으로 들어오고 싶어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후손까지 낳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에오윈 가문은 불파겐의 후예를 낳았다.
‘다른 연놈들에게 후예가 꼭두각시처럼 휘둘러지게 하고 싶지는 않겠지.’
“아, 하지만 후손이라고 해도 저희 가문성을 이어받아서···”
그 말에 엘라한 가문의 가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불파겐이 너무 관대해서였다.
‘고작 10명도 안 되는 소가문에 후손을 내어주다니.’
“크흠! 그래도 자식은 자식 아니겠습니까? 외척들이 위축된 지금이야말로 달려야 할 때입니다.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거기에 외척이 쥐죽은 듯이 지내고 있을 때야말로 확장할 수 있는 때였다.
“알고 있습니다.”
안젤리카가 그렇게 말하면서 아직 젖도 떼지 않은 실리번 에오윈(Silven Eowin)을 더욱 끌어안았다. 반드시 지켜야 했다.
‘정보의 진위를 떠나서라도 난 이 애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
서로 아이를 가진 시기는 비슷했지만, 후손이 가지는 혈통은 제각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유전형질의 불규칙성은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케이샤 킹슬레이가 낳은 파르지팔 킹슬레이(Parsifal Kingslay)가 마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정보. 그것이 안젤리카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자식을 받쳐줄 세력이 절실했다.
그녀는 엘라한 가주에게서 둥근 철구슬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작은데 좁은 수관을 말끔하게 청소할 수 있습니까?”
“마법이 주류가 아닙니다. 물의 정령이 가진 힘이 주된 힘입니다.”
안젤리카가 신기한 듯 살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마법적 지식은 있어도 마력이 없었다.
“한 번 사용해보셔도 됩니다. 그래야 더 설명하기 쉬울 겁니다. <수관 쇠구슬>은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에오윈 목조 저택의 수관은 구리로 되어있었다. 철은 비싸기 때문이다. 특히 동부는 더했다. 자원이 한없이 부족한 것이 동부였다. 오죽하면 은광산 하나를 먹으려고 대산을 넘을 정도였다.
다행이라면 에오윈 가문이 이주를 할 때, 계곡에서 나던 구리를 많이 챙겨왔다는 점이다. 동부에서는 몇 배로 불려서 팔 수 있었고, 남은 여분으로는 집의 수관을 만들었다.
콸콸콸! 꾸거거걱!
심한 소음 소리를 내며 수관으로 들어가며 물이 크게 출렁거렸다. 소리는 외부 배출구까지 이어졌고, 안젤리카가 그곳에서 코를 막은 상태로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10년 묵은 변비가 해소된 것 같은 것들이 싹 내려가는 모습에 안젤리카가 눈을 빛냈다.
‘이거라면 차고 넘친다.’
드낙의 이름으로 <수관 쇠구슬>이 팔릴 것이다. 명예 하면 드낙이었다. 그 큰 힘을 가지고도 숙청, 숙청 노래를 부르지 않고, 권력의 이양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었다.
*
‘귀찮다.’
환호받고 떠받들어지는 건 좋았지만,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드낙은 최근 권력자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직급 때문에 돌겠네.’
거기에 기술과 대시험에 대해서도 개입을 해야 했다. 그것도 큰 건이었다. 논공행상이 끝나고 바로 시험이 치러질 것이다.
‘아.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중립신에 의해서 불이 당겨진 드낙은 없었다. 어느 정도 만족하는 상황에서는 한없이 늘어지는 게 드낙이었다. 수능이 끝난 예비대학생과 같았고, 전역한 군인과 같았다.
‘그래도 해야겠지.’
아무리 드낙이 귀찮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건드려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상황이 이상하게 변할 것이다.
‘할 때는 하는 영주가 되어야지.’
기술과 전쟁에서 승리자가 되는 건 다른 사람이 되어도 그 주된 요인은 드낙이 되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독불장군으로 살았을 것이다. 다른 세력의 객장(客將) 노릇을 하며 그때그때 힘을 빌리는 식으로 살았을 터다.
‘직장인이랑 뭐가 달라.’
드낙이 몸을 일으켰다. <검은 회의>에서 닦달해서 얻은 방법이 있었지만 그건 고작 일거양득에 불과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지만, 드낙은 만족을 몰랐다.
“영주님. 안젤리카 에오윈 경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부인이라기에는 기세가 무인다운 안젤리카가 도착했음을 병사가 알렸다.
평범한 갈색머리가 가장 먼저 드낙의 눈에 들어왔고, 그다음에 눈이 마주쳤다. 점이 여러 개 박혀있는 눈동자는 이질적이었고, 누가 봐도 평범하지 않은 기사임을 알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가장 눈에 잘 띄기 때문에 견제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불파겐처럼은 아니겠지만.
“정말 오랜만입니다.”
외척과의 거리를 두기 위해서 부인과는 존대를 하고 있는 게 드낙이었다. 이것은 거래라고 표면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으며, 그들을 최고로 대우해주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제는 부질없었지만, 습관이 들여져 있었다.
“실리번은 잘 키우고 있습니까?”
화제는 당연히 실리번 에오윈에 대해서였다.
“예. 애초에 마력을 타고나서 병에 걸린 적도 없고, 잘 자고···”
무인 가문 + 무인가문이었기에 우량아이기도 한 것이 실리번이었다. 탈이 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고르곤을 잡기 전에 태어난 아이였지만 마력을 품고 태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공통 화제에서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수관 쇠구슬?”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대량생산을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수관에서 걸리지 않기 위해서 동글동글하게 아주 공을 들여서 만들어야 했다. 내부 또한 꽉 차야 하기 때문에 거푸집을 사용해도 힘들 수 있었다.
구슬을 만드는 것은 엄청나게 높은 기술과 숙련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달구어진 쇠를 부을 때, 공기가 스며들 수 있었기에 불량품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도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학적 지식이 필요했지만, 드낙이 그딴 걸 알 리가 없었다.
현대인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공학적 지식을 실천할 수 있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또 달랐다.
‘하수관은 물론이고 상수관에서도 충분히 쓰일 수 있어.’
물때 제거를 위해서 철과 온갖 광물을 소비하기보다는 <수관 쇠구슬>을 통해서 꾸준히 청소하는 게 이득이었다.
사람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잉여인력은 다른 분야로 뻗어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마탑에서 힘을 보태드렸으면 합니까?”
수관 쇠구슬과 기술과 대시험을 연관 짓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드낙이 냈다. 안젤리카는 본인이 직접 입으로 말해서 딴소리를 못 하게 하려는 것으로 짐작하고 심호흡을 하고 입을 움직였다.
“엘라한 가문과 협력해서 <물의 기술관>을 따로 세우고 싶습니다. 위치는 <엘라한 토성>입니다.”
“흠.”
드낙이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기술관 교육 기관을 말씀하시는 것 맞습니까?”
공기업을 사기업으로 만드는 것과 같았다. 상하수도 사업은 그 관리까지 생각하면 비옥한 평야와 같았다.
“예. 생각보다 큰 이권입니다.”
안젤리카는 변명의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드낙은 그 모습에 그녀가 뭘 쥐고 있는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몇 가지 없었다.
‘다른 북부 놈들과 비해서는 나쁘지 않다는 점. 밀어줄 가치가 있다는 것 정도인가.’
동시에 엘라한 가문과 협동으로 추진해도 그 숫자가 적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 빈공간을 다른 이들이 채워야 했고, 두 가문의 수준을 생각하면 외척이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었다.
‘한 번에 많은 걸 해결할 수 있을지도.’
“만약 그렇게 해주신다면 기술과시험은 내후년으로 미루고 싶습니다.”
“그래야 할 겁니다.”
‘알아서 적정선을 지켜준다는 소리까지.’
기술과를 통해서 진출하는 귀족수는 자연히 낮아질 것이고, 시민 합격자는 높아질 것이다. 교육을 받기 때문이다. 2년이면 충분했다.
‘기를 쓰고 성공하고 싶어 하고, 실기까지 생각한다면···’
나쁘지 않았다. 동시에 교육을 받는 시간을 생각하면, 핏빛쥐들을 통해서 개짓거리 하는 놈들을 먼저 가려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쉐도우 위스퍼>라는 그럴듯한 소문까지 나 있는데, 안 쓸 수는 없지.’
편지로 전달하는 식이라면 얼마든지 핏빛쥐들의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 감사부터, 협박까지.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이득이었기에 드낙은 호쾌하게 양피지를 가져왔다. 단번에 권한을 써내려갔지만 이내 펜을 멈췄다.
“흠···그래도 베바란스 총관의 의견은 한 번 들어봐야지 않겠습니까?”
“아! 예! 천천히 생각하시고 답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 구워진 고기를 먹지 못하고 냄새만 맡았기에 안젤리카가 허둥거렸다. 서둘러 인사를 깍듯하게 하고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본 드낙이 집무실 의자에 앉아서 기댔다.
‘역시 난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제갈량처럼 멋진 전략을 내지는 못해도, 다른 사람들의 허를 찌르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렇기에 드낙은 검은 회의를 닦달했다.
“똑똑하다며! 귀족이 그런 것도 못해?”
“미친놈이···”
세파리아스가 드낙의 하찮은 도발에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프라이드는 범인(凡人)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다. 자신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작은 도발에도 자존심이 꿈틀거렸다.
“누누이 말했을 텐데. 이실레아를 비롯한 귀족들은 현재 피라미드 구조를 고정하고 싶어한다. 사회계급의 이동을 둔화시키고 막아야 하는 게 그들이다.”
난세에 천방지축으로 뛰는 계급의 변화. 그것은 기득권이라면 반드시 다시 틀어막아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을 막는 것은 필히 해야 할 일이다.
“반드시 막아야 하기에 예상하기가 쉽다. 그렇기에 허를 찌르는 것은 좋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너도 알텐데?”
“아~역시 불파겐은 그 정도에 불과하구나.”
훅!
깔끔한 정권이 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드낙은 가볍게 피했다. 세파리아스에게 맞고 산 지도 이제 2년째였다.
“어이어이. 그런 직선 공격에 내가 당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이거 나도 얕보였···”
“건방진 놈. 시건방진 놈!”
한바탕하고 대차게 깨진 드낙이 드러누운 채 말했다.
“다른 방법이 정말 없어? 뭔가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은데.”
“반짝하고 끝날 거라면 아예 하지 않는 게 좋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뭐 다 죽여라. 심장을 쥐고 뜯어내라. 그런 건 아니겠지?”
“네 녀석에게 불파겐의 처세를 하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 말에 드낙이 상체를 일으켜서 제법 진지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말은 그렇게 해도 불파겐만큼 큰 땅을 가진 귀족도 없었다. 수많은 지식이 그에게 있었다. 성향 때문에 밖으로 나오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난 다르지.’
드낙 맞춤형 답안지를 내줄 수만 있다면 세파리아스는 발바룽보다 더 좋은 책사가 될 수 있었다. 그게 안 되는 게 문제일 뿐이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를 것 같았다.
“총관을 불러서 <동부 장원 기사 추천제>를 추진해라. 오크 대침공의 주역들을 통해서 <장원 기사>를 대량 배출하는 것이다. 넘쳐나는 게 마을이다. 지방 영향력을 생각하면 편을 먹는 게 최고다.”
“그렇게 하면?”
“어차피 물의 기술관을 설립하면서 기술과 시험은 나중으로 미루어질 것 아니냐? 그 완충제 역할을 할 수 있겠지.”
하찮은 시민이 지닌 좁쌀만 한 영향력보다는 귀족을 대우해주는 모습이 절로 보였다. 기득권이 지닌 영향력은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가기 바쁜 시민이 한자리에 모여도 그건 결코 오래갈 수 없었다.
“또한 기사들이 엘라한과 에오윈의 일에 훼방을 놓지 않게 될 것이다. 그들 때문에 자신들이 받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서로 같이 먹은 경우였다. 사이가 좋아질지는 모르지만, 싸우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큰 맹점이 있었다.
“외척은 완전히 제외되었네?”
드낙의 말에 세파리아스가 흉포하게 웃었다. 보는 사람을 오싹하게 할 정도로 무서운 웃음이었다.
“너도 오늘부터 외척에 대해서는 확실히 해라. 또 봐주거나 그런 건 절대 용서치 못한다. 없는 사람처럼 여겨라.”
그가 주먹을 쥐었다. 철저하게 자신만 생각해서 만든 조언임을 드낙이 그제야 깨달았다.
“개처럼 기어서 너한테 애걸할 때까지 멈추지 마라. 복수는 그런 것이다. 지역 유지? 웃기지 말라고 해라. 그 자리는 오크 대침공에 참여하고 죽어간 자유 기사들이 들어갈 자리임을 명시해서 명예도 얻어라.”
드낙이 침을 삼켰다. 쓰러진 상대를 짓밟고, 걷어차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건 너무 악랄했다. 왜냐하면 드낙은 항상 그렇게 얻어맞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하기가 내적으로 부담되었다. 반면 세파리아스는 항상 강자의 위치에 있었다.
죽음의 목전까지도 그는 누구에게 목이 베어지지 않았다. 그저 출혈로 사망했을 뿐이었다.
“가장 편한 길 아니냐? 한 번의 행보로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다.”
“자잘한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
세파리아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드낙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언제나처럼 밑에 놈들이 알아서 수습하겠지.”
그 말에 드낙이 웃음을 빵 터트렸다. 결국 고생하는 건 자신이 아니었다. 그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긴, 욕심이 있긴해도 유능한 인재들이 많으니까. 어떻게든 서로 적정선을 지키겠지.”
낄낄거리는 드낙을 보며 세파리아스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누가 말리겠냐. 저놈을.’
세파리아스 불파겐은 도저히 드낙이라는 인간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운 정 때문에 선을 잘라낼 수도 없게 되었다.
정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적어도 세파리아스에게 있어서 드낙은 개새끼였지만, 진심으로 미워할 수는 없는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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