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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논공행상
세리안 불파겐은 꿈을 꾸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남부 왕국의 겨울, 부녀(父女)는 겨울의 늑대를 찾으러 여행을 떠났다. 불파겐 역사상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가장 유명했지만, 그보다 더 뛰어난 딸이 태어났으니 영지 일을 버리고 그녀에게 몰빵을 하기에 충분했다.
불과 11살이 되던 해 <일류의 흐름>을 터득해서 일류 불파겐 기사를 고꾸라뜨린 것이 세리안이었다.
체급 차이를 메꿀 수 있는 것이 <상승(常勝)의 묘리(妙理)>였다.
묘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호흡이다. 상대의 호흡의 흐름을 끊는 것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호흡조절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마라톤을 하는 마라토너의 규칙적인 호흡을 엉망으로 만들면 완주를 절대 못 하는 것처럼, 호흡은 인간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 제대로 된 호흡을 하지 못하게 되면 42km를 달리던 사람도 3km밖에 못 달려버린다.
그것을 어린 나이에 터득한 세리안은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고, 그것이 그녀를 야수의 곁으로 끌고 갔다.
“컹! 컹컹컹!”
겨울에도 늑대는 살아간다. 그리고 세파리아스 불파겐과 세리안 불파겐은 그들의 사냥방법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키가 작은 세리안은 세파리아스의 팔에 앉혀져서 늑대들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그 야생성.
그 흉포함.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떠냐. 이 추운 겨울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늑대들의 모습이.”
“처절합니다. 사냥해내지 못하면 죽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어떻게서든 잡아먹는다. 그리고 살아남는다.
곰을 잡는 늑대들은 지독했다. 세리안은 그 모습에 매료되지는 않았다. 처절하다는 것은 곧 추하다는 뜻이다. 항상 전력을 내지 않고, 위에서 군림하는 세파리아스를 존경하고 있는 게 세리안이었다.
늑대들의 절박함은 그저 나약한 놈들이 발톱을 세우며 세상을 살아가려고 발악하는 구질구질한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천박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사냥이 끝났군. 왜 곰이 늑대들에게 사냥당했는지 알고 있느냐?”
“다수에게 포위되고, 공격을 신중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장기전에 돌입했고 죽고 말았습니다.”
“일반인이라면 그렇게 말했겠지. 아무리 곰이라도, 다수의 늑대에게 포위되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그럴만하다고 말이다.”
세리안은 세파리아스의 목소리에 담긴 열기(熱氣)에 압도됨을 느꼈다. 그 뜨거운 기운을 감지할 정도로 세리안의 이성은 뛰어났다.
세파리아스가 사냥을 마치고 피와 고기를 탐하는 늑대들에게 난입했다.
“크르르!”
“크으렁! 컹!”
뒤가 없는 늑대들은 으르렁거리며 세파리아스와 타협을 하려고 했다. 때때로 사냥감을 두고 곰과도 같이 식사를 하는 게 늑대들이었다. 하지만 불파겐에게 타협은 없었다.
덤비는 놈은 죽였다. 그러고 나서 세리안을 불렀다.
손으로 늑대의 어금니를 보여주었다.
“이 정도 어금니면 곰의 가죽을 뚫기 충분하다. 하지만 어금니는 턱 안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지친 상대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
“예. 하지만 어금니로 물면 이빨을 빼기가 힘들 겁니다.”
“그래. 물면 끝이다. 그때부터는 곰도, 늑대도 정면승부뿐이다. 그렇기에 늑대는 곰의 체력을 최대한 빼앗아야 한다. 자신의 어금니를 깊게 박고. 자신 또한 살아남을 수 있게.”
세파리아스의 손이 늑대의 앞니로 향했다. 어금니에 비해서는 형편없는 이빨이 앞니였다.
“늑대의 앞니는 형편없다. 하지만 물고 바로 뗄 수 있지. 물면 고통스럽기에 곰은 다가오는 늑대들을 위협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물어서야 가죽을 뚫을 수 없다.”
세파리아스가 몸을 일으켰다. 세리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린 세리안에게는 너무나도 큰 산이다.
“불파겐의 상황도 이와 같다. 앞니로 물고 떼고를 반복하며 곰이 지치기를 기다리는 늑대들은 지금도 불파겐을 약화시키려고 버둥거리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느냐?”
세리안이 중얼거렸다.
“늑대들이 못 덤비게 해야 합니다···”
“맞다. 다시는 덤비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어금니로 물기 전에 앞니로도 못 물게 만들어야 함이다.”
그 말을 듣는 내내 세리안은 피냄새를 맡았다.
“알아들었느냐? 작은 건방짐에도 죽는다는 걸 안다면 앞니조차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공포다.”
“공포.”
세리안의 말에 세파리아스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세상에는 늑대들이 많다.’
겉으로는 양으로 보이고, 얌전해 보인다. 하지만 짧고 깊게 박히지 않는 앞니로 이 사람, 저 사람을 물고 본다. 그리고 어금니를 박아도 되는 놈이 있다면 앞니가 아니라 어금니로 그 목을 물어뜯어 죽인다.
‘그게 세상이다.’
얕보이면 착취당하고.
약해 보이면 경쟁에서 밀려난다.
겉으로라도 강해 보이면 누구나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게···진리다.’
햇살이 나뭇잎에 비치는 아름답고 밝은 녹안(綠眼)이 세파리아스의 모습을 담았다. 소녀는 때때로 볼 때마다 전율이 돋고, 팔뚝에 소름이 끼치는 아버지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었다.
이성이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심신이 안정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세파리아스 불파겐 정도의 존재가 아니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게 세리안이었다.
모든 것은 과유불급(過猶不及). 인간에게 있어서 오우거의 업이든, 엘프의 업이든, 감당하기 힘든 것은 똑같았다.
*
축제는 성황리에 끝을 맺었다.
“정원에서···그냥 확!”
“진짜로 그런 소문을 들었다고?”
축제가 끝나도 드낙과 레이시아에 대한 무성한 핑크빛 소문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들떠서 똥과 된장조차도 구분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드낙은 착실하게 오늘을 살고 있었다. 게으름의 전형인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태평하게 지내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아직까지 세파리아스에게 얻어터지면서 <상승의 묘리>를 배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배운다고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수에게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그래서야 터득했다고 볼 수 없었다.
새벽수련은 물론이고, 검은 문에서도 세파리아스에게 구르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아무리 능력치가 좋아도 이 세계는 게임 세계가 아니었다. 수치로 아무리 뛰어나도 세파리아스라는 아성을 뛰어넘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것이 드낙이었다.
‘전초극의 오른팔에도 <약점>은 존재하니까.’
대영웅(大英雄)이나 되어야지 알 수 있었다. 당연히 드낙이 지닌 전초극의 오른팔이 지닌 약점은 이미 세파리아스와의 대련에서 드러났다.
‘그게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건 세파리뿐이겠지만.’
남들은 사기라고 말하는 걸 오히려 약점이라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은 실로 두려울 정도였다.
촤악!
드낙은 새벽수련으로 땀에 젖은 몸에 냉수를 끼얹으며 오늘도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공개 재판이 있는 날이었다. 제법 많은 이들이 외투를 껴입고 중앙광장에 아침부터 모여있었다.
500명에 달하는 자들이 심판을 받게 되어 있었지만, 오늘은 그중에 가담자 300명에 대한 재판이었다.
드낙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영주이기에 재판의 주체가 되어야 했다. 현대에서 판사가 하는 일을 해야 했다.
“공개재판을 시작하겠다.”
가담자들은 한 곳에 보여있었는데, 그 행색이 추레했다. 모두 잠을 못 자서 피폐해져 있었다. 외청에 돈을 찔러넣고, 내청의 관리와 연을 만들 정도로 성공한 자들이 한순간에 몰락했다.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중에 대부분이 동부 출신이 아니었다. 외부에서 들어왔기에 그들을 위해 힘써줄 사람은 모두 다른 곳에 있었다. 가족조차도 이 자리에 없었다.
드낙은 그들 하나하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죄수 번호로 매겨서 악명이 퍼지는 것조차 막았다.
“이들이 저지른 행위는 모든 이들을 공평히 대해야 하는 관리들을 부패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 이름을 더럽혔다!”
특히 드낙은 지독할 정도로 자신이 이번 일로 불명예를 얻었다고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해야 할 일을 하고 돌아와 보니 악독한 놈들에게 명예가 추락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명예를 지켜줄 관리들에게도 배신당했음을 소리쳤다.
강자의 피해자 코스프레만큼 무서운 것이 없었다.
포승을 당한 채 몸이 묶이고, 입에는 재갈이 물렸으며 얼굴조차 천이 덮여서 가려져 있었기에 반박조차 못 하는 것이 가담자들이었다.
이들에 대한 처우는 그 어떤 반대도 없이 일사천리 됐다. 정오가 되기도 전에 줄줄이 묶여서 짐마차를 타고 은고원 마을로 향했다. 어린아이들조차도 그들에게 돌을 던지고 낄낄거렸다.
동시에 중앙 광장에서는 가담자 중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한 50명이 처형당했다. 그 목은 호수 마을 밖에 효수되었다. 시체 또한 그대로 버려졌다. 누구도 그 시체를 수습하려 하지 않았다.
신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죽은 사람에 대한 예우보다는 산 사람을 더 살리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레이시아 공주를 통해서 드낙에게서 기도문이라도 읊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드낙은 죄를 지은 사람이 용서받을 수 있다면, 다른 자들도 그 믿음으로 남들을 해하고, 타락시킬 것이라며 거절했다.
“미래를 알고 있다면 읊으시오.”
그런 드낙의 말에 사제 중 누구 하나 말을 하지 못했다.
관리들에 대한 재판은 암암리에 이루어졌다.
“더는 관리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축제 덕분에 덮어졌고, 가담자들로 인해서 분노도 삭여졌으니. 충분할 겁니다.”
더는 관리들의 평판이 낮아지면 안 된다는 베바란스 총관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물론 드낙 또한 관리들의 평가가 한도 끝도 없이 내려가는 걸 막고 싶었다.
‘내가 떠나야 할 때가 언젠가는 오니까.’
그들은 가담자들과는 다르게 새벽녘에 조용히 은고원 마을로 끌려가게 되었다. 똑같은 죄를 지어도 직위에 따라서 다른 대우를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같은 성폭행범이라도 의사와 노숙자는 엄연히 다른 법을 받기 마련이었다. 비록 그 형벌이 똑같은 이름이라도.
시민들이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에 드낙은 베바란스 총관과 상의를 통해서 벽보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사대시험. 시기도 적절하다.’
조선시대 과거제를 본뜬 것이다. 동부가 커졌다는 것을 이실레아가 스스로 권력을 오등분하는 결단을 내렸을 때, 크게 깨달았기에 이런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다. 동시에 인재가 부족하다는 것을 진작에 실감하고 있어서였다.
크게 4개의 시험을 치기 때문에 사대시험이었다.
문과, 전투과, 마법과, 기술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기사의 등용문은 되지 못했다. 이 세계의 기사는 곧 귀족이었으며 상당한 교육을 받은 이들이었다. 4개의 시험에 모두 해당하는 능력치를 지니고 있었다.
‘엘리트라는 소리지.’
기병 한 번 운용해보지 못한 선비가 왜군을 상대로 대승하는 것도 이와 같았다. 두루 안다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가문에 대한 애착과 충성심이 기괴할 정도로 높았다.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사대시험이 있어야 했으며 동시에 등용관의 설립도 벽보에 추가로 붙여놓았다.
‘게제라스가 씨앗은 뿌려놓았을 터.’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한 시민을 관직으로 진출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시설이 꼭 필요했다. 하지만 아직도 동부의 잉여생산력과 수준은 교육시설을 난립시킬 정도는 되지 못했다.
‘차근차근 하나씩 설립을 해나가야 해.’
부족하다고 10개, 20개를 짓는다고 해도 가르칠 사람이 적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 게제라스의 경우에는 법을 맡아줘야 했으므로 교육에 쓸 수 없었다.
‘무직 문인들을 써먹는다.’
본래라면 죄를 지은 관리들을 쓰려고 했지만, 괘씸해서 그러지 않았다. 베바란스 총관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중앙 관리 다섯을 죽이지 않고, 넘어가 주었기에 더더욱 기분이 상해있는 게 드낙이었다.
쫌생이 같지만, 사사로운 감정이 깃들지 않은 행정이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드낙의 이런 감정이 깃든 권력행사는 평범하다고 할 수 있었고 지나치지 않는다는 평이 많았다.
다른 이의 판단에 따라서 손을 들어주기 때문이었다.
“어떤가? 시민들의 반응은?”
“뜨낙! 아주 난리입니다.”
집무실에서 핏빛쥐의 말을 들으며 드낙이 귀를 쫑긋했다. 그가 크게 집중하자 핏빛쥐도 긴 털이 송송 난 입 주변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숨결이 거칠어지고 흥분했다. 드낙이 너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어서였다.
“그래. 그래. 어서! 정확히 말해봐라.”
“뜨, 뜨낙!”
핏빛쥐가 팔을 버둥거리면서 온갖 이야기를 해주었다.
“고소하게 생각하는 시민도 있었습니다.”
“고소해?”
“예! 마탑과 대중 목욕탕이 있는 불파겐 중부로 이사를 간 시민이 많았는데, 호수 마을에 등용관이 설립되고 시험도 이곳에서 치르게 되지 않습니까? 이 때문에 떠난 사람을 고소하게 생각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아아.”
이사라는 건 돈이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면 그냥 고생길에 지나지 않고, 매우 힘들고 고된 나날을 지내야 한다. 쉽게 이사하기가 힘들었다.
“또, 다른 것도 말해봐라.”
들어보니 재밌었다.
“기술과를 치겠다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그건 그렇겠지. 대부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을 것이고.”
손재주만 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수관부터 시작해서 수로에 대한 관리는 귀족의 힘이기도 했는데, 이를 민간에게 돌리면서 그 힘을 빼앗고 싶어하는 게 문인들이었고, 드낙은 훌륭하게 속았다.
만인을 재능으로만 등용한다는 겉멋에 눈이 돌아가 있었다.
사대시험의 가장 큰 쟁점은 바로 <기술과>에 있었다. 수많은 기사들의 자재들 중에서는 무재나 문재가 없으면 기술과를 준비할 정도였다. 그것도 아니라면 막내를 기술과로 보내려고 하는 기사도 많았다.
드낙 혼자만 그걸 몰랐다. 그는 현대인이었고, 한국인이었다.
한국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사람은 아무리 좋아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세와는 크게 달랐다.
수로 관리자에 대한 귀족들의 모임까지 이루어지고 나서야 드낙이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미 배는 지나간 뒤였다. 그리고 <겨울의 논공행상>에 대한 논의가 내성에서 시작되었다.
“관복을 통일하고, 구분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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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시아가 인기가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