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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끝
드낙은 축제가 벌어지는 곳을 내성의 꼭대기에서 내려다보았다. 축제는 한창이었다. 집보다 더 큰 코뿔소가 피를 뿌리는 광경은 잔혹했음에도 강렬했다.
‘역시는 역시지.’
피로 가득한 곳에서 고기를 물로 씻는 것도 재미의 일종이었다. 드낙은 로마의 콜로세움과 검투사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현대에도 그런 자극적인 문화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다.
“우와아!”
살면서 그렇게 큰 고기의 산을 마주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비위가 상한 이들은 접근하지 않았지만 코가 마비되고, 다른 이들이 풍기는 활력과 열기에 감화되어갔다.
술까지 들어가니 더는 축제의 성패를 가늠할 필요도 없었다.
‘나도 내려가서 즐기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되겠지.’
아쉬워하는 드낙에게 겨울바람이 크게 불어닥쳤다. 눈을 감았을 때, 드낙은 무언가가 자신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
허리춤에 있는 검에 손을 얹었고, 벼락처럼 뽑았다. 부유감마저 체감해야 했다. <초월의 힘>이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베이는 게 없다!’
당혹감에 찬 그 눈에 검은 연기가 거침없이 그의 모든 것을 덮쳤다. 꿈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각성 상태의 드낙은 검은 연기가 뿜어내는 그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인간의 감각 체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뭔가가 그의 신경계를 모두 휩쓸고 지나갔다. 입을 쩍 벌린 드낙은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
정신을 차렸을 때 드낙은 검은 공간에 있었다.
‘<검은 꿈>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드낙은 아직 잠을 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이 모든 것이 끔찍한 악몽과 같이 여겨졌다. 왜냐하면···
“쿨록!”
기침 소리에 드낙이 크게 움찔하며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은 꼴사납기 그지없었다. 어두운 산길에서 호랑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굴었다.
‘중립신···’
밀랍처럼 생기 없는 흰 피부를 지닌 중립신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 봤을 때와 똑같았다.
색채 하나 없는 저 모습은 신이었다. 그 무감정. 무채색···
“신도 기침을 합니까···?”
드낙의 목소리는 지나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잘 못 들었겠지. 그것보다 챔피언, 상황이 바꿨다.”
“예?”
중립신의 무미건조한 모습에 작은 감정이 돌았지만 드낙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만큼 희미했다.
“동부 안정화를 빨리 해야 하는 이유는 챔피언인 그대가 부재중이라도 어떻게든 굴러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에 드낙이 빠르게 침착해졌다.
“예. 확실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드낙은 항상 동부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그게 드낙이 지닌 권력 구도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무력이 강한 일인으로 유지되는 세력이지만, 드낙은 언제나 동부에 있을 수 없었다.
‘오우거···제국···엘프···드워프···’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것들 투성이다. 그렇기에 중립신의 조언과 <검은 회의>를 통해서 현재의 권력구도를 만들어나갔다.
새로운 바람이 동부에 불었지만, 그건 밑에까지는 불지 못했다. 분다고 해도 게제라스를 통해서 불어오는 작은 바람에 불과할 것이다.
권력자가 바뀐다고 해서 생활 살림이 변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농사짓는 이는 농사짓고.
나무하는 자는 나무를 했다.
세금은 가벼워졌나? 가벼워졌다. 하지만 수탈은 그대로다. 그것을 드낙은 해결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큰 힘을 지녔는데, 하지를 못하다니.’
농부보고 마을을 다스리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국에게 왜 남부 왕국이 <야만인> 취급받는지 알겠어. 역량이 너무 부족해.’
어느 정도까지 올라와야 했다. 하지만 남부 왕국은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었다. 잉여 식량이 꾸준히 많아야 하는 건 물론이고, 동부에서 결코 내전이나 전쟁이 일어나서도 안 되었다.
전쟁은 그저 모든 것을 파괴할 뿐이다. 겉으로는 승패가 갈라지고,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인류가 쌓아올린 총량을 꾸준히 무너뜨릴 뿐이다.
그걸 막기 위해서는 동부는 일정량 이상의 덩치를 지니고, 쉽게 내전에 휩싸이지 않아야 했다. 그게 바로 세력의 분화이며 견제이며 협력이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까?”
“아니. 훌륭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상황이 변했다. 나의 챔피언아.”
“어떤 상황 말입니까?”
드낙이 즉시 물었다. 마치, 반항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였다. 세파리아스 불파겐은 그것을 보며 마음이 기분 좋게 들썩였다.
“마신과 마수는 이 세계의 업을 훔쳐먹는 도둑놈들이다.”
중립신은 감정 하나 담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업(業). 카르마(Karma).
그것은 초월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인간도 그 업을 쌓을 수는 있지만, 그 끝은 좋지 않다. 대표적으로 오우거를 토벌하여 홀로 그 목숨을 취한 플래티넘 왕족은 그대로 죽어버렸다.
그릇이 깨지다 못해 가루도 남기지 않고 소멸했다.
그런 의미에서 드낙은 특별했다.
심연을 들여다봤다는 것은 그 심연에 있는 것도 그를 본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드낙은 중립신의 것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드낙 또한 중립신과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있었다.
그 기괴한 관계는 중립신이 <테라(Terra)>를 구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업을 약탈하는 겁니까.”
“세상에 뿌려져서 던전이라는 이름으로 그 차원의 생명체를 죽이고, 그 업을 가로채는 것이다. 그 존재가 무엇을 믿고, 어떤 신앙을 가졌던 상관이 없지. 그렇기에 마신장은 그 누구보다 빨리 토벌해야했지만···”
마치 중립신의 이런 판단을 알아본 것처럼 상대는 평범하지 않았다.
“마신장이 벌써 움직였다는 말씀을 하고 싶은 겁니까?”
“마신은 통이 크다. 오우거의 그릇을 생각하면 한 개체가 가지는 업의 그릇이라고 볼 수 없지. 그런데 그런 그릇이 금이 갈 정도로 힘을 주었다. 그걸 지금에서야 알았다.”
중립신의 말에 드낙이 의문을 가졌다.
“보통 오우거보다 두 배는 큰 놈 아닙니까?”
“하하하.”
세파리아스가 웃는 소리가 드낙의 귀에 들려왔다.
“뭐!”
“너는 그럼 뭐냐?”
“아···”
드낙이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덩치와 업의 그릇은 상관없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드낙은 인간의 형태가 아닐 것이다. 드낙이 얻은 많은 업을 중립신이 가져갔지만, 그럼에도 인간을 아득히 초월하는 업이 드낙에게 있었다.
그게 바로 <검은 문의 능력들>이다.
인간 객체가 편하게 받아들이게 여겨지지만, 그것은 바로 업으로 만들어진 능력들이었다. 이미 드낙은 순수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인간의 탈을 벗는 게 어떤가. 나의 챔피언, 그리된다면 모든 것이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예?”
중립신의 말에 드낙이 듣지 못하는 척 반문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가장 쉬운 길은 장애물을 치울 수 있는 맹수가 되면 그만이다.”
그의 말에도 드낙은 주저했다.
“방법 중에 하나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인간이고 싶습니다.”
중립신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방법을 이야기했다.
“흉폭하고 난폭한 오우거는 그 그릇이 박살 나기 전에 드워프를 칠 것이다.”
중립신은 오우거의 정확한 공격로까지 파악한 듯했다. 하지만 믿기 힘든 일이었다. 가까이 있는 인간을 놔두고 왜 드워프를 노리는지 드낙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남부를 안 치고, 드워프요? 만약 그렇다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믿어라. 나는 전지전능하지는 않지만, 더 많은 걸 볼 수 있다.”
“예.”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언제든지 자리를 비울 수 있도록 해라.”
“예? 지금 가야 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중립신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남부 왕국에게서 공물을 2번 받은 것에 불과하다. 못해도 내년까지는 받을 것이다. 서부에서 활동하는 인간들이 소수라도 있으므로 마신장이 움직이면 포착할 수 있다. 그때를 위해서 내년까지 동부를 안정시켜라.”
드낙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방법을 고민할 필요는 없다. 내가 정해주마.”
“예?”
중립신은 이번에도 개입했다. 방관만 하던 중립신이 드낙의 방향성을 정확하게 가르쳐줄 정도로 이번 분기점은 까딱 잘못하면 모든 것이 망가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드낙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이번 검은 꿈은 놀람의 연속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마신장과 마신에게 관심을 쏟는 이유는 뭐지?’
중립신이 드낙을 물그러미 보더니 마치 그 생각을 읽은 것처럼 드워프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강철을 두르지 않아도, 강철을 두른 것과 같기에 광산의 종족이라 불리는 게 드워프다. 엘프들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는 종족이다. 마신이 눈독을 들일만하지. 그렇기에 이 정도로 내가 반응하는 것이다. 이해했는가? 나의 챔피언아.”
“아! 예. 죄송합니다.”
중립신이 이제 드낙이 꼭 해야 할 것을 정해주었다.
“하나. 이실레아를 중앙에서 쫓아내지 말 것.”
시작부터 드낙이 이해하기 힘든 소리를 했다.
“그녀는 이번에 동부로 도렌과 함께 중앙에서 물러나게 할 생각입니다.”
“불허한다. 사실상 그녀만큼 동부를 잘 굴러가게 할 인재가 없다. 게제라스는 정치력이 약하고, 자존심이 강하다. 동시에 자격지심 또한 심하지. 물론 청렴하다. 공정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약자들에게 너무 관대해. 누군가의 그림자에서는 좋은 업적을 쌓겠지만, 전면에 나서면 암군일 뿐이다.”
‘착해서 암군이라니···’
드낙은 중립신의 인물평에 불만을 품었지만 이내 흥미가 생겼다.
“중립신께서는 이실레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평범하게 역적이지. 간신이라기에는 통치자로서 출중하고, 다재다능하지. 왕이라면 죽이거나 지방으로 보내는 게 최선일 것이다.”
“그, 그 정도 입니까?”
“하지만 그대에게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 실력이 좋은 인간은 무조건 이득인 것이 그대의 상황이다.”
“그렇긴 합니다만···”
드낙은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다. 순수하게 역적이라니, 신랄한 평가였다.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구나.”
“솔직히 말하면···그렇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공신 중의 공신이고, 지금까지 절 위해서 일해오며 동부를 크게 만들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하지만 난 그런 그대가 나쁘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그런 면을 높게 평가해.”
저런 생각을 하고 있고, 그런 성향이기에 드낙은 중립신에게 선택받았다. 자신을 도와줬다고 생각하면 관대해져 버린다. 마치 간이나, 쓸개라도 내줄 것처럼 행동해버린다. 겉으로는 아닌 척 행동하지만, 막상 지켜보면 결국 자신에게 작은 도움을 준 자는 끝까지 대우해주려고 애를 쓴다.
“그게 끝입니까? 뭔가 더···”
드낙이 그런 평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질척거렸다. 하지만 중립신은 이야기를 되돌렸다.
“시간이 없다. 둘. 레이시아에게 후손을 안겨줘라.”
‘아···’
그는 그 소리에 왠지 모를 불쾌함을 느꼈다.
“셋. 신전에게 성 다섯 개는 들어설 수 있는 영토를 내어줄 것. 위치는 남서로 제한할 것.”
“넷. 불파겐을 도왔던 몰락 가문의 장원을 북쪽에 집중시킬 것.”
“다섯. 밀서를 통해서 북부와 교류하는 자가 있다면 모조리 쳐낼 것이라고 명할 것. 플래티넘에게도 보내야 할 것이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은 깔끔했다.
검은 연기가 드낙을 덮쳤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드낙은 몸을 일으켰다. 전신의 감각이 이상했다. 고통스럽지는 않았지만, 달구어진 회로처럼 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아.”
드낙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다고는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해야 했다. 왜냐하면, 중립신이 그리는 그림은 확실할 것으로 생각해서였다.
‘근데 뭔가 기분 나쁘다.’
드낙은 그 기분 나쁨이 이해할 수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생각했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승승장구. 하지만 과정적으로 보면 난잡하고 엉성해. 하지만 정확하게 테라로 향하고 있었기에 중립신은 나에게 그 어떤 자세한 명령을 자주 하지 않았어.’
어찌 되었든 드낙이 할 일은 다를 바 없었다.
그저 신이 하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
저벅. 저벅.
집무실로 되돌아간 드낙은 양피지에 밀서를 먼저 썼다. 번잡한 축제 속에서 이 밀서는 은밀하게 전해질 것이다.
그것을 쓰면서도 드낙은 중립신의 명령을 더듬고, 또 더듬었다.
‘못해도 내년에는 떠나야 한다는 소리인가. 조금 더 쉬고 싶은데···’
이 영지에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아스팔트 도로처럼은 아니라도 로마처럼 도로대국으로 만들고 싶었고, 레이시아가 구상했던 연극 문화를 더 퍼뜨리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소비하는 재미를 주고 싶었다.
‘농사 같은 힘든 일도 편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영주 노릇도 재미난 부분은 진짜 재밌을 것이다. 그게 아쉬웠다.
집무실에서 다 쓰인 잉크를 말리며 드낙의 얼굴이 검게 드리워졌다.
앞으로 거칠게 달리고 있음에도 드낙은 마치 런닝머신에서 달리는 기분밖에 들지 않았다.
‘부처님 손에 있던 손오공의 모습 같다.’
그 생각을 드낙은 억지로 털어냈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신은 신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을 드낙도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되면 나도 신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어찌되었든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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