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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전사-568화 (567/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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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끝

남녀의 웃음소리가 드낙의 집무실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잠시였다. 레이시아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꿈을 꿈꾸기에 그녀는 스스로가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그녀는 <결함품>이니까.

‘본론만 말하고 가야 해.’

지금까지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과욕은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욕심을 부리면 칼날과도 같은 상처만 늘어날 뿐이니까. 욕심을 버리면 고통도 없다. 하지만 행복 또한 없다. 그저 무(無)에 불과하고, 공(空)이라 할 수 없다.

그 고리를 끊지 못하면 평생 메마른 사막에 있을 뿐이다.

“아까 고아들을 봤다고 말씀을 드렸던 것 기억나세요?”

“예.”

드낙도 그녀가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자 웃음기를 지우고 대답했다.

“아이들을 위한 축제가 되었으면 해서요. 신전과 공동으로 추진하고 싶어서 허락을 받으러 왔어요.”

“제 도움이 필요한 일입니까?”

“전혀요. 전 도움이 되고 싶지,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아요.”

“그렇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드낙의 표정에 아쉬움이 깃들었지만 장님인 그녀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드낙의 입이 달싹거렸다. 상대가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자 레이시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려운 일이었나요?”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할 생각인지 알고 싶습니다만.”

“아이들을 위한 공연을 준비할 거예요. 동화를 들려주는 것을 뛰어넘어서 극을 할 거예요.”

레이시아의 목소리가 들떴다. 동화를 들려주고 나면 해질녘까지 역할 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생각났다. 그 모습을 어른들이 연극을 할 생각이다.

그 말을 들은 드낙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린아이를 위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른을 위하는 거 아닙니까?”

의미심장한 계획이었다. 연극을 통해서 아이들을 즐겁게 함과 동시에 어른들의 생각을 바꾸고 싶어하는 듯했다.

“사실,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지 않은 사람이 많잖아요?”

현대조차도 어린이에 대한 인권이 발아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으며, 그것조차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중세는 어른이 되지 못한 것이 어린 아이들이며, 이들은 <애송이 시절>을 겪고 어른이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애송이>라고 불리는 청소년기에 죽는 아이들이 특히나 많았다.

아이를 거래함에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는 자들도 있었다.

그냥 그런 것이다. 꾸준히 교육받지 않으면 약자에게 함부로 하는 건 손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여행가기 좋은 계절에 버려지는 짐승들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사들은 썩 좋은 표정이 아니네.’

그럴 만도 했다.

축제에서 일을 벌이면 호위하는 게 힘들 수밖에 없었다. 기사인데도 단검을 쥐고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리치는 절대적이다. 협소한 공간에서는 롱소드는 결코 단검을 이기지 못한다.

‘애초에 호위 기사라니.’

말도 안 되는 과잉 인력 투입이다. 기사라는 것은 적게는 마을의 관리부터, 그 마을들이 모인 한 지역을 담당할 수 있는 내정관의 역할도 행할 수 있다.

기사 마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기사는 때때로 간이 법정을 열어 시민 간의 다툼을 해소시키기도 해야 했다.

이곳에는 법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도 마을마다 제각각이고, 살인에 대한 처우도 지역에 따라 달라진다.

법에 대한 기준을 바로 세우는 것이 큰 업적으로 여겨지는 이유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나한테는 이득이다.’

거짓이다.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판단한 것뿐이다. 외모가 좋으면 면접에서 점수를 많이 받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너무 크게 해서는 안 됩니다. 베바란스 총관과 잘 이야기해보십시오.”

“감사해요.”

레이시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깊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그만큼 그녀는 드낙에게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것이 드낙은 불편했다. 서로 동등한 위치라고 여겨지지 않아서였다.

짝!

뺨을 치며 드낙이 정신을 곤두세웠다.

‘뭔 잡생각이냐.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닌데.’

드낙이 호흡을 정돈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마신장(魔神將)을 잡기 위해서는 <일류의 흐름>을 습득해야만 한다.’

3년 이내 습득하지 못하면 드워프들에게로 향해야 했다. 〈강철이 흐르는 강(Steel flowing river)〉을 만든 자들이 드워프들이다. 그 힘을 빌려, 오우거를 토벌하는 수법밖에 없었다.

<적혈대검(赤血大劍)>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소문 하나 쥐어지지 않은 걸 보니 엘프에게 있는 게 확실하지만, 그곳은 사지(死地)다.

삶이 이어질수록 감정은 죽어가고 이성이 강해지는 엘프들의 사회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섭기 때문에 드낙은 결코 홀로 그곳으로 가면 안 되었다.

‘중립신이 나에게 준 시간은 5년 이내. 그것도 언제 뒤틀릴지 모른다.’

4차원적 시야에서 보면 시간의 연속성은 불규칙하기 그지없었다. 사진 한 장으로 굴곡이 많고, 큰 이야기를 다루는 파노라마를 해석해보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이라도 예측하기 힘들었다. 전지전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지전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드낙은 계속 달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멈춘다면, 모든 것을 잃지는 않겠지만. 결국, 나중에 후회하겠지.’

그는 현대인이다. 수많은 문화를 맛보고 이곳에 떨어졌다. 그 갈증은 사람을 미쳐버리게 하기 충분했다. 힘을 가지고 나서는 더더욱 그런 욕망이 강해졌다. 여자를 즐기지 못한 박호훈이었기에 더더욱 그런 것에 목을 매는 것일지도 몰랐다.

서로 원하는 것이 있는 여자와의 관계는 삭막함만 주었다. 그래서 드낙은 더 고민하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레이시아는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없어 보여서였다.

‘한국 드라마도 아니고. 뺨 맞은 여자한테 호감을 느끼는 미친 재벌 놈이 이해가 될 것 같다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드낙이 밖으로 나갔다. 검이라도 휘두르고 싶었다.

망설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드낙은 지금이 나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힘든 일이다.

토치라이트 가문이 호수 마을에 도착했다. 그들은 드낙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호수 마을에 온 토치라이트 가문의 인원은 2명이었다.

실질적으로 업무를 볼 사람은 하나뿐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수행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엔그리 토치라이트>는 작은 토성의 성주로 살아오며 15개의 마을을 관리하는 기사였다. 지역 유지를 다스리는데 호평을 받았기에 이런 곳으로 오기에 충분했다. 직계 중에 무재가 없는 자였다.

<빌란 토치라이트>는 외부인재로 방계가 거의 없는 가문의 특징상 토치라이트로 성을 개명했다. 덩치가 크고, 호위 무사에 어울렸지만 다른 것에는 평범하거나 못했다. 그가 토치라이트의 이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엔그리 성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변변찮은 성의 성주였지만, 그에 비해 능력이 출중했다.

‘두루두루 관계를 맺는 게 좋겠지.’

모두 내치는 것은 토치라이트로서 이득이 전혀 없었고, 드낙만 좋은 꼴이다. 모두 좋게 관계를 맺으며 드낙이 싫어할 만한 일을 포착하는 게 토치라이트 가문의 문인들이 할 앞으로의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귀족이 중재역할을 해야 했다. 그게 엔그리 토치라이트가 이곳에 온 이유였다. 좋은 게 좋은 것 아닌가? 드낙을 위해서 일을 하지만 동시에 토치라이트가 이득을 취하려면 이 방법뿐이었다.

‘잘 조율해야 한다.’

매우 어려운 일이 분명했다. 모두 만족스러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감사란 것은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다리 역할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해야지 이권이 감사 조직으로 올 수 있었다.

간단해 보이지만 어려운 비즈니스고, 골치 아픈 일이 있어야지만 큰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동부에 가장 필요한 조직이기도 했다.

‘<겨울의 논공행상> 때 받을 직함이 벌써 기대되는데.’

남부 왕국의 논공행상이 아니다. 불파겐이 직접 개최하는 논공행상이다. 동부가 커진 만큼 많은 직책이 토해질 터였다.

“불파겐 자작님의 서신을 받고 오셨다지요? 이거 축하합니다!”

찾아온 이 중에는 <술취한 통(Drunken barrel) 상단> 상단주 카이라트도 속해있었다. 그는 상인 중에서도 첫 스타트를 가장 빨리 끊어내면서 선두주자의 위치에 서 있었다. 먼저 얼굴을 두루 알렸고, 시종은 물론 상당수의 중요한 얼굴과 마주하는 자리도 선점할 수 있었다.

그의 판단이 곧, <상단연합>의 판단이 될 수 있도록 조심, 또 조심하고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토치라이트 가문과 마주했다.

“저희 상단이 만든 술입니다. 도수가 높고, 공을 들인 것인데 받아주십시오.”

“병이 제법 예쁜데···어디서 이런 물건을?”

“동부 이주자 중에는 기술자도 제법 됩니다. 상인이라서 말에 귀를 기울여서 확! 잡아챘습니다.”

“아하.”

왜 그런지를 묻지는 않았다. 모르면 간첩이었다.

술병을 챙긴 엔그리가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에 사병을 가지게 되었다고 들었소. 그것도 불파겐 자작이 공인된 패를 내어준다고 하니 정말 놀랐겠소.”

이미 상인들은 반귀족이나 불러도 무방했다. 사람을 굴릴 재력은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단번에 지역 유지를 뛰어넘을 것이다. 거기에 <상인연합>이라니. 무섭기 그지없었다.

한 명도 아니고 100명의 대상단이 하나의 조직으로 동부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불파겐 자작이니 할 수 있겠지.’

“과찬이십니다. 다름이 아니라, 토치라이트 가문이 이번 오크 대침공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 않습니까?”

“그렇소만.”

엔그리는 쿨하게 인정했다. 동쪽과 서쪽을 두고 완전히 밀렸던 것이 토치라이트 가문이었다.

“상인 연합이 도울 수 있을 겁니다. 어렵지 않은 일이지요. 하지만···저희들의 속사정이 참 골치 아픕니다.”

카이라트 상단주는 쥐새끼처럼 속닥거렸다. 주는 세금에 따라서 직책이 달라지는 걸 들은 엔그리가 감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게제라스 총관의 제도는 실로 대단하오. 불파겐 자작의 무리한 말을 그럴싸하게 만들지 않소?”

“그렇기나 말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대단하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드낙이 생각한 것이지만 자연스럽게 게제라스의 공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체계적이었고, 완벽했다.

‘상인을 돈으로 제어한다.’

서로 어느 정도 선을 지키겠지만, 백단주와 천단주는 엄연히 다르다. 그리고 몇몇 상인은 천단주로 상인 한 명을 밀어주게 될지도 몰랐다. 재력이 부족하면 모으면 그만이었다.

그 복잡한 거미줄 속에서 돈이 드낙을 괴롭힐 수 있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상인연합이야말로 가장 아군으로 쓰기 좋다.’

어지러운 상황을 지닌 세력이야말로 가장 아군으로 맞이해야 할 세력이었다.

“말해 보시오. 그렇기 위해서 날 찾아오지 않았소?”

“금화가 필요합니다. 물론 토치라이트 가문을 전적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먼저 밀을 동화 한 닢에 토치라이트 가문에 내어드리겠습니다.”

“한 닢?!”

엔그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침착했다.

“소리를 질러서 미안하오. 하지만 그렇게 해도 되겠소?”

“예. 하지만 제 이름을 기억해주십시오. 동시에···”

“금화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 하지 마시오. 상인연합의 상인은 그 누구도 토치라이트 가문에게서 금화를 가져가지 못할 것이오. 오직 단 한 명 빼고 말이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다른 상인들에게도 토치라이트 가문에 많은 것을 싸게 내어주라고 제가 힘을 써보겠습니다.”

“좋소.”

드낙에게 얼마나 주느냐에 따라서 동부에서 상인들의 힘이 결정지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힘에 따라서 더 큰 관계가 쌓일 것이고 이는 해를 더할수록 차이를 벌릴 터였다.

그렇기에 지금 자신을 자해하듯이 난도질하며 내줄 수 있었다. 그건 동부를 성장하게 만들 원동력으로 쓰일 것이 뻔했다.

그 외에도 토치라이트 가문은 브릴리언트 가문과 건초를 거래했다. 브릴리언트 가문은 건초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제법 대량을 거래했는데, 이 거래를 시작으로 서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좀 더 부드럽게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세력이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선물을 나누고, 서로의 관계를 표면적으로라도 정리하고 있을 때, 신전은 침묵했다.

레이시아 플래티넘과 연결되었을 때부터 신전의 방향성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공주라는 대리인을 통해서만 움직인다는 뜻이었다. 폐쇄적이기 짝이 없었지만 그 어떤 세력도 신전을 물어뜯지 못했다. 폐쇄적이었음에도 다리가 놓여 있었기에 이빨을 드러내면 다른 세력이 이를 이용할 것이 뻔했다.

동시에 동부 신전 세력 또한 <오크 대침공>의 주역이었다.

<겨울의 논공행상>이 오기 전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축제가 개최되었다. 수많은 이들이 호수 마을 밖에 천막을 칠 정도로 많이 와있었다.

드낙은 마법 족쇄로 묶은 일백야수 코뿔소를 산채로 포박했고, 그것을 끌어 대로를 뻗어 나가며 축제의 시작을 알렸다.

푸화아악!

피가 쏟아지며 구슬픈 울음소리가 퍼지며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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