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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실레아는 게제라스와 만난 뒤에 하루를 침묵하기로 마음먹었다.
게제라스는 장단점이 뚜렷했다. 그렇기에 그는 믿을 수 있는 자였다. 동시에 드낙은 모르지만, 이실레아는 게제라스를 부담을 많이 지워준 자였다.
단순한 장군으로 동부에서 활동한 것이 크게 이야기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한 명의 통치자로서 활동했다. 그녀의 가장 큰 업적은 게제라스를 도와서 〈장원 기사 시스템〉을 만든 것에 있었다.
‘고작 문인 따위가 〈장원 기사〉를 만들 수 있었을 리가 없지. 만약 그렇게 정말 생각한다면 귀족이 되고 싶은 자유기사를 우습게 보는 것이다.’
동시에 이실레아는 게제라스에게 개입했다. 겉으로는 그를 도왔지만 속으로는 불파겐의 부흥과 함께 그 불파겐을 도왔던 자들의 후예가 언급되는 걸 철저하게 틀어막았다.
동부에 이득을 줌과 동시에 자신을 위해서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하는 이실레아는 실로 대단한 정치가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장수라기보다는 통치자에 어울렸다. 그리고 통치자를 휘하에 둔 드낙은 몰락하고 싶어도 몰락할 수가 없었다.
‘게제라스가 몰락했다. 이건 나에게 나쁜 일이다. 하지만 나쁜 일을 좋은 일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능력이다.’
허나 파도를 거슬러 헤엄쳐야 하는 것이 지금이었다.
“크흠.”
이실레아가 물을 마셨다. 누군가가 마치 자신의 목을 조르는 기분이 순간적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지금 제대로 방향을 더듬고 있음을 정확하게 인지했다.
“밖에 누구 있느냐.”
“예. 부르셨습니까.”
전에 있던 부관은 이실레아에게 큰 실수를 저질렀고, 본가로 돌아갔다. 그 대신에 〈가르푼 브릴리언트〉가 그녀의 새로운 부관이 되었다.
눈 밑이 검은 것을 보고 그녀가 말했다.
“인수인계는 확실하게 받았을 거로 생각한다.”
“예. 결코,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실수하면 목이 날아갈 수밖에 없음을 항상 명심하고, 또 명심하라.”
“가문을 위해서라면 제 한 몸 흙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원망 하나 가지지 않겠습니다.”
“좋다. 그 누구도 방으로 들이게 하지 마라. 그것 외에는 쉬어도 좋다.”
“알겠습니다.”
그녀의 집무실에서 누구도 들이지 않고, 초에 불을 붙인 채 가만히 그 불꽃을 지켜보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이내 몸을 일으켜 조금 어두운 벽에 다가갔다. 벽 한쪽을 모두 뒤덮고 있는 동부의 지도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자. 게제라스가 직언하는 걸 포기했다. 왜 그렇게 엎드렸을까.’
고작 시민들에게 내어줄 금괴를 경제적 요인을 들어서 설득할 수도 있을 문제다. 명성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시민들에게서는 욕을 먹겠지만, 그들이 영지를 이끌어가는 건 아니다.
‘외척들 또한 쥐죽은 것처럼 지내고 있다. 그들이 자초한 일이지만, 후속조치를 하지 않는 건 미련하기까지 하다. 왜 그렇게 엎드려 있을까.’
자신이라면 에드윈 가문을 통해서 자유기사나 불파겐을 도왔고, 그래서 멸문한 가문의 후예와 연줄을 댈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쉐도우 위스퍼〉를 의식했나? 감안하더라도 이 정도는 아니다.’
이제는 거의 공인된 것이 드낙이 가진 의문의 정보 단체였다. 그들 때문에 위축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끝이 약하다.
‘문인의 교체. 게제라스와 가담자들에 대한 처우를 잔치로 묻어버리고···겐 경을 홀로 불렀다. 거기에 상인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그의 노림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천재의 번뜩함은 실로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비 내리는 밤에 번쩍이며 나무에 내리꽂히는 벼락을 보는 것과 같은 기분을 만들게 한다.
그것은 자연재해와 같으며, 인간을 두렵게 만든다.
달칵.
이실레아가 일어나서 체스판을 꺼내고, 돌을 놓았다. 반대편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녀는 막힘없이 체스말을 움직였다. 그리고 손에 병사(pawn)를 쥐었다.
‘드낙은 폰을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움직이지 못한다.’
귀찮음. 게으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실레아는 그 두 개의 요인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힘이 있기에 폰을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지. 동시에 판을 크게 짜지만, 자잘한 것은 건드리지 않는다.’
비가 와서 강이 범람하고, 가뭄이 들어서 강에서 물이 바짝 말라도 결국에는 물은 언제나 강길을 따라 흐르는 법이다. 힘이 있기에 귀찮음이 생기고, 게을러 지는 법이다.
전후가 바뀌었지만 결국 결론은 같았다.
가장 힘 있는 자가 폰을 만지지 않기에 다른 자들은 폰을 자기 멋대로 둘 수 있었다. 그중에 가장 그 힘을 폭압적으로 사용하고 남용하고 이용한 것이 이실레아였다.
권력자라면 무조건 쥐고 있는 군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그게 사라졌다. 그 뜻은 이제 내가 군권을 언제든지 버려야 한다는 소리와 같다.’
이실레아의 몰락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저 지금에서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항상 〈공신 대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머니에 넣어도 튀어나오는 게 그녀의 재능이고, 실력이다. 적어도 자유 기사 시절로 돌아가지만 않으면 되었다.
‘명분이 없으니, 날 내칠 수는 없다. 문제를 만들지 않으면 팔이 잘려도 계속 살아갈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실레아가 다시 체스판으로 눈을 돌렸다.
드낙은 북부와 단교하고 영지로 돌아와서 세력을 만들고, 힘을 내어주기 시작했다. 더는 폰이 없도록 만들었다. 서로가 기사라면 서로 견제하기 마련이다. 그 단체의 숫자는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4개는 되었다.
‘여기서 끝날까? 아니다. 그래서야 태풍이라고 할 수 없다. 드낙은 이 정도에서 끝날 놈이 아니다.’
이실레아는 체스판에서 폰을 모두 빼버렸다.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드낙이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폰은 이제 모두 나이트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폰은 없는 상황이다. 하나같이 드낙에게 공인되고, 믿음을 받고 힘을 받았다. 일개 상인조차 사병을 일백명 둘 수 있게 되었다. 그 여파는 이실레아는 가늠할 수 있었지만 세력이 많아질수록 수가 어지러워지는 건 불가피했다.
생각은 돌고 돌았다.
‘왜 드낙이 그렇게 움직이게 되었을까? 그 의도를 짚어야 한다.’
탁.
이실레아의 거친 손길에 나이트 하나를 체스판에 찍으며 소리를 내며 흉포하게 나이트가 앞으로 나아갔다. 답은 뻔했다. 나이트 하나가 드낙의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겐 쟝. 그렇게 내려찍었는데도 기어코 북부에 병사들을 이끌고 찾아왔지.’
게제라스를 어떻게 설득시켰는지는 뻔했다. 이실레아, 자신을 무섭고 두렵게 계속 언급하면 그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일군 제도로 영지를 가꾸고 싶어하니까.
‘죽였어야 했나? 그랬다면, 쉐도우 위스퍼가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
적당히 하는 게 중요했다.
‘하늘 기사의 후예. 그런데도 드낙은 그를 소홀히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안정되고 중책에 맡길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그 판단을 겐 쟝이 바꾸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어.’
상단세를 취하면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고, 목을 내줘야 한다는 기사. 그 위명은 그 독특한 싸움법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야기꾼들의 지갑을 두둑하게 해주고 있었다.
이실레아의 견제를 뚫고, 자유 기사들을 휘어잡아 병사를 끌고 북부로 스스로 찾아왔다. 그 정도의 능력을 보여줬으니 드낙은 이실레아와 동급으로 겐 쟝을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이실레아가 손가락을 떨었다.
‘그는 권력의 재분배를 생각하고 있다.’
그게 그녀의 결론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일을 키울 리가 없었다.
‘목표는 알았고, 날 견제하려고 곧 움직이겠어.’
그렇다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먼저 선수를 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고 해도 그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늑대는 단순히 3마리, 5마리가 아니라 십여 마리로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늑대가 많아진 상태에서 군권을 잡고 있다면 이실레아는 물어뜯겨 처참하게 죽을 뿐이라는 걸 잘 알았다.
하이에나에 둘러싸인 사자꼴이고, 늑대에 둘러싸인 곰의 형세다.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이득은 이제 더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실레아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목숨을 바쳐서 수행해야 할 일이 있었고, 나아가야 할 목표가 있었다.
수련으로 흉터가 가득한 양손을 들어 보였다. 검에 대한 재능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생기기도 전에 검을 들었고, 그 외의 모든 것에 대해서도 다재다능하다는 걸 알고 나서는 〈계승〉을 받게 되었다.
몰락한 가문의 모든 자원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귀족 가문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지만 가문원 중 몇몇이 과로사해서 죽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실레아는 앞으로 나아가고, 또 나아가야 했다. 그 길이 설사 굴복하는 길이라도 그녀에게는 확실한 기둥이 꼿꼿이 세워져 있으므로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드낙은 내가 스스로 움직여주기를 원했을지도 모르겠어.’
실력만으로 많은 이들이 등용되었다. 그 판단은 지금도 여전할 것이다.
이실레아가 집무실을 나왔다. 가르푼은 어찌 된 영문인지 복도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제법 눈치가 있는 자였다.
그녀는 그를 깨우고 난 다음 복도를 걸으며 착 가라앉은 눈을 했다. 그녀는 이것이 드낙의 배려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굴복하는 모습이라도 취한다면, 함께할 수 있다고 악수를 내미겠지.’
그렇게 할 수 있겠냐고 드낙은 묻고 있었고, 이실레아는 봄바람이 날리는 날에 결혼식을 여는 새신부처럼 웃으며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새로 생겨난 권력 구도에서 늑대에 둘러싸인 채 사자처럼 싸우다 죽으면 된다.
“어디로 향하시는 겁니까?”
“영주님을 뵈어야겠다.”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그런 걱정 말고 먼저 향해서 내가 가는 것을 알려라.”
“예!”
이실레아가 인상을 찡그리자 가르푼이 서둘러 움직였다.
*
“이실레아 경이? 알았다.”
드낙은 서둘러 옷을 걸쳐 입었다. 세수도 했다. 그녀는 가볍게 만날 수 없는 기사였다.
‘그녀를 어떻게 하기는 해야 하는데.’
손익이 밝고, 재능도 뛰어나다. 동시에 지금까지 가장 드낙의 곁을 지킨 자였다. 공신 중의 공신이다. 활약을 따지면 이스핀과 도렌을 앞지른 지 오래다. 거기에 도렌과 결혼까지도 했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여자지. 난 왜 도렌을 그때 막지 못하고 축하를 해줬을까. 단단히 마가 끼였던 게야.’
두 사람이 마음이 있더라도 그것을 막아야 했던 게 드낙이었다. 후회해도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에 대해서 생각할 뿐이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괜찮다. 우리 사이에 무슨. 급한 일이 있나 보지?”
“예.”
이실레아는 드낙이 자리를 권하기도 전에 앉았다. 드낙의 목젖이 조금 움직였지만 뭐라고 하지 않았다.
“동부는 이제 많이 커졌습니다. 영주 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장원 기사의 숫자만 해도 수백이지 않나.”
“게제라스 총관이 너무 뿌렸습니다. 물론 이해하지 못하는건 아닙니다. 이주민은 많은데 마을을 관리할 자는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이제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제법 자세히 아는 듯한데, 많이 도와줬나 보네.”
이실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기사들의 기를 죽이는데 힘을 보탠 것뿐입니다.”
“그래. 용건이 뭔가?”
이실레아는 뜸을 들였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점검했다. 그 치밀함을 보며 드낙은 술잔을 마시며 여유롭게 기다리는 척을 했다.
“군권을 내놓겠습니다. 영주 님께서 〈겨울의 논공행상〉에서 공식적으로 군권을 다섯으로 나누어 주십시오. 그중에 하나는 영주 님께서 가지셔야 합니다.”
드낙의 눈이 커졌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런 소리를 하는가? 기병 수백을 단번에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키운 자네가 아닌가. 설마 그런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저도 사람입니다. 사람. 이전까지는 어찌어찌 굴렸지만 지금의 동부는 너무 커졌습니다. 지금대로 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음. 그러긴 그렇지. 하지만 다른 이들을 자네에게 붙여주면 되지 않겠나.”
“안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전 현장에 나갈 수 없지 않습니까. 비록 욕심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직은 현역 기사로 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성에 박혀서 다른 이들을 보고를 받으며 잉크 냄새만 맡을 생각을 하면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합니다. 영주 님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드낙은 그렇지, 그렇지를 연발했다. 이실레아는 드낙을 빌어서 자신의 발언에 힘을 얹었기에 그로서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힘든 결정이었을 텐데, 왜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인가. 다른 이유가 없다고는 말하지 말게.”
눈치와 감각이 좋은 드낙의 질문에도 이실레아는 미소를 지으며 막힘없이 대답했다.
“이제 대를 이을 아이도 가지고 싶습니다. 안정되니, 자연스럽게 그러고 싶어졌습니다.”
“아하.”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들이야, 그렇다. 안정되면 아기를 원하고 가정을 꾸리고 싶어한다.
“나머지 셋은 생각한 게 있는가?”
“알아서 생각해주십시오. 다만, 전 도렌과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그런거야 어려울 것 없지. 다른 건?”
“없습니다. 그럼 시간이 늦었으니 일어나보겠습니다. 편히 주무십시오.”
이실레아가 밖으로 나갔다. 드낙은 다시 앉았다. 잠이 확 깬 기분이었다.
‘왜 스스로 물러나지? 도통 이해가 안 되네. 오히려 이번 오크 대침공을 생각하면 총사령관이나 그런 걸로 하려고 했는데. 다섯으로 나누라니···’
드낙은 그녀의 판단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고민을 하고 나온 여러 가지도 모두 이실레아의 판단을 설명해내지 못했다.
그만큼 그녀는 드낙을 앞서나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이실레아는 겐 쟝으로부터 서신을 받았다.
“기사들의 모임인가.”
안젤리카 에드윈과 겐 쟝의 공동 서명이 있었다. 그 이름까지 훑은 이실레아는 서신을 그대로 태워버렸다.
“가르푼. 모임에는 참석한다고 알려라.”
“예.”
점점 검게 타고 있는 서신을 이실레아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눈은 마치 벌레를 보는 것처럼 혐오로 가득했다.
========== 작품 후기 ==========
6700자
평점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독자 몇몇 분들의 판단은 진짜 소름돋을 때가 많습니다. ㅋㅋ 이래서 제가 댓글을 못 닫고, 항상 코멘트를 달아달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