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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핀은 창백한 얼굴을 손으로 거칠게 문질렀다. 어느 정도 혈색이 돌아옴을 느꼈다.
몇몇 아는 병사가 다가와서 그를 반겼다. 문제가 없을 때는 권위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이스핀이었다. 드낙처럼 풍기는 기세가 적기도 했다. 시민들이 살면서 필요한 게 뭔지 정확히 아는 기사이기도 했다.
그는 제법 인기가 좋았다. 동시에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처럼 비리를 저지르고 다니지 않았다. 드낙에게 안 좋은 것만 배워서 선물은 받는데 대가는 하지 않는 행보도 보여주기도 했다.
“이스핀 기사님! 드디어 오셨습니까?”
“좋은 구경 했느냐?”
그 농담에 병사가 크게 들썩였다. 플라잉 불파겐에 대한 목격담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거기에 하루아침에 500명을 싹 다 잡아갔다.
흥분하는 것도 잠시, 흥분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두려움뿐이다.
“일이 어찌 될지, 무섭습니다. 금방이라도 피바람이 불 것 같지 않습니까?”
괜히 말조심하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그렇게 농담을 던진 이스핀도 눈알을 굴리며 혹여나 다른 사람이 듣지나 않을까 조심했다.
대범한 척도 상황 보고 가면서 하는 게 이스핀이었다. 왜냐하면, 드낙에게는 강력한 정보 단체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누구도 몰랐지만, 어느새 하나의 이름으로 굳혀졌다.
모두가 아는데, 그 누구도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없다고 여기는 이들도 많았다. 그것은 마치 그림자 속에서 속삭이는 것과 같았다.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지?”
“거리에서 온갖 것을 가르쳐주는 문인들을 데려다가···”
대충 상황을 들은 이스핀은 서둘러 내성에 들어섰다. 곧바로 드낙과 마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목욕하고 계신다고?”
“예. 두 시간도 전에 들어가셨지만, 아직 안 나오셨습니다.”
이스핀이 볼을 긁었다. 한 시간 뒤에서야 드낙과 만날 수 있었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석지 마을은 잘 관리하고 있겠지?”
“풍년도 그런 대풍년이 없습니다. 정령이 도와주고, 견습 마법사들에게서 성장에 도움을 주는 마법철봉까지 박아넣었으니, 실패하고 싶어도 실패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드낙이 그 말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추진한 것이 마탑이었다. 동시에 정령 또한 중요한 자원이었고, 그와 거래를 하기 위해서 시간을 쏟아붓게 명령했다. 실제로 석재 마을에는 돌을 쌓은 언덕이 몇 개 존재했고, 대산의 앞에는 인간들이 쌓은 돌 언덕이 수없이 많았다.
정령이 그런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도렌과 연락은 자주하고?”
“은광산에서 나가고 싶다고, 아주 찡찡거립니다.”
드낙의 최측근이 교도소 소장을 하고 있으니, 답답할 만했다. 그들 또한 그렇게 여기게 되어버렸다. 이실레아의 교육이기도 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누리는 것이 도렌에게는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흐하하.”
드낙이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언제 다시 불러야지.”
은광산은 중요하지만, 핏빛쥐들의 정보력을 활용한다면, 결코 수작질을 못 하게 할 수 있었다.
“문인들을 모두 잡아들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이 마을 문인들의 마음을 얻고 있는 베바란스 온이라는 자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나?”
“예. 수소문해보니 남부의 가문이랍니다. 귀족은 아니고, 순수 문인가문입니다.”
그 말에 드낙의 눈썹이 위아래로 살짝 움직였다. 괜한 편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남부 가문이 왜 여기까지 흘러들어왔지?”
이스핀은 어깨를 으쓱했다.
“가문을 떠나서 뭐, 웅대한 꿈을 펼치겠다는 걸 수도 있고 꼭 백금 왕가의 끄나풀이겠습니까?”
“허~?”
드낙은 이스핀이 그를 옹호하자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관리는 아니지만, 호수 마을에 몰려든 문인들을 휘어잡고 있으니, 뒷조사를 제법 오래 진행했습니다. 믿을만한 자입니다.”
“그래? 알았다. 그가 문인들과 가담자들을 은광산으로 보내라고 하는데, 너는 어떠냐?”
이스핀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그렇게까지 피를 봐야 하나 싶었다. 그들은 모두 문인이 아니었고, 일반 시민 출신이었으며, 게제라스의 실무 교육을 받은 자들이었다.
“총관을 생각한다면, 살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게제라스 총관이 그렇게 부탁을 하셨습니까? 제도에만 신경 쓰는 줄 알았더니 그래도 정이 쌓였나 봅니다.”
드낙은 이스핀이 엉뚱한 소리를 하자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오늘부로 총관이 된 베바란스가 건의한 것이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조금 이상합니다.”
“이상해?”
이스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력 교체인데 왜 살려두겠습니까? 이상하지요. 영주님은 분명 다 죽이겠다고 하셨겠지요?”
“처음에는 그랬지만 몇 놈만 죽이려고 했지.”
일벌백계라는 좀 간지나는 행보를 걷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문인도 아닌 시민 출신의 관리들을 죽인다고 해서 검은 꿈이 나올 것 같지도 않고, 지금의 힘까지 쌓아올렸는데 그런 자들을 억지로 죽여서 능력을 얻고 싶을 마음이 안 생겼다.
“그렇다면 베바란스 총관이 무슨 생각을 하고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핀은 입을 다물었다. 드낙이 턱짓하자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이스핀의 한계였다. 괜히 무력을 높여준 게 아니었다. 머리로 쓰기에는 능력이 낮았다.
“후우. 갑자기 이거 의심스럽네.”
드낙이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자신이 베바란스에게 홀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모, 목소리, 행동거지. 하나같이 믿을만했고, 드낙을 위해주기도 했으니 그럴듯했다.
큰 문제 없이 그의 발언을 받아들인 것은 그만큼 베바란스가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똑같은 방식을 써도 사람마다 그 결과가 다른 것과 같았다. 잘생기면 다 된다는 말과도 어느 정도 이어져 있었다.
“그의 의도가 뭘까?”
“···저에게 물어보셔도···”
드낙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핏빛쥐들은 그런 것을 몰랐다. 의도도 말을 해야지 들을 수 있는 법이다.
‘그가 얻는 이득을 생각하면 알 수 있을지도.’
드낙이 투박한 종이를 꺼내 들어서 생각나는 것을 적었다.
“일을 그렇게 처리해서 그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생각해봐.”
“피를 안 뿌리고, 총관이 되었다는 점이 아니겠습니까. 그걸 막았기에 인정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아하.”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피를 뿌리자고 했고, 베바란스는 그것을 막았다. 그런 소문이 퍼진다면 베바란스는 자연스럽게 명성을 얻는다. 드낙과 맞서서 자신의 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진짜 개이득이다.’
곱씹어볼수록 진짜 이득이었다. 싸우지 않았는데도 드낙과 싸워서 그를 설득했다고 여겨질 터였다.
드낙을 상대로 이겼다고 시민들에게 여겨질 수 있었다.
“이거, 정말 그럴듯한데.”
펜으로 자신이 쓴 한 문장을 툭툭 건드렸다.
“죽이지는 않았지만, 문인들을 은광산에 보냈으니 외척들의 입김도 현격히 줄어들 겁니다. 외청과 내청이 전과 다르게 오직 한 명의 손으로 운영될 수 있다.”
게제라스 총관은 외척들의 침투를 막지 못했다. 드낙을 위해서 외척과 유착관계를 갖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외척들과 줄을 대는 관리들을 통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자였다.
반면, 베바란스 온의 상황은 굉장히 좋았다. 전임자의 똥을 싹 치우고 새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하는 문인들은 똘똘 뭉쳐있었고 가고 싶은 곳으로 힘차게 노를 저을 수 있었다.
‘행정의 독립.’
모양새가 좋았다. 특히나 드낙도 설득시켜서 마음을 돌리게 만들었으니 신흥세력치고는 첫 시작부터 남달랐다.
자본금 5천만 원으로 시작하는 가게보다 10억으로 시작하는 가게가 출발이 좋을 수밖에 없는 것과 같았다.
“굳이 이걸 막아야 하나? 아니다.”
드낙의 입장에서는 놔두는 것이 편했다. 베바란스가 그린 그림을 오히려 도와줘야 할 지경이다. 그만큼 그가 그린 그림은 좋았다. 물론 그 외에도 노림수가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손익을 따졌을 때, 밀어주는 게 옳아 보였다.
‘이대로 진행하자.’
그는 자신의 실력을 이미 증명했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드낙은 그를 신뢰하며 권력을 내어줄 뿐이다. 이스핀도 찬성하며 벌써 그를 칭찬했다.
“게제라스 총관과는 다르지만, 베바란스 총관도 대단합니다.”
술이 한 잔 돌았다.
“게제라스 총관은 그럼 은퇴하는 겁니까?”
“아니. 사람 관계가 별 필요 없는 조직을 하나 더 만들 것이다.”
“아하.”
이스핀이 가볍게 이해하고 넘겼다.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드낙은 이스핀에게 앞으로 할 일에 관해서 이야기했는데, 토치라이트 문인들로 감사 조직을 만들겠다고 하자 이스핀이 술을 홀짝이다가 콜록거렸다.
“케켁!”
“왜 놀라? 2년 임시직으로 영지를 순회하며 더러운 것들을 치우게 할 생각인데.”
남부 왕국은 기사들이 법관이기도 했다. 그게 아니라면, 영주가 판단하도록 상경하거나 영주가 영지 순회를 돌 때 모여들기도 한다.
그런 귀찮은 일을 드낙이 할 리가 만무했고, 〈장원 기사〉에게 법관의 힘을 실어주기도 싫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영지를 돌기도 귀찮았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으면?
‘현대식대로 하면 된다!’
감사는 항상 외부인사를 쓰는 게 최고라는 걸 어디에서 주워들은 적이 있는 박호훈이었다. 이것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어찌 굴러갈 수 있게 만들면 될 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남에게 그런 걸 맡기면 어찌합니까? 능력 좋은 자를 모함하면 어찌하시려고요?”
“괜찮아. 괜찮아. 어느 정도까지는 내가 지켜볼 것이다.”
그 말에 이스핀이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다가 상체를 굽히며 말했다.
“역시, 〈쉐도우 위스퍼(Shadow Whisper)〉라는 영주님 직속 정보단체가 실존하는 겁니까?”
“뭐?”
중2병스러운 단체명에 드낙이 반문했지만 이스핀은 만족스럽게 웃음 지었다. 역시, 그들은 존재했다. 아마 토치라이트의 문인들도 딴마음을 품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모습을 본 적이 없죠. 그래서 다들 외청 놈들이 미쳤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고 말하는 시민들이 많습니다.”
보이는 위협보다 보이지 않는 위협이 더 무서운 법이다. 그 덕에 이스핀은 새사람이 될 수 있었다. 정조대를 찬 난봉꾼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새사람이 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도렌은 곧 부를 것인데, 넌 어떠냐? 지금으로 만족하고 있나? 아니면 따로 뭐 하고 싶은 게 생겼으면 말해봐.”
“저 말씀이십니까? 여기서 뭘 더 바랍니까?”
“장원 기사로 만족하다니, 남자가 마음이 뭐 그렇게 좁아?”
드낙의 말에 이스핀이 기쁘게 웃었다.
“제가 성주나 마을 여럿을 관리하게 되면 제 목을 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혹은 감옥에 갇혀야겠지요. 그럴 깜냥이 안 된다는 걸 석지 마을을 관리하며 깨달았습니다.”
마을 하나 관리하는데도 문제가 터진다. 그리고 그런 문제는 한꺼번에 확 터졌다가 다시 싹 사라져버린다.
“지금으로 만족한다는 말이지. 그래도 사업 하나 맡아줬으면 하는데.”
“어떤 사업입니까?”
“주류 사업이다.”
“그건 이미 하고 있습니다.”
드낙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주 크게 할 생각이다. 어떠냐?”
이스핀이 눈알을 굴렸다. 자신을 못 믿는 눈치였다. 술이 있으면 마시고 볼지도 몰랐다.
“그럼 생각해보고 나중에 다시 말해라.”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정말로?”
“예. 그게 영지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크게 하실 생각입니까?”
“못해도 술하면 석지 마을이 거론되어야한다.”
“아···그 정도로 크게 말씀이십니까?”
드낙은 가볍게 끄덕였다. 동시에 드낙은 한 번 더 이스핀의 의견을 물었지만 이스핀은 하겠다고 다시 한 번 말했다.
‘할 수밖에 없다.’
드낙의 배려에도 이스핀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게 드낙과 이스핀의 관계였다. 겉으로는 아닐지라도 냉혹한 현실에서는 그런 관계였다. 그리고 이스핀은 결코 로망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뒷골목에서 자신의 기준을 철저히 지키며 홀로 살아남았다.
적어도 이스핀은 드낙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는 현실적인 남자이기 때문이다.
“좋아. 자세한 건 베바란스 총관과 이야기해서 진행해. 딴소리하면 나한테 사람을 보내고.”
“예.”
이스핀에게 일감을 준 드낙은 곧바로 호수 마을의 옆에 건설된 신전으로 향했다.
‘이슈거리를 만들어야지.’
아주 자극적인 것으로 시민들의 관심을 확 돌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한 모든 것을 이용해야 했다.
〈성기사 케이슨〉은 이실레아와 함께 돌아오고 있었으므로 이 신전에는 없었다. 반면 예의 사제가 드낙을 맞이했다. 드낙은 그 사제 대신에 〈성기사 에이담〉을 찾았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동부, 불파겐 영지가 버려진 영지로 불릴 때, 만났던 새로운 교리를 원하는 사제들을 이끌던 자가 〈성기사 에이담〉이었다.
그는 여전히 교리를 만드는 데 힘을 쓰고 있었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신전의 시간은 따로 가는가? 분명 사제가 날 찾아와서 소년소녀와 창녀들을 데리고 갔는데.”
“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정신이 교리에만 팔려있어서···”
드낙은 에이담을 앉혀놓고 본론을 말했다.
“사제가 관리들을 관리, 감독하는 건 어떨 것 같나?”
미친 듯이 일을 부풀리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그냥 아무 말이나 던져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호수에 던진 돌처럼 파문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예?”
에이담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있는데 누가 뒤통수를 때린 표정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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