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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낙은 오랜만에 두 팔을 걷었다. 게제라스 총관이 몸을 회복시키는 동안 자신이 그 역할을 대신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적당히 굴릴 수는 있겠지.’
그가 하라는 것을 하도록 만들면 되는 일이라고 쉽게 생각했다.
“총관과 가까이 지내던 문인이나 뭐 그런 자는 없나?”
“제가 아는 자라면, 브리얀이라고 문인이 하나 있습니다.”
“성은?”
“없습니다.”
그 말에 드낙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문에서 쫓겨난 게제라스는 자신의 가문 명을 말하지 않는 걸 좋아하기에 제쳐놓더라도, 다른 문인을 초빙하는 게 아니라 새로 키우고 있으니 이런 꼴이 나는 것도 당연해 보였다.
“브리얀 문인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
“예.”
병사가 앞장섰다. 내청으로 향했는데, 드낙이 발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외청도 어떤 상황인지 알아놓아야겠어.’
즉흥적인 그 태도는 실로 피곤한 윗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먼저 외청으로 가보겠다.”
“예.”
호수마을에 있는 외청은 항상 북적거렸다. 1층에는 하급 관리라 불리는 자들이 뒤섞여있어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양피지는 없고, 조잡한 종이만 가득했다.
이상한 것은 그런 관리들보다 다른 자들이 더 많았다는 점이다. 이제 곧 겨울이었기에 막바지에 남은 일을 하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관리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기다리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으. 관리를 무슨 이따위로.’
바닥은 더러웠고, 음식물이 말라 비틀어져 있기도 했다.
쾅! 쾅!
드낙이 눈을 찌푸리면서 주먹으로 벽을 후려쳤다. 굉음에 모두가 할 일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눈이 돌렸다.
후두둑!
균열이 난 벽에서 돌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외청이라는 곳이 더럽나! 당장 청소부터 시작해라! 먼지 하나라도 남아있으면 엄벌을 내리겠다!”
단발이지만, 붉은 머리카락을 보고 딴소리를 할 놈은 없었다. 하지만 드낙이 나타나자마자 외부인들이 밖으로 허둥지둥 나가려고 짐을 싸는 모습이 드낙의 눈에 들어왔다.
뭔가 싸했다.
눈치 좋은 드낙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보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촉이 왔다. 이놈들, 뭔가 저질렀구나.’
아니면? 아니면 말고. 왜 권력을 쥐었는가. 이렇게 거침없이 나갈 수 있으니까 모두가 권력을 원하는 것이다.
아파트 주민들이 경비원이 인사 안 했다고 폭행하는 것도 모두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동작 그마아안!”
드낙의 우렁찬 외침에 외부인들이 움찔했다. 무식하게 나가려고 하는 자는 드낙이 주문을 읊어서 단번에 포박했다.
“왜, 왜 이러십니까.”
관리 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서 다가왔지만 드낙이 노려보자 고개를 푹 숙였다. 감히 문인 따위가 드낙에게 딴지를 걸었다. 그만큼 이들이 짓고 있는 죄가 크다는 뜻이다.
드낙과 상대한다고 마음을 먹을 정도로 큰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왜 이래? 미쳤구나. 미쳤어.”
드낙이 검을 뽑아들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단 하나라도 나선다면 폭풍처럼 몰아칠 것 같은 긴박감이 피부를 타고 흘러왔다.
만약 드낙의 기세가 조금이라도 약했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을 터였다.
오크의 야수성이 드낙을 더욱 흉포한 자로 보이게 만들었고, 이들은 드낙이 모든 일을 마무리할 때까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 하나 선택하기에는 그들의 간은 절대 크지 않았다.
바람아, 바람아. 어딜 그렇게 가느냐?
가는 것 멈추고 내 손 한 번 잡아다오.
그리 못하겠거든 가는 길 멈추고
말 한마디라도 해다오.
“〈끊을 수 없는 속박〉.”
마법은 단 한 번이었지만, 담긴 마력이 대단해서 한 번에 수십 명을 포박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을 모조리 속박하고, 큰 창문과 세 개의 입구를 마법으로 봉쇄했다.
드낙의 대마력이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봉쇄하는 데 쓴 마법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그냥 불로 뒤덮으면 되었다. 마법 불꽃은 번지지 않기 때문이다.
〈소환 마법〉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이 세계의 소환 마법은 효율이 정말 형편없어서였다. 1:1을 1:2로 만들 수 있으므로 그 가치는 높았지만, 가치와 비교하면 소모되는 마력이 너무 컸다.
드낙은 2층으로 향했다.
‘뭐야, 이거. 막혀있잖아.’
서류 더미가 그를 막고 있었다. 여기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도리어 말년병장들의 음습한 비밀기지를 본 것처럼 보였다.
종이를 무식하게 발로 밀어내며 2층에 기어코 올라갔다. 계단에만 이상할 정도로 종이 뭉치들이 쌓여있을 뿐, 그 뒤의 복도는 공간이 많았다.
‘여기에 뭔가가 있다.’
가장 가깝게 있는 문의 열려고 했다. 단단히 잠겨 있었다. 발로 걷어차자 경첩이 떨어지며 문이 바닥에 쿵 떨어졌다. 이들은 드낙이 그렇게 고함을 질렀음에도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방음은 안 되어있을 텐데. 얼마나 방심하고 있었으면.’
“어멋!”
문인 하나와 여자 두 명이 나체로 뒤섞고 있었다. 드낙은 씨익 웃으면서 주문을 읊어서 단번에 그들을 포박했다.
다른 방도 확인했다. 쿨쿨 자면서 한 손으로는 어린 소년의 엉덩이에 음흉한 손길을 뻗은 자도 있었다. 그 손가락은 정말 끔찍한 곳에··· 차마 말을 하기 힘들 정도로 더러웠다.
‘이게 외청이야, 매음굴이야?’
아예 대놓고 씻는 곳이 마련되어있는 방도 있었다. 대산에서 끌어오는 질 좋은 수원을 직통으로 연결해놓았고, 견습 마법사를 통해서 강철로 된 수로는 달구어져 있었는데, 뜨거운 연기가 펄펄 생겨나고 있었다.
‘살판났네.’
마법 자원을 자신들의 사리사욕에 쓰고 있었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드낙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공정성을 드낙에게 기대하면 안 된다. 그는 그 정도의 그릇이 없고, 그렇게 행동하면 그건 다른 자의 조언을 들어서 그렇게 한 것 뿐이었다.
‘난 죽으라 고생하다가 왔는데.’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지금도 그는 편히 쉬는 삶을 선택하지 못하고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밑에 놈들이 진탕 놀다니? 이건, 절대로 쉽게 흘러갈 수가 없었다.
‘천국이 따로 없었겠지. 직장에서 이딴 짓거리를 할 수 있고.’
술도 제대로 못 즐기고, 여성과 재밌게 즐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편안하게 온천욕을 할 수 있었나?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돌아와 보니 외청의 2층이 이 꼴이니 분노가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사, 살려주세요! 저희는 그냥 돈을 준다고 해서 여기에 온 것뿐이에요!”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비는 창녀가 있는가 하면, 그냥 울기만 하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의식불명에 빠진 채 피와 허연 것이 바짝 말라 있는 더러운 침대에 그저 누워있는 여자도 있었다.
이런 자들만 모아도 족히 80명이 넘어갔다.
“어쭈?”
가장 구석진 방은 금고처럼 강철문이 새로이 자리잡혀 있었다. 드낙은 히드라의 타투를 이용해서 강철을 우그러뜨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금괴와 은괴가 그럴싸하게 모양이 잡혀있었다. 한쪽에는 장부가 있었는데 어디의 누구에게 얼마를 받았고, 그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적혀져 있었다.
‘자유기사들과 상인들.’
드물게 용병단의 이름도 보였다.
‘외청을 자기들의 편으로 끌어들였군.’
게제라스 총관은 내청의 집무실에서 일하고 일에 치여서 다른 이들을 사찰할 시간도 없었다.
드낙은 말할 것도 없다. 그의 게으름은 게제라스 총관에게 내정을 일임할 정도로 으뜸이다.
그는 다시 첫 방으로 돌아갔다. 가장 먼저 드낙에게 걸린 놈이었다. 온몸에 온갖 장신구를 끼우고 있었다. 외청에서 일하는 관리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현행범이라는 걸 잘 알고 있겠지? 이름은 들어보자.”
“데리엄이라고 합니다.”
제법 침착해 보이자 드낙은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뺨을 후려갈겼다.
철썩!
데리엄이 휘청거리며 바닥에 철퍼덕 내려앉았다. 고개를 드는 것조차 못하다가 옆으로 픽 쓰러졌다. 바닥에 이빨과 피 그리고 침이 뒤섞여 흘러내렸다.
두세 호흡 뒤에 겨우 앓는 소리를 냈다.
“어그극···”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것이냐. 아니면 이런 상황을 미리 예견한 것이냐?”
눈시울이 붉어진 채 콧물을 훔치며 데리엄이 바싹 엎드리려고 했지만 전신을 뒤흔든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해서 엉망으로 바닥에 엎어졌다.
“사, 살으혀주십시오!”
혀까지 꼬아가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했다.
“살려면 노력을 해야지. 가담한 자를 하나도 빠짐없이 말한다면, 살려줄 것이다.”
그가 얼른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드낙이 검지로 입술을 가렸다.
“······!”
“만약 가담한 자 중에서 네가 말하지 않은 이름이 단 한 명이라도 나오면 넌 죽을 것이다. 네가 살려면 모든 것을 집중해서 한 번이라도 여기서 허리를 놀린 놈을 찾아 적어라. 이름을 모르면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라도 적어라.”
“예. 예! 당장 하겠습니다!”
드낙은 밖으로 나갔다. 외청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병사! 양피지를 최대한 많이 가져와라.”
“예!”
병사가 혁대를 풀고, 창과 무기를 함께 있는 병사에게 건네주며 후다닥 달려나갔다.
“너는 호수 마을에 그 누구도 나갈 수 없도록 순찰병을 밖으로 돌리라고 명령하라!”
“예!”
추가로 순찰을 돌던 병사들도 제법 와있었기에 드낙이 명령을 하달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마을에 기사가 있는가.”
“예!”
“그들도 이곳으로 불러라. 반항하거나 핑계를 대면, 안 불러도 좋다.”
애꿎은 병사가 죽을 수 있었다. 도망갈 길은 터주었다. 물론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지옥까지 따라가서 쳐 죽일 것이다. 자신의 자원을 함부로 쓴 놈이다.
‘악착같이 쫓아가 주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인파마저 모였다. 병사가 내달렸으니, 자연히 사건이 터졌고 지금은 할 일이 없는 게 시민들이었다.
판을 깐 드낙은 양피지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데리엄이라 불린 자는 꼼꼼하게 양피지에 쓴 것을 두 번, 세 번 검수하고 난 뒤에 침을 꼴깍 넘기며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드낙에게 말했다.
“완성했습니다.”
“틀림없겠지?”
“예.”
완성된 양피지의 장수는 19장에 달했다. 적혀진 인물수는 대략적으로만 봐도 200~300명은 되어 보였다. 밖으로 파견 나가 있는 관리도 포함되어있을 것이다.
‘가난하고 신분이 낮다고 모두 성실하게 일을 하지는 않지.’
거지라고 모두 불쌍하고, 착하다고 보는 것과 같았다. 현대 사회복지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현장에서 직면하는 가장 큰 모순이며 스스로 판단을 꼭 내려야 하는 문제였다.
‘총관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거기까지 드낙은 파악하지 못했다. 압도적이며, 유례없으며, 전폭적인 〈권력의 이양〉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드낙은 총 다섯 명의 주동자를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데리엄, 브리얀, 타일러, 조세, 브레이안.
총관의 측근 다섯 명이며, 〈다섯 손가락〉이라고 불리는 자들이었다. 데리엄의 경우 외청으로 파견을 나가 총관을 대신하여 외청을 관리, 감독하는 자였다.
측근이었고, 주동자라도 이 일에 가담한 자를 모두 기억할 수는 없었다. 다른 자의 연줄을 타고 온 자는 서로가 몰랐다.
애초에 드낙이 내건 조건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깊게 생각하면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거기까지 생각하는 건 힘들었다.
“너희들은 그저 그런 상황이라서 돈을 내어줬다고?”
“이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외청이 부패했고, 다른 자들도 돈을 줘서 장원에 편의를 받는데 그럼 어찌합니까?”
호수 마을에 있던 자유 기사는 모두 8명이었다. 그들은 계약을 하고 장원을 받기까지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 여섯이 도망치고, 두 명만이 드낙의 부름에 찾아왔다.
“왜 신고하지 않았지?”
“누구에게 신고합니까? 게제라스 총관을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고, 그렇다고 전쟁에 나간 자작님을 어찌 찾아가겠습니까? 찾아간다고 해도 어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드낙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대의 이름은?”
“노드헝이라고 합니다.”
독특한 이름이었다.
“아, 가문 명을 말하라.”
드낙이 착각해서 아 소리를 내며 다시 물었다.
“웃터 가문입니다.”
“웃터! 이제야 찾아왔구나. 그럼 옆에 기사도?”
“제라드 가문의 후예, 리암 제라드라고 합니다.”
드낙은 그들을 크게 반기며 마법 족쇄를 바로 풀어주었다. 이들이 저지른 죄? 그것을 덮을만큼 그들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비리를 저지른 것도 잊은 채 이런 상황에서도 관리를 하나 풀어 닦달하며 마탑 근처에 장원을 세울 수 있도록 명령했다.
‘겐 쟝과 같은 꼴이 나면 안 되지.’
호들갑일 수 있었지만, 권력자가 호들갑을 떨면 당사자는 크게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두 가문의 후예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표정으로 그대로 드러났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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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래 안 하던 놈들이 하게 되면 더 무서운 법이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