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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아!”
사람들이 너도나도 목책 위에 올라왔다. 가장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한 것은 아이들이었지만, 금방 이리 쳐내 지고, 저리 쳐내 졌다. 결국, 아이들은 밖으로 나가서 구경하게 되었다.
검은 비늘 와이번의 위용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목책만 한 높이에 길쭉한 몸은 제외하고도 그저 용이라는 것만으로도 대단하게 여겨졌다.
그 환상은 마치 드낙이 지녔었던 북부 귀족들에 대한 환상과 같았다.
몬스터임에도 용을 대단하게 여기는 것이 인간들이었다. 워낙 만나기 힘든 놈이라 그런 환상을 품을 수 있었고, 이야기꾼들이 이야기하는 용은 때때로 선행도 베풀기 때문에 착각하고 살 수 있었다.
“병사!”
“예!”
“와이번에게 다가가게 하지 마라. 잡아먹을지도 모르니.”
병사들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드낙은 웃으면서 그들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죽고 싶은 놈만 나와라!”
“죽어도 날개는 한번 만져보고 싶소!”
객기를 부리는 놈의 볼에는 홍조가 들어있었다. 낮술 하는 한량놈이었다. 호수 마을에 온 사람 중에서는 재물이 많은 자도 섞여 있었기에 한량이 없을 수 없었다.
“악!”
엉덩이가 걷어차이는 한량을 보며 웃는 이들이 많았다. 추수가 끝났기에 사람들이 매우 많이 보였다.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는데, 〈불파겐 마탑〉에서 배출된 견습 마법사들 덕분이었다.
드낙은 알아서 비키는 인파를 지나며 게제라스 총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의 입구는 병사가 두 명 지키고 있었고, 1명은 막 건물의 코너를 돌며 순찰을 마치고 있었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경례하는 것을 받아주고 총관의 상태를 물었다.
“총관은 어떤가.”
“쓰러지신 지 이제 이틀째입니다.”
“그래? 신관은?”
“아침과 저녁에 한 번씩 오고, 자정을 넘어서 한 번 더 와주십니다.”
동부로 흘러들어온 사제들의 성향을 생각하면 대단한 편애였다.
삐걱.
소리가 나는 나무로 된 계단을 올랐다. 곳곳에 종이뭉치가 많이 쌓여있었다. 정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을 만큼 일에 시달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집이 이 정도인데 집무실은 어느 정도일지 감이 오지 않았다.
‘어디.’
호기심에 계단에 있는 종이를 한 장 꺼내 들어서 훑어보았다.
[둥근 언덕 마을의 가구수 239. 가정마다 정장의 숫자는 1···]
‘윽.’
통계가 눈에 보이자마자 드낙이 질색하며 다시 내려놓았다.
기름칠이 되어있는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잠을 자고 있는 건가?”
드낙이 눈을 뜨지 않는 게제라스를 보며 소리를 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침대의 밑에는 물이 담겨 있고, 새하얀 천이 둥둥 떠올라있었다.
의자에 앉아서 꾸벅 졸던 고용인은 드낙이 지닌 존재감에 갑자기 눈을 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소리를 크게 냈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서둘러 고개를 허리까지 숙였다.
“잠을 자고 있는 건가?”
드낙이 다시 묻자 시녀가 냉큼 고개를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정신을 못 차린 지 삼 일째입니다.”
그 말에 드낙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병사들이 하는 말과 달라서였다. 총관 하나 없다고 인수인계도 안 되는 모습에 화가 났다.
“밑에 가서 병사를 불러와라.”
“예.”
여자 고용인이 서둘러 내려갔다. 어찌나 당황하고, 겁을 먹었는지 치맛자락을 밟아서 넘어질 뻔했다.
“부르셨습니까!”
병사가 말하자 드낙이 싸늘하게 말했다.
“고용인은 삼일을 의식이 없었다고 하고, 너희는 이틀이라고 말하니.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한 듯합니다.”
“병사. 이름이 뭔가?”
“하드란입니다.”
“두고 보겠다. 자신이 맡은 일을 확실하게 하길 바란다.”
드낙은 경고하는 것으로 끝냈다. 병사는 크게 안도하며 손사래 치는 드낙에게 소리 없이 물러갔다. 심기를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신성력으로 깨어나지 않는다면, 더 큰 신성력을 부어주면 될 일이다.’
드낙은 사제 3명~5명의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그 정도에서 그칠 생각은 없었다.
“최대한 많이 잉크를 가져와라.”
“예.”
고용인이 나갔다. 그리고 금방 돌아왔다.
“아까 내려간 병사들을 다시 불러라. 시킬 일이 있다.”
“예.”
드낙은 병사들을 다시 불러 총관이 누워있는 침대를 제외하고 모두 빼도록 했다. 텅 빈 방에서 잉크를 듬뿍 부어서 마법진을 만들었다.
가죽 주머니에서 철가루를 잉크에 뿌렸다. 잉크의 나약함을 철가루가 조금이나마 보완해줄 것이다.
‘실패하면 철을 녹여서 마법진을 다시 만들면 되니까.’
이걸로 되면 두 번 일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마법진을 그리고, 간단한 바람 마법으로 잉크를 말렸다.
‘마력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범용성이다.’
〈범용성의 마력〉이라고 불릴 정도로 쓰임새가 많은 게 마법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도, 어떤 것으로도 될 수 있는 게 마력이라는 초월의 힘이었다.
그 성격을 극대화하면, 마력을 신성력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불가능이 아니었다.
드낙은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마법사들을 처형시켜 얻은 지식과 능력으로 능히 마력을 신성력으로 변형시킬 수 있었다.
물론 두 힘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어떠한 〈재능〉이 있어야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힘의 합일을 연구한 마법사들은 10중 9은 그 힘에 멀어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재능을 알고 포기한다.
그런 마법사들에게 꿈 같은 소리가 있었으니, 바로 〈삼주력(三主力)〉에 대한 전설이었다. 마력, 신성력, 주력을 하나로 융합시킨 초월의 힘이 가지는 증폭율은 신조차도 죽일 수 있다고 여겨지며 후대 마법사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그 소리를 믿는 마법사는 단 하나도 없었다.
아무튼, 드낙은 자신의 강대한 마력을 신성력으로 변화시켜 게제라스에게 쏟아부었다.
5시간을 부여하고 나서야 게제라스가 눈을 떴다.
“윽.”
앓는 소리에 마법을 취소시키고 드낙이 성큼 걸어 다가갔다.
“괜찮은가.”
“드낙 님. 아, 영주님···”
게제라스가 서둘러 드낙을 영주라고 불렀다.
“쓰러지긴 왜 쓰러져. 그러다가 큰일이 나면 어쩌려고.”
“죄송합니다.”
일어서려고 했지만 게제라스는 일어나지 못했다. 드낙은 그의 상체를 일으켜주었지만, 다시 나뭇잎처럼 침대에 쓰러졌다.
“흠. 오랜만에 일어나서 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 걸 수도 있어. 일단 따뜻한 수프를 마시며 재활에 힘써.”
“예.”
드낙이 몸을 돌리기도 전에 총관이 말했다.
“오크와의 전쟁은 어떻게 마무리가 되었습니까?”
드낙이 움찔했다. 만약 북부와 단교하고 왔다라고 말하면 까무러칠지도 몰랐다.
“몸을 추스르면 말해줄게. 그전에는 편히 쉬어라.”
“예.”
드낙은 문을 닫고 나와서 서둘러 함구령을 내렸다. 몸이 약할 때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게제라스 총관의 후임자는 누구인가?”
“예? 그게··· 정해진 게 없습니다.”
병사의 말에 드낙이 이마를 쳤다.
산 넘어 산이었고, 게제라스가 얼마나 혼자서 일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거 어쩌지? 너무 막막하다.’
뭐부터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갑자기 총책임자 하나가 사라지니, 모든 게 제대로 굴러가고 있지 않았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
“헉헉!”
일단의 무리가 거칠게 산길을 올랐다. 어찌나 급하게 가는지 서로가 지닌 대열도 엉망진창이었다.
물론, 누더기나 다름없는 더러운 행색은 그들이 결코 병사 같은 퀄리티를 보여줄 수 없다는 걸 미리 보여주고 있었다.
“읍! 읍!”
재갈이 물린 채 뭐라고 지껄이는 병사의 뒤통수를 끌고 가는 자가 때렸다.
“조용히 안 해? 여기서 죽여줄까? 엉!”
그 말 한마디에 묶인 남부 병사의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죽음은 너무 무서웠다.
“퉤! 개새끼. 그렇게 사람 쥐어패더니, 이제 자기 차례가 왔다고 겁먹은 개새끼처럼 꼬랑지를 마는 꼴이라니.”
침을 바닥에 뱉으며 병사가 조용해진 걸 보고 한 명이 분을 삭였다.
남부 왕국의 수탈은 해를 넘어갈수록 가혹해지고 있었다.
있는 자들은 내야 할 것을 안 내니, 오우거에 대한 부담은 자연히 약자에게 부담됐다. 그 덕에 이런 반란분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기사와 마법사가 있는 세계라도 칼침을 맞으면 똑같이 목에서 피를 쏟아낸다.
반란을 도모하는 건 누구나 생각해볼 만 했다.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건 또 달랐다. 이들의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 뒷배는 산의 중턱에 있었으며, 그늘진 곳에 가려진 동굴로 향하는 입구로 들어서야지만 만날 수 있었다.
“바닥이 왜 이렇게 미끄럽지?”
처음 온 사람은 껄끄러운 감정을 담아서 말했다.
“조심해서 따라와. 어차피 외길이니까, 길 잃을 염려는 없을 거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포획 당한 남부 병사는 질질 끌려갔다. 손과 팔이 단단히 묶여 있어서 이런 곳에서는 제대로 걸어갈 수 없어서였다.
홀로 남은 누더기 사내는 천천히 움직였다.
벽을 짚었는데, 뭔가가 묻어있어서 벽도 짚기 꺼려졌다. 고약한 악취가 동굴 안에서 풍겨왔다.
동굴 입구의 기이한 분위기 때문에 그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촉수를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른 것에 홀려버린 것이다. 촉수에 달린 실눈이 빛을 받아들이며 그의 모습을 담았다.
〈키메라의 알파던〉.
흑마법사의 일원 중에 하나.
남쪽의 바닷가로 도망친 이들은 꼭꼭 숨었지만, 남부에 온 혼란에 다시 눈을 뜨고 행동을 개시했다. 이번에는 여러 개의 〈거짓된 은신처〉에서만 활동하고, 꼭두각시를 세웠다.
꼭두각시를 정하는 것은 간단했다.
이 세상을 증오하는 자들은 넘쳐났다. 그들 중에서 죄를 짓고 투옥되어 겨우 풀려난 자들을 거두어들였다.
풀려났다는 건 살아남았다는 뜻이고, 운이 좋든 실력이 좋든 하나는 한다는 뜻이기에 하수인으로 두기 좋았다.
“재갈을 풀어라.”
“예.”
중앙에 있는 화덕에 마법불이 지펴져 있었고, 그 뒤편에 선 알파던이 꿇려진 병사의 재갈을 풀도록 지시했다.
“이 악독한 놈들! 남부군이 두렵지 않느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반응 하나 없었다.
스스슥.
촉수가 병사를 휘감고, 들어 올려 제단 위에 놓았다. 움푹 들어간 제단은 버둥거려서 빠져나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스윽!
독한 마비약이 입으로 들어갔다. 피부가 검게 변할 정도로 독성이 대단한 마비약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포가 떠졌다.
말 그대로 산채로 피부가 벗겨졌다. 꺽꺽거리며 두려움에 떠는 병사는 그렇게 산채로 버둥거리며 서서히 죽어갔다.
악마에게 사람 하나를 인신공양한 알파던은 흡족하게 웃으며 품에서 작은 대거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것이···”
“너의 복수를 도와줄 힘이다. 뽑으면 바로 적용이 될 것이고, 다시 집어넣으면 효과가 사라진다. 힘을 보충하려면 사람을 공양해야 한다. 태어나지 얼마 안 된 아기는 최고의 공양물이니, 대거의 힘이 강화될지도 모르지.”
공양할 악마는 정해져 있었다. 〈악마 아카타베루〉.
“예. 잘 알겠습니다.”
리더인 사내가 대거를 뽑아들었다. 그러자 옆구리에서 짜릿한 통증과 함께 촉수가 4개 튀어나왔다. 그가 생각하는 곳으로 쏘아졌다.
바닥에 떨어진 촉수는 버둥거렸다. 실망하는 자들에게 알파던이 말했다.
“목표물을 휘감아 빨판으로 집어삼키는 촉수다. 제대로 검술을 배우지 않아도 병사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기사는 힘들다.”
“충분합니다.”
그들의 목표는 기사가 아니었다. 북부의 관리는 기사지만, 남부는 달랐다. 나약한 몸으로 큰 권력을 지닌 자들이 있었다.
대거를 집어넣자 나머지 촉수는 순식간에 검게 변해서 후두둑 떨어졌다.
“감사합니다.”
“힘없고, 핍박받은 이들을 데려와라. 그들에게 힘을 주겠다.”
“예.”
누더기 차림새의 무리가 서둘러 동굴을 빠져나갔다. 그중에 한 명은 남부왕국의 첩자였지만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외길로 보이는 동굴이지만 탈출구는 무려 3곳에 달했다. 또한 동굴의 입구에도 눈이 달려있었다. 그 눈을 간파해서 죽인다면 알파던은 미련없이 동굴을 떠날 것이다.
이 행위는 그저 남부의 혼란이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겁잡을 수 없이 번진다면, 흑마법사들은 더욱 본격적으로 움직일 터였다.
지배만 한다면 지방에서라도, 엄청난 공물을 악마에게 공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5710자
평점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오랜만의 흑마법사들입니다. 물론 잽을 넣는건 당연한 일이겠죠? 리스크가 있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언제나 잔챙이로 남을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