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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파겐을 욕하는 대신들은 실로 간신이었다. 물론 단순히 드낙만 욕하지도 않았다. 그래서야 꼴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플래티넘의 자손들은 천성적으로 정치력이 높았다. 노골적인 사탕발림에 넘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남부왕의 결단으로 오우거의 마수를 막고 있는 것을 모르는 우매한 시민들이 많습니다.”
시민들을 빌미로 이 세상에 얼마나 우둔(愚鈍)한 자들이 많은지를 이야기했다. 자연스럽게 어렵지 않은 판단을 해도 남부왕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높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 또한 큰 문제 아니겠습니까?”
이에 남부왕이 웃음을 내비쳤다.
“깨달은 자가 깨닫지 않은 자를 이끌어야 하는 법. 그 기쁨을 누리는 남부인들은 큰 행운을 가졌음에도 그걸 깨닫고 있지 않습니다.”
남부왕이 손사래를 쳤다.
“상황이 급한데 왜 나를 그렇게나 칭찬하는가. 그만하라.”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대신들은 30분이나 지나서야 말을 멈출 수 있었다. 이것은 충성심을 시험하는 단두대와 같았다. 침을 수염에 흘리면서 열변을 토해야 했다.
‘역겨운 돼지 놈들.’
이를 지켜보는 1왕자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들이 모두 무능하게 보여서였다. 만약 자신이 왕이 된다면 저들을 모두 숙청하고 새롭게 새로운 피를 수혈할 것이다.
물론 그게 정말로 이루어질지 아닐지 누구도 몰랐다.
개혁을 외치는 독재자만큼 음흉한 놈이 없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부왕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해나갔다.
“흠. 오우거 쪽은 어떤가? 새로운 소식이 있는가.”
“마수는 단 한 번도 남부로 내려온 적이 없습니다. 그는 약속을 이행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불파겐보다 더 인간답습니다.”
발라쿠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인간보다는 드워프의 피를 원하고 있었기에 인간을 자극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판단은 하나의 공으로 여겨져서 남부왕의 공적이 되었다.
“모두 왕의 카리스마 덕입니다. 마신장조차도 손뼉을 부딪치기 무서워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수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목소리가 지배적이었다. 현재 불파겐의 행보를 생각한다면 그렇게라도 마신장을 포장해야만 했다.
“북부를 보십시오! 그들은 전쟁을 했고, 몰락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의 목숨을 쉽게 여기는 자들이나 전쟁을 하는 법입니다. 오우거에게 공물을 바치고 마수의 침략을 받지 않은 남부는 큰 복을 타고났습니다.”
북부를 깎아내리고, 오우거에게 바치는 공물에 대한 정당성을 외쳤다. 군사대치도 한 놈들이 말은 잘했다.
실로 그럴듯한 말이었다.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사실처럼 보였다.
“허나!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들의 왕이시여!”
분위기를 딱 잡았다. 그만큼 불파겐은 두렵고, 공포스러웠다. 다른 여느 권력자와 달라서였다. 광인(狂人)이라고 해도 무방한 자가 드낙 불파겐이었다. 그 스스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선정을 베풀기도 하는데 오히려 그게 더 미치광이로 보였다.
착한 일을 하는 미치광이라니? 소름만 더 끼칠 뿐이다.
“오크 4만을 쳐부수는데 혁혁한 공로를 내세웠습니다. 드래곤 오크 라이더도 홀로 죽였으니, 이미 그 무력은 하늘에 닿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음···”
남부왕은 앓는 소리를 냈다. 드낙의 강인함을 생각하면 절로 불쾌함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짜증과 질투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드낙을 경외하지 않았다. 단순히 힘만 강한 놈이 존경을 받는 시대는 〈세파리아스 불파겐〉의 난으로 끝이 났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정치력임을 남부 왕국의 모든 귀족들이 확인한 시대가 수백 년 전이다.
드낙은 또한 단점도 많은 자였기에 존경을 받을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드낙이 지닌 가장 큰 강점을 몰랐다. 빈틈이 많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라는 것을 몰랐다.
게으름은 수많은 이들에게 수많은 것을 맡기고 싶어함을 의미했다.
병사를 훈련하는데 재미를 못 느꼈기에 이실레아는 군권을 얻고, 드낙에게 전폭적으로 권력을 이양받았다.
세금의 관리부터, 마을의 문제를 가려내고, 상하수도는 물론, 인간이 모여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도 게제라스 총관이 도맡아 결정했다. 드낙은 그런 것을 〈머리 아픈 것〉이라 생각했다.
권력의 이양.
그게 가지는 무시무시한 파급력은 지금까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드낙에게 꼬리표처럼 붙는 무성한 소문 때문이었다.
또한 게제라스와 이실레아가 그 권력의 이양이라는 놈을 독점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숨겨도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관리해야 할 마을은 많아지고, 찾아오는 자유기사도 많았다. 서서히 드낙의 중심으로 수많은 이들이 모이고 있었다.
바닥을 흐르는 그 거센 흐름을 높은 곳에 있는 자들은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북부와 친하게 지내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단교를 결정했습니다. 그 성정이 얼마나 괴팍하면 나라의 일에 사사로운 감정으로 멋대로 굴겠습니까?”
“이랬다, 저랬다 하며 그때그때 박쥐처럼 판단을 달리하는 변덕스러운 자입니다. 괜히 그에 대한 악소문이 퍼졌겠습니까?”
다른 대신이 넙죽 받았다.
“그러니 〈몬스터 기사〉라고 악명이 자자하지 않소. 실로 불명예스러운 이름이오. 몬스터라니!”
“불파겐 자작은 이번에 큰 실수를 한 겁니다. 비록 몰락했다고는 하나 열세에서 오크의 대침공을 막아낸 자들이 북부 아닙니까?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할 때입니다.”
드낙의 결정을 실수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제안은 일석이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과정적으로는 드낙이 옳아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북부와 남부와 좋게 지내면 좋은 결정을 하게 된 것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믿을 수 없는 놈들에게 손을 내밀다니? 그들을 어찌 믿을 수 있나.”
남부왕은 단칼에 잘랐다. 하지만 대신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 보내는 세금을 보고 결정하시면 됩니다. 그 세금이야 말로 북부의 목줄입니다. 세금이 낮으면 북부에게 압박을 하고, 만족할만한 수준이면 북부를 계속 도와주는 겁니다.”
“어차피 오크 대침공을 막아낸 신하들 아닙니까? 그 공을 결국에는 치하하여야 합니다.”
결국에는 북부에 이득을 줘야 했다. 그들은 어쨌든 남부왕이 내린 작위를 받은 자들이고, 방파제 역할을 수행했으며, 적지만 세금도 보내주고 있었다.
국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대신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었다. 큰 마을의 소멸은 전조 현상과 같았다.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든 활로를 뚫어야 했다.
“불파겐 자작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견제를 해야 하겠으나, 망명한 길게이 왕자에게 힘을 실어 동부의 권력구도를 엉망으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메시지 마법을 통해서 일등공신에 오른 것이 길게이였다. 이를 이용하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그는 겁이 많은데, 그렇게 하겠소?”
1왕자가 발언했다. 3왕자에게 이득이 들어간다고 하니,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경쟁자에게 상을 주는 꼴을 보는 건 죽어도 싫었다.
“왕자는 가만히 있어라.”
남부왕은 그를 제지하며 턱짓하며 발언한 대신이 계속 말하도록 제스쳐를 넣어주었다.
“귀가 얇다고 소문이 난 불파겐 자작입니다. 길게이의 힘이 높아지면 어느 쪽으로든 싸움이 날 것입니다.”
“흠.”
“변덕스러운 자입니다제대로 끝마무리를 못 낼 것입니다.”
대신의 말에 남부왕이 눈으로 다른 대신들을 훑었다. 모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미 서로 이야기가 다 된 것처럼 보였다.
‘허, 이놈들.’
그 단합된 모습에 남부왕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들과 함께한 지도 40여 년. 서로 늙어버렸다.
“하지만 3왕자의 목줄은?”
서로 자멸하지 않을 수 있었다.
“북부와 남부의 화친으로 능히 막아낼 수 있습니다.”
“불파겐과 화해를? 가능한가?”
남부왕이 반신반의했다. 작위를 받았음에도 수도에 한 번 오지 않은 자가 드낙이라는 작자였다. 플래티넘 왕가의 입장에서는 파격적으로 작위를 내어주었는데, 드낙은 그 기대를 저버렸다.
“세속적인 자입니다. 명예보다는 금에 더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이기도 합니다만, 금궤로 달랠 수 있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주기에는 모양이 안 살기 때문에, 오우거 토벌을 겸하면 됩니다.”
물기 좋은 떡밥이었다.
금궤를 받고, 오우거 토벌도 한다면 남부 왕국은 큰 짐을 덜게 된다.
금궤만 받는다면, 평판을 내리 까면 된다.
어찌 되었든 드낙은 금궤를 받을 것이기에 남부와 동부는 한시적이라도 서로 화해를 할 터였다. 그로 인해서 동쪽에 대한 부담감이 사라지는 남부는 마신장이 자리 잡은 서부에 신경을 쓸 수 있다.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의견은 더 없는가?”
“남부의 상업은 크게 발전해있습니다. 동부와 친하게 지내며 남부에 대한 의존도를 높인다면 나중에 단번에 차단했을 때, 큰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돈과 자원으로 목줄을 만들 수 있었다. 스스로 생산하는 게 아니라, 남부에 기대게 하는 것이다. 만들어서 팔아도 적자가 날 정도로 공격적으로 사업하면 동부의 산업은 박살이 날 터였다.
플래티넘 가문의 장기이기도 했다. 전쟁과 유혈사태 없이 남부 귀족을 모조리 초토화시킨 경험이 그들에게 있었다.
“좋다. 북부의 논공행상을 최대한 늦춰서 그들이 성의를 보이고 난 뒤에 상을 결정하겠다.”
북부는 힘든 상황에서도 남부에게 성의를 표시해야지 살 길이 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가혹할 것이었는데, 드낙이 북부와 단교를 해서 그들은 뒤가 없기 때문이다. 바다에서는 마실 수 있는 물이 귀한 법이었다.
“길게이 왕자와 밀약을 맺을 준비를 해라. 경제적인 목줄로 동부를 쥐는 것에 협력하게 하여라.”
겉으로 보이지 않도록 움직일 수 있을 터였다. 길게이는 자신의 몸에 날개를 붙이는 일에 크게 좋아할 것이다. 이것은 그가 남부에게 있어서 쓸모가 있다는 소리와 다름없었기에 매일 같이 암살자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불파겐에게 사신을 보내 금궤를 전하며 오우거 토벌을 권유하라.”
빈틈이 많은 인물이 드낙이라는 자였다. 충분히 먹힐 수 있었고, 시도해볼만 했다.
“명을 받듭니다!”
*
드낙은 목표를 잃고 방황하고 있는 순찰자들을 가면서 여럿 만나게 되었다. 백설산맥에서 순찰자 전력의 절반이 소모되었고, 그곳으로 가지 않은 순찰자들은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강인한 신념을 지닌 사람을 거둬줄 사람은 적었다.
‘순찰자들의 신념은 실로 대단했지.’
물론 드낙은 아니었다. 그 기개는 그의 가슴을 떨리게 하였고, 돕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였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먹을 것을 얻으러 온 순찰자 한 무리는 드낙에게 감사를 표했다.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오크를 죽이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인 대가는 혹한의 겨울이었다.
“힘들면 언제든지 동부로 오시오. 그들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존중하겠소.”
드낙은 스스럼없이 순찰자들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들은 존중받을 만했다. 동시에 드낙은 이들에게 다른 가문들이 선물로 준 은궤를 하나 내어주었다.
부담스럽다고 말하면서도 형편이 참 안 좋은지 두 번 싫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흐르고 흘러, 드낙은 동부 영지에 들어설 수 있었다.
“여기에 마을이 있었던가?”
그 말에 겐이 말했다.
“〈빌라스 마을〉입니다. 게제라스 총관님의 정책으로 수많은 자유 기사들이 장원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 그도 전쟁에 참가했나?”
“병사 하나 없어서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목책으로 잘 가려진 마을이었기에 제법 인구가 될 것이라 여겼지만 이게 웬걸, 50가구도 되지 않는 마을이었다.
멸문한 빌라스 가문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가문이었다. 드낙은 그에게 큰 신경도 쓰지 않았고, 동부의 근황에 관해서만 질문했다.
〈기사 플포른 빌라스〉는 드낙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자 적잖이 실망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드낙이 원하는 바에 대해서만 말하였다.
포기가 빠른 남자가 플포른 빌라스라는 기사였다.
“풍년이라고?”
“예. 불파겐 마탑의 견습 마법사들이 보내오는 〈성장 마법봉〉의 위력을 실감했습니다.”
마법사들의 대우가 썩 좋지 않은 게 불파겐 마탑이었다. 마탑이 미완성이니 그 처우는 열악할 수밖에 없었고, 드낙은 마법사들에게 많은 마법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산업에 도움이 되는 마법사지 수작업으로 수십 일을 허비하여 마법 장비 1개 만들어내는 장인이 아니었다.
그 효과는 농업에 특히나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이번 가을 수확에 큰 도움을 주었다.
“다행이다.”
먹을 것에 대한 걱정이 말끔하게 사라지는 대답이었다. 그 외에 자잘한 근황을 듣고 드낙은 서둘러 호수 마을에 있는 게제라스 총관에게로 향했다. 향하면서 불파겐의 병사들은 자신의 마을로 돌아갔다.
생존한 자유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겨울이 찾아오기 전에 최대한 마을을 수습하고 관리해야 했다.
불파겐 영지도 논공행상을 해야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하기가 어려웠다. 겨울에 다시 한 번 모이기로 했다.
“그대들은 천천히 와라. 난 와이번을 타고 먼저 가보겠다.”
안전한 동부에 들어서자 드낙은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싶어서 냉큼 와이번을 타고 날아올랐다.
거친 바람이 흙먼지를 크게 일으켰다. 와이번의 위용은 그 어떤 짐승보다 대단했다. 괜히 용이 아니었고,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호수 마을에서 드낙이 가장 먼저 들은 소식은 게제라스 총관이 쓰러졌다는 소식이었다. 신성력조차도 과중한 업무를 짊어진 총관을 치료하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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