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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이의 환대 덕분에 그라돈 토치라이트는 서슴없이 원하는 바를 말할 수 있었고, 일을 쉽게 끝낼 수 있었다.
일사천리였다.
“안 들어줄 이유가 어디에 있소? 하하!”
“고맙소!”
동부의 남쪽에 자리를 잡은 길게이의 세력과 동부의 북쪽을 넘어야 영지가 있는 토치라이트 세력은 상부상조하기에 적합했다.
기후도 달랐기에 교역할 것도 많았으며, 특히나 남부의 질 좋은 옷들과 물약까지 끌어올 수 있는 게 길게이였다.
‘그것 뿐만이 아니지.’
사회의 높은 계급에 들지 못한 남부 재력가들의 분출구가 될 수 있는 게 그의 현재 위치였다. 더불어 남쪽에 자리 잡은 곳에 거대한 목장과 농장을 짓고 있었기에 두 가지의 산업 분야를 손에 쥐고 있었다.
사업 파트너로 길게이 만한 자가 없었다. 사람을 포를 떠서 산채로 피를 흘리게해서 샤워를 해도 함께 사업하고 싶은 자가 길게이였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씀하시오. 남부의 자원을 몽펠리에보다 더 많이 가질 수 있을 것이오. 물론 서로 돕고 도와야겠지만···하하.”
“반드시 전하겠습니다. 저희 가주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길게이는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돈의 위치를 생각하면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북쪽의 토치라이트는 유지하는 게 좋았으며, 될 수 있다면 그들을 키우는 게 옳았다. 길게이의 세력은 남쪽에 치우쳐져 있기 때문이다. 북쪽을 견제하거나 흔들려면 토치라이트의 힘이 필요했다.
그건 단순히 군사적인 이유만이 아니었다. 온갖 분야에서 토치라이트는 동부에 침투될 수 있었다.
“방계 중에 장원을 받지 않은 기사가 있다면, 나에게 추천해주시오. 불파겐 자작에게 받은 남쪽의 땅이 워낙 넓어서 말이오.”
길게이의 말에 그라돈이 크게 놀라면서도 대단히 반겼다.
“아! 그렇습니까?!”
기사 전력을 자유기사가 아닌, 몰락하지 않은 가문에게서 조달받고 싶은 길게이의 뜻을 그라돈은 철썩 받았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사업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당장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떡밥만 던져도 서로 교류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일을 빠르게 매듭짓고, 그라돈은 서둘러 기병 50기를 추려서 달렸다. 보병이 섞여 있는 불파겐의 행군 속도는 느렸기 때문에 이틀 반나절 만에 그라돈은 불파겐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발룬을 탄 이실레아가 벼락처럼 달려왔다. 멀리서도 그 속도가 무시무시해서 기병들은 물론이고 그라돈까지 말을 급히 멈춰야 했다. 푸른 벼락이 뿔에서 얽히며 보이기도 했는데, 실로 존재감이 대단한 사슴이었다.
발룬의 존재감과 달려오는 맹렬함에 절로 침을 삼켰다.
“이실레아 브릴리언트라고 하오! 토치라이트의 누구인가!”
“그라돈 토치라이트라고 하오!”
이에 이실레아가 짧게 목례했다. 〈야수 기사〉는 토치라이트 가문이 운 좋게 배출한 고위 기사였으며,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자였다.
“몽펠리에에게 사정을 들었소. 무례일 수 있으나, 불파겐 자작께 말씀을 드리고 싶소.”
“······”
이실레아는 일부러 뜸을 들였다. 그리고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천천히 걸어서 다시 되돌아갔다가 십여 분 뒤에 그라돈에게 다시 다가왔다.
“편치 않은 마음으로 내리 달려왔으니, 편히 하루 쉬고 내일 자작님께서 부르시겠답니다.”
“알겠소.”
그들은 일찌감치 야영 준비를 마친 불파겐의 진영으로 들어섰다. 장소를 안내받았고, 천막과 고정대,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장작과 식량을 받을 수 있었다.
“원래 여기에 온천수가 있었소?”
그라돈은 오면서 상당한 구덩이에 연기를 내뿜는 물웅덩이를 볼 수 있었다. 병사들이 너도나도 그곳에 들어가 있었다.
안내하던 불파겐의 병사가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영주님께서 마법을 부려서 만든 것입니다.”
“아하.”
그라돈이 이해했다. 홀로 〈광역 마법〉을 쓰는 상상을 초월하는 마력을 보유한 것이 드낙이었다.
그들 또한 뜨거운 물을 받아서 대충 씻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피로가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뜨거운 물이 지니는 가치는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높아져만 가기에 심적으로 그러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다음 날, 그라돈은 굳은 얼굴로 드낙과 마주할 수 있었다.
“드낙 불파겐 자작님을 뵙습니다.”
그라돈은 북부가 완전히 불파겐과 줄이 끊어져 버렸기에 고개를 허리까지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드낙이 턱을 매만졌다.
“흠. 그라돈 경, 무얼 그렇게까지 고개를 숙이시오? 고개를 드시오.”
“예. 그리고··· 드래곤 나이트가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고맙소.”
드낙은 짧게 그 말을 받았다. 썩 좋은 반응이 아니라 그라돈의 간이 서늘해졌다. 불파겐이 큰 손해를 감수하고 북부와 단교를 선언했기에 드낙을 대함에 공포와 두려움이 있었다.
그게 그라돈을 굽히게 하였다.
힘 있는 자가 걷다가 갑자기 파도처럼 날뛰고 있으니 닥치고 숙여야 하는 게 옳았다.
왜 쥐새끼가 사자의 코털을 뽑겠는가? 사자가 잠을 자고 있기 때문이다. 얌전해 보이기에 코털을 뽑을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태도의 변화에 드낙의 마음속에는 경멸이 깃들었다. 하지만 토치라이트 한 가문 정도는 인정하는 건 상당한 이득이었다.
‘다른 북부 놈들이 아주 죽으려고 하겠지.’
단교를 했는데 토치라이트만 제외된다? 배가 아파서 끙끙 앓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통쾌한 복수였다.
‘제국이 남부 왕국에 언제고 내려온다면 전쟁터는 토치라이트 영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토치라이트를 살찌우고, 강하게 만드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불파겐 영지를 막아주는 훌륭한 방파제로 만드는 건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길게이를 견제하는데 토치라이트 가문이 효과가 있을까?’
의문이 드는 것은 그렇게 키워서 뒤통수치는 일이었다.
“앞으로 잘 선택해야 할 것이오.”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간 저희 가문은 끝없이 불파겐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까.”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뿐이지만, 상황상 계속 사과를 한 것이 토치라이트였다.
‘조금 계륵 같기도 한데.’
두루 생각하고 결정을 해야 하는 일이기에 드낙은 좀처럼 확답을 주지 않았다. 이에 이실레아가 드낙에게 다가와서 귓속말을 했다.
“받아들이십시오. 영토의 절반이 오크에게 약탈당했기에 동부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자세히는 이실레아의 장원이 큰 이득을 볼 것이다. 목장 일을 하기에 물품을 수송하는 마차도 많이 운용할 수 있는 게 그들 가문이었다.
“생기는 단점이나 피해는 뭐라고 생각하나?”
“길게이와 긴밀한 협력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이를 경고하십시오. 아예 하지 말라고 하면 숨기고 할 것입니다. 적당한 선을 지키는 것은 토치라이트 가문에 어려운 게 아닙니다.”
드낙이 수긍했다.
“길게이 왕자 전하와 적당한 선을 지킨다면 앞으로 불파겐은 토치라이트와 친하게 지낼 수 있소.”
그라돈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냉큼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소.”
드낙이 만족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그 옆에 선 이실레아도 실로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토치라이트 가문이 동부에 신경을 쓸수록 그와 붙어있는 이실레아의 장원 또한 자연스럽게 이득을 보기 때문이다.
이를 지켜보는 겐은 무표정했다.
*
승전보는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고, 달리는 말보다 빨랐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행동을 보인 것은 남부의 상인들이었다.
“서둘러 북쪽으로 가야 한다!”
보부상은 식량만 가득 짊어졌다. 화폐나 금, 은따위를 쉽게 얻어낼 절호의 찬스였다. 반대로 상단을 이끄는 상인들은 물약을 비롯해서 온갖 필수품까지도 마차에 실었다.
“으~ 머리야.”
술에 취한 용병들도 돈을 많이 벌 찬스를 놓치지 않고, 오랜만에 먼 길을 떠났다. 그중에서 착실한 용병은 길잡이 노릇을 도맡아 했는데, 남부는 혼란스러운 상태라서 마을이 생겨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해서였다.
“아니, 길잡이가 왜 망한 마을로 가자는 거야? 미친 거 아냐?”
돈 몇 푼 더 받을 수 있으므로 같은 용병에게 쓴소리를 듣기도 했는데, 길잡이 용병은 코웃음을 쳤다.
“모르면 입이나 닥치고 있어.”
“저 자식이 못하는 말이 없네. 자신 있어?”
“넌 그럼 무슨 자신감이냐?”
말싸움은 칼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두고 보자는 식으로 일을 키우는 것에 그쳤다.
사람 하나 없는 마을에 자리를 피자마자 횃불을 들고 추레한 차림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접근했다. 길잡이 용병은 거침없이 다가가서 인사를 나누고, 그들을 상단주에게 데려왔다.
상단주는 몇 걸음 떨어진 상태에서 말을 이어나갔다.
“저들은 누구인가?”
“이곳에서 겨울을 버티기로 한 화전민들입니다. 산에서 나는 싱싱한 야채와 말린 과일 등을 싸게 팔고 있습니다.”
“그래?”
남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돈이 가장 쓸데없다고 여기는 게 상인들이었다. 반색하며 그들을 반겼다.
“겨울만 버티면 어디로 가는가 보지?”
“예. 동부입니다. 요즘 못사는 사람들은 전부 불파겐 영지로 이주하지 않습니까?”
숨길 것도 없었다. 한 번은 성문마저 잠글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막으면 피난민만 성에 바글거려서 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저 백금 왕가에 할 일을 했다는 정도로 입소문이 퍼지는 정도로 끝냈다.
“남부가 대체 어떻게 되려는 건지. 쯧쯧.”
상인이 혀를 찼다. 이게 모두 3왕자가 동부에 망명을 가서 생긴 일이라 생각했다.
이처럼 동부로 이주를 하는 자들은 용병들과 상단의 요긴한 휴식처를 제공하며 1년을 또 버티고 봄에 또 열심히 걸어가고 봄이 끝나기 전에 자리를 잡아 다시 겨울을 버텨야 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에 이주하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만한 각오를 할 정도로 오우거 토벌로 인한 세금은 괴로웠다.
“허튼짓을 생각하지는 말게.”
상단주의 경고를 끝으로 서로 헤어졌다. 동시에 밤도 깊어가며 달이 빠르게 기울어져 갔다.
*
남부 왕국의 수도, 왕성에 놓인 황금으로 도금된 복도를 걸으며 대신 두 명이 불평했다.
“요즘 신전이 너무 건방을 떨고 있지 않소?”
“부정한 놈들이 매일 같이 자신들의 값을 높이고 더 많은 재물을 원하는 모습을 보시오! 꿀꿀거리는 돼지 같은 놈들!”
회복물약 보다 더 좋게 보는 것이 신성력이었다. 인간이 만드는 물약이 어찌 신의 힘에 준하겠는가? 당연히 대신들은 신성력을 만병통치약으로 보고 아프지 않아도 세례받듯이 축복받는걸 즐겼다.
마치 목욕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누리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선하고, 자신의 챔피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맑은 사제들에게 중립신은 친히 꿈에 행차하여 그들을 동부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산딸기 사제〉가 가장 대표적인 이주 사제였다.
남은 악한 사제들은 신성력이 빼앗기지는 않았기에 남부를 그나마 지탱하고 있었지만, 남부의 관리들이 지닌 재물을 탐하기 바빴다. 다른 시민들? 부상이 아니면 감히 신성력을 얻기가 힘들어졌다.
어린 소녀의 몸을 탐하며 신성력을 주는 극악무도한 사제도 있었다.
중립신이 남부를 그렇게 썩어 문드러지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업(業)때문이었다. 남부가 혼란스러울수록 죽는 인간도 많았고, 동시에 태어나는 인간도 많았다.
특히, 돈을 벌려고 자손을 낳는 이들도 많았다. 공공연하게 노예가 부활한 것이다. 돈 있는 자들에게 돈을 주고 자신의 자식을 팔아버리는 것이다.
한 마을이 아예 그런 사업을 체계적으로 하고 있을 정도였다. 일부러 부랑자를 잡아다가 애를 낳도록 했다.
모든 것이 더러워지고 있었다.
그것을 중립신은 가만히 지켜보았는데, 중립신은 결코 선한 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소식 들었소? 〈벨라스 마을〉에 굶어 죽은 자들 말이오.”
“마을 하나가 굶어 죽은 게 뭐가 이상하다고.”
“난 찜찜하오.”
그러자 대신이 단단히 경고했다.
“행여나 왕께 말하지 마시오. 제법 큰 마을이 기근에 떼죽음을 당했지만, 결국 마을 하나요. 지금 불파겐의 소식을 듣지 못했소?”
“그건 그렇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긴 하오.”
대신 2명이 서둘러 대전으로 향했다.
〈드래곤 나이트〉가 되고.
홀로 〈광역 마법〉을 펼치고.
오크들의 전쟁에서 승리한 〈전쟁 영웅〉이 된 드낙 불파겐.
‘거기에 북부와의 단교까지.’
태풍이 휩쓸었다. 이런 상황에 생뚱맞은 주제를 거론한다? 그날로 옷을 벗어야 했다.
모든 이들이 모이자 30분 뒤에 남부왕이 행차했다. 그와 함께 1왕자도 뒤를 이었는데, 누가 차기 왕위를 이을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대신들이 하나같이 소리를 크게 질러대었다. 남부 왕이 상석에 앉고, 왕자는 대신들과 함께 앉았다.
“모두 들었겠지? 불파겐 자작이 이번에 보여준 미친 짓거리를 말이다.”
“예! 정말 믿을 수 없는 자입니다.”
“자신을 믿고 따라준 북부에게 썩은 오물을 쏟아부은 망나니놈입니다.”
시작은 불파겐을 욕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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