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전사-552화 (551/1,239)

552 <-- -->

“싫다.”

〈세리안 불파겐(Serrian Bulpagen)〉은 즉답했다.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엘프의 사회계급 중에서도 일류 시민과 이류 시민을 나누는 집정관의 계급에 있는 젊은 엘프가 그 말에 노기를 드러냈다. 이곳까지 따라온 자들은 모두 상류층의, 엘프 중에서도 재능있는 자들이었다.

보기 드문 광경을 보여주는 것은 큰 경험이기 때문이다.

“건방지다!”

종족 우월주의가 한 마디에 잘 녹아 있는 외침이었다. 한 걸음을 내딛기까지 했는데, 이를 늙은 피부를 지닌 〈나스타 카라(Nasta Cala)〉가 팔을 올려 막았다. 힐끗 노려보자 목을 숙이며 한 걸음 뒤로 다시 물러났다.

“기회를 줘도 스스로 버리려는 것이냐? 인간.”

나스타 카라의 말에 세리안은 코웃음을 쳤다. 그 모습은 실로 여유로웠고, 누가 본다면 자기 집 안방에서 큰소리를 치는 줄 알 것이다.

“자유라며, 더러운 귓밥아.”

“저! 저!”

귀쟁이라는 엘프를 평범하게 폄하하는 말도 아니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미친 소리에 엘프들이 격양되었다. 몇몇 엘프는 부들거리며 이빨을 갈았다. 하지만 엘프들은 감히 나서지 못했는데, 나스타 카라가 그 발언을 참았기 때문이다.

아주 냉정한 표정을 보였다.

“후하하하.”

세리안이 광소(狂笑)했다. 매력적이고 성숙한 여성의 웃음소리였지만, 그 속에 담긴 야수의 기세가 절로 퍼져나갔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덤비는 놈이 없어?’

그녀는 속으로 놀랐다. 또한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강철이 흐르는 강을 지닌 불파겐의 후예가 나타나 남부 왕국을 헤집고 인간을 죽여 살성의 힘을 얻어내는 것은 물론 다른 별의 선택까지 받았다.”

나스타 카라는 눈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그 별 중에는 〈저주성(詛呪星)〉도 있지.”

의심쩍은 별을 의심스럽게 말했다.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없지는 않았다. 세리안의 눈썹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물론 세리안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언제 내가 가야 할 이유를 말하라고 했나? 왜 말귀를 못 알아먹지?”

그렇게 말했음에도 엘프 중 누구 하나 말하는 자가 없자 세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야수의 기세와 또 다르게 전의를 불태우며 살의를 드러냈다.

“여기서 죽을 생각인가?”

나스타 카라의 말에 세리안 불파겐은 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엘프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하나, 둘 정도면 몰라도 수십 명을 홀로 싸워 이길 수는 없었다.

1:1로 수천 번 싸워도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엘프 다수와 싸워 이기는 것은 감히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의 팔은 두 개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게 내 선택을 좌지우지하지는 않지.’

아버지와 함께 싸우지 않고, 미래를 위해 도망쳤다. 하지만 미래를 도모했던 곳이 오히려 사지(死地)였고, 그녀는 엘프에게 뒤통수를 당해 검 하나 휘두르지 못하고 영혼 감옥에 갇혀야 했다.

그 분노는 현재진행형이었다.

죽어서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그건 세리안이 인생을 살면서 쌓아올린 잣대였다. 그 잣대는 지금 검을 들어 싸워야 한다고 울부짖고 있었다.

죽음이 내 명줄 하나 잡고 있다고 해서 물러선다면, 그건 기사가 아니었다.

그녀가 이곳에서 싸울 이유는 매우 많았다.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기 싫다면야··· 나는 이곳에서 네놈들을 죽이고 죽을 뿐이다.”

나스타 카라는 잠시 고민했다. 저 각오는 진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저렇게까지 말을 했기 때문에 세리안은 협상 가능한 존재였다.

‘모순적이지만 그게 인간이라는 잡것들이지.’

만약 세파리아스였다면 정신을 차리자마자 달려들 것이다. 그게 그와 그녀의 차이였다.

호랑이 거죽을 뒤집어쓴 능구렁이가 세리안이었다.

‘모든 패를 다 말해주는 것처럼 보여줘야 넘어가겠지.’

그렇다고해서 쉬운 말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저울질하고 있을 뿐이다. 나스타의 노력에 따라 그녀의 선택이 바뀔 터였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그녀는 싸우다 죽을 각오를 이미 굳히고 있었음에도 마음을 바꿀 수 있어서였다.

“이것은 그럼 거래다. 남부 왕국을 통일하고, 제국으로 향해라.”

“제국? 인간의 세력을 깎아내라는 것인가?”

“그런 하찮은 목적이었다면 널 깨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피비린내가 나지만 세리안 불파겐은 〈엘프들의 걸작(Masterpiece)〉이었다. 세파리아스는 인류의 걸작이었지만, 세리안은 엘프들의 걸작이다. 그 차이 중에서 가장 큰 요인은 포악성이었다.

협상이 가능해야 이용할 수 있는 법이다. 그게 불가능한 세파리아스였기에 불파겐은 실패한 것이다. 그의 그림자 때문에 가려진 세리안을 조금만 더 일찍 간파했더라도 불파겐이 멸문당할 일은 없었을지도 몰랐다.

“제국으로 가보면 알게 될 것이다. 혹은 제국이 먼저 남부 왕국의 문을 두드릴지 모르지.”

“정확히 너희들도 확답할 수 없다는 소리군.”

‘엘프가 인간을 이렇게까지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단연코 없다.’

그녀의 입에 군침이 돌았다. 겉으로는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세파리아스를 멘토로 삼고 살아온 세리안이었다. 사건이 있는 곳에는 응당 자신이 중심에 있어야 했다.

고로 나스타의 말은 절로 흥미가 생기는 말이었다. 남부 왕국보다 제국으로 가보고 싶을 정도였다.

오랜 연륜을 지닌 나스타는 세리안이 구미를 당겨 하자 제안을 마무리했다. 크게 내어주고, 한 걸음 살짝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목적을 달성하면 인간을 다스리는 것은 불파겐이 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에도 조건이 있다.”

“뭔가.”

“후손을 두지 말 것. 거부한다면 인간은 이번에야말로 멸망할 것이다.”

“인간도 중립신의 자손이라며 지켜야 한다며?”

“우리는 첫 번째 자손이다. 그럴 자격은 충분히 있지.”

세리안은 혀를 찼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엘프의 피가 흐르는 그녀였다. 정확히 자신의 수명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몰랐지만 꽤 길 것이 분명했다. 〈완성된 엘프〉는 수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도 조건이 있다.”

“인간, 어디까지 기어오를 셈이냐?”

아까 분노를 토해내던 젊은 엘프가 다시 경고했다. 나스타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까부터 자꾸 나대서였다.

“말해라.”

“여기까지 따라왔다면, 이곳에 있는 귓밥 놈들은 모두 엘프 사회에서 한가락 하는 놈들이겠지?”

긍정도 부정도 없었다. 세리안은 오른쪽 손목에 가죽끈으로 묶여 덜렁거리는 쟝의 스틸레토를 휘릭 돌려 잡아 끝으로 아까부터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젊은 엘프 집정관을 가리켰다.

“저 귓밥 놈과 싸워봐야겠다. 그게 내 조건이다.”

나스타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눈길을 젊은 엘프 집정관이 받자 냉큼 대답했다.

“과거의 망령입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엘프의 힘을 보여주겠습니다.”

“좋다.”

‘엘프 하나 죽는 것으로 세리안이 남부 왕국의 인간들을 휘어잡아 제국으로 향하면 더 큰 이득이다.’

우우웅!

엘프 집정관이 뽑은 철막대기가 단번에 무기로 변화했다. 검날에는 화염이 번들거리고, 검 손잡이에서는 바람이 뻗어 나가 그 화염과 자연스럽게 상생하며 증폭시켰다.

“화려한걸.”

세리안은 그렇게 말하자마자 단번에 돌진했다.

〈마법의 엘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간략화된 마법이 그녀를 노렸다.

무형의 충격파.

바닥이 진동하며 갈라지고, 튀어나왔다.

튀어나온 돌이 날카롭게 깎여지며 화살처럼 그녀를 노렸다.

허공에서는 마력으로 만들어진 마법진에서 화염, 냉기 화살, 벼락이 쏟아져나왔다.

엘프의 핏줄이 피부에서 튀어나왔다. 척 봐도 무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소용! 없다!”

일갈하며 그 모든 마법을 맨몸으로 맞으며 세리안이 질주했고, 바닥에서 흙의 주먹이 튀어나왔다.

쿠구구구!

진로를 막으려고 했다.

“어림없다!”

화르륵! 쾅!

〈데드판의 목 보호대(Deadpan`s Neck protector)〉에서 불의 고리가 튀어나와서 흙의 주먹을 파괴했다.

흙과 불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주위에 있던 엘프들은 방어마법을 쓰며 자신을 보호했다. 방어막의 겉에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물의 보호막이었다.

“합!”

파괴의 화염고리로 주먹을 붕괴하며 흙먼지와 불똥 속에서 기회를 잡은 세리안이 오른발을 뻗어 나가며 어느새 뽑아든 〈브루드의 자벨린(Brood`s Javelin)〉을 던졌다.

꽈릉!

천둥소리가 들리며 샛노란색의 벼락이 뻗어 나갔다. 엘프 집정관의 왼손이 옆으로 움직이자 벼락이 중력장에 기울어져서 옆으로 흘러가 벽에 박혔다.

캉!

적혈대검과 엘프의 검이 부딪쳤다.

육신을 앞서 나가는 완성된 영혼을 지닌 엘프는 잔상을 만들어내며 초월적인 스피드를 보여주었다.

따다다다당!

롤레온의 방패가 그 맹공을 자연스럽게 막아냈다. 팔뚝에 묶여 있음에도 이리저리 각도가 달라지는 롤레온의 방패는 교묘하게 엘프 집정관의 검격을 건드려서 검로를 방해했다.

엘프의 긴 검신을 타고 흐르는 바람에 불꽃이 세리안의 눈을 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며 상쇄되어졌다. 그녀는 그 순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제법···!”

엘프 집정관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 순간이었다.

말을 한다는 것은 호흡을 내뱉는 것과 같았다. 458년 전 불파겐 가문의 이인자였던 세리안 불파겐에게 그것은 자살하는 것과 같았다.

한순간이었다.

그 누구도 그 섬광과도 같은 세리안의 공격을 눈으로 읽지 못했다.

어째서 그렇게 빨랐는지 이 자리에 있는 엘프 중에서 그것을 본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세리안의 공격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만들어냈다.

단 한 번에 엘프 집정관이 〈해체〉 당했다.

오른팔은 위로, 왼팔은 아래로 잘려나갔고, 목에는 쟝의 스틸레토가 꽂혔다.

피를 뿜으며 뒤로 쓰러지는 엘프 집정관의 머리가 적혈대검에 의해서 반으로 갈라졌다.

퍼석!

뇌수와 피가 사방으로 튀며 바닥을 장식했다.

“······”

돌격하는데 2초.

엘프의 영혼력을 통해서 잔상을 남기는 맹공을 버티는데 1초.

집정관을 죽이는데 0.5초.

단 3.5초만에 엘프 집정관이 죽었다.

피로 흠뻑 적셔진 세리안이 적혈대검의 검면을 어깨에 대며 걸쳤다.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엘프는 여전하구나. 완성되어서 그런지 발전이 없는 건 애석한 일이다.”

‘그래서 〈하프 엘프〉 따위를 만들려고 한 것이겠지.’

엘프들의 상황을 확인한 세리안은 무표정한 나스타에게 턱짓을 했다.

“남부 왕국으로 가는 방향은?”

혁대에 걸린 막대를 나스타가 바닥에 던졌다. 막대기는 단번에 큰 가죽 배낭으로 변했다. 배낭의 윗부분에는 모포 같은 것이 둘둘 말려져서 가죽끈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흡사 군장 같았다.

“이쪽으로 쭉 가면 불파겐 자작 영지로 갈 수 있다.”

“〈자작〉?”

“백금 왕가에게 작위를 받았더군.”

세리안의 두 눈에 분노가 서렸다. 그녀는 배낭을 짊어지고, 그 길로 떠났다.

“시신을 수습해라.”

“예.”

나스타의 곁에 이 도시의 신흥세력을 만든 엘프 집행관이 다가와서 말했다.

“실로 짐승 같은 인간입니다. 왜 하프 엘프가 실패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속으로는 많은 걸 고민했을 터다. 엘프의 녹안을 무시하지 마라. 야수의 아가리 속에서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을 수 있다. 그게 우리 엘프의 힘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세파리아스보다 그 기질이 약한 것이 세리안이었다. 아니, 엘프의 피가 오우거보다 더 강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고, 남녀의 차이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엘프는 〈세리안 불파겐〉을 깨운 것이다.

그녀는 제어 가능한 존재였다. 세파리아스가 인간의 탈을 쓴 오우거라면, 세리안은 인간의 탈을 쓴 엘프였다.

자신의 아버지를 따라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엘프의 선택을 하는 것이 그녀였다.

“제국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영혼 마법〉은 놔두면 놔둘수록 위험하지 않습니까.”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숫자를 줄이고 있는데, 적당한 때까지 놔둬야지.”

첫 번째 자손은 움직임에 무거움이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찍찍.

드낙의 군막의 한중간에서 쥐새끼 소리가 났다.

토실토실 살이 오른 핏빛쥐의 머리가 툭하고 튀어나왔다. 출렁거리는 머릿살에 드낙이 순간 웃음기를 머금었다.

낑낑거리며 대장쥐가 구멍에서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골반이 제법 커져서 끼워져버렸다. 밑에서 쥐소리가 여럿 들렸는데 이내 구멍이 빠르게 커졌고, 대장쥐가 흙묻은 털을 털며 일어났다.

드낙이 커진 구멍에 눈길을 주자 그곳에 있던 핏빛쥐들이 뜨낙이라고 소리를 질러대었다.

“뜨낙! 우리들의 창조주를 뵙습니다.”

대장쥐는 허리를 활처럼 뒤로 기울이며 자신의 키와 덩치를 크게 보여주며 드낙에게 경례했다.

“고생이 많다. 이번에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오크들을 너희들이 좀 도와줘야겠다.”

〈제국 대비 제1안〉!

그것은 도네투스의 죽음으로 다시 부락 사회로 돌아가 버린 오크들의 세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 작품 후기 ==========

6039자

평점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