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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온이 반 킹슬레이를 만나러 갔을 때는 이미 선객이 와있는 상태였다.
“몽펠리에의 가주께서 직접 찾아온 것을 보면, 중요하고 다급한 일이 생겼나 보오.”
킹슬레이의 기사가 자연스럽게 아크온을 맞이했을 때, 아크온은 반 공작이 누구와 대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병사가 아니라 기사가 입구를 막고 있다니. 드낙 자작이 먼저 와있구나!’
“반 공작은 누구와 만나고 있소?”
“모르오.”
“드낙 불파겐이오?”
“모르오.”
기사는 그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 무엇도 내비치지 않는 모습에 아크온은 이 기사가 그러한 방계로 커왔다는 걸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만큼 방계가 전문화되고, 세분화 되어 있으며 숫자가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치 시종 같구나. 〈시종 기사〉인가. 웃긴 이름이군, 하지만··· 그간 조용했던 킹슬레이는 오늘을 위해 날아오를 준비를 열심히 했구나.’
그것은 북부가 〈세파리아스 불파겐〉의 그림자만 쫓으며 혈통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 것과는 다른 방향성이었다. 그들은 〈버팔로 나이트〉 같은 기사를 배출하기보다는 다른 방향으로 가세를 늘렸다.
기사의 분업화와 양적 팽창이 그러했다.
결국 아크온은 소득 없이 돌아가야 했다. 기다린다고 해도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었으며 드낙과 마주쳤을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귀족은 만능이지만, 전능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시간이 필요한 건 당연했다.
탁.
반 킹슬레이가 술잔을 놓았다. 드낙은 술병을 받아서 잔에 술을 따랐다.
“고맙소.”
술잔을 받은 반이 감사를 표했다. 드낙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모두가 〈와이번 나이트〉라고 깍아내렸으나, 반 공작은 그러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불파겐으로부터 이득을 보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북부의 방침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뿐.’
완전하지 않은 귀족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북부였다.
왕의 이름을 쓰지 않지만, 왕과도 같은 자들이 북부 영주들이었다. 고로 그 규합력은 외세의 침략에 강하게 규합하지만, 반대의 상황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아귀들의 다툼이나 다름없었다.
오크들이 물러가고, 백금왕가는 오우거에게 조공하며 전쟁을 벌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기에 외세에 대한 위협이 줄어들었고, 그 결과로 킹슬레이는 다른 북부 귀족들과 함께 결정한 것을 순식간에 쓰레기통에 버린 상태였다.
‘호구라도 주변 가신들에 의해서 언젠간 빛을 볼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변수가 생겼다.’
“오늘 오후에 원탁이 열릴 것인데, 직접 여기까지 온 것을 보니 불파겐이 큰 결심을 한 듯하오.”
“그렇소.”
드낙은 그렇게 대답하며 말을 골랐다.
“북부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나의 호의를 무겁게 받아들이면서도 대함에서는 가볍게 대하는 걸 멈추지 않았소. 킹슬레이도 이와 같은지 묻기 위해서 왔소.”
깔끔하게 자신의 목적을 먼저 밝혔다.
“그렇게 말을 해도 결국 북부는 필요한 것 아니오?”
“정복할 곳도 아닌데, 북부 전체가 필요한 건 아니오.”
드낙의 노림수가 너무 뻔히 보였다. 그래서 반은 오히려 더 옆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지나칠 정도로 노골적이라서 찜찜했다.
“그렇다고 해도 길게이 왕자를 받아들였으니, 숨통이 트일 곳은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반 공작의 확답만 들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 아니겠소.”
“······”
반이 술잔을 이리저리 만졌다. 너무 적극적이었다.
‘왜 일을 이렇게 빨리 진행하려고 하지?’
의심이 들었고, 무엇보다···
‘킹슬레이만 있으면 된다라니.’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시류만 놓고 봤을 때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되었을 시 킹슬레이는 북부에서 고립을 면치 못한다.
아무리 강한 세력이라도 킹슬레이의 영지는 썩 좋은 곳이 아니었다. 필연적으로 다른 곳의 자원을 원했다.
“몽펠리에와 파이룬은 기울었지만 그 역량이 하루아침에 어디로 간 것은 아닌데, 너무 노골적이지 않나?”
‘북부를 진창으로 만들기 위한 계략일 수도 있지.’
북부의 성장과 회복 속도를 줄이고, 동부를 발전시킨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북부를 버릴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것이 좋소. 하지만 북부를 압박하는 것이라면 도와줄 의향은 있소.”
“흠.”
드낙이 고민에 빠졌다. 생각보다 킹슬레이가 야망이 없어서였고, 리스크를 짊어지려고 하지 않아서였다.
‘3만을 끌고 와서 조금은 기대했는데. 역시 북부는···’
그의 눈이 실망의 빛이 비추어졌다. 하지만 드낙은 일어서지 않았다.
‘킹슬레이의 세력이 아쉽다. 3만 정병이면 분명 나중에 큰 도움이 될 텐데.’
무엇보다 척박한 곳에서도 그 정도의 병력을 굴릴 힘을 축적한 그 세월은 큰 힘이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이기도 했고, 그래서 더더욱 킹슬레이와 굵은 끈을 연결하고 싶었다.
‘북부를 내 밑으로 둘 가능성은 이걸로 사라졌다.’
킹슬레이를 통해서 명분을 얻고, 북부를 복속시키는 방법은 반 공작의 태도로 수포가 되었다.
“후우···”
드낙은 손에서 나는 땀을 닦았다.
‘나에게는 힘이 있다. 이대로 나가면 될 뿐이다.’
자신을 다독이고 입을 열었다.
“반 공작. 나는 이미 다른 가문에게 폭탄선언을 하고 왔소. 그러므로 이 자리가 무엇보다 중요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오.”
최후통보를 했다.
“북부에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겠다는 말이오?”
킹슬레이가 제대로 드낙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드낙은 그제야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소. 그저 따를 것인지, 따르지 않을 것인지만 말씀하시오.”
“오만한···! 북부의 왕이 되고 싶다면, 절대 그런 태도로는 결코 북부를 얻을 수 없소. 몽펠리에는 천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킹슬레이는 가문이라는 틀 전부터 이어져 온 역사가 있소. 그리고 불파겐 또한···”
드낙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실로 유쾌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우하하하하하!”
반 킹슬레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엄청난 무례였다. 하지만 드낙은 그런데도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가문이 그들의 몸을 족쇄처럼 휘감고 있다는 걸 진정으로 체감했기 때문이다.
결국, 애초에 드낙과 북부는 함께할 수 없는 사이였음을 깊게 깨달았다. 언젠가 드낙은 남부 왕국을 통일해야 할지도 몰랐다. 중립신이 대적할 상대는 결코 가벼운 상대가 아니었다.
만약 남부 왕국의 통일을 기준으로 잡았을 때, 가문이라는 쇠사슬에 온몸이 속박된 북부의 귀족들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가?
‘백금 왕가는 이를 알고 남부 귀족을 모조리 몰락시켰다.’
중앙 집권을 위해서는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 이후로 수십 년을 웅크린 것 또한 그들이 전쟁을 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귀족이 몰락한 만큼 그 부족한 인프라를 채울 시간이 필요했다.
드낙은 웃음을 멈추고 싸늘한 눈으로 앉아있는 반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나의 전생과 같다.’
박호훈이라는 인간은 돈에 얽매여서 그렇게 살다가 그냥 그렇게 죽어버렸다. 평생 돈 걱정밖에 못했다. 그것을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것은 드낙의 자기변호와도 같았다.
실제로는 그냥 돈의 노예로 산 것에 불과했다. 남들이 원하고, 남들이 하는 것을 부러워하며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서 버둥거렸다. 남이 여행 가면 나도 여행 가고 싶고, 결혼하면 나도 결혼해야 하고···
그리고 이것은 이들이라고 다른 게 아니었다.
가문에 얽매여 죽는 귀족은, 돈에 얽매여 죽는 박호훈과 같다. 몸에 감긴 쇠사슬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버둥거릴 뿐이다.
그건 드낙이 전생에 대한 기억이 있기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나는 왜 그렇게 귀족들과 함께하고 싶고, 그들을 대우해주고 싶었을까? 결국 이놈들도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을 대단하게 생각한 것이 우스웠다. 쪽팔렸다. 그들이 보여주는 명예라는 빛과 목숨을 초개처럼 던지는 용맹함을 보고 그들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바닥에 있는 것은 박호훈이 가진 것과 다른 게 없었다.
“케이샤 킹슬레이가 낳은 자식은 4살 때 킹슬레이로 보내겠다. 지금까지 정도 주지 않았으니, 문제는 생기지 않을 터다.”
드낙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무···”
“논공행상에서 나는 빠질 테니, 그 대신에 길게이를 일등공신으로 올려라. 그렇게 하지 않아도 뭐, 좋다. 이젠 기대도 안 간다.”
‘북부의 차선은 존재한다.’
오히려 북부가 이렇게 오크를 막아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수탈당하고 있지만, 남부를 지켰으니 잘 되었다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길게이의 수완이 생각보다 뛰어나고, 몰락 귀족들 또한 야망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이 웅크려서 얻어맞았다면, 북부 또한 웅크려서 얻어맞을 뿐이다.
벌컥!
드낙이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돌아가자마자 드낙은 초조하게 기다리는 이실레아와 겐 쟝과 마주했다.
문이 닫히고 침묵이 가득 자리잡혔다.
“킹슬레이는 누구를 선택했습니까.”
“북부.”
이실레아가 고개를 숙였다. 진한 아쉬움이 그녀의 표정에 드러나서였다. 그만큼 북부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항상 열세로 외세를 피해를 입으면서도 밀어내는 걸 보여주면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나도 밖에 놈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지.’
그것을 지금이라도 깨달았기에 다행이었다.
“병사를 보내서 내일 돌아갈 준비를 해라. 길게이에게 서신은 잘 도착했겠지?”
드낙이 겐을 보며 말하자 그가 냉큼 대답했다.
“예. 그는 서신을 받자마자 북부의 6가문을 반드시 동부로 데리고 가겠다고 확답했습니다. 그가 일등공신이 되려면 여섯 영주의 입김이 필요할테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해도 답하는 속도가 대단히 빨랐습니다.”
‘뱀같은 자니까.’
언제든지 자신을 물 것처럼 보이지만, 그만큼 사리에 밝은 자가 없었다. 그렇기에 드낙은 북부보다는 길게이라는 카드를 뽑았다.
드낙이 그대로 동부로 돌아가려고 하자 모두가 들썩거렸다. 하지만 누구도 나서지 못했는데, 불파겐과 마주할 힘이 없어서였다.
화가 난 상대에게 다가가는 것은 위험한 법이다.
분노가 삭여지고 나서야 다가가야 했다.
그게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불파겐 자작!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오! 일을 이렇게 처리하려고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나와보시오!”
드낙이 있는 방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드낙은 꿈쩍도 안 했다.
‘부수고 들어와 봐라. 그때는 더 한 굴욕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화가 났지만 그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더는 남부 왕국의 역량을 소모시켜서는 안 되었다.
드낙의 그런 생각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자신을 다스리고 있을 때, 소란이 줄어들었고 이내 사라졌다. 이대로는 드낙의 마음을 돌리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병신같은 놈들.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구나.’
그가 준 마지막 기회를 영주들은 다시 한 번 버렸다. 하지만 그런 모습까지 본 이실레아는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북부를 그냥 이렇게 버리다니. 이건 너무 막 나갔다.’
버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단순히 겁을 주는게 아니라 아예 인연을 끊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자작님. 이 정도로도 충분히 북부는 알아들었을 겁니다. 길게이 왕자에게 너무 큰 힘을 실어주는 것보다는 적당히 균형을 맞추는 것이···”
“이실레아 경. 난 북부를 위하고, 길게이도 똑같이 위했네. 똑같이 도움을 주었지. 그건 적어도 평등했어. 하지만 그들을 다시 용서한다면 공평하지 않아. 안 그런가?”
“예. 하지만···”
드낙이 손을 들어올리며 그녀의 발언을 막았다.
“하지만 지금 북부에게 손을 내민다면 내가 한 행동을 번복하는 일이고, 그건 나중에 화살처럼 나를 향해 똑같이 겨누어지겠지.”
싸늘한 분노에 이실레아는 순간 헛바람을 집어먹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모습을 드러낸 드낙에게는 힘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단교라니요. 우리 세력은 이제 기병 수백을 거느린 것뿐입니다. 제가 그들을 설득해보겠습니다.”
이실레아의 눈이 겐에게 향했다. 태풍이 된 드낙이 절대 멈추지 않을 것처럼 보여서였다. 북부를 완전히 끊어버릴 생각을 하는 드낙과 적어도 줄 하나는 대어놓고 싶어하는 이실레아였다.
겐의 판단은 당연히 후자에 해당했다.
“제가 데려온 병사들이 전쟁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해주십시오. 우리는 아직 세력이 약합니다. 수천명이 할 수 있는 일을 혼자서 어찌 하겠습니까. 이제 그들도 깨달았으니, 분노를 거두시고 그들이 살 수 있도록 숨통만 열어주십시오.”
드낙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깨닫기는 무슨! 언제까지 북부를 위해줘야 하나? 그렇게 이 빌어먹을 새끼들과 함께하고 싶으면 여기에 남아라!”
꼬리에 불똥이 묻은 황소처럼 드낙이 고함을 질렀다.
“아닙니다. 따르겠습니다.”
이실레아가 한쪽 무릎마저 꿇으며 굴복했다. 겐 쟝도 마찬가지였다.
“실언했습니다.”
‘단단히 꼭지가 돌았구나.’
그녀는 드낙이 보이는 날것과도 같은 감정에 안도했다. 그 빈틈이 있었기에 무릎을 꿇을 수 있었다.
그가 만든 태풍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했지만,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했다는 걸 알았고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분노가 사그라들면 그를 북부왕으로 추대하여 달랠 수 있을터다.’
누구나 원하는 왕의 자리였다. 그가 거부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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