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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 나온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서 반 킹슬레이는 내성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했다. 말이 휴식이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을 정리하는 시간을 보냈다.
“여기 정리한 것을 쓴 것입니다.”
“음. 내가 말했던 것도 고려했겠지?”
“예.”
따라온 문인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킹슬레이가 한껏 몸집을 유지한 채 이곳에 온 이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불파겐을 뜯어먹는다.’
불파겐에게서 이득을 가장 많이 취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이는 〈케이샤 킹슬레이〉의 서한을 여럿 받았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그는 자신의 힘을 휘두를 줄 몰라. 화를 내기는 하지만 언제나 적정선에서 마무리한다.’
〈드낙 불파겐〉이라는 인물은 가진 힘에 비해서 그것을 인간이나 귀족에게 행사하는 꼴을 보기 힘들었다. 제국 전신갑주를 독식하려는 몽펠리에와 파이룬 가문을 상대로도 적당히 타협하는 선에서 끝냈다.
만약 반 공작이 드낙과도 같은 무력을 지녔다면 이미 남부 왕국을 통일시키고도 남았다.
‘불파겐 자작은 너무 남을 신경 쓴다. 피난민을 도와주고, 도망자를 도와주는 모습도 보였으니. 평판에 너무 민감해 한다.’
그게 불파겐의 약점들이었다.
이 거친 세상을 걷는데 붉은 양탄자를 펼치고 걷고 싶어하는 모습을 지닌 불파겐 자작은 항상 깨끗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불가능한 일이다.’
동시에 〈계승〉이 덜된 모습으로 불완전한 귀족이라는 것도 중요한 약점이었다. 그 외에도 그를 이용할만한 점은 많았다.
‘귀찮은 것도 싫어하지.’
하나같이 이용하기 쉬운 요소들이었다. 그리고 몽펠리에와 파이룬은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했다. 그들이 간과한 것은 바로 드낙이 지닌 불가해(不可解)의 정보력에 있었다. 그리고 킹슬레이는 그렇게 당하지 않을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불파겐에게 뺨을 때릴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취하면 그만이지.’
케이샤를 통해서 불파겐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반 킹슬레이는 그 정보를 토대로 어떻게 할지 이미 정해놓았다.
‘불파겐을 돕고, 불파겐에게서 이득을 취한다.’
돕기에 아군이고, 도왔기에 도와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드낙은 그것을 들어줄 것이다. 드낙은 자신의 편에 서면 편애를 하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가장 대표적으로 하찮은 용병 따위를 기사로 임명함은 물론이고 비전도 여럿 하사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반 킹슬레이는 확실한 방향성을 가진 채로 불파겐을 뜯어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베라세.”
“예.”
〈시종 베라세〉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에리트레아의 영주부터 데려와라. 그가 우리의 일등공신이다.”
“예.”
베라세가 몇몇 수행원과 함께 빠져나갔다.
오크 대침공의 일등공신은 드낙이었지만, 킹슬레이의 일등공신은 에리트레아의 영주였다. 그가 없었다면 그렇게 빠르고 확실하게 청야 전술을 펼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처음인 것이 킹슬레이에 누가 될까 봐, 걱정이오.”
에리트레아 영주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가진 세력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가 이 쌍둥이 성채에 데리고 온 것은 5명의 기사와 130명에 불과한 민병대였다.
그 초라한 군세에 변변찮은 전공도 없었다.
“무슨 소리를!”
반 킹슬레이가 고함을 내지르며 크게 소리쳤다. 에리트레아 영주가 어깨를 들썩거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담력이 없는게 아니라, 워낙 주변이 조용해서 그 고함이 너무 크게 다가와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북부의 상황을 보게. 동쪽의 토치라이트는 불파겐 자작이 홀로 물러가게 만들었지. 이것은 말하고, 비교하는 것도 우스워. 안 그런가?”
드래곤과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것과 같았다. 애초에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중앙이라고 제대로 버텼나? 브레이브 가문은 전투 요새를 믿고 버텼다가 드래곤 오크 라이더에게 박살이 났네. 팬크리스는 둑 한쪽이 뚫리자 포위의 위험성을 버티지 못하고 패주했지.”
“하지만 서쪽은 어떤가. 빠르게 청야 전술을 할 수 있었고, 누구보다 독하게 전술을 수행했지. 그 덕에 우리는 싸우지 않고 서쪽에 쳐들어온 오크를 물러가게 만들었네.”
반 킹슬레이는 잔에 술을 따라서 탁자에서 밀어 에리트레아 영주에게 건네주었다.
“에리트레아 남작. 그대는 수만 명의 인간을 살린 전략가일세. 비록 자네는 킹슬레이가 가진 힘을 거부할 수 없어서 내 가문의 말을 따른 것일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북서쪽을 지키게 되었지.”
반은 자신 또한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몽펠리에도 수천 명이 죽었고, 파이룬은 자신의 영토를 오크에게 허락했지. 그런데 자네가 킹슬레이의 일등공신이 아니면 내가 어떻게 하늘을 보고 떳떳하게 살아가겠나.”
“그렇게까지 생각하셨다니···. 대단하오.”
반 킹슬레이가 손짓하자 시종이 양피지와 펜을 가져왔다.
“겨울부터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주겠네. 에리트레아의 영토 모두를 수복할 수는 없겠지만 〈각진 돌산〉을 경계로 오크와 국경선을 만들 수 있을걸세. 그리고 그것을 모두 내 이름과 가문으로 약조해주겠네.”
“구두 약속만으로도 괜찮소. 공작.”
에이트레아 영주는 목례까지 할 정도로 감사를 표했다.
“됐네. 계약서를 가지고 가게.”
괜한 말을 하기도 했지만 반 킹슬레이는 계약서로 남겨주었다. 에리트레아는 이번 일로 적어도 다음 세대까지는 친킹슬레이 파가 득세할 것이다. 킹슬레이의 돈을 먹지 않은 자가 없게 될 것이다.
계약서를 받은 에리트레아 영주가 그것을 읽어나가며 생각했다.
‘고향을 버릴 수는 없는 법이지.’
에리트레아 영주는 〈북부 7가문〉에 속하는 가문이었다. 몇몇 북부 7가문의 일원은 진절머리 나는 피의 역사를 가문에 새긴 북부를 버리고 동부로 이주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그는 아니었다.
자신의 고향과 시민 그리고 가문의 역사가 깃든 수많은 것들을 저버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의 시간은 에리트레아 영지에 많이 깃들어있었다. 그 미련을 포기하는 것은 힘들었다.
‘킹슬레이의 덕을 보는 게 낫다.’
드낙 불파겐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가 친북부 성향이라 수많은 것을 양보하고 있더라도 두려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에리트레아 영주가 다른 명문가와 다른 것은 그는 이제 더는 뒤로 물러날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낭떠러지가 코앞이다. 더는 도박수나 강하게 블러핑을 할 수 없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소. 불파겐 자작은 이참에 북부 7가문을 자신이 다스리는 동부로 이주시킬 생각을 하고 있소.”
“허, 그렇단 말이지···아무튼 이번 전쟁에서 킹슬레이의 전략을 이행해줘서 고맙네.”
“인접해있는 영지인데 서로 돕고 도와야 하지 않겠소. 계약서도···감사하오. 공작.”
에리트레아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러갔다. 그는 모든 근심·걱정 없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달칵.
문이 닫히자 반 킹슬레이가 턱을 매만졌다.
‘영지 내에 제3 세력까지 만들 생각을 해? 이거 동부를 대체 어떻게 하려고 하는 거지? 대책 없이 불러들이는 꼴인데.’
북부 7가문은 결코 〈중립 세력〉이 아니었다. 그들은 〈제3의 세력〉이라고 봐야 했다. 자유기사 진영이나 중립으로 만들 수 있지, 북부 7가문은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서 외척들에게 달라붙을 터였다.
‘도통 알 수 없군. 브릴리언트 가문의 성향도 아니고, 그 제국 물만 들이킨 헛문인이 생각할 수단도 아니야.’
반 공작은 그 혼란이 표면 위로 올라왔을 때의 파급력을 걱정했다. 한 손에 쥔 검으로 이루어진 평화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드낙의 사후 동부는 여러 갈래로 분열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딸은···
‘부질없다. 이미 먼 곳에 있으니···’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힌다면 되는 일도 안되는 법이었다.
쿵.
빈 술병을 무겁게 손에서 내려놓은 반은 한숨을 한 번 쉬며 시종에게 말했다.
“몽펠리에와 파이룬에게 오크들을 싸잡아서 밀어내겠다고 함께하자고 말을 전하라.”
“예.”
시종들이 너도나도 빠져나갔다.
킹슬레이는 물론 확전(擴戰)을 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몽펠리에와 파이룬은 킹슬레이의 대군을 보고 아직 킹슬레이가 싸울 생각이 있음을 확실히 인지했을 터였다.
‘자원을 소모해서까지 3만을 데려왔다. 하지 않겠다고 상정하고 움직인다면 하면 될 일이지.’
치킨 레이스를 시작해도, 시작하기 전에 쥐고 있는 게 서로 다른 게 이 세상이었다.
이를 통해서 그들을 위협하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거기에 겁을 안 먹는다면? 하면 된다. 그리고 불파겐은 이것을 잘하지 못했다. 피로 물든 역사 때문에 스스로 겁을 먹고 주저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부러뜨리지 않는다면, 불파겐은 평생 발목을 절며 걸어가야 한다.
맞을 것 같으니 웅크리는 게 아니라, 웅크려서 맞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그걸 가르쳐줄 병신은 없었다. 그들의 가신 또한 그런 모습을 통해서 이득을 취하고 있어서였고, 함부로 드낙을 변화시키는 게 무섭기 때문이다.
드낙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모두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킹슬레이는 다르다.’
반응은 곧바로 찾아왔다.
몽펠리에와 파이룬의 시종들이 그들 가문의 말을 전했다. 사람 하나 건너서 말을 전하는 것은 중요했다. 당사자들끼리 의견을 다투다 보면 서로 앙금이 쌓이기 마련이다. 그렇게 해도 앙금이 쌓이겠지만,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백금 왕가를 배불러 주는 꼴이라고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 킹슬레이는 백금 왕가를 도와주는 꼴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남부 상인에게 워낙 시달린 적이 있어서였다. 정치력과 많은 재력으로 북부를 자신의 손에 쥐려는 백금 왕가의 수작질은 언제나 그렇듯 재수 없었다.
“몽펠리에와 파이룬이 도와주면 되는데, 무슨 백금 왕가인가. 돌아가서 전해라. 백금 왕가 말고 나는 분명 몽펠리에와 파이룬의 도움을 원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말을 한 번 나누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사람이 오가며 말을 전해서였다.
“그럴 역량이 없다고? 이거 웃을 일이군! 허면, 불파겐과 함께 나아가는 수밖에. 그가 선봉을 선다면, 오크들을 백설산맥까지 밀어붙일 수 있겠지.”
드낙은 그런다고 하지 않았지만, 반 공작은 입으로 금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른 가문의 시종들이 들락날락하는 사이에도 반은 가문의 일원과 상황을 체크하며 자신의 상황을 진단하며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가주님. 불파겐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면, 이 이상 압박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몽펠리에와 파이룬을 이제 위로해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다. 아직은 괜찮다. 적어도 기사급이 와서 제대로 설득하겠다는 모습을 보였을 때, 굽혀야지. 시종이 말을 전하는데 태도를 바꾸면 우리가 헛소리했다는 걸 보여주는 꼴이다.”
드낙 또한 다른 가문의 시종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확답을 절대 내주지 않았다.
‘알아서 열심히 해봐라. 난 모르겠고, 거기에 끼고 싶지도 않다.’
A와 B와 C가 있는데 진실을 알려면 C의 조언이 필요하다. 하지만 C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라고만 말한다면 결국 그 누구의 말도 믿을 수 없게 된다.
드낙은 귀찮기 짝이 없는 짓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동시에 자신의 스탠스는 명확하게 정해져 있었다.
‘킹슬레이만 내 편으로 만들면 된다. 그뿐인 일이다.’
자정이 되어서 킹슬레이, 몽펠리에, 파이룬이 서로 해결을 보았다. 드낙이 책임지고 나서지 않았기에 질질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협상에서 킹슬레이가 갑이었다.
“군대는 내일부터 점진적으로 서쪽으로 돌려보내겠소. 내일 원탁회의를 열어서 논공행상을 진행하고, 킹슬레이를 두 번째로 높여주시오.”
“···그렇게 하겠소.”
몽펠리에의 기사가 말했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지만 별수 없었다. 킹슬레이 또한 서쪽의 오크 3만을 상대로 훌륭히 막아냈다. 명분은 세울 수 있었다.
“백금 왕가로부터 상을 받을 테니, 부족함이 없도록 보고서를 꾸며야 할 것이오.”
“걱정마시오.”
몽펠리에와 파이룬은 북부 왕으로 킹슬레이를 추대하려고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 당장 그것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하나하나 해결하며 잘 마무리되었을 때, 딱 말해야 하는 계략이었다.
“서쪽으로 향하는 상단의 숫자도 늘려야 할 것이오. 그게 안 된다면, 몽펠리에나 파이룬이 힘을 합쳐서 남부의 상인들을 잘 다독거려 주시오.”
남부는 잘 개발된 곳이었기에 생산되는 자원의 양이 대단했다. 이를 옮겨서 북서쪽에 있는 킹슬레이의 영지에 향하도록 하는데 차질이 없어야 했고, 더 많으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받아들이겠소.”
‘뜬금없이 웬 남부 상인이지? 킹슬레이의 내부 상황이 안 좋나?’
상황에 조금 어긋난 요구였다. 하지만 나중의 일이었으므로 거침없이 좋다고 받아들여주었다.
“이 정도로 족하겠소. 두 가문 모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는가?”
킹슬레이는 그 정도에 만족했다. 두 명문가의 힘이 남쪽으로 향하도록 방향을 튼 것으로 충분했다.
결코, 홀로 먼 영지에서 살아가는 딸을 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내일 반드시 원탁회의를 열어야 할 것이오. 못해도 해가 저물기 전에 말이오.”
“염려 마시오.”
타가문의 기사들이 물러갔다. 적어도 지금은 킹슬레이만 이득을 보는 상황이었고, 불파겐은 자신이 한 만큼은 못 받게 될 것이다. 그만큼 드낙이 한 일은 대단했지만, 그것을 잘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불파겐 자작에게 밀서는 잘 보냈겠지?”
“차질 없도록 비밀리에 보냈습니다. 누구도 못 봤습니다.”
시종의 말에 반 킹슬레이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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