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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크리스 가문은 멸문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비올란트 팬크리스(Violent Fanchris)〉의 나이는 영주라고 하기에 너무 젊었고, 기사들은 세대교체를 아직 하지 못하고 노기사들이 현역으로 뛰고 있었다. 실력이 좋은 기사들이 치고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노기사를 포함해서 팬크리스 가문의 기사는 30명 있는 것이 전부였다.
북부의 7가문은 기사의 비율이 기형적으로 높다는 것을 봤을 때, 처참한 수준이었다. 정규병은 50명이 살아남은 상태였다.
고작 80명의 전력만이 남았다.
오크의 대침공에 맞선 그들의 용기는 대단했지만, 그 결과는 멸문뿐이었다.
명예를 얻으려면 피는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항상 권력자는 리스크를 짊어지지 않으려 한다.
‘결국 세월에 명예는 빛을 잃고 옛날 일이 되어버리기 마련이지.’
“그렇게 단호히 말씀하는 것을 보니 거래를 할 만한 것이 있는가 보오.”
드낙의 말에 젊은 패기가 가득한 팬크리스 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최대한 조율해야 한다. 그리고 불파겐 자작은 무인답게 크게 가는 걸 좋아한다.’
팬크리스 영주는 판을 뒤엎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개발을 해야 하더라도 황무지가 아닌 것이 어딘가. 그간 자신이 쌓아온 명성을 듣고 피난민들도 스스로 그에게 찾아올 것이다.
‘단물 쫙 뺀 본론만을 말해야 한다.’
드낙의 성향을 고려하기도 했다.
“내 가문의 군사역사학을 사본하도록 허락하겠소. 불파겐이 잃어버린 세월을 메꾸는 데 도움이 될 것이오.”
불파겐의 몰락. 〈계승〉이 제대로 안 된 것처럼 보이는 드낙의 자잘한 귀족적 실수들.
그것을 단번에 찌르는 말이었다.
“물론 대장장이 기술과 함께 더 필요한 것들은 차차 서로의 신뢰를 쌓고 교류했으면 좋겠소.”
하나는 크게 내어주고, 다른 하나는 서로와의 지속적 관계 유지를 위해 걸어둔다.
효과적인 거래방법이었다.
‘갑자기 확 나오네.’
드낙은 확답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솔깃했다. 팬크리스 가문의 군사와 역사가 담긴 사본을 얻는다면, 도움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애초에 드낙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용으로 최고였다.
“북부 7가문을 모두 받아들인다면 영지의 발전은 가속화될 것이오. 기사 양성은 도와줄 수 없겠지만, 그 역량의 증가는 자연히 불파겐을 살찌울 수 있소.”
동부가 원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이룰 수 있음을 어필했다. 외부의 유입은 이득일 수밖에 없었다. 드낙이라는 무력 수단이 존재하기 때문에 불파겐은 안심하고 이들을 받을 수 있다.
“흠···하지만 게제라스 총관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을 하고 싶은 게 내 본심이오.”
“외척들의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세력이 만들어지는 것인데, 그 세력을 누르실 생각은 하지 않으시길 바라오.”
바짝 마른 목을 축이는 물과도 같은 것이 제3세력이었다.
“그 뜻 잘 알겠소. 더 하고 싶은 말은 없으시오?”
“끝맺음을 시작하기 전에 말하겠소. 내 고향, 인간이 도망쳤었던 땅을 오크로부터 되찾는 그 날이 온다면 동부에서 받은 땅을 다시 반환하겠소.”
드낙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반응을 본 팬크리스 영주는 더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명예를 입에 담았다.
“20년 이내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떠나겠소. 만약, 불파겐 자작이 많은 것을 도와줘서 10년 이내에 힘을 갖춘다면 10년 이내에 팬크리스 영지를 되찾기 위해 검을 뽑아들고, 말을 타고 동부를 나가겠소.”
그가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때를 위해, 오늘을 도와주시오.”
드낙은 그 흐름에 몸에 전율이 흘렀다. 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했고, 모든 것을 거는 모습은 실로 남자다웠다.
자신도 모르게 술잔을 들어 올려 부딪쳐주었다.
“게제라스 총관의 입지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말을 바꿀 수 있소. 하지만 나는 그때를 위해서 최대한 배려를 해주겠소.”
“수많은 명예를 쌓은 불파겐 자작의 그 말! 그대로 믿겠소.”
팬크리스 영주가 일어나서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드낙이 겐 쟝을 힐긋 보며 말했다.
“내가 잘했다고 보는가? 아니면, 경솔했다고 보는가?”
“그는 안주할 사내가 아닙니다. 5년 만에 기회가 생긴다면 박차고 나갈 그릇입니다.”
겐 쟝의 말에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겐 쟝은 생각보다 다재다능했고, 군대를 이끌 줄도 알았으며 물러서지 않을 때를 아는 자였다.
‘이실레아와 쌍벽을 이룰 인재가 왔음에도 그간 대우해주지 못했다.’
“돌아간다면 동부의 중앙을 책임질 자리를 내어주겠다.”
“예? 너무 갑작스럽게 결정하시는 것 아니십니까.”
“총관도 이해해줄 것이다.”
드낙의 독단적인 말에 겐 쟝이 걱정했지만, 드낙은 쿨하게 넘어갔다. 자신이 해봐서 안다. 천이 넘어가면서부터 병사를 통솔하는 일은 머리가 터져버리고, 재능의 영역이다.
그저 천 명의 병사들에게 돌격만 외치는 것은 통솔이 아니었다. 진짜 통솔은 어느 정도 재능이 받쳐줘야만 했다. 어디가 어떻게 되는지 1인칭 시점으로 천 명이 지닌 공간을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그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비록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만, 겐 쟝은 자신이 이끄는 군대가 그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드낙이 그를 중요한 직책에 넣는다고 서둘러 말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었다.
‘게제라스 총관보다 늦게 대우해주다니. 입맛이 쓰다.’
그것을 만회하려면 결국 겐 쟝을 더 크게, 파격적으로 대우해야 했다.
팬크리스 영주와의 담판은 오직 말로만 끝났다. 하지만 드낙은 조금 패배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보여준 멋진 모습에 홀린 기분이었다.
“길게이 왕자 전하께서···”
“내일 찾아오라고 말해라. 오늘은 많이 늦었다.”
“예···”
드낙은 길게이의 시종을 또 한 번 돌려보내고 저녁을 먹고, 회의를 열었다.
‘한 번은 붙여봐야지.’
이실레아 브릴리언트와 겐 쟝만 있는 작은 회의였다. 드낙은 둘을 통해서 둘을 견제할 요량이었다. 그 간을 보기 위한 것이 이번 회의였다.
‘나중에 해도 될 안건이지만, 한 번 해보는 거지.’
“각 진영에 대해서 얼추 판단이 서야 한다. 킹슬레이부터 말해봐라. 그들을 어떻게 처우해야 하겠나.”
이실레아는 생각을 미리 해놓았는지 바로 대답했다.
“몽펠리에의 대처는 훌륭합니다. 하지만 맹점이 있다면, 결국 킹슬레이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불파겐이 나서야 한다는 겁니다.”
드낙의 눈이 겐 쟝에게 향했다.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교통정리가 되는데, 굳이 자작님께서 움직여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분명 좋은 방법이지만, 사실 확전을 해도 킹슬레이는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 태도만 취하고, 얻어갈 것은 얻어갈 공산이 큽니다.”
그럴듯했다.
진짜로 킹슬레이가 주력이 박살 난 오크들의 지친 모습을 보고 전쟁을 이어나갈까?
‘듣고 보니 그렇군.’
이실레아가 반박했다.
“백금 왕가가 도와줄 겁니다. 그렇기에 몽펠리에가 킹슬레이에게 이득을 주고 전쟁을 마무리하려는 겁니다.”
“남부의 힘을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수도에서부터 여기까지 거리가 얼마나 먼데, 보급을 대준다? 그것도 2만 이상의 군대를 유지시킬 보급을? 그렇게까지 해서 공을 탐하려 했다면 진작에 왕자 하나가 군대를 이끌고 이곳에 왔을 겁니다.”
“그 먼 곳까지 꾸준히 보급을 해왔던 것이 백금 왕가입니다. 여전히 북부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고, 여차하면 크게 나올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이실리아가 몸을 일으켜 지휘봉을 잡고 벽에 있는 지도로 향했다.
“남부의 입장에서는 북부에서도 서쪽에 있는 킹슬레이는 우군으로 삼아도 될 정도로 멀리 있습니다. 반면 몽펠리에, 파이룬, 불파겐은 남부 왕국과 국경선이 닿아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킹슬레이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는다? 대비하지 않으면 당할 것입니다.”
먼 곳의 국가와는 친하게 지내고, 가까운 국가는 경계하라.
정석 중의 정석이었다. 하지만 겐 쟝 또한 만만하지는 않았다.
“지레 겁을 먹는다면 남부는 코 풀지 않고, 이득을 취할 것입니다. 동시에 역으로 생각해보십시오. 킹슬레이가 백금 왕가와 짜고 불파겐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어쩌실 겁니까.”
다 같은 북부라고 하기엔 킹슬레이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호탕한 것처럼 보여도 극한의 청야 전술로 이번 전쟁에서 전력을 보존한 것이 킹슬레이와 서쪽의 북부 가문들이었다.
절대 멍청하지 않았다. 동부는 언제고 다시 힘을 되찾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드낙의 세대에 그 세력이 완성되길 진짜로 원하는 귀족은 단 1명도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결국 가문이었다.
팽팽했고, 핏빛쥐들의 서쪽 정보가 도달해야 했지만, 그곳의 리전은 아직 감감무소식이었다.
“킹슬레이는 먼 곳에 있다. 그들과는 친하게 지내는 게 맞긴 맞다. 무리한 요구는 받지 않고, 최대한 우리의 편으로 해놓는 것이 좋다. 킹슬레이는 북부 최대 세력이 되었다.”
드낙이 적당히 중재를 놓으며 결정했다.
몽펠리에와 파이룬에 대해서는 두 사람 모두 똑같은 의견을 말했다.
“북부를 움직이는 데 사용할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두 가문 이미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고, 순위를 매긴다면 파이룬이 아래입니다.”
“저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파이룬 가문은 특히 전투 요새가 반파되며 자신의 영토를 지키지 못했기에 몽펠리에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드낙은 고개를 끄덕였다. 몽펠리에와 파이룬도 우호적으로 대해야 했지만 이번 오크 대침공으로 가세가 기울었기에 뒷순위로 밀어내야 했다. 적당히 북부에 영향력을 끼칠 말로 쓰는 게 좋았다.
그런 대우를 받게 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백금 왕가는?”
당연히 그들은 정치적, 군사적 적대세력이었고, 언젠가 박살 내야 할 존재에 불과했다. 그나마 쓸모가 있다면,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북부 7가문은 북부로 진출할 다리역할로 요긴하게 쓰일 것입니다.”
동부에서 그치지 않고, 북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주면 입김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빚까지 달아둘 것이니, 그 은혜를 갚아야 했다.
여기까지는 큰 갈등이 적었다. 하지만 드낙은 마지막에 폭탄을 준비했고, 그것을 두 사람 앞에 놔두었다.
“길게이 왕자는 앞으로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을 것 같나?”
가장 복잡한 사람이 3왕자 길게이였다. 그에 관한 판단은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겐 쟝이 먼저 말했다.
“여우가 어찌 호랑이를 잡겠습니까? 그리 큰 위협이 될 자가 아닙니다. 전투에서조차도 이득이 눈이 멀어서 패배와 직결된 짓을 하는 자입니다.”
이실레아는 반대였다. 그녀는 음흉함이 지닌 무서움을 잘 알았다.
“사냥감이 사냥꾼을 못 잡는 법은 없습니다. 더욱이 길게이 왕자는 독사와도 같은 자입니다. 함께한다면 그 독에 중독되어 어느새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고 눈을 뜬 채 목이 베일 것입니다.”
드낙이 그 확고한 의견 부딪침에 눈을 빛냈다. 그래야 자신이 두 사람에게 권력을 내어줄 수 있었다.
‘싸워라. 더 싸워라.’
“근데, 길게이 왕자의 힘이 아직은 미흡하지 않나?”
드낙이 리액션을 취하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그가 보여준 판단력이 위협적입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
드낙이 이실레아와 겐 쟝을 투톱으로 내세우기 위해서 두 사람을 균열내고 있을 시각에 아크온과 게실리안은 서로 독대를 하고 있었다.
수행원 하나 없었다.
“불파겐 자작의 전공을 들었을 것이오.”
“실로, 위협적이오. 북부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모를 정도로 절륜한 힘이오.”
이미 개인의 힘을 뛰어넘어 홀로 전투할 수 있으며 성조차도 무너뜨릴 존재가 된 것이 드낙이었다.
위협을 안 느낄 수가 없었다.
“남부도 드낙 불파겐도 이제 우리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세력이 없소. 북부는 단단히 뭉쳐야 하오.”
게실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괜히 손을 주억거렸다. 괜히 긴장했는데, 드낙이 그만큼 말도 안 되는 힘을 지니고 있어서였다.
마음 같아서는 남부 왕국이 모두 힘을 합쳐서 밀어내야 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드낙은 결코 자신의 야망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기에 남부 왕국을 규합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3왕자가 동부에 붙으면서 더 복잡해졌어.’
“북부 귀족 연합을 만들고, 킹슬레이를 북부의 왕으로 추대할 생각이오.”
게실리안의 말에 아크온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시류가 그러했다.
“팬크리스 영주는 어느 편이오?”
“북부로 되돌아갈 가문인데, 누구 편이겠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드낙 불파겐은 항상 양보를 해왔다. 이번에도 뒤로 물러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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