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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은 모비딕이다.”
박호훈은 자신이 어렸을 때 재밌게 했던 CD게임의 주인공 이름을 와이번에게 지어주었다. 그것이 얼마나 유명한 이름인지는 알지 못했다.
무지(無知)했다.
그는 책을 보지 않는 인간이며, 영화관에 올라오지 않는 옛날 영화를 억지로 찾아보지 않는 인간이며 영어 문화권에 대해서도 알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럴 시간에 돈이라는 놈에게 머리채가 잡혀서 자본주의의 노예로 살았다.
죽기 전까지 돈에 구속되어 노예로 살았고, 단 한 번도 자유인으로 산 적이 없었다.
“크으어.”
한순간에 이름이 대물(Moby Dick)이 된 검은 비늘 와이번은 하품만 할 뿐이었다. 이래 부르나 저래 부르나 그게 그거였다. 혓바닥을 놀리며 이빨을 청소하기 바빴다.
‘깔끔한 녀석이네.’
와이번은 비늘을 혓바닥으로 닦기도 했는데, 그 모습은 흡사 고양이 같았다. 특히 겉은 박쥐 날개지만 날개의 안쪽에 있는 깃털은 아주 세심하게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박박!
발톱을 손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멍하게 구경하던 드낙은 다시 내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게실리안 님이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몽펠리에의 맥주 산업을 담당하는 기사가 있습니다만, 그분께서 자작님을 꼭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길게이 왕자 전하께서···”
그를 찾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그들의 시종은 결코 드낙을 안내하지 않고, 자신들이 방문할 것이며 시간만 알려달라고 청하였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야.’
오늘은 게실리안 파이룬 지휘관의 방문을 받기로 했다. 몽펠리에를 어제 보았고, 킹슬레이는 아직 오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파이룬을 쳐줘야 했다.
‘길게이 왕자는 누른다.’
그들보다 북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만나는 순서를 통해서 확실하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방문의 순서에도 세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겐 쟝이 이 결정에 도움을 주었다.
물론 드낙도 그 정도의 판단은 내릴 수 있었다.
‘사람 3명이 전부인 커피숍에서도 정치질이 일어나는 게 한국이다. 이 정도는 껌이지.’
자잘한 것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게 이 바닥이었다. 물론 드낙은 이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서로 패를 까고 서로가 윈윈하는 게 편했다. 하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애들도 아니고.’
그래서 드낙은 불편했다. 만나는 순서 같은 거로 이래저래 하는 건 썩 좋은 그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부수기에는 아직 드낙은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큼. 불파겐 자작, 먼저 이번에 세운 무훈을 축하하오.”
게실리안이 헛기침을 하며 드낙을 세워주었다.
“별말씀을. 파이룬 또한 큰 공을 세우지 않았소? 오크들을 정면에서 막아내지 않았다면 내가 나설 일이 없었을 것이오.”
서로 상투적인 말을 하며 대화를 천천히 풀었다.
‘그때 내가 크게 대우해줬어야 했는데.’
싹이 보이는 드낙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못 해준 것이 게실리안은 아쉬웠다. 게실리안 지휘관은 아크온과 같이 드낙의 용병시절 때 만났지만 아크온처럼 대우해주지 못했다. 그로 인해 생긴 차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아는 사람과 친구는 다르고, 친구와 친구의 친구는 다른 법이었다.
‘끙.’
또한 몽펠리에의 가주와 친구 먹은 자와 친하게 지내기에는 힘든 것이 파이룬 가문이었다. 그 가문의 울타리에는 게실리안 또한 속해있었다.
드낙이 말하는 칭찬에 게실리안은 탄식하며 말했다.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다.’
한땀, 한땀 훈련하고, 실전 경험을 축적하며 자기 자식처럼 키워온 병사들이었다. 그들이 쌓아온 경험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었고, 시간 만으로만 해결할 수 있었다.
“수많은 피로 이루어낸 일이오. 칭찬받을 일은 아니오.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오.”
파이룬은 전술적으로 패배했다. 〈연합군〉이 지닌 한계가 모든 것을 불살랐다.
당당하게 파이룬을 받쳐주겠다는 놈들은 전투가 시작되자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길게이는 좌익을 돕기보다는 우익에서 한 다리만 걸쳤고, 불파겐의 병사들은 도움이 되기보다는 공간을 쉽게 내주며 진형이 있었습니다만, 없었습니다로 게실리안을 당황케 하였다.
드낙이 광역 마법으로 우익의 실타래를 풀지 못했다면 패배했을 터였다.
“그런 말 마시오. 이겼으니 축하해야 할 일이잖소.”
게실리안은 그 말에 질문으로 답했다.
“승리로 피를 어떻게 덮겠소. 말씀만으로도 고맙소. 그런데, 몽펠리에의 가주에게 어떤 말을 들었는지 말해주실 수 있으시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파이룬은 한 배를 탄 사이였기에 드낙은 간략하게 파이룬이 알아야 하는 것만을 알려주었다.
킹슬레이의 확전 욕심을 막고, 7가문을 동부가 받아들이고, 백금 왕가에 대한 처우에 대해서만 말했다. 거의 다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좋은 계획이오. 그리한다면 서로 부담이 없어지지 않겠소? 하지만 킹슬레이가 쉽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소.”
게실리안 지휘관은 킹슬레이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조건을 건다라···어떤 걸 요구할지 아시오?”
드낙 입장에서는 서둘러 전쟁을 끝내야 했다. 오크가 그래도 남아있어야 제국을 막아줄 것이고, 그 시간 내에 더욱 성장해야 했다. 자신도, 영지도.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게 느껴졌다.
‘난세(亂世)이기에 중립신은 부활을 꿈꿀 수 있었던 것이겠지. 앞으로 어찌 될지 진짜 모른다.’
드낙의 마음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신이 부활할 정도의 변수가 생기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오크 대침공〉을 통해서 깨달았다. 10만 오크가 지랄을 떨어야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화통하면 화통한 자가 킹슬레이의 가주라서···예상하는 것은 어렵소. 무엇을 원할지도 지금 상황에서는 모를 수밖에 없소. 그러니 더 걱정이라는 것이오.”
게실리안은 쉽게 판단하지 못했고, 가볍게 대답하지 못했다.
드낙이 지닌 위치가 얼마나 높아졌는지 실감할 수 있는 때였지만 드낙은 〈킹슬레이의 조건〉에 대해서 깊게 고민하느라 기뻐하지 못했다.
앞으로에 대해서 들은 게실리안은 파이룬의 입장을 말해주었다.
“공에 대해서 논하고 나서는 바로 돌아갈 것이오. 이미 대부분의 병사를 영지로 보냈고, 남은 숫자는 300명도 안 되오.”
오크 4만을 회전에서 격파했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였다. 더이상 전투는 없을 것이다.
오크들은 사상 유례없는 소모를 겪었고, 감히 전쟁을 더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부락 10개가 몰락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소름이 돋을 소식이 퍼져나갈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점령한 땅을 내어주지는 않을 터였다. 북부의 일부는 회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끝없는 약탈에 시달릴지 몰랐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국경선에 마을이 들어서도 병사가 지키지는 않을 것이며, 기사의 장원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를 터였다.
왜냐하면 북부의 역량 또한 몰락했기 때문이다. 병사는 키우기 힘들고, 기사는 말하면 입이 아프다.
파이룬이 웅크리는 이유는 이러한 근거가 존재했다. 몽펠리에도 다를 바 없었다. 빠르게 병사들이 되돌아가고 있었다.
보급은 언제나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드낙 또한 그 말을 듣고 나서 보급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와이번이 많이 먹던데, 괜히 눈치가 보이네.’
전쟁을 겪은 혹독한 겨울이다.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드낙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자신의 와이번이 남의 것을 먹으며 민폐를 끼치는 기분이 들었다.
‘남 생각할 때가 아니다. 드낙아.’
그는 스스로를 추스르고 입을 열었다.
“킹슬레이를 잘 타일렀으면 좋겠소.”
지금은 킹슬레이가 자신들의 말을 잘 듣게 해야했다. 다른 북부 가문이 큰 피해를 입었기에 킹슬레이 혼자 공을 독차지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상태였다. 드낙은 그걸 막아야하는 상황이었다.
‘드래곤 오크 라이더가 죽은 이상, 더 오크를 죽이면 제국을 막을 방파제가 사라진다.’
동시에 곧 도착할 백금 왕가의 사신에게서 최대한 많이 뜯어내야 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그들 또한 결국에는 북부 귀족에 속한 자들이오. 다른 마음은 품지 않을 것이오. 또 합의를 통해서 7가문이 겨울을 버틸 수 있도록 보급도 도와주겠소. 물론 백금 왕가도 내 가문이 쏟은 피값을 제대로 내야할 것이오.”
“고맙소.”
게실리안은 그 외에도 수많은 도움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이를 통해서 불파겐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더 두껍게 만들려는 생각도 있었다. 드낙은 절대 거부하지 않았다.
‘꼭 필요한 일이지. 거부하면 자신들과 척을 진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어.’
호의를 받아야 관계가 유지된다.
드낙은 백금 왕가에 대해서 추가로 언급했다.
“너무 백금 왕가를 압박하지 마시오. 악마의 힘을 얻은 트롤 때를 기억하시오.”
“후하하!”
게실리안이 웃었다.
겐 쟝의 눈이 찌푸러졌다. 자신이 모시는 분이 비웃음 당해서였다. 드낙 또한 눈을 찌푸리자 게실리안이 사과하며 말했다.
“미안하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들어오는 정보에 의하면 명예도 없는 플래티넘의 족속들은 매년 오우거에게 공물을 바친다고 하오. 그들은 결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흠···”
드낙이 썩 좋은 표정을 짓지 않자 게실리안이 거듭 설득했다. 드낙이 백금 왕가에 트라우마라도 가진 것처럼 보여서였다.
“덧붙여서 오크가 건재하니 감히 북부에 수작질하지는 않을 것이오. 북부가 진짜로 몰락하면, 다음 차례는 그들이 될 것인데 어떻게 수작질을 하겠소? 안 그래도 기울어졌는데 여기에 북부를 누른다? 자멸하는 꼴이오.”
백금 왕가는 결코 막타를 못 칠 것이라고 게실리안이 호언장담했다.
‘괜한 걱정인가. 하지만 믿을 만한 새끼들이어야지.’
항상 개 짓거리란 개 짓거리를 다 하는 놈들이 백금 왕가였다. 정치적으로 음흉하다 보니 전쟁이나 전투에서도 구질구질하고 치사했다.
〈악마의 트롤 사태〉에도 겨울에 군사대치를 한 미친놈들이 백금 왕가였다. 드낙은 일말의 걱정을 도저히 덜어낼 수 없었다.
*
다음 날, 〈팬크리스(Fanchris)〉와 〈멜마론(Melmaron)〉 그리고 이실레아와 기병대가 쌍둥이 성채에 도착했다.
“꾸우!”
발룬이 있었기에 오크에게 죽을 수가 없는 것이 이실레아였고, 그렇기에 이들은 큰 피해 없이 도착했다.
마중을 나가고 다시 내성으로 돌아온 드낙은 가장 먼저 이실레아를 자신의 방으로 들여보냈다. 다른 세력보다 자신이 품은 기사를 먼저 보기로 스스로 결정했다. 드낙의 뒤에는 겐 쟝이 호위하듯이 서 있었다.
“대승을 축하드립니다!”
이실레아가 크게 경례하며 드낙을 대우했다.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이기도 했는데, 그럴 만도 했다. 전공만 생각한다면 인간 하나가 만(萬)이 뒤섞인 회전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벌써 소문이 났는가?”
드낙이 놀라자 이실레아가 빙긋 웃었다.
“입소문은 달리는 말보다 빠른 법입니다.”
전쟁임에도 상인들은 움직이는 법이고, 폭리를 통해서 이득을 취하기 좋았다. 목숨보다 돈이 먼저인 놈들은 어느 세상에나 존재했다.
“특별히 보고할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다만, 저녁에 앞으로에 대해서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알았다. 쉬어라.”
“예.”
드낙은 고개를 끄덕이며 쉬라고 말했고, 이실레아는 서둘러 물러갔다. 물러가며 드낙의 뒤에 있는 겐 쟝과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 싸늘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이실레아는 그렇게 물러갔는데, 드낙이 해야 할 일이 태산이었고, 그런 일을 빨리해치우고 싶어하는 기색을 드낙이 보여서였다.
달칵.
그녀가 물러가자 문을 열고 들어온 젊은 영주가 드낙에게 목례했다. 드낙 또한 고개를 살짝 숙여서 인사를 받아주었다.
“고생이 많소. 힘들지는 않으셨소?”
“괜찮소. 다른 가문보다 그래도 일말의 전공이라도 쥐고 있고, 그런 기회를 준 자작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소.”
팬크리스 영주는 드낙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하.”
드낙이 짧게 웃으며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팬크리스의 젊은 영주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이에 드낙이 입을 열었다.
“부담스러우니, 잊으셔도 괜찮소.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오.”
“말씀만으로도 고맙소. 하지만 절대 잊지 않겠소.”
팬크리스의 젊은 영주는 용케도 살아남았다. 그는 이번 전쟁을 통해서 누구보다도 힘을 갈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돌파구는 드낙 불파겐이었다.
그 눈빛을 보고 눈치 좋은 드낙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벌써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었군. 아니오?”
“모르는 자들이 없는데, 어찌 안 듣고 버티겠소? 하지만 세세한 것을 듣고 싶소.”
드낙은 고민했다. 동부에 7가문이 들어오겠지만, 그것에 대한 세세한 결정은 자신이 내릴 수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잘 말하지.’
“혹시···게제라스 총관이라고 들어는 봤소?”
드낙이 조심스럽게 이름을 꺼냈다.
“동부의 실태는 유명하오. 제국의 법도를 따르지 않소.”
“그래서 걱정이오. 내가 내정에 관해서는 그의 말을 참고하는 터라, 확답해줄 수가 없소.”
팬크리스 영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들어서 얻은 기대가 단번에 박살 난 표정이다. 드낙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내어줄 땅은 넓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드낙의 말에 〈비올란트 팬크리스(Violent Fanchris)〉가 강하게 나왔다.
“세금을 자작에게 줄 수는 없소. 그리하면 다시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세월을 보내고 말 것이오.”
결국에는 가문이었다. 자신들의 선조들이 그 땅에 묻혀있었다. 반드시 되찾아야 했다. 그렇기에 북부 7가문은 불파겐 영지로 가고 싶은 것이다.
더 많은 땅을 소유할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제국의 법도가 자신들에게 뻗쳐온다면 언제 힘을 기를지 의문이었고, 불파겐의 방계가 될 수도 있었다.
자신의 대(代)에 그런 치욕을 당한다? 나라를 팔아넘기는데 선봉을 선 역적으로 가문 역사에 남게 될 터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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