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 <-- 가을의 끝 -->
인간들은 패잔병처럼 몽펠리에 성으로 들어갔다.
살아남았지만, 지친 이들이 많았다.
“하흑.”
잘 걷다가 다리에 힘이 풀린 병사가 앞으로 넘어지기도 했다. 몇몇 병사는 낙오될 정도로 진이 빠져있었다. 그나마 힘이 남아있는 기사들이 수레를 끌고 와서 낙오된 병사들을 태우고 인력거처럼 끌었다.
“죄송합니다.”
“사는 것이 중요하다. 말을 아껴라. 혀로 입을 적시고, 침이 잘 나오도록 해라. 뱉어내지는 말고.”
“예.”
병사가 감동하며 살짝 눈시울이 붉어졌다. 물론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이 세상은 아직도 눈물은 나약한 것으로 여겨졌다.
탈권위적인 모습이었지만, 정규병이 지닌 십 년의 근속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권위를 세운다고 10년을 노력해서 만든 병사를 죽게 내버려둔다? 적어도 무인이 생각할 발상은 아니었다.
“곧 밤이 찾아온다! 서둘러 움직여라!”
밤이 찾아오면 온도가 낮아질 것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야영한다는 생각은 누구도 가지지 않았다.
끔찍한 소모를 겪은 병사는 결코 야지에서 밤을 보낼 수 없었다.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을뿐더러, 체력의 소모를 견디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불을 지펴라!”
“피곤하더라도 모닥불을 피우고, 너무 가까이서 잠을 자지 마라!”
“창문, 창문! 누가 창문을 열고 바로 자려고 하느냐!”
기사들과 중역(重役)들의 소모율은 40%를 넘지 않았기에 병사들을 잘 다스릴 수 있었다. 그들이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인간의 전술 시스템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병사의 목숨으로 방패와 갑옷을 짜고, 기사가 쌓은 수련의 시간으로 검을 만들어 전투를 진행하는 것이 이곳 인간들이 지닌 전술의 뼈대였다.
자연스럽게 병사보다 기사들이 살아날 확률이 높았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모든 기사들이 병사들을 관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남은 것보다는 앞으로 생길 것을 위해서 움직였다. 오늘에 안주하지 않고, 내일을 움켜쥐려고 했다.
“불파겐 자작! 다름이 아니라···”
“됐소. 들어가서 쉬고 싶소.”
“아크온 님께서 논의할 것이 있으시다며 찾으십니다.”
“알아서 하시오.”
드낙은 걸어가면서 만난 기사들과 그를 찾아온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매우 피곤한 표정은 물론이고, 딱딱하게 굳은 모습이라 누구도 두 번 묻지 않았다. 아크온의 이름이 거론되었음에도 막힘없었고, 일관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공을 양보하려고 하는군. 역시 드낙 불파겐, 소문 그대로다.’
감탄에 감탄하는 기사들이 많았다. 아크온 또한 만족스럽게 웃었다. 망치가 부러지고 탈력감에 전투에 참가하려고 갔다가 강제로 끌려가서 몽펠리에 내성에 있어야 했던 그였다.
이것은 전투 이후의 수습에 대해서는 일절 손을 대지 않겠다는 뜻으로 비추어졌다. 코피를 쏟더라도 한 다리 걸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 드낙의 모습은 대범함 그 자체였다.
‘1등 공신이 양보했으니, 뒷정리가 쉬워지겠어.’
이번 전쟁의 1등 공신이나 다름없었지만, 공이란 것은 먹으면 먹을수록 더 먹고 싶은 법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수습하게 함으로써 공을 깔끔하게 떼어주는 장면을 연출했다.
논란의 여지가 없었고, 상대에게 양보함으로써 상대 또한 자신의 공을 깎아내리지 말아 달라는 무언의 압박이며 거래였다. 서로 좋은 모습을 지닐 수 있었다.
완벽한 처세술이었다.
북부 귀족들 또한 거부하지 않았다. 드낙의 힘을 보고 딴마음을 가질 귀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했다면 벌써 가문원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서둘러 전공을 논해야 한다.’
인간은 공멸했음에도 승리는 승리였다.
귀족은 피비린내가 가득한 곳에서도 공을 서로 가를 줄 알았다. 그런 인간들이었다. 그게 인간이었다.
“파이룬의 대표자를 데려와라! 어서!”
“예!”
병사가 서둘러 달려갔다. 몽펠리에와 파이룬이 큰 것을 가르면 구색이 바로 잡힐 것이다.
*
“끙.”
드낙은 아무런 빈집으로 들어가서 그대로 눈을 감았다. 추위는 전혀 느끼지 않았는데, 다른 인간들과는 다르게 체온이 높아서였다.
이미 가장 큰 공을 세웠기에 드낙은 다른 공을 탐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자신이 독식할 정도로 기반이 탄탄하지 못함을 잘 알았다. 주제도 모르고 모든 걸 꾸역꾸역 먹는다면 남은 북부 귀족들과 갈등을 빚을 뿐이었다.
힘만 강한 놈은 결국 대국적으로 승리하지 못한다. 여포가 그러했다.
그 대신 아직 남아있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했다.
‘중립신의 계획이 무너졌다.’
그 압박감은 강하게 드낙의 목을 졸랐다. 중립신이 실수하고, 완벽하지 않기에 찌를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 전과 전혀 달랐다. 왜냐하면 드낙의 꿈은 중립신이 성공해야지만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설마 실패하겠어?’
중립신이라는 배가 가라앉을까 봐 무서웠고, 걱정스러웠다.
“후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잠이 편하지 않았다.
이판사판 개사판거리며 달려들던 드낙은 이제 없었다. 신중하게 자신의 앞길을 고민했다.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이 어찌 될지 모든 것을 예상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저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걸어야만 했다.
‘고민해봤자 소용없어. 이번 일로 내가 얻을 능력은 뭐가 될까.’
드낙은 갈등 속에서도 욕심을 차리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의 욕망은 근본적인 것이다.
중립신이 부추기지 않아도 탐욕스러운 생각을 하는 것이 인간이었고, 만족을 몰랐다.
‘드래곤 나이트.’
눈을 감은 드낙이 씨익 웃었다.
〈블랙 스케일 와이번〉은 아직 죽지 않았기에 서둘러 검은 문의 능력을 통해서 드래곤 나이트가 되고 싶었다.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그게 욕심이었지만, 욕심을 버리는 것은 어려웠고 중립신의 손길을 받지 않았어도 놓을 수 없는 것이 욕심이기도 했다.
“······”
잠에 빠지자 검은 연기가 드낙을 덮쳤다.
검은 꿈에 들어선 드낙이 주위를 살폈다.
‘중립신이 없네?’
드낙이 놀랐다. 중립신이 분명히 반응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검은 문만이 그를 반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은 신인가? 침착하다고 해야 하나.’
드낙은 중립신이 빤스런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신인데, 설마 그러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대책 없이 안 만나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중립신 대신 세파리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낙은 그를 보자마자 농담을 던졌다.
“어땠냐? 잘 싸웠지?”
그 말에 세파리아스가 코웃음을 쳤다. 요행으로 이긴 주제에 혓바닥이 긴 것을 보니 벌써 화가 났지만, 그래도 드낙과 함께해오며 드낙의 수준을 알았기에 분노를 표출하지는 않았다.
“흥. 와이번을 아끼는 놈이라서 이긴 줄 알아라. 〈드래곤 오크 라이더〉는 위협적이지만, 오크 한 마리가 무엇이 그리 무섭겠냐? 그런데 잘 싸웠느냐고? 건방지다. 건방져.”
“건방지다니, 참나.”
드낙은 그렇게 말했지만, 따로 반박하지는 못했다. 드낙이 〈드래곤 오크 라이더〉와 싸웠지만, 반쪽과 싸워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와이번에 탄 도네투스라면 드낙도 목숨을 걸어야 했을 것이다.
‘허무하게 죽기는 했지.’
고통과 상처로 지친 도네투스에게 얼굴을 맞았지만 그건 지친 자의 마지막 발악에 불과했다. 그만큼 도네투스는 와이번을 아꼈고, 결국 가장 와이번의 힘이 필요할 때 쓰지 못했다.
아끼다가 개 준 꼴이었다.
“세팔아. 그래서 중립신님의 보상은 이게 전부야?”
단 두 개의 검은 문만이 보였다. 이에 대해 세파리아스가 짧게 대답했다.
“인간이길 포기하고 오크가 되고 싶으면 따지던가.”
‘말을 해도 꼭.’
드낙은 이해했다. 오크만 너무 죽여대서 그 모든 업을 받아들인다면, 드낙은 더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게 변모할 것이다. 피부가 초록색으로 될지도 몰랐고, 송곳니가 튀어나올 수도 있었다.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오크의 능력에는 한계가 뚜렷했다.
플래티넘 왕족이 오우거를 죽이고 그 업을 못 받아들이고 죽어버린 것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터였다. 드낙은 죽지는 않겠지만, 인간이 아니라 뒤섞인 뭔가가 될지도 몰랐다. 인간의 외형은 꼭 유지하고 싶은 게 그였다.
‘하나씩 빼먹는 게 중요하다는 소리지.’
“좀 아쉽네. 한 일과 비교하면 보상이 좀···”
“〈전초극의 오른팔〉을 지녔으면서 말이 많다.”
그 말에 드낙이 거세게 반박했다.
“갑자기 사용이 안 되던데. 그건 왜 그런 거야?”
“중립신한테 물어봐라. 내가 해줄 말은 없다. 멍청한 놈아.”
드낙이 머리를 굴리지 않고, 대뜸 화만 내자 세파리아스도 곱게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능력을 주고 나서 나랑 만날 것 같네.’
맛있는 거 먹여놓고 대화를 하는 것 같아서 드낙은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진리였기에 먹힐 수밖에 없었다.
돈 받고 나면 딴소리 못 하는 것과 같았다.
중립신은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오크에게서 받을 수 있는 업이라고 해봤자, 결국 드낙이 죽인 도네투스가 지닌 가장 강력한 두 개의 타투였다. 드낙이 검은 문 앞에 섰다.
‘아아!’
강렬한 환상이 드낙을 덮쳤다.
크르르, 컹!
꾸뀌끽!
자신의 타투 중에서 〈동물이나 야수 혹은 몬스터〉와 관련된 타투가 모조리 튀어나와서 질주했다. 타투의 소실이 만들어내는 탈력감이 짜릿하게 등골을 타며 질주했다.
수많은 야수들의 거친 감정이 드낙을 헤집었고, 그 몸속으로 들어와 등판에 자리 잡았다.
쿵!
쿠와아악!
묵직하게 땅에 내려앉은 와이번이 드낙의 몸으로 들어오며 환상이 끝이 났다. 드낙은 비로소 〈혼란무도(混亂無道)의 타투(Tattoo)〉가 지닌 힘을 오롯이 이해했다.
‘짐승의 왕. 혹은 용을 다루는 자의 증거.’
전체적으로 신체능력이 상승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용족으로서의 특징을 지니기도 했다. 선천적인 마법 저항력이 가장 두드러진 효과였다.
‘오크 맞춤형 타투였네.’
오우거의 적발을 지녔기에 마법 저항력이 지니는 힘이 얼마나 큰지 이미 체감하고 있는 드낙이었다.
드낙은 타투로써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한계로 강한 저항력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경감시키는 수준이었다.
‘강화 마법의 효율이 낮아지겠는데.’
자신에게 부여되는 모든 종류의 마법효율이 낮아짐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인간의 마법 체계는 대부분이 인챈트 마법이기 때문이었다. 강화 마법이 없어도 이미 드낙은 육체적으로 그 어떤 인간보다 뛰어났다.
거기에 미련은 없었다.
또한 수많은 짐승과 용족 일부를 길들일 수 있고, 대화 또한 나눌 수 있는 게 혼란무도의 타투였다. 야생에서 살아가는 오크에게 탁월한 힘이었다. 드낙의 〈조련술의 업〉과 겹치는 부분이기도 해서 딱히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짐승이고 신체능력이건, 소량의 마법 저항력이 아니다.’
용(Dragon)!
그런 것을 타고 다닐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드낙은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물론 와이번 이상의 용족을 길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와이번을 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기적이었다.
오크건 인간이건 그런 종족 따위가 용족을 길들이다니? 신의 힘이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녹색 도끼가 얼마나 오크를 아끼는지 알 수 있는 면모였다.
‘와이번을 가진다면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니게 되겠지.’
누구나 두려워할 것이다. 동시에 드낙은 하늘의 제공권을 획득하게 되는 것과 같았다. 하물며 이 이동수단은 남들보다 더 빠르게, 더 넓게 활동할 수 있는 열쇠이기도 했다.
‘엄청난 이점이지.’
다음 검은 문에 드낙이 손을 뻗었다. 환상이 그를 덮쳤다.
질퍽거리는 늪에서 모습을 드러낸 7개의 머리를 지닌 히드라가 드낙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와이번보다 더 강대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아아!’
무시무시한 힘이 드낙의 왼팔을 타고 그를 덮쳤다. 인간은 결코 맛보지 못하는 힘은 태산마저도 부술 것 같았지만 동시에 드낙에게 고통을 선사했다.
양날의 날임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환상이었다.
동시에 히드라의 모습만으로도 얼마나 이 타투가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도네투스가 처음부터 히드라의 타투를 오직 오른팔에만 집중했다면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전신에 퍼뜨려서 부담을 줄인 것이 패착이었다.
인간을 상대로 오른팔을 버릴 생각을 하지 못한 오크 종족이 지닌 한계였다.
‘범은 토끼를 사냥함에도 전력을 다하거늘. 쯧쯧.’
드낙은 죽은 놈에게 훈수를 두었다. 심지어 묘지 앞에서 해도 재미난 것이 훈수였다.
그렇게 드낙은 두 가지의 타투를 획득했다.
와이번을 길들여 부리는 〈혼란무도(混亂無道)의 타투(Tattoo)〉
스스로 자멸할 수 있지만, 맨손으로도 성벽을 무너뜨리는 〈히드라의 타투(Hydra`s Tattoo)〉
두 가지 타투는 모두 〈전초극의 오른팔〉과 비교해도 꿇릴 것이 없었다.
‘히드라의 타투는 트롤 재생력과 신성력을 지닌 나와 궁합이 좋아.’
벌써 어떻게 쓸지 견적이 나와 있었다.
싱글벙글하고 있는 드낙의 앞에 중립신이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드낙은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감정을 제어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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