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4 <-- -->
휘이익!
드낙이 휘파람을 불었다. 〈조련술의 업(業)〉으로 한 번 휘어잡았던 그 낙타를 부르기 위함이었다.
‘달려서 가는 건 좀 아니지. 체력이 아까워.’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 좀생이 같이 그러냐 싶지만, 드낙은 원래 그런 인간이었다. 내일 세상이 망해도 절대 적금을 못 깨는 그런 인간이 드낙이었다.
‘체력과 생명력은 나한테 가장 중요해.’
저 먼 곳까지 내달릴 수 있는 역량이 충분했지만, 전황이 좋지 않아서 작은 체력마저도 보신하는 것은 중요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아끼지는 않았다.
전황이 너무 안 좋아서였다. 이대로면 공멸(共滅)해도 역전승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어느 한쪽이라도 풀어줘야 한다. 안 그러면 내가 끼어들어도 소용이 없다.’
인간의 좌익은 겨우 몸을 추스르고 있었고, 그나마 풀어줄 수 있는 곳은 중앙과 우익이었다. 드낙은 자신이 향하는 곳이 자연스럽게 우익이 가까웠으므로, 우익을 풀기로 마음먹었다.
치사해도 어쩔 수 없었다. 또 단순히 쉽게 가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크가 만들 변수를 줄여야 해. 동시에 내가 만들 수 있는 변수를 키워야 해.’
첫 단추를 끼우는 게 힘들면 다음 단추도 끼우기 힘든 법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달리고, 상대와의 간격을 좁혀야 했기에 개입하는 첫 타이밍이 중요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속도를 줄이고, 그 시간을 길게 만들어야 했다. 그게 모든 전황을 바꿀 물꼬를 틀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해야 한다.’
오크가 만드는 변수를 줄이는 게 드낙이 해야 할 일이었다.
파아앗.
마력이 드낙의 손에서 모여졌다. 마법진을 그릴 큰 공간은 없었기 때문에 이 방법뿐이었다. 마력을 모으고, 그 마력에 주문을 읊어서 마법으로 만들어야 했다.
‘요즘 트렌드는 아니지.’
인간의 마법 체계가 인첸트 마법으로 간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성이었다. 올드한 마법 체계였는데, 〈주문 마법식〉 혹은 〈주문형 마법〉이라 불리는 마법 체계였다.
‘단점이 심해도 이런 곳에서는 어쩔 수 없다.’
이 방법의 가장 큰 단점은 마력의 손실이 가장 큰 단점으로 꼽혔다. 물체에 마력을 담는 마법진과는 다르게 허공에 마력을 모아야 하기 때문에 정신력에 따라서, 마법 솜씨에 따라서 마력의 손실은 천차만별이었다.
이것은 또 수공예와 공장으로 비교할 수 있었는데, 프로토타입의 퀄리티는 결코 공장제의 퀄리티를 이길 수 없는 법이듯이 주문형 마법은 결코 인챈트 마법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나는 다르지. 그리고 마법은 재능에 따라 차이가 있어.’
수공예에도 장인이 있는 법이다. 10에 9의 장인은 범인(凡人)이고, 규격화된 공장제를 이길 수 없지만, 천재나 수재는 공장제의 수준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리고 드낙은 마법사를 처형시키며 그 지식을 탐닉했고, 그 실력을 핥아먹었다.
천재는 아니지만, 수재가 펼치는 〈주문형 마법〉은 평범한 인챈트 마법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었다.
광역 마법. 〈진동하는 땅과 타오르는 불꽃(Vibrating land and Blazing flame)〉
“땅이 좋다 한들 재해 앞에 소용없더라
땅에 좋다는 것 뿌리며 좋아해도 소용없더라
지진 앞에서는 좋아하던 것들 모두 소용없더라”
울컥!
드낙의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지나칠 정도로 고르곤의 심장이 생명력을 빨아먹으며 마력을 생성해서였다.
잠을 자며 휴식하며 남아있던 절반의 마력은 이미 바닥이 난 상태였다. 하지만 광역 마법이 주는 오크의 피해는 드낙이 생명력을 다소 소모해도 이득으로 비추게 할 가능성이 존재했다.
‘예상했던 바다.’
드낙은 다음 주문을 읊었다.
“밤이 들어 모닥불을 피우니 온기가 그렇게 좋더라
밤바람이 추워 돌을 달구니 쉬이 잠이 잘 오더라
생각 없는 불똥이 튀어 올라 삽시간에 번지더라
이내 태산을 태우는 재앙으로 태어나더라”
주문은 결코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잠시 한 호흡 쉬기도 했다.
마력이 마법으로 변하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절차를 따라야 했고, 충분히 그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다음 주문을 읊어야 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운율이 있었고, 숨을 쉴 지점이 있었다.
드낙이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며 시동어를 외쳤다. 마력은 단번에 사그라들었고, 우익에서 날뛰는 오크들이 있는 땅으로 안개처럼 흩뿌려졌다. 그 밀도는 음흉하기 짝이 없었다.
5초 이상 마법으로 짜여진 마력이 스며들고 나서야 주술사 중에 노련한 오크 주술사가 고함을 내질렀다. 손이 벌벌 떨렸다.
“대단위 마법이다! 상쇄할 수 없다! 너무 넓고···음흉해!”
주술사들은 안개처럼 흩뿌려진 마력을 주력으로 상쇄시키려고 하지는 못했다.
‘이미 늦었다!’
알아차리는 것이 늦은 것은 물론이고.
‘남은 주력이 없다···’
주력도 바닥난 지 오래였다. 전투가 오래 지속하였고, 인간 군대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빈도가 거의 다 사라져버려서 남은 주력을 이미 다 써버렸다.
“퍼져라! 퍼져라!!!”
오직 산개하는 것이 답이었다. 오크들이 너도나도 퍼져나갔다. 가장 먼저 대규모 마법을 알아차린 주술사가 발을 옮기려는 찰나 거대한 진동이 땅에서 출렁거렸다.
쿠구구구구!!! 드드드드드득!!!!
진동은 거셌고, 땅이 움푹 올라가며 진형의 변화를 크게 가져왔다. 오크들은 자세를 잡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지진의 여파는 인간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어이쿠!”
“켁!”
뒤로 벌러덩 넘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방패에 턱을 찍기도 했다. 오크보다 인간의 피해가 더 생길 지경이었다.
모두 꼼짝없이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네발짐승이 되었고, 오크는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오크 인간 구분 없이 4천의 생명체가 지진의 영향에 놓였는데,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이익!”
인간이 오크의 발을 붙잡기도 했고, 오크와 인간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상황도 보여졌다.
“버러지 같은 인간놈!”
“어딜!”
서걱!
그 상황 속에서도 무기를 서로 휘두르다가 오크가 자신이 지닌 체중 때문에 스스로의 무기에 손가락이 뭉텅이로 잘리기도 했다.
“헉!”
그중에서 오크는 지하로 떨어지기도 했다. 땅이 갈라진 곳에는 어둠밖에 없었고, 오크 전사는 도끼로 겨우 절벽에 자리를 잡았지만, 오크와 병사가 서로 뒤엉켜서 떨어지는 통에 휩쓸려서 끝없는 지하로 나뒹굴었다.
“퉤퉷!”
흙에 파묻혀 생매장을 당하기도 했다.
푸화아아악!
곧 튀어 오르고 꺼져가는 땅에서 화염이 솟구쳐올랐다. 끈적한 용암의 형상을 한 마법 불꽃이 오크 전사를 집어삼켰다.
“그아아아아아!!!!!”
고함을 지르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힘없이 오크 전사가 무릎부터 쓰러졌다.
폐에 들어간 열기가 모든 것을 송두리째 태워버렸다.
“그르릅!”
땅에 머리를 처박으며 화염을 꺼트리려고 하는 오크 전사의 발악이 있었지만 전신이 새까맣게 타버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마법 불꽃은 흙으로도 꺼트릴 수 없었고, 오로지 초월의 힘으로 인한 상쇄가 살 길이었다.
화르륵!
오크의 살집이 떨어져나가며 바닥 곳곳에 마법 불꽃이 남았다.
화염 지옥 속에서 1, 500마리의 오크가 화염에 휩쓸렸고, 그중에 절반이 죽어야 했다. 주술 도기를 아낀 오크만이 중경상에 그쳤다.
총 1, 500마리가 넘는 오크가 중경상을 입고, 그중에 800마리의 오크가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광역 마법에 가진 마력을 모두 사용한 드낙은 자신이 펼친 마법의 효과를 보고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 다들 마법사, 마법사 노래를 부르고 지키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하지만 아껴서 개준다는 말이 지금 남부 왕국과 딱 그러했다. 일찌감치 마법사를 전쟁터로 끌어들였다면, 오크를 충분히 막았을 것으로 보였다.
물론 드낙만의 생각이었다. 누구나 공격적으로 투자하라고 외치면서도 적금을 손에서 못 놓는 것과 같았다.
‘생명력을 제법 소진한 보람이 있네.’
성벽 밑에 도착한 낙타를 향해 드낙이 냉큼 외성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허리를 밧줄로 단단히 묶고, 군대에서 배운 대로 천천히 밧줄을 풀면서 내려가서 착지한 다음에 그대로 낙타에 올라탔다.
“가자! 전장으로!”
꾸게게게게!
낙타가 특유의 괴상한 소리를 내며 달려나갔다.
드낙이 한 일은 우익에 새로운 바람을 집어넣었다. 단순히 오크 1, 500마리를 무력화시켜서가 아니었다.
〈불릿 발레아르〉가 속으로 기염을 토했다.
‘불파겐 자작이다! 마법에 조예가 있다고는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최소 마법사 30명이 모여야 할 수 있는 것이 광역 마법이었다. 실력이 좋고, 수재 소리 듣는 마법사만 모은다면 15명은 있어야 했다. 대영지에서도 그렇게 마법사를 동원하지 못한다.
수습 마법사라면 몰라도. 수재급 마법사를 15명이나 전쟁터로 보낸다? 미치지 않고서야···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이름이 날 만해. 오히려 부족할 지경이다.’
이미 인간을 벗어난 존재로까지 느껴졌다. 혹은 흑마법에 손을 댔을지도 모른다는 음모론까지 불쑥 생각날 정도였다. 그런 의심을 할 정도로 지금 드낙이 보여준 광역 마법은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나중의 일이다.’
그가 보고 있다는 것이 명확하게 나오자 불릿 발레아르는 후방의 뒤까지 밀려있는 우익을 앞으로 전진시켜야만 했다.
사장님이 옆에 있는데 일을 안 하는 직원이 있다? 퇴사가 일주일 남은 놈이다. 길게이는 불파겐의 동부에서 정년퇴임까지 봐야 할 상황인데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굽신거리며 사장이 볼 때 열 일을 해야 하고, 성과를 보여줘야 했다.
“앞으로 나가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아가라!!! 어서!”
전령 십여 명이 불릿 경의 외침에 전장을 내달렸다. 치면 물러서고, 때리면 밀려나던 인간들이 갑자기 흥분제를 먹은 것처럼 앞으로 오기 시작했다.
“건방진 인간 놈들이!”
“으윽!”
“계속! 밀어붙여어어어!!!”
인간이 오크의 손뼉을 받아주지 않아 짝 소리가 나지 않던 전투가 제대로 손뼉소리가 나며 피가 땅을 가득 적시며 진창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자욱하게 일어나던 흙먼지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수천의 생명체가 뿌리는 피로 먼지가 가라앉고, 진창이 된 대지에서는 더는 흙먼지가 올라오지 않게 되었다.
줄줄줄···
머리를 땅에 처박고 죽은 병사의 사타구니에서 오물이 줄줄 흐르는 광경 속에서 무릎에 꾸준히 메이스가 때려 박혀 쓰러진 오크의 머리통을 신명 나게 방패로 내리꽂는 방패병의 모습이 겹쳤다.
“앞으로!”
오크의 시체를 뒤로하고 인간들이 앞으로 나아갔다.
길게이 왕자의 군대가 우익을 다시 밀기 시작하고, 몽펠리에의 결사대가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형세는 포위나 다름없었다. 앞과 옆에서 두들겨 맞기 시작한 오크들은 빠르게 소모되어갔다.
인간의 시체보다 오크의 시체가 우익 싸움터에 많아졌을 때, 인간의 함성이 오크의 고함을 집어삼켰다.
와아아아아!!!
동시에 길게이 왕자의 군대와 몽펠리에의 6천 결사대가 서로 합류하는 결과로까지 이어졌다. 그곳에 드낙마저 합류하며 오크에게는 좌익인 곳의 뒤꽁무니를 후려치면서 인간 우익의 완벽한 승리를 가져왔다.
1만3천의 오크 중에 3천 마리가 이곳에서 몰살당했다.
인간 우익과 부딪친 오크 숫자가 적은 이유는 인간쪽 좌익이 빠르게 붕괴했고, 그곳으로 오크가 갈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생겼기에 인간의 우익보다는 좌익으로 빠진 오크가 원체 많았다. 동시에 뭉툭하게 튀어나온 인간의 중앙에 물린 오크도 많았다.
방향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오크들이었기에 인간이 가진 진형에 오크 숫자가 분배된 것이다.
중앙에 물린 오크가 4천이었고, 좌익으로 몰려간 오크가 6천이었다.
고작 4천 마리의 오크였지만, 덩치가 커서 인간 군대를 감당할만했다. 떡 벌어진 그 몸을 보는 인간은 마치 기병을 상대하듯이 움츠러들어야 했다.
“무조건 중앙을 지켜야 한다!”
파이룬 지휘부의 병신같은 짓거리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게실리안이 거부했음에도 그를 살리기 위해서 정규병이 전방으로 투입되었다. 이미 전방은 좌우익도 무너지고, 오크밖에 없었다.
뭉툭하게 튀어나온 전방 중앙군은 버려야 하는데도 피로 길을 뚫어 후방과 연결했다.
그 형세는 막대기와도 같았다.
“빌어먹을···”
게실리안 지휘관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후퇴를 결정했다. 길쭉한 형세는 오크들에게 좋은 먹잇감일 뿐이었다.
“컥!”
“아악!”
오크 전사가 방패병과 창병을 연달아 죽이며 난입해 큰 도끼를 양손으로 쥐고 크게 스윙했다. 근처에 있던 병사들 4명이 추가로 중상을 입으며 몸에서 피를 뿜었다. 그것만으로도 뚝하고 인간들이 나뉘었다.
길쭉한 형세가 지닌 전술적 패배는 흉악하게 인간의 생명을 갉아먹고 군대의 유지력을 바짝 마르게 하였다.
“후퇴하라! 후퇴!”
게실리안 지휘관은 그런 전술적 단점 때문에 스스로 고립을 선택했지만, 지휘부의 판단은 직계를 살리고, 가문 기사들의 생명을 1초라도 연장하는 결정을 해버렸다.
파이룬의 막대기 진형이 평범한 원형진으로 변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13분.
오크를 상대로 진형을 13분 만에 바꾼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고, 실로 정규병다운 솜씨였다. 하지만 그 속에서 죽은 파이룬의 정규병 숫자는 1만 명에 달했다. 인간이 오크를 상대로 전술적 오판을 한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는지 잘 보여줬다.
그것도 중앙에서 전술적 패배를 했으니, 끔찍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앞과 양옆이 전부 오크였다.
“왜 내 말을 듣지 않은 것인가!”
지휘부에 피칠갑을 한 채로 달려든 게실리안 지휘관이 피를 토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노기사들은 거침없었다.
“기사가 중요하고 직계가 중요해야 가문이 남는 법이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오. 그대의 명줄이 병사와 같다고 생각하시오?”
부들부들.
게실리안 지휘관의 주먹 쥔 손이 떨렸다.
“이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면 모두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오.”
“우익에 불파겐 자작이 들어왔고, 길게이의 건방진 군대가 이제야 제대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몽펠리에의 남은 군대가 합류해서 1만3천의 군세가 뭉쳤으니, 버티기만 하면 됩니다.”
오른팔이 없는 노기사가 호언장담했다.
불파겐 자작이 모두 해결해줄 것이다.
========== 작품 후기 ==========
6589자
평점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이 편에 덧글을 남겨주시면 추첨을 통해서 딱지 100개를 선물해드립니다. 덧글을 중복으로 남기시면 제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