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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드낙이 쓰러진 채 숨을 작게 내뱉었다. 흙이 조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작디, 작은 자연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드낙은 실로 오랜만에 본 것 같았다. 수많은 의문이 꼬리를 물고 물었지만, 그는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에 충실했다.
‘신성력은 충만하다.’
사제 여럿의 힘과 비견할 수 있어 보였다. 하루가 다르게 드낙의 내부에 있는 신성력은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마치, 신을 경배하는 챔피언이니 지닌 믿음이 커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마력은 전무.’
발달한 육체에 있던 마력은 동났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는데, 어찌나 자신의 힘을 과신했던지 〈고르곤 과열(Gorgon Overheat)〉을 몇 번이나 사용해버리며 이곳으로 비행해서 날아왔다.
급속마력회복의 능력으로 이틀 동안 비행을 한 것이다. 24시간 동안 계속해서 비행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에 있었다.
그 덕에 마력의 회복은 기대할 수 없었다. 고르곤의 심장에 피로가 너무 누적되어 심정지로 이어질 가능성마저 내재되어있음을 드낙은 인지했다.
까득.
엄지를 이빨로 물어뜯어 피를 냈다. 빈혈기가 안 그래도 있었는데, 작은 출혈마저 생기자 드낙의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허나 그는 결코 정신을 잃지 않았다. 더욱 독하게 땅에 드러누운 채로 〈트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의 역량을 현재 지닌 지 알려고 노력했다.
‘실망스럽네.’
작은 생채기조차 천천히 아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트롤의 피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고, 이 상태로 〈드래곤 오크 라이더〉를 굴복시켜야 한다는 사실에 겁이 났다.
드득.
〈주력 저장 척수〉 34개 중, 27번째의 척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드낙의 몸에서 흘러나와 귀로 들려왔다. 뼈가 울리는 소리와 비슷했지만, 효과는 달랐다.
‘주력(呪力)은 〈자연의 주력〉. 만변할 수 있는 〈범용성의 마력〉과는 다르다.’
사용할 수는 없었다. 다만, 패시브로 〈내부 저항력(Inside Resistance)〉을 지닐 수 있었기 때문에 양을 정확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자주 사용해보지도 않고, 그저 뿜어내기만 할 뿐이며 특히나 척추의 34곳에 따로 저장되어있었기에 일으켜봐야지만 정확한 용량을 가늠할 수 있었다.
‘절반가량 남아있네. 최악은 아닌가.’
그는 오우거의 적발을 손으로 당겨 길이도 확인했고, 풍성도도 점검했다. 싸우기 전에 필요한 일이었다.
‘처음엔 장발이었는데 이젠 단발밖에 안 되네.’
마치, 정말 오랜만에 적발의 길이를 손으로 잰 듯한 기분이었다. 수많은 전투가 있었음에도, 가장 중요한 적발의 길이는 자주 체크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 드낙은 거대한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의문을 느꼈다.
꿀꺽.
그것을 억지로 마음속으로 삼켰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주력으로 쓸 법한 힘을 확인한 뒤에 드낙은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드러누워서 육포를 하나 꺼내서 씹었다. 움푹 파여진 이곳은 숨기도 꽤 좋은 곳으로 보였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반드시 척후병이나 호기심에 미친놈이 오기는 오겠지. 하지만 그건 전투가 어느 정도 끝났을 때가 될 것이다.’
몸을 추스를 시간은 충분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고, 이내 드낙은 천천히 일어나서 투구가 널브러진 곳으로 향했다.
‘못 쓰겠네.’
함몰이 크게 되어있어서 쓰는 것조차도 불가능했다.
작은 크레이터를 올라가서 머리만 내밀었다.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흙먼지가 자욱하게 올라오는 곳을 볼 수 있었다.
서쪽의 사막 기병이 만들어내는 흙먼지 구름이었다.
‘왠지 꺼림칙하다.’
드낙은 그 구름이 조금 섬뜩하다고 느꼈다. 곧 일어나서 기어서 500보 남짓한 거리에 있는 언덕으로 향했다. 전신갑주를 입은 전사는 오크들이 환장하는 음식과도 같은 것이어서 기어가는 것이 좋았다.
언덕에 오르자마자 꼭대기를 넘어가기 전에 땅을 파서 몸을 숨기고 머리만 정상에 빼꼼 내밀었다. 해발이 50m도 안 되는 언덕이라 많은 것은 볼 수 없었지만, 평지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는 많이 볼 수 있었다.
‘쩝.’
그마저도 흙먼지 때문에 보기가 힘들었지만, 저 먼지가 일으켜지는 한 인간은 계속해서 오크와 싸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중요했다.
엎드려있다가 다시 빙글 몸을 돌린 드낙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흙으로 몸을 덮고, 마법으로 물을 일으켜서 진흙을 얼굴에 펴 바르고 적발도 숨겼다.
신성력을 사용했다.
파아앗.
아직도 빈혈이 심해서였다. 바로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적에게 들킬 수 있어서였다. 그러기 위한 위장이었고, 위장과 은폐에 대해서 귀신같은 재능을 지닌 것이 드낙이었다.
황금빛은 전혀 새어 나오지 않았다. 흙을 최대한 많이 몸을 덮어서였다. 신성력을 모조리 사용했음에도 〈트롤의 피〉를 많이 재생시키지 못했다.
‘그만큼 가치가 높은 것이겠지. 보통 피랑은 달라.’
트롤의 피가 지닌 단점이기도 했다. 너무 가치가 높은 것이다. 마치 큰 마법은 오직 큰 마법진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것과 같았다.
빈혈을 줄이고 나서야 드낙은 잠을 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지금 달려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오크에 대한 욕심도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 첫째였다.
북쪽의 인간들을 돕고 싶다는 선한 마음도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 첫째였다.
중립신의 전략을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는 충성심도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 첫째였다.
‘신이라면 이런 일도 예상했겠지.’
그게 아니라면 신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드낙의 두 눈은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신도 실수를 한다. 이게 중요하다.’
이미 중립신은 오크의 대침공에서 두 번의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는 드낙의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하였다.
“흐흐흐.”
짧게 웃은 드낙이 눈을 감았다.
곧, 검은 연기가 그를 뒤덮었고, 〈검은 회의〉가 바로 열렸다.
〈세파리아스 불파겐〉이 바로 화부터 냈다.
“어리석은 놈. 예비 통나무도 안 만들고 가다니.”
〈흰여우 새린〉 또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점으로도 나왔잖아요. 지나친 모험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요.”
그 말에 세파리아스가 검지로 그녀를 가리키며 으르렁거렸다.
“빠져라. 삼류 연금술사.”
그 말에 흰여우 새린이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 세파리아스의 기세는 대단했다. 오늘 아주 제대로 날 잡은 듯했다.
“과정이 잘못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전쟁터에 내가 올 수 있었잖아. 바로 덤비지도 않았고 몸이 회복하면 바로 개입할 수 있어.”
드낙의 말에 세파리아스가 순간 움찔했다.
“군대 하나도 없이 어떻게 개입할 거냐.”
“개입하는 게 힘들면 안 하면 돼.”
“뭣? 그럼 도네투스는 잡지 못하고 북부는 멸망의 기로에 서게 될 뿐이다. 서쪽도 더는 유지할 수 없다. 몽펠리에나 파이룬이 있기에 그들이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다.”
세파리아스가 드낙의 말에 경악했다.
북부를 버리는 선택지를 서슴없이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드낙은 이미 그런 생각을 마음속에 단단히 잡은 것처럼 굴었다. 실재로도 그러했는데,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너무 북부만 생각해줘서 너까지 머리가 돌아버린 거냐? 북부도 결국에는 말이다. 중립신의 말.”
드낙의 말에는 독이 발린 단검처럼 섬뜩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세파리아스가 아니었다.
“뭔 개소리를 하고 자빠졌느냐! 북부의 메디 오인들이야말로 우리가 품어야 할 인간들이다! 그들이 아니고서는 너를 받쳐줄 자들이 없다! 남부에 기댈 생각을 하게 되었나? 박쥐처럼! 그들을 믿을 수 있다고?”
“왜 안 되겠어? 나에게는 힘이 있는데.”
드낙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세파리아스에게 말을 이어나갔다.
“애초에 반란을 일으키고, 번목을 하게 함으로써 검은 꿈을 더 키우는 것이 목적 중에 하나였잖아? 죽이고 죽이다 보면 하나로 결집할 수밖에 없는 법이지.”
주제도 모르고 고개를 세우는 놈들만 눌러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드낙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정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딴짓만 해대었다. 결국 게제라스의 내정 체계가 시작됐고, 자유 기사는 많이 중용되지 못했다.
드낙이 내정에 신경을 쓰지 않음으로써 그 책임이 게제라스 총관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만들어서였다. 총관의 입장으로서 결국 이실레아와의 공조를 통해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반란이 일어나거나 갈등이 일어나면 책임론에서 피할 수 없어서였다. 드낙이 전면에 서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왕건 메타라고해도 드낙이 스스로 한쪽으로 물러갔으니, 제대로 될 리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방관한 것도 너고.”
“흥.”
세파리아스는 코웃음을 한 번 칠 뿐이었다. 이제야 그도 깨달은 것이다. 지금 앞에 마주한 놈은 검은 문이 주는 쾌락에 골수마저 젖은 놈이 아니라는 것을.
드낙은 세파리아스를 쥐어패면서 이번 일을 무마시켰다.
“그래서 북부를 버린다고?”
“누가 버린대? 버릴 만 하면 버린다는 거지. 가능성이 있을까?”
그는 이번 전투에 회의적이었다. 자신은 감이 꽤 좋았고, 흙구름 속에서의 기병싸움이 인간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파이룬은 못해도 내일 도착할 것이다. 잘한다면 오늘 밤에 모습을 드러낼 터다.”
쌍둥이 성채의 동남쪽은 숲이 있었다. 도네투스도 파이룬 군대의 등장을 늦게 차릴 것이 뻔했다.
“내일부터 회전에 마력이라도 쏟아부어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드낙은 그 말에 냉소적으로 입술을 핥았다. 실로 간사해 보였다.
“인간들이 내일까지 평야에 남아있기는 있을까? 그럴 리가.”
허나, 세파리아스는 단언했다.
“판이 차려질 때, 먹어라. 네 두 눈으로 확인해라.”
드낙은 손을 주억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손사래를 쳤다. 다른 수련도 하지 않고, 드러누워서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깊게 잠겼다.
‘죽음보다 가치 있는 일이라.’
그에게 있어서는 가장 병신같은 말이었다.
‘내 꿈은 변하지 않아. 챔피언으로 남아 영생을 살고, 지구로 가서 호화를 누리거나 이곳을 지구만큼 발전시킨다.’
*
도네투스의 명령으로 내성벽 전투는 시작한지 30분도 안 되어서 끝이났다. 대신 나머지 오크들은 2개의 부락만 남고, 모두 평야로 향했다. 후방을 깔끔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서였다.
하늘에 있는 도네투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흙구름은 가장 큰 변수로 여겨져서였다. 또한 사막 기병들이 가져온 보급품에도 눈이 갔다. 쌍두낙타 1마리당 들고온 보급품만 200~400kg에 달했다.
우선순위가 바뀔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자정을 넘은 야심한 밤에도 사막 기병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하지만 그 수는 확실하게 줄어들어 갔다. 더 이상 독특한 낙타의 울음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고, 인간의 고함소리, 오크의 외침만 들려올 뿐이었다.
“헉. 헉.”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숨소리를 거칠게 내뱉으며 낙타를 잃은 기수가 버클러를 앞으로 쭉 뻗은 채로 눈을 꿈뻑 거렸다. 피곤에 절어있는 모습이 여실 없이 나왔다. 고개는 계속해서 아래로 기울어졌다.
그 앞에 있는 오크도 많이 지쳐있었다. 오히려 인간보다 더 지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서로 대치하기만 할 뿐, 서로 휴식하기 바빴다.
종족이 지닌 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는데, 바로 낙타 때문이었다.
오크들의 짐승들이 먼저 탈락했고, 그다음에 낙타가 지쳐 나자빠졌기에 인간들은 땅에 오크들보다 늦게 발을 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낙마한 기수들은 뭉치지 않았다.
오크가 쫓으면 도망가기 바빴다. 그것은 명예로운 싸움이 아니었다. 그저 사냥감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아크온 몽펠리에〉가 그들에게 원했던 싸움이기도 했다.
죽인다는 행위가 얼마나 힘들고 고된 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아아!”
오크 전사가 다시 한 번 달려들었다. 기수가 냉큼 옆으로 굴렀다. 하지만 제대로 된 컨디션이 아니었고, 지나치게 피로한 뇌는 실수를 낳았다. 버클러의 위치가 잘못 땅에 부딪혔고, 그대로 손목이 역으로 꺾였다.
“끄르으읍.”
전신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그 사이에 오크의 긴 발이 머리를 후려쳤다. 지쳐도 오크는 오크였다. 인간과는 달랐다.
뒷머리가 땅에 고스란히 부딪혔고, 대(大)자로 뻗은 기수를 본 오크 전사가 겨우 양손을 무릎에 놓고 고개를 푹 숙이며 숨을 골랐다.
툭.
작은 돌 하나가 그런 오크를 두들겼다. 성난 눈을 한 오크의 머리가 다시 올라갔다. 쓰러진 기수가 앉은 채 오크에게 돌을 던진 것이다.
“새끼가 사냥감 해체도 안 하고 사냥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냥꾼이 어딨냐?”
인간의 언어로 지껄였지만 비웃는 억양은 그대로 오크의 귀에 들렸다. 오크가 왼 주먹으로 땅을 짚으면서 짐승처럼 기수를 덮쳤다.
“그아아아!”
지치고 지친 오크의 침은 지나칠 정도로 걸쭉했다. 하지만 분노가 더 대단했다.
가죽이 산채로 뜯기기 시작했다. 기수는 끝까지 반항하며 오크 얼굴에 피와 침이 뒤섞인 침을 뱉기도 했다.
“그흐, 헉헉!”
기수의 내장을 쥐어뜯고 나서야 오크가 멈추었다. 더는 힘이 남아있지 않아서였다. 숨을 감당하지 못해서 그대로 뒤로 넘어가서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오크 전사는 자신이 크게 무리했음을 깨달았다. 호흡은 빠르게 가라앉았지만, 몸에 탈력감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수많은 곳에서 오크들에게 인간들은 죽어갔다.
새벽의 동이 틀 때까지도 죽고, 또 죽었다.
평야에 인간의 목소리가 사라질 때, 태양이 떠올랐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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