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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야수 기사〉가 이끄는 토치라이트 가문의 군대는 토치라이트 영지의 서쪽에서부터 바짝 위로 올라가며 파이룬 영지가 아닌, 팬크리스 영지의 동쪽을 관통하여 그대로 서북쪽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 판단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연히 인간 최고의 미끼, 드낙 불파겐의 존재 때문이었다.
‘광견병 걸린 개처럼 날뛰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순찰자들에게서 드낙이 토치라이트 령에서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아서였다. 눈이 벌겋게 해서 고기를 뜯는 야수처럼 오크 부락을 혼자서 박살을 냈다.
그 덕에 미친놈처럼 오크의 손에 떨어진 곳을 보급로로 설정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만 이유가 아니었고, 복합적인 이유가 있어서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훅!
차자작!
나무에서 검은 것이 떨어지자 병사의 창대가 바로 옮겨졌다. 그 창끝과 간격을 두고 다른 창들이 서로 교차하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겨누어졌다. 병사들의 위치가 달라서였다.
겨누어진 창은 세 자루였고, 거리에 따라서 한 걸음 내지는 반걸음 차이가 났다. 상단을 겨눈 창끝이 가장 멀리 있었고, 나머지 거리순으로 중단과 하단을 맡았다.
〈트리플 포메이션〉이라고 불리는 행군 도중에 할 수 있는 진형이었다.
적에게 습격을 당해 가장 가까운 병사가 상단을 맡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다른 두 명이 보호를 해주었기에 과감하게 할 수 있는 한 수였고, 기습의 묘리를 살린 상대의 허를 찌르기에 좋았다.
반면 하단을 겨누는 병사가 가장 거리가 먼 곳에 있는 이유는 체격이 낮은 작은 야수나 몬스터를 겨냥해서였다. 비교적 약하기 때문에 가장 막아낼 순위에서 내려간 것이다.
트리플 포메이션은 다양한 직업군을 통해서도 할 수 있는 매우 능동적인 진형이었다. 특히나, 이동 중에 할 수 있는 진형 중에서 가장 대처 속도가 빨랐다.
거리에 상관없이 일단 3명만 뭉쳐서 만들어낼 수 있었고, 무기의 길이도 큰 상관이 없었다. 가장 긴 무기가 상단을 겨누면 되었다. 이 덕에 민병대를 일시적으로 지휘하는 기사가 민병대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가르치는 것이 〈트리플 포메이션〉이었다.
물론 장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진형이 허술할 수밖에 없었고, 특별한 기술이나 이론을 요구하지 않기에 상황에 따라서 잘못 대처하기도 쉬웠다.
농사를 짓는 이에게 전문 진형을 가르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었기에 그 단점은 민병대의 수준을 높일 때는 오히려 장점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순찰자다!”
전투 로브는 헤어지고, 머리를 짧게 자른 순찰자가 로브를 벗었다. 머리를 가리는 로브를 벗으면서 보이는 손가락은 뭔가에 찍힌 것처럼 짓이겨진 흉터가 남아있어서 흉측했다.
“이런 미친놈들. 토치라이트 영지군이 왜 팬크리스 영지에 있어? 여긴 진작에 오크들에게 넘어간 곳이다! 당장 보급품을 태우고 너희 영지로 돌아가라!”
중년의 순찰자가 침을 튀기며 소리를 질렀다. 병사들은 그 외침에도 무덤덤했는데, 순찰자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서였다. 기껏해야 순찰자를 하대할 수 있는 건 귀족이나 병사들의 장(長)쯤은 되어야 했다.
“그라돈 님께 데려가라!”
뒤에서 베테랑 병사가 소리를 치자 병사 몇몇이 턱짓을 하며 방향을 가리켰고, 몇몇은 앞장서서 걸었다. 행군은 계속되었고, 그것에서 벗어나 길의 바깥쪽에서 걸어가야 했다.
그라돈은 전투마에서 내려서 걸어가며 순찰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시 명불허전이다. 아직도 활동하는 순찰자가 있다니.”
“야수 기사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에서 물러나야 할 때입니다.”
“그런 걸 들으려고 자네와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이곳 주변의 사정을 묻고 싶어서지.”
“목적지가 어디십니까?”
“서쪽의 에리트레아 영지는 못 가도 스틸리코의 경계선을 지나 다시 남하할 생각이다. 가진 보급을 피난 중인 다른 영지군에게 주기 위해서지.”
은근히 자신들이 할 그림을 살짝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순찰자는 시큰둥했는데, 부질없다고 여겨서였다. 북부는 성을 많이 버려두고 피난길에 올라갔기 때문에 믿음이 많이 사라져 있는 상태였다.
“〈겹치는 숲〉은 반드시 거치시길 바랍니다. 그곳에 패잔병들이 모이고 있는데, 팬크리스의 기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
흥미가 생겼다. 그들에게 양질의 보급품을 쥐여준다면, 오크 약탈자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것이고, 그 기회가 쌓인다면 〈오크 보급소〉 공략 또한 가능할지도 몰랐다.
‘무조건 이득이지.’
민병대는 있으면 일단 좋았다. 자발적으로 일어섰기에 제법 오크와 부딪쳐 버틸 수 있었다. 오래 부딪혀있을 수는 없었지만, 실전도 많이 겪지 않고 그 정도면 대단한 수준이었다.
“근처에 오크 보급소가 있으므로 소수의 병사만 보내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라돈 토치라이트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순찰자들을 위해서 보급품을 땅에 매몰시켰다. 필요하다면, 땅을 파서 확인할 수 있을 터였고, 보급품 냄새는 진한 흙내음에 사라져서 웬만하면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 흔적을 지우는데 순찰자의 기술이 들어갔기 때문에 걱정 하나 없이 편안했다.
순찰자들은 곳곳에서 그들을 마중 나왔다. 당연히 걱정이 앞서서였고, 이들은 그라돈 토치라이트의 명성 때문에 크게 소란을 피우지는 못했다.
이들이 알려주는 길들은 하나같이 안전했을뿐더러, 근처에서 활동하는 오크 약탈자에 대한 정보도 알려주었다. 그 덕에 먼저 기습을 하여 전공을 올리기도 했다. 토치라이트 영지군의 진짜 군대는 그렇게 순찰자들 덕분에 은폐될 수 있었다.
〈겹치는 숲〉에서의 패잔병을 만나기 위해 소수의 경기병과 그라돈이 직접 그 숲으로 향했다.
우엉! 부우엉!
부엉이 소리가 들려오자 병사들은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벌레 소리도 제법 나는 것을 보니, 안전하다고 여겼다.
휘리릭!
“억!”
단번에 눈이 없는 함정에 걸렸다. 밧줄이 왼발을 단번에 조여오며 그대로 딸려 올라갔다. 투구가 아래로 툭하고 떨어졌다. 그라돈이 그 모습에 눈을 찌푸렸다. 아무리 귀찮고, 만드는 시간이 오래 걸려도 투구의 고정쇠는 항상 있었다.
그걸 안 해서 투구가 벗겨지다니, 자기 목숨을 쉬이여긴다고 생각했다.
“고정쇠는 왜 안 했나.”
“죄, 죄송합니다. 말에서 내릴 때···”
병사가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라돈의 무시무시한 눈부리에 절로 오금이 저려왔다.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는다면, 단단히 각오해라. 징계는 내리지 않겠지만, 그에 따른 수고는 할 각오를 가지고 있어라.”
“예!”
쉭!
바람 소리가 나며 밧줄이 끊어지며 병사가 쿵 하고 떨어졌다.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았는데, 없는 살림을 통해서 만든 밧줄 함정임을 알 수 있었다.
“순찰자인가?”
“예. 어디의 기사입니까?”
“내 이름은 그라돈 토치라이트다.”
“야수 기사 아니십니까. 동쪽에도 오크가 대거 내려왔다던데, 대승을 거두셨는지요?”
“전혀. 보급 때문에 오크들은 물러났고, 서북의 땅을 차지했다. 우리는 서남을 통해서 이곳으로 왔고.”
제법 자세히 말해주었다. 그만큼 숲의 어둠은 지나칠 정도로 어두웠다. 횃불로는 상대가 어딨는지 알 수 없었고, 겹치는 숲은 양쪽 산에서 부는 바람 때문에 바람 소리가 너무 거세었다.
“안내하겠습니다.”
순찰자를 따라서 움직였다.
사박.
바짝 바른 수풀을 지나야 했는데, 그라돈의 체중 때문에 수풀 하나가 옆으로 픽하고 쓰러졌다. 가을이라 잎이 떨어지는 건 상관없었지만 이건 좀 아니었다.
‘뿌리를 뽑아냈구나. 죽은 수풀이네. 이걸 길에 놓아서 길을 숨겼군.’
발에서 느껴지는 험함은 적었다. 땅을 다져놓은 것이다.
“여기에 마차도 다니나?”
“말이 귀해서 마차는 아니고, 제법 큰 짐수레가 오가는 곳입니다.”
“그것도 일이군.”
“오크들에게서 숨으려면 이 정도 수고는 해야 합니다. 가을이라 다행이지, 여름이었다면 수풀을 죽일 수 없기에 뿌리까지 뽑고 심고를 반복해야 했을 겁니다.”
수풀을 뜯어내서 길에다가 뿌리는 식이었다. 그 덕에 너저분한 자연의 색감을 살리면서 시각적으로 은폐할 수 있었다.
〈죽은 수풀의 길〉을 지나서 도착한 곳은 입구가 큰 자연동굴이었다. 앞으로는 절벽이 떡하니 있어서 찾기도 어려울 곳이었다. 주변 입구에는 약초의 군생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흙이 곱다.’
돌이 적은 것을 보고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약초꾼들의 쉼터로 보였다.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많은 이들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이 남자들. 그것도 나이가 제법 되는 자들이 많다.’
머리가 반백이거나 대머리 혹은 새하얀 자들이 전부였다. 복장도 형편없었다. 죽을 것을 알고 일부러 돈이 되는 옷은 안 입고, 누더기를 입은 듯했다.
나이가 들어도 눈빛만은 살아있었다.
그 뒤로는 상처를 다스리고 있는 정규병들을 볼 수 있었다. 주변을 잘 정돈하고 있어서 최소 군적에 몸을 담군 이들일 것이다. 굳이 상세하게 묻지는 않았다.
동굴의 끝에서 그라돈은 깡마른 노기사와 마주하게 되었다.
“바이안 엔제브렛이오.”
“그라돈 토치라이트라고 하오.”
“야수 기사가 다른 영지까지 오는 걸 보니, 큰 계획을 진행 중인 듯하군.”
“그렇게 대단한 계획은 아니오. 팬크리스의 노기사께서는 어쩌다 이곳에서 홀로 버티고 있소?”
“스스로 남겠다고 했지. 버려지는 이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아서 말이오. 하지만 죽으려고 날뛰니 오히려 이렇게 살아버렸소.”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라돈은 자신들이 지닌 전략에 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그럴듯한 전략이었지만, 노기사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많은 이들이 죽을 것이오. 블랙 스케일 와이번은 드래곤 중에서도 강력한 종(種). 거기에 오크는 싸울 줄 아는 전사인데, 각개격파라니? 기동성, 정보전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소.”
자신 또한 평지가 아닌, 숲이나 산으로 숨어들어 가서 때를 기다리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늘을 지배한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메시지 마법〉이나 마법으로 담아낸 목소리를 곳곳에 퍼뜨리는 〈마법 신호탄〉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었다.
“지는 싸움이라고 볼 수 있지만, 드낙 불파겐의 무위를 생각하시오. 남부 왕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 않소.”
“음···”
노기사는 말을 아꼈다. 이미 그렇게 대규모로 움직였다면, 기호지세(騎虎之勢). 하던 일을 멈출 수 없었다.
“···다만, 내 한 가지 조언해도 되겠소?”
“기꺼이 받아들이겠소.”
“전쟁에 없는 일은 없소. 그것을 명심하시오.”
그라돈은 고개를 어렵게나마 끄덕였다. 절로 심기가 불편해졌고, 부정할 수 없는 찐득찐득하고 질척거리는 현실이라는 놈이 머릿속으로 들어오고 마음에 들어차 올랐다.
씨익.
그 모습에 바이안 엔제브렛은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시작했다면, 우직하게 나아가야 하는 법이 아니겠소? 이 근처에 오크 보급소가 하나 있소. 그곳은 큰 길이 여럿 경유하는 곳이라 파괴하고, 도로를 없애버린다면 오크들이 매우 괴로워질 수 있소.”
교차로를 지나는 데 5분이 걸린다면, 그것은 능히 고속도로에서 몇 km를 달리는 것과 같은 시간이었다.
“칠 생각을 계획하고 있었소? 봐도 400명도 안 되어 보이던데···”
“다른 곳에 흩어져 있소. 뭉쳐봤자 좋아질게 없어서 말이오.”
그라돈은 거부하지 않았다. 300마리 이상의 오크들을 잡아낸다면 한 오크 부락의 전력 10%를 깎아 먹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인간의 보급로를 이용하고 있는 것을 파괴한다면 큰 수확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영향력은 오크 주력 군대에게 영향을 끼칠 터였다.
“오크를 죽이는 일에 메디오인이 거부를 할 것 같소? 당연히 함께 싸우겠소.”
그 말에 노기사가 단번에 묶어두었던 양피지를 펼쳤다. 어지러운 표식이 많았고, 선과 점도 있었기에 무지한 자가 본다면 눈이 팽팽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라돈은 아니었다.
“〈통구이 전략〉이오. 평지에서 오크를 상대하기 위해서 만들었소.”
“정규병의 위치가 독특한데,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있겠소?”
그라돈은 정규병의 약식표시를 검지로 가리켰다. 보통의 회전이라면 우회 타격으로 정규병을 쓴다. 버티는 것은 죽어도 버티지만, 오크를 죽이는 일은 실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원형진으로 민병대의 뒤에 있었다.
“부상자가 많아서 접근전이 힘들어서 그렇소. 불화살을 쏘고, 보급소를 다 털어버리고 후퇴하는 작전이었지. 그것을 수습할 사이에 살아남은 자들은 도로를 파괴하고, 무너뜨리고···”
없는 살림으로 할 건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지도였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다.
“놈들은 포위되어서 무기 하나 못 휘두르고 죽는다는 것이 뭔지 깨닫게 될 것이오.”
그라돈이 근엄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평지에서의 대규모 전투는 인간의 장기중에 장기였고, 서로 머리통을 후려갈기면서 갈고 닦은 전투술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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