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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 기사〉.
〈그라돈 토치라이트〉.
토치라이트 가문에서 가장 전공이 많은 자였다. 현 성주 울베인과는 4촌 지간이었기에 배경도 탄탄했다.
“불파겐 자작이 토치라이트 영지에 혼자서라도 개입한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감정이라던가, 외교의 일관성, 앙금··· 그런 건 전혀 상관없습니다.
“놀라운 일이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토치라이트 영지 다음에는 바로 불파겐 영지로 향하는 길이 뚫립니다. 반드시 막아야 하는 곳은 몽펠리에나 파이룬도 아니고, 토치라이트입니다.”
방파제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매우 컸다. 뭐라도 하나 거치는 것만으로도 자국의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몇 번이나 자신의 의견을 달리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태도를 바꾼 것도 그렇게 생각하면 될 일입니다.”
게제라스 총관과 이실레아 경의 말이면 껌뻑 죽었다.
“특히나 군권을 브릴리언트에게 준 것만 봐도 사람을 잘 쓰고, 크게 일을 맡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낙 불파겐의 돌발적인 행동은 능히 납득이 가능했다.
“그의 다음 행보는 북부 중앙입니다. 허리를 자르는 격이지요.”
지휘봉이 북부의 중앙을 짚었다. 중앙을 벗어나서야 몽펠리에나 파이룬의 영지가 보였다.
“다른 곳도 제법 잘 막고 있지 않겠습니까?”
귀족들이 사태를 낙관했다. 방계의 사람이었고, 군사학보다는 상업과 관련된 일을 하는 자였다.
“가봐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라돈은 거기에 대해서는 확답을 주지 않았다. 너무 많은 추측은 반감을 일으킬 수 있었고, 항상 조심해야 했다. 증거가 없는 말로 씨부렁거리는 놈들은 죄다 사기꾼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신뢰성을 얻을 수 있는 의견은 말할 수 있는 건 말해주고, 아니면 아예 말을 끊듯이 하지 말아야 했다.
“저희 영지에 온 불파겐 자작은 홀로 백설산맥에 들어가서 보급대를 처리한 것은 물론이고, 부락 하나를 박살을 내며 〈오크 대전사〉의 수급을 챙겼습니다. 그것은 〈순찰조장〉이며 60명의 순찰자들을 이끄는 조가 말했으니, 확실한 것일 겁니다.”
순찰자는 소속이 딱히 없다. 있다면 사람. 인류라고 할 수 있었다.
누구도 섬기지 않기에 그 말은 믿을 수 있었고, 말이 곧 증거였다.
“그렇게 움직여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단기적으로 전략적 이득을 최대한 많이 취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불파겐 자작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휘봉은 토치라이트 영지의 서쪽을 지나 백설산맥을 흔들며, 다시 내려갔다. 손에서 지휘봉을 잠시 놓고 그라돈이 손가락을 펴며 주위의 귀족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 어조는 차가웠고, 단단했다.
“하나는 오크들의 습성을 잘 파악하고 그 허를 찔렀다는 점입니다. 놈들은 하나가 되어서 내려왔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동쪽에 있는 부락은 토치라이트로, 중앙에서 밀고 들어오는 놈들은 둘로 나누어져서 팬크리스 영지와 브레이브 영지를 침략했습니다. 서쪽은 알 길이 없지만, 제 예상대로라면 에리트레아 영지를 침략했을 겁니다.”
귀족들이 그제야 웅성거렸다.
“오크들이 4갈래로 향했다는 건, 그만큼 놈들의 머리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건 아니지요. 블랙 스케일 와이번 라이더에 대한 목격담도 많고, 통일되기는 된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 웅성거림을 그라돈이 원탁을 쳐서 조용히 시켰다.
“오크들의 규합력이 이처럼 낮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제대로 통제를 할 수 있다면, 중앙을 찌르고, 적당히 만족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에 방계 귀족이 물었다.
“허나, 10만을 보급할 길이 부족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때문에 여러 갈래로 간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오크들은 멍청이가 아닙니다. 처음 있는 일에 전력을 분산한다? 어려운 일이지요. 그리고 애초에 그런 생각을 했다면, 침공 시기를 늦추고, 점진적으로 교두보를 마련하고 대침공을 시작했을 겁니다.”
“또한 그들은 부락 단위로 뭉치는 습성을 여전히 보여주었습니다. 서쪽에서 활동하던 오크들이 물러가서 횃불 성채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전서구로 쓰는 비둘기를 통해서 알아낸 정보였다. 보통은 15마리를 쏘아 보내는데 고작 3마리밖에 횃불 성채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래도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 아직도 그 습성이 유지되고 있었고, 군이라고 할 수 있는 부대를 이루는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였을 때, 오크들이 이렇게 일찍 토치라이트 영지에서 물러간 이유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오크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보급이 얼마나 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거리, 길의 상태, 시간과 보급대의 피해까지 복합적인 것들을 칼처럼 짜놔야 하는데, 이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한다고 해도 전례가 없기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오크들이 물러간 것입니다.”
탁!
지휘봉이 횃불 성채를 짚었다.
“이 모든 것을 계획한 불파겐 자작은 보급대를 노렸고, 어떤 기회를 잡아 대전사 또한 죽였습니다. 보급책에 문제가 생겼으니, 전투를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토치라이트 영지는 전쟁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되었습니다.”
불파겐 자작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언제 어떻게 얼마나 보급이 어찌 될지 감히 예측도 못 했기 때문이다. 오크에게 이번 일은 많은 것이 처음이었다.
“실로··· 대단한 전략입니다.”
원탁에 앉은 귀족들이 혀를 내둘렀다.
오크의 보급에 혼란 혹은 피해를 줘서 오크를 물러나게 한 것이다. 대승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승리였고, 단 한 명이 만들어낸 역풍이었다.
“이 전략을 만든 이를 반드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딱 봐도 이실레아 브릴리언트요. 그녀는 병사 하나 다룬 적이 없는데도 트롤 토벌에 매우 숙련된 민병대를 쓴 전적이 있습니다.”
“그런 대단한 자에 대한 보고서가 왜 하나도 없었습니까?”
“트롤 토벌에 실패를 해서입니다.”
“저런···”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인데도, 한 번의 실패로 그 사람을 재단하다니. 실로 기분이 나빠진 귀족들이 많았다. 물론 그들 또한 잘 난 것은 아니었다. 훈수는 거지도 둘 수 있었다.
“전략도 좋았지만, 그걸 수행한 불파겐 자작도 엄청납니다.”
“날아다니는 오우거나 다름없습니다. 트롤을 잡기보다 기술을 겸비한 오크 전사를 잡는 게 더 위험하지 않습니까. 보통 인간이 지닌 상성을 완전히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모두가 불파겐 자작의 무력에 혀를 내둘렀고, 감탄하기 바빴다. 가히, 무력만은 예전의 불파겐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더 했다.
적어도 세파리아스 불파겐은 〈다수〉에게 밀려서 죽임을 당해서였다.
“그럼, 불파겐 자작이 몽펠리에로 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북부 영지는 버틴 영지도 있고, 물러난 영지도 있을 겁니다. 부락 단위로 침공하고, 성에서는 모여서 치고 그랬을 겁니다. 예를들면···”
깃발 하나를 브레이브 영지에 놓고, 지휘봉은 팬크리스 영지에 놓았다.
“브레이브 영지에서는 수성전을 택했습니다. 버티기죠. 하지만 팬크리스가 피난길에 오릅니다. 그럼 브레이브 영지는 다른 오크들이 이곳으로 모이는 것을 두려워하여 같이 피난할 것입니다.”
지휘봉이 주욱 아래로 내려왔다. 몇몇 방계 귀족들이 다른 영지에도 깃발을 추가했고, 가는 길은 다 달라도 남쪽으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음.”
자신들의 영지를 막는 데 급급했기에 그제야 북부의 전체적인 상황이 예상됐다.
“이거··· 위험한 것 아닙니까?”
“위험합니다. 군대는 많지만 사방팔방에 흩어져있고, 모두 머리가 다릅니다. 대부분 영주고 기사이기에 판단도 다르게 할 것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오크들의 규합력이 좋아 보일 지경입니다.”
“허면, 불파겐 자작은 이들을 하나로 만들려고 하는가?”
“그랬다면 저희들에게 보급을 위한 병사를 요청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파이룬이 있지 않습니까. 전투 요새가 부서졌기에 더 남쪽으로 내려간 파이룬을 통해서 몽펠리에의 북쪽 국경선에 있는 〈쌍둥이 성채〉에 보급하면 그만입니다.”
울베인 성주가 잠시 팔을 올렸다. 그라돈이 입을 다물었고, 잠시 머리를 식히는 시간이 찾아왔다. 몇몇 이들은 그라돈과 이야기를 하며 이해를 하려고 애를 썼다. 그만큼 고차원적인 전략과 전술이 가미되어있었다.
몇몇은 대전을 나가서 자신을 따르는 가신 중에 군사 전문가를 불렀다.
“다시 시작하라.”
“예. 아무튼, 결론을 말하자면 드낙 불파겐 자작이 원하는 것은 전선의 확대입니다. 이 전선의 확대를 통해서 불파겐 자작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3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번 전쟁에서 전쟁 수행은 물론이고, 보급까지 닿는 강력한 전공을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파겐이 판을 짜고, 불파겐이 시작과 끝을 열고 마무리한다면 전공 1위는 금방이었다. 막대한 은혜를 북부에게 입히는 것이며, 북부는 이를 공적으로 삼아서 보상해야 했다.
“둘은 오크의 주력을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 판단이 안 되어서입니다. 오크들 또한 이번 대규모 전쟁은 처음이고, 저희들 또한 처음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한 방 싸움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력이 높은 것이 오크라서였다. 버티기를 위해서 몽펠리에로 향하는 것일 뿐이었다.
“셋은 남부의 공적을 낮추기 위함입니다. 군사를 보내든 보급을 보내든 할 것인데, 주력이 있는 곳으로 향할 것입니다. 아까 말했듯이 〈전선 확대〉가 된다면 전공이 높은 것은 주 격전지가 아니라 부 격전지가 될 것입니다.”
백금 왕가의 공적이 낮아지면 그들은 많은 힘을 투자한 것에 비해서 가져갈 것이 적어진다. 전공은 서로 비교하여서 책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잠깐, 잠깐. 그럼 우리 토치라이트 가문에게 불파겐 자작이 원하는 것은 뭔가? 아까 쉬어서 그것을 그냥 넘긴 듯한데.”
토치라이트 영주의 말에 그라돈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물을 한 잔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뿔뿔히 흩어진 각지의 군대에게 원활한 보급을 하는 게 불파겐 자작이 저희에게 원하는 일입니다.”
“아하.”
그제야 곳곳에서 이해했다는 소리를 내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이 나왔다.
“피난하는 자들을 통해서 오크들과 최대한 많은 장소에서 싸우거나 보급을 노린다면 오크들은 절로 퍼져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오크들을 분열시킬 것입니다.”
“평지에서 싸운다면 사람들의 피해가 더 크지 않겠나?”
“이길 상황에만 싸우지 않겠습니까? 그게 안 된다면 서로 힘을 합치겠지요. 오크들은 부락으로 움직이니, 한 부락씩 노리면 됩니다.”
성주 울베인이 몸을 일으켰다.
앞뒤를 가늠해볼 시간 따위 없었다. 이미 불파겐 자작은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고, 토치라이트 영지를 해방했다.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다! 불파겐 자작은 사사로운 감정은 잊고 우리를 도와주었다. 왜냐하면 대의를 위해서다! 우리 또한 대의를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 영지의 재점령은 뒤로 미루고, 북부에서 역공의 발판을 마련하겠다!!!”
귀족들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크게 소리를 지르는 자는 없었다.
이곳에 있는 귀족들이 모두 할 일을 배정받아서 하나씩 대전을 빠져나갔다.
이렇게, 토치라이트 가문은 드낙이 생각하지 못한 큰 전략을 시작하게 되었다. 철석같이 드낙이 그렇게 유도했다고 믿었고, 불파겐 영지에서 내어주는 보급의 7할이 그렇게 사용될 터였다.
왜냐하면 불파겐의 주력 군대는 이미 파이룬 영지에 있어서였다. 그들의 생각이 서로 다르다는 걸 보여줄 사람이 하나 없었다. 그래서 게제라스 총관이 토치라이트 가문에 보급을 운반하기 위한 병사를 요청한 것이기도 했다.
*
레이시아 플래티넘은 눈을 감은 채 고용인의 도움을 받아서 햇볕에 나와 의자에 앉았다. 쪼르륵 소리와 함께 찻잔에 차가 채워졌다.
조용한 한 때를 보내는 그녀는 실로 평온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말 그대로 감금이나 다름없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째짹! 째애!”
“이게 무슨 소리죠?”
끔찍하고 구역질이나며 정신을 미치게 만드는 정원의 침묵 속에서 새소리가 들려오자 레이시아가 관심을 가졌다.
곁에서 철통같이 그녀를 감시하는 〈기사〉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새가 있습니다.”
반면 옆에서 시중을 들던 고용인은 더 상세히 대답했다.
“수풀 밑에 떨어진 새입니다. 날개를 다친 것 같습니다.”
“새를 치료해주세요.”
“예? 하지만··· 신성력은 귀중한 자원입니다.”
“물약을 써서요.”
그 모습에 고용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옷이 찢어져도 꿰매서 입는 것이 레이시아 공주였다. 사치라는 것과 거리가 멀었고, 생각도 깊은 것이 그녀였다. 조금 대화가 길어지자 기사가 끼어들었다.
“공주 전하의 말씀이시다. 뭘 그렇게 자꾸 캐묻는 것이냐. 빨리 치료해주어라.”
기사가 혁대에서 물약 하나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고용인은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아서 다친 새에게 물약을 뿌렸다.
푸드득!
거친 날갯짓 소리가 났고, 이내 다시 정원이 조용해졌다.
레이시아는 그 짧은 사건에서 단물과도 같은 따스함을 느꼈다. 적어도 저 새는 날개가 부러져도 다시 날아갔다.
‘나는 부러진 새나 다름없어.’
그 날개는 결코 날갯짓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일어나셔야 합니다.”
기사는 시간도 철저했다. 결코 레이시아에게 능동성을 부여하지 않는 길게이의 흉악한 짓거리이기도 했다. 기상부터 취침은 물론이고 일상생활까지 일정이 짜여있었다. 레이시아가 일어났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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