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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전사-490화 (489/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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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내려온 10개의 부락 중에서도 가장 대전사가 강한 〈속굽이 부락〉이 가장 마지막에 〈횃불 성채〉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팬크리스 영지〉를 무혈입성하고 난 다음에 의도적으로 동선을 길게 잡아서 동쪽으로 향하는 괴기한 짓을 벌여서였다.

최대한 이 전쟁에서 부락원의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규르소모스는 횃불 성채에서 적당히 싸운 상태였다. 부락원들은 죽은 이들도 있었지만 다른 부락에 비하면 세발의 피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잘 됐다. 뒤가 흔들리니 빠져나갈 명분이 생겼다.’

〈곰가죽 속의 하얀뱀(Bosoo Mogoi)〉이라고 불리는 〈대전사(大戰士) 규르소모스(Guurshormos, 다리 힘줄)〉가 조용히 버팔로를 옆으로 돌리며 횃불 성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오크 대침공에서 온건파에 해당했다. 대규모 침공을 썩 내키지 않아 했는데, 백설산맥의 광활한 대지 때문에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실제로 〈붉은 요새 함락〉 이후, 인간은 백설산맥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오크는 계속해서 발전을 해왔다.

몇몇 오크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 떠돌이 오크만이 인간 세상으로 〈내려갔다〉.

질겅. 질겅.

말린 약재를 뜯어 먹던 그의 눈이 이리저리 천천히 움직였다.

느긋함 그 자체.

성벽의 곳곳에 규르소모스의 굵직한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으며 성벽에 툭 튀어나와서 거대한 불꽃을 만들어내던 〈엔토르챠(Antorcha, 모순의 횃불)〉가 새까만 재로 변해있었다.

“쩝.”

‘며칠 안 남았는데.’

그가 크게 아쉬워했다. 오크들이 못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잘 버텨주었다. 수성전에서의 인간의 저력은 대단했다. 살기 위해서 싸운다기보다는 죽기 위해서 싸운다는 말이 옳을 정도였다.

오크와 함께 성벽에서 떨어지는 건 예사였고, 오크의 눈 하나 앗아가겠다고 목이 베였음에도 입에서 피 거품을 물고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힘을 주며 정신을 잃지 않고 덤비기도 했다.

함락 직전, 성벽의 한쪽이 오크에게 빼앗겼던, 가장 최근에 있었던 〈격전의 3일〉은 인간이든 오크든 피가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혹독한 싸움이었다. 3일 밤낮 구분 없이 싸웠던 서쪽의 성벽은 피와 시체로 가득했다.

“규르소모스! 미련을 버려라!”

오크 전사가 손짓을 했다. 이에 그가 한숨을 한 번 쉬며 몸을 돌렸다.

“휴우.”

그 모습을 보며 성벽 위에 있던 야수 기사, 그라돈 토치라이트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크들이 물러간다니, 꿈만 같습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싸울 정도로 횃불 성채의 상태는 위태로웠다. 특히나 최근 보름간은 가히 오크와 함께 성벽에서 투신하는 이들이 특히나 많았다. 그중에는 여성의 비율이 매우 높았는데, 오크에게 무기를 휘두르는 것보다 목을 잡고 뛰어내리는 것이 더 수월해서였다.

덩치 큰 오크가 여자의 체중을 못 이긴 것은 아니었다. 병사들이 도와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헛된 죽음이 되기도 했지만, 단 1초라도 머리를 와락 껴안고 있으면 어떻게든 오크 하나를 조질 수 있었다.

물론 언제나 오크의 가을에 여성들이 자발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전투에 동원되지는 않았다.

이번은 특수한 상황이었다.

보통이라면 얇은 죽창으로 눈을 찌르는 임무를 수행하거나, 화살집이나 짐을 옮기는 일을 했다.

한숨을 내 쉰 그라돈이 비틀거리자 병사들이 부축했다.

“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다리에 힘이 잠깐 풀렸다.”

그라돈이 몸을 일으켰다. 오크들이 가고 나서도 경계는 풀어지지 않았다. 모두가 마음 졸이는 하루였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토치라이트 가문은 내성에서 원탁회의를 열 수 있었다.

“추적할 수 있겠소?”

후퇴하는 오크들을 방해해서 조금이라도 손해를 끼치고 싶어했다.

“8개의 부락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오크들은 2만이 넘습니다. 어찌 상대하려 하십니까.”

방계와 직계 모두 부정적이었다. 토치라이트 영주는 쉽게 수긍했는데, 혹시나 해서 물은 것뿐이었다.

“병사들을 주변으로 보내어 식량을 챙겨오게 시키고, 성에 있는 피난민들을 남쪽으로 이동시켜라. 성에만 있으면 결국 굶어 죽을 뿐이다.”

서둘러 피난민을 성 밖으로 내보내는 작업을 시행했다. 지금이 아니면 살 방도가 없었다. 기사들 또한 기사 마차를 타고 남쪽을 돌아다니며 몬스터든 야수든 잡아와야 했다.

그 후 5일 뒤에 〈곡사의 조〉를 순찰조장으로 삼고 그를 따르는 순찰자들 60여 명이 횃불 성채를 방문했다.

“성문을 열어라!”

웅성웅성.

순찰자들이 너무 많이 성채에 방문해서 많은 이들이 구경을 나왔다. 그만큼 순찰자들은 보기 힘들었고, 본다고 해도 1명 내지는 3명이 전부였다.

60명이나 왔다는 것은 사실상 〈백설산맥〉에서 철수를 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이들은 곧바로 내성으로 안내됐다. 대표자 다섯 명의 순찰자가 원탁회의에 참석했고, 곡사의 조가 말을 거의 다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음···흉터가 심각한 순찰자로군.’

〈전투 로브〉를 벗은 곡사의 조는 흉측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머리 피부가 뜯겨 나간 곳은 머리카락 하나 나지 않았고, 얼굴 곳곳에 흉한 흉터들이 많았다. 오크에게 살이 뜯기고, 도끼에 베어지는 등 고생이 많은 얼굴이었다.

살아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만큼 거친 경험을 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절로 그를 대우하는 방계와 직계가 많았다. 병사들은 그게 더 심했는데, 순찰자들은 성벽 없이 오크들과 싸우기 때문이었다.

“어디에서, 어떤 순찰자인가?”

“제 이름은 〈곡사의 조〉라고 합니다. 순찰조장을 맡고 있으며, 다른 조장들에게서 흩어진 순찰자 63명을 이끌고 있습니다.”

“순찰자들도 힘든가 보군. 그렇게 많은 순찰자가 모이다니.”

“이례적인 대침공 아닙니까.”

“그렇지. 이런 일은 처음이야. 오크가 하나가 되다니··· 그 무시무시한···”

토치라이트 영주는 말을 줄여나갔다. 자신이 해야 할 말이 아니었고, 이런 자리에서 오크를 높이 세우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그들이 비록 우월하다고 해도 인간은 오크를 꺾어야 했다.

스윽. 턱.

조가 목함을 원탁에 놓았다. 방계 귀족 하나가 그것을 회수하여 안을 확인하였고, 이내 영주가 그 내부에 있는 대전사의 머리를 볼 수 있었다.

“엄청난 크기군. 이 정도면 대전사급인데.”

오크 부락에 대해서 빠삭하게 아는 순찰자들이다. 조가 그 수급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를 풀었다.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한 의외의 인물이 토치라이트 가문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드낙 불파겐 자작?!”

“그가 어째서!”

크게 당황한 이들도 있었다. 선물을 받았다가 내쳤다가 아주 지랄도 그런 지랄을 해대었던 게 드낙이었다. 토치라이트 가문은 시류를 따르기에 싸움은 나지 않았지만, 감정적으로 서로 사이가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원탁 회의가 뜨겁게 달구어졌다.

‘왜 그가 우리를 도와주었을까.’

이따위 생각을 하는 자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오직 이 생각밖에 없었다.

“순찰조장. 그는 어디로 갔는가.”

그라돈의 물음에 조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드낙에 대해서 말하는 게 매우 조심스러웠는데, 그만큼 드낙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는 뜻이었다.

‘드낙이 대전사의 목을 홀로 치다니.’

그라돈은 경계심이 크게 생겼다. 그만큼 순찰조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보통 귀족에게는 결코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인사도 깍듯하게 하지만, 그에 대해서 말을 할 때 조심하는 것뿐만 아니라, 몸가짐을 바로 한다?

‘충격적이야.’

순찰자가 보여야 할 태도가 아니었다. 그만큼 드낙이 가져온 전공은 대단했다. 존경할 수밖에 없었고, 그게 아니라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몽펠리에로 갔습니다. 파이룬 전투 요새가 반파되었기 때문에···아무래도 수성전을 돕기 위해서 움직인 것 같습니다.”

그런 거창한 목적은 아니었다. 성에 사람이 모이니 성에 갈 뿐이었지만, 조는 드낙이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몽펠리에의 쌍둥이 성채에 간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강한 어조에 다른 이들이 고민하는 눈치였다.

“순찰자들은 이제 어쩔 생각인가?”

“···저희들은 백설산맥에 남아있는 순찰자들을 다시 한 번 모을 것입니다.”

힘없는 소리였다. 그야 그랬다.

괜히 순찰자들이 5~10명 단위로 퍼져서 활동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모인다는 것은 백설산맥에서 후퇴한다는 소리와 같았다. 더는 의미가 없어서였고, 오크의 침공 규모가 너무 컸기도 했다.

‘전에 없던 수준의 규합이 필요하다.’

“그런가. 돌아가 봐도 좋네. 아니면, 회의를 보고 가던가.”

“예. 갈 길이 멀어서 돌아가겠습니다.”

순찰자 5명이 원탁에서 빠져나갔다.

“오크는 물러났다. 최소한의 별동대를 조직해서···”

토치라이트 영주가 중얼거렸는데, 매우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내 탄식을 하고는 눈을 감아서 심호흡했다. 급하게 결정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

한 걸음을 걸어도 의미 있게 걸어야 했다.

대전이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원탁에 둘러앉은 이들도 말을 아끼며 생각에 빠졌다. 몇몇 이들은 귓속말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그때, 밖에 어수선함이 일어났고, 이목이 쏠렸다.

“불파겐 자작령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드, 들여보내라!”

딱 때맞추어서 온 전령 소식에 절로 목소리가 떨렸다.

큰 문이 열리며 기사 하나와 병사 둘이 들어왔다.

“기사가 직접 온 것이오? 어디의 누구인가.”

투구를 벗으며 기사가 말했다.

“도렌 홀그린(Doren Hallgreen)이라고 합니다. 불파겐 자작님의 서한은 아니나, 게제라스 총관의 서한입니다.”

영주의 옆에 있던 자가 속삭였다.

“불파겐 자작의 왼팔이 게제라스 총관입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토치라이트 영주가 서한을 받아들였다. 도렌을 알아보지는 못했는데, 워낙 평범하기도 했고 인상에 남지 못해서였다. 아무리 기사가 되었다고 해도 용병 시절 때의 얼굴을 기억할 수는 없는 법이다.

뜨득.

인장을 확인한 다음에 인장을 뜯었다. 안에는 간략하게 토치라이트 가문의 분전을 기대한다는 것과 불파겐 자작 또한 홀로 돕기 위해서 나섰다는 것, 피난하는 자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본론은···’

주르륵 시선이 빠르게 내려갔다. 그리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그라돈 경에게.”

“예.”

조심스럽게 끝이 닳아있는 양피지를 살짝 접어 〈야수 기사〉에게 가져갔다. 그 또한 읽어보고는 미묘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확고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홀그린 경, 오늘은 푹 쉬시오. 서한에 대한 답은 내일 바로 드리겠소.”

“예. 물러가겠습니다.”

도렌은 원탁회의에 참관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물러갔다.

귀족들의 눈이 그라돈 토치라이트에게로 모였다. 그라돈은 〈성주 울베인 토치라이트(torchlight)〉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영주님,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말하시오.”

“불파겐 자작이 그린 그림은 실로 엄청난 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가 돕는다면, 능히 오크들을 밀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정도인가? 하지만, 불파겐 자작은···”

영주가 의심스러워했다. 그야 그럴 것이 드낙 불파겐은 무력만 뛰어나지 나머지는 그렇게 대단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모두 하나같이 이야기하기를, 불파겐의 무력은 확실히 가졌다고 이야기하지, 세파리아스의 전신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힘을 가졌음에도 그걸 제대로 이용할 줄 모르는 것이다.

이건 힘이 강할수록 더욱 명명백백히 드러났고, 모르는 귀족이 없었다. 물론 그래서 외척이 피를 많이 보기는 했다.

“그의 오른팔인 〈이실레아 브릴리언트〉 경이 냈을지도 모릅니다.”

“〈섬투(閃投)의 기사〉를 말하는 것인가. 그녀는 우리 영지에서 활동하지 않았었나?”

“트롤 토벌을 통해서 방계로 영입하려고 했던 자유기사였습니다. 아쉽게도 실패했고, 그녀에 대한 평가가 절하되어서 영주님께는 이야기가 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전에도 말씀을 따로 올렸습니다.”

울베인 성주가 눈두덩이를 매만졌다.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흘러들었나 보군.”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심신이 약하면 영지를 5년도 돌보지 못하는 것이 영주직이었다. 마음의 병도 심했고, 마차나 말을 오래 타야 하기도 했다.

“다시 이야기를 돌리겠습니다. 불파겐 영지는 자신들의 군량미를 북부로 옮길 군대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불파겐 자작이 저희를 도우러 갔기에 저희에게 여력이 있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실로 그러했다. 오크들은 물러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점령당한 땅을 먹으려면 군대가 필요한데, 가만히 놔두고 병사를 뒤로 돌린다면 서쪽은 오크의 땅이 될 것입니다.”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소리였다. 이에, 그라돈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상 초유의 대침공입니다. 불파겐의 전략대로 움직이는 게 최선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라돈이 지휘봉을 잡았다. 북부 전체를 빙 두르며 말했다.

“아주 큰 그림입니다. 그의 행보에 맞추고, 오늘의 전령이 있었기에 저 또한 알 수 있었습니다.”

불파겐의 큰 그림!

드낙은 생각하지도 않은 계략이 그라돈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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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한 편밖에 못 올려서 죄송합니다. 내일부터 시작될 설연휴 따뜻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힘들어도 자신을 위한 휴일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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