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5 <-- -->
어두컴컴한 장소. 오크에게는 낮아 보이는 천장. 끝없이 넓은 폭.
오크들의 뒤로는 오르막이 크게 있었고, 계속해서 오크 전사들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주술 반딧불과 동물 지방 횃불이 오크들에게 쥐어졌고, 핏빛쥐들은 그런 것 하나 없었다. 오크들은 칠흑처럼 어두운 곳을 봐야 했고, 핏빛쥐들은 밝게 빛나는 곳을 보고 있었다.
오크들은 자신들과 함께 있는 불빛 때문에 어둠을 더욱 어둡게 보았기에 불편한 점이 있었다.
이러한 지하 환경은 핏빛쥐들의 영토임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훙, 훙!
“찌찍!”
핏빛쥐들이 단번에 슬링을 날리기 시작했다. 오크들이 생각하기에는 낮은 천장이었지, 핏빛쥐들에게는 엄연히 사격이 가능한 곳이었다. 물론 평범한 슬링과는 달랐다.
아래에서 돌을 던지듯이, 아래에서 쏘아 포물선을 그리며 추락했다.
후두두둑! 퍽!
온 곳을 두들겨 맞아야 했다. 슬링과 함께 길쭉한 단창이 투척되어서 쏴지기도 했는데, 털가죽을 단번에 관통하고, 오크의 피부를 크게 베며 허벅지를 긁고 지나갔다.
아무리 두꺼운 피부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털〉이 수북하게 나 있지 않으면 뾰족한 원거리 무기에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피는 많이 흐르지도 않았고, 그저 넘어져서 피부가 찢긴 상처에 불과했지만, 문제는 투창의 숫자 또한 많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대전사의 부재 또한 컸다. 사격을 받으면서 응사를 하는 오크가 있다면, 일단 웅크리며 체력을 보존하는 오크도 있었다.
두 갈래로 나누어진 오크의 행동과는 다르게 핏빛쥐들은 〈한성질 쌍쥐〉의 지휘 아래 하나가 되어서 하나의 행동을 하고 있었다.
“주술사!”
몇몇 머리가 돌아가는 전사들은 주술사를 찾았다. 이런 형편없는 원거리 공격은 주술이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주력이···없다!”
한두 개 남은 주술도기를 깨거나, 주술 목걸이를 다른 오크 전사들에게서 받아서 그 주력을 흡수해서 흙으로 된 엄폐물을 세웠지만, 돌 때문에 퍽퍽 무너져갔다.
“왜 주력이 없어? 고작 그 한 명한테 모조리 써버린 거냐!”
“고작이라니! 〈별의 기사〉에 대한 예언을 듣고도 그딴 소리냐! 〈초월의 힘〉에서 눌린다는 생각만 해도 피비린내가 내 코를 타고 줄줄 흘렀다! 모든 주술사가 그것을 경험했어!”
주력을 하나도 남김없이 썼다는 뜻이었다. 하나의 오크 부락에 있는 주술사들 중에 주력이 남아있는 자가 없었다. 결국 주술사들은 스스로의 생명력을 걸어야 했다.
“콜록! 콜록!”
코의 점막이 바짝 마르고, 기침만 해도 피가 나서 침과 섞어서 뱉어내야 했다. 인간이든 오크든 내부 장기는 촉촉해야 했지만, 생명력이 줄어들면 내출혈부터 생겼다.
구구구구!
엄폐물이 오크들을 가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도 끝도 없이 오크들이 내리막길을 통해서 주르륵 내려왔다. 다시 올라가는 것은 장비 없이 불가능했다.
인간보다 체중이 무거운 것이 오크였다. 그들은 가파른 길을 올라가는 것에 큰 페널티를 얻고 있었다.
“쏴라! 쏴라!”
〈한성질 쌍쥐〉가 한 손에는 방패를 쥐고, 다른 손에는 칼을 쥔 채 돌아다녔다. 본래는 이도류를 쓰는 게 그였지만, 오크와의 전쟁에서는 특별히 방패를 소지했다. 다른 핏빛쥐들도 마찬가지였다.
“신무기가 발사 준비를 마쳤습니다!”
성질 급한 한성질 쌍쥐가 냉큼 고개를 홱 돌려서 신무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덜그럭, 덜그럭!
정신없이 도르래를 돌리고 있는 핏빛쥐들이 보였다. 그들과 함께 신무기를 조작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는데, 크놀들이었다.
“킁!”
한성질 쌍쥐가 코를 풀며 존재감을 뽐냈다. 크놀 중에서도 기술력이 높아서 이곳에서 활동하게 된 〈뮤베째트(Muveszzet)〉가 조작하는 모습을 감독하고 있다가 냉큼 달려와서 고개를 조아렸다.
“굳은살 리전의 의원님을 뵙습니다! 뮤베째트라고 합니다!”
“으음! 그래! 신무기는 발사가 가능한가?”
“예! 지금이라도 당장 저 간악하고 덩치만 큰 놈들에게 공격할 수 있습니다만···”
크놀 뮤베째트가 한성질 쌍쥐의 눈치를 봤다.
“말해봐라! 문제가 무엇이냐?”
“큰 효과를 내려면 저 엄폐물이 사라져야 합니다.”
“〈후타스 투즈(Futas tuz, 달리는 지옥)〉는 그저 흙벽도 못 뚫나?”
신무기, 달리는 지옥!
〈굳은살 리전〉에게 패배한 토치라이트 영지의 지하에 살던 크놀 부족의 무기를 대형화시킨 것이 달리는 지옥이라는 이름의 신무기였다.
크놀의 언어로는 후타스 투즈라고 불렀다.
보통의 공성무기는 뒤로 길어지는 몸체를 지녀 뻗어 사정거리를 높게 만든다. 하지만 지하 종족에게 있어서 사거리는 별 필요가 없었다. 포물선을 그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직사로 쏘고, 높게는 못 쏜다.
그 덕에 앞뒤보다는 양옆이 길어지는 형태를 지닌 공성병기가 만들어졌다. 지하에서도 제법 세를 불렸던 크놀들의 국가였지만, 내전을 통해서 지하 싸움에 능통한 핏빛쥐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전투가 특수전으로 이루어졌기에 핏빛쥐들을 상대로 공성 병기를 쓸 일이 없었다. 그게 크놀들의 패인이었다. 크놀은 평범한 지하종족인 것에 반해, 핏빛쥐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일각수였으며, 동족 포식을 하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을 지닌 지하 종족이었다.
“그건 아닙니다. 충분히 직사로도 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연구된 지옥불은 한 번 부딪치면 퍼지게 되어서 벽에만 탄을 소모할 수 있습니다.”
“이제야 생각난다. 그랬지. 좋다. 그럼 발사준비를 마친 뒤에 엄폐물이 허물어지면 그때 발사해라!”
“예!”
다리를 덜덜 떨면서 대기하고 있던 핏빛쥐들이 크놀 작업자와 함께 곧바로 발사준비에 들어갔다. 철의 탄성을 최소한으로 가져가고, 오직 단단함만을 가진 철봉에 있는 용수철이 도르래를 돌릴 때마다 계속해서 감겼다.
“좌측 용수철 당김 완료!”
“우측 용수철 당김 완료!”
덜컹!
그물에 싸이고, 아주 얇은 도기에 다시 한 번 싸인 통이 내려와서 소리를 냈다. 뚜껑은 나무로 되어있었고, 그곳에 진흙을 한 번 더 바르는 것으로 끝이 났다.
“발사 준비 완료!”
한성질 쌍쥐는 곧바로 별동대를 보냈다. 오크놈들이 쌓아놓은 흙벽의 밑으로 들어가서 아래부터 무너뜨리기 위해서였다. 오크들은 여기에 전혀 반응을 못 했는데, 땅밑을 어찌 확인할 수 있겠는가.
쏴아아, 후두둑!
파도 소리가 나며 흙벽이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후타스 투즈, 1번부터 차례대로 발사!”
투웅!
엄청난 소리가 나며 용수철이 팽창했고, 그 힘은 고스란히 중앙으로 향하며 단번에 뒤에 고정된 〈지옥불〉이 튀어 나갔다. 발리스타와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지만, 양옆이 더 길어서 장력이 어마어마했다.
직사로 날아간 지옥불은 정확하게 오크들이 있는 곳으로 떨어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근처 땅에 부딪쳤고,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발사하면서 장력이 주는 충격에 균열이 빼곡히 들어간 지옥불을 감싸던 도기가 터지고, 그물이 찢겼다.
화르르륵!
삽시간에 불이 나며 사방팔방으로 파편이 데굴데굴 구르면서 이글거리는 불로 이루어진 길을 만들어냈으며 동시에 매캐한 연기도 크게 내뿜었다.
“콜로! 콜록!”
오크들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눈이 매웠고, 연기를 제법 크게 들이마시면 목이 까끌까끌해지고, 통증이 왔다.
*
〈검은 꿈〉
〈검은 회의〉
드낙은 그곳에서 눈을 떴다.
“흐으윽.”
이곳에서는 다치지도 않았는데, 타오르는 환각에 휩싸이며, 환통을 느꼈다. 그만큼 화상이 주는 고통은 정신마저 붕괴시킬 정도로 강렬했다.
“이제 정신이 들었냐?”
세파리아스의 목소리를 들었다. 드낙은 몸을 일으켰다.
“내가 정신을 잃으면 네가 가는 거 아니었어?”
“트롤의 재생력을 얕보지 마라. 이 검은 꿈은 금방 사라질 거야. 그럴 여유가 안 돼. 중립신의 배려로 이 시간이 연장된 것뿐이다.”
세파리아스 불파겐은 중립신을 크게 높이지 않으며 말했다. 그가 중립신에게서 받을 보상을 생각한다면 괴이할 정도로 오만했다.
“오우거의 적발이 왜 효과가 없었던 거야? 머리카락이 다 타버린 거야?”
그 말에는 〈흰여우 새린〉이 대답했다.
“정령이라서 그래. 정령의 불꽃은 〈자연의 주력〉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도 있지만, 일부는 말 그대로 진짜 불꽃이야. 〈초월의 힘〉을 상쇄시키는 오우거의 적발이 어떻게 진짜 불을 없애겠어?”
불합리한 결론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정령의 존재 자체가 초월의 힘으로 유지되는 거 아니야?”
“맞아. 하지만 정령의 근본은 자연, 그 자체야. 그들의 힘은 진짜나 다름없어. 엘라한 가문이 만들어내는 물 또한 진짜 물이잖아?”
그 말에 드낙은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만약 그런 물이 〈초월의 힘〉이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건 진짜 물리적인 물이었다.
“그럼 놈을 어떻게 상대해야 해?”
“챔피언, 흑마법의 방어마법을 통해서 막을 수밖에 없다.”
중립신은 드낙의 뒤에 있었다. 드낙이 고개를 돌렸다.
“마력이 없습니다. 더는 남은 게 없어요.”
“생명력을 쓰면 된다. 트롤의 재생력과 고르곤의 심장을 가진 것이 그대이다. 능히 가능할 터.”
드낙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의 부족을 생명력으로 메꾼다. 지금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내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주술사들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할 수 있는 게 없을 겁니다. 생명력으로 마력을 생산한다고 한들, 그들에게 막힐 겁니다.”
“걱정하지 마라. 주술사들은 사전에 널 노렸고, 온종일 주술 도기를 불의 정령에게 바쳤다. 그 축적된 힘으로 겨우 너를 압도할 수 있었다. 오크 부락이 수십 년 동안 모은 주력이 너 하나 때문에 모두 소비되었다. 자랑으로 여겨라.”
세파리아스는 드낙이 약한 소리를 내자 짜증을 내면서도 드낙을 받쳐주었다.
“···이번에도 네가 대신 싸워주면 안 되겠냐?”
“난 기사다. 죽어서도 나는 기사고, 두 번까지 너의 몸을 통해서 네 명성을 높이는데 어울려준 것은 중립신과의 거래 때문이다. 다음은 없다.”
드낙이 중립신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은 사실이다. 나와의 거래 때문에 챔피언인 그대를 대신해서 싸워준 것뿐이다. 더는 없다.”
그 말에 드낙이 세파리아스를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진짜 미친 새끼네.’
생각이 대쪽같다고 할 수 있었고, 지나칠 정도로 굽힘이 없었다. 설마 신과 거래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냐? 나는 나로서의 나를 지킬 수 있다면, 죽음도 마다치 않는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죽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든지 있다.”
그 말에 드낙은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열등감을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저 미친 새끼라고 욕하고 넘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다음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기사처럼 싸워라.”
드낙이 체념하고 방법을 묻자 세파리아스가 말했다.
“자세히 말해봐.”
“어쭙잖게 날 따라 하지 말고, 이제는 다른 기사들처럼 싸우라는 소리다.”
세파리아스의 말에 드낙은 욱해서 쏘아붙였다.
“내가 언제 널 따라 했다고 그래?”
그 말에 세파리아스가 웃음을 참을 수 없는지 크게 웃었다.
“겁을 먹은 채 나처럼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을 나처럼 싸운 적이 없지. 그래서 나의 방식으로 싸운 것처럼 안 보이지만 나는 알 수 있다.”
그가 자신의 눈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내 판단은 결코 틀리지 않는다. 특히나, 싸움에서는 주술사들이 모여서 예언한 것보다 정확해.”
“기사차럼 싸우라니···”
자신의 전투 스타일이 그러지 않았던 것에 드낙은 당황한 눈치였다.
“너 잘하잖아. 치사하고, 얍삽하게 하는 거. 가장 잘 하는 거잖아. 그렇게 하라고.”
“기사는 명예를 중시한다면서? 다른 기사들도 그렇게 싸워?”
세파리아스가 답답한지 가슴을 쳤다.
“겉멋에 찌들어서는, 다른 기사가 어떻게 싸웠는지 생각해봐라! 이 멍청한 새끼야! 대체 어디까지 널 배려해야 하는 거냐!”
“······”
‘다른 기사들의 싸움.’
드낙은 지금까지 봐왔던 기사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만약 그들이라면···
========== 작품 후기 ==========
5673자
평추코! 다양한 의견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