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전사-473화 (472/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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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크리스 영지〉

〈윙스톤 성(兩翼石城)〉

〈노기사 봉보리 팔콘〉과 〈노기사 바이안 엔제브렛〉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후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들의 뒤로는 끝도 없을 만큼 많은 인원이 따라오고 있었다.

병사들의 표정은 암울했지만, 전투에 대한 패배감은 없었다.

“영주님. 가셔야 합니다.”

팬크리스 영주는 정문의 성벽에 올라가 있었는데, 〈속굽이 부락〉의 대전사인 규르소모스(Guurshormos, 다리 힘줄)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태평하게 나뭇가지 하나의 겉껍질을 벗겨서 씹고 있었다.

부들부들.

팬크리스 영주의 손이 떨렸다. 노기에 찬 표정은 투구에 가려서 볼 수 없었지만, 상당한 기세가 느껴졌다. 이내, 그가 몸을 돌렸다.

“가는 길은 준비에 차질이 없겠지?”

“예. 순찰자들이 도와줬습니다. 곳곳에 함정이 설치되어있고, 언제든지 함께 합공이 가능합니다.”

오크의 추적에 대한 대응 준비에 대해서 논했다.

“사제들의 수작질은?”

“완료했습니다. 최대한 많은 곳에 신성력의 덩어리를 놓았고, 정문에서 오크들이 들어오는 곳 방면으로는 조금 더 힘을 실었습니다.”

모든 곳에 신성력을 통한 함정을 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냥 신성력만 뭉쳐두는 기만질은 가능했다.

‘여기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팬크리스 영주가 주변을 둘러보며 걸어갔다.

모든 것이 멀쩡한 윙스톤 성의 모습이 들어왔다.

피 하나 없었다. 부상병들의 피가 제법 묻어있던 성벽 아래의 흙을 제외하고는 말끔한 것이 이 성이었다.

단단하게 쌓아올린 돌집과 열심히 피서 만든 냉랭한 바람이 드는 지하 창고가 생각이 났다. 겨울마다 마을에서 차출된 장정들이 노력해서 만든 것들이 많았다.

“휴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용맹의 전투요새〉가 함락당했다.’

바로 서쪽에 인접한 〈브레이브 가문〉의 가장 큰 전투요새다. 그것도 제법 브레이브 영지의 안쪽에 있는 곳이었다.

‘파죽지세로구나.’

부락 단위로 존재하는 오크들을 하나로 통일시켜 침공전을 펼치는 것은 인간들에게 재해나 다름없었다. 고대 국가가 하루아침에 중앙집권제로 바뀌었다고 말해도 무방했다.

말도 안 되는 일.

‘블랙 스케일 와이번을 타고 다니던 오크가 이 일의 원흉이다.’

후회스러움이 그의 마음을 헤집었다. 그토록 강력한 전사였다면, 큰 피를 흘리더라도 암살을 해야 했다.

‘차라리 백설산맥을 선제 타격했어야 했다.’

평화가 너무나도 절실했고, 평화를 너무나도 원했기에 그러지 못했다. 많은 북부 귀족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군사력에 미쳐있었지만, 동시에 평화에 굶주려 있었다.

오크들의 사회체계가 부락 단위일 때, 계속해서 피해를 줘야 했다. 그걸 알고 있었음에도 주저했다.

그 대가는 바로 처음으로 통일된 세력을 가지게 된 오크들의 대침공이었다. 부락마다 여전히 쪼개져 있었지만, 〈족장 도네투스〉의 존재는 오크를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는 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영주들은 서로 협력할 수 없었고, 각개격파를 당했다.

그 결과가 〈윙스톤 성〉에서의 무의미한 후퇴였다. 옆 영지가 개박살났는데, 앞길만 막는 건 어리석었다.

5천이 넘는 이들은 빠르게 남쪽으로 향했다.

“크하하하하!!!”

그들의 뒤로 규르소모스가 대소(大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크들은 성벽을 넘어서 성문을 바로 점거했다.

꾸그그그···!

병사들도 열기 힘들어했던 성문이 금방 열렸다. 그 안으로 버팔로를 탄 오크들이 들어왔다. 규르소모스가 외쳤다.

“남김없이 수색해라! 최대한 안전한지 확인해야 한다!”

오크 전사 10마리 그리고 오크 주술사 1마리가 1조를 이루어서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색을 시작했다. 오크들에게 있어서도 인간들의 성은 거주하기 아주 좋았다.

지하로 들어가는 계단 앞에서 주술사가 외쳤다.

“멈춰라!”

오크 전사들이 순식간에 멈추며, 길을 텄다. 주술사가 보호를 받으면서 주력을 뿜어냈다. 그것은 뱀의 형상으로 변하더니, 서서히 나뭇잎 색의 주력이 갈색으로 변하며 진흙뱀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뜯어먹는 뱀(Rip Mogoi)〉.”

진흙을 뚜둑 흘리는 뱀이 입구를 훑었다. 황금빛이 터져 나오더니 뱀이 지닌 주력과 부딪쳐 스파크를 일어냈다.

초월의 힘이 내는 상쇄 현상이었다.

“중립신의 개들이 수작을 부렸군.”

오크 전사의 말에 주술사가 다시 뒷걸음질 쳤다.

“더 의심스러운 것은 없다.”

지하 창고로 들어간 그들은 서늘한 공기에 절로 웃음을 지었다. 인간들의 건축술 중에서도 이렇게 서늘한 곳을 만드는 건 원탑이었다. 그 덕에 오크 전사들은 특히나 건축가들을 노예로 삼고 싶어 했다.

자연적으로 만든 냉동 동굴이 전부여서다. 오크들이 대충 모방해서 만든 인위적인 냉동 동굴은 모두 물이 차서 식량이 썩기 일쑤였다. 습기를 내보내는 비밀은 오크들도 몰랐다.

연구를 해도 혼자서 혹은 부락단위로 해서 발전하는 게 더뎠고, 사회적 지위도 너무 낮았다. 주술사, 사냥꾼. 이게 오크들의 사회에서 가장 잘 먹어주는 계급이었다.

“이상 없다.”

규르소모스는 태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추적은 안 하나? 평지에서 인간들을 죽이는 게 가장 손쉽잖나.”

“어차피 다른 부락이 다 해줄 텐데, 뭐하러 죽이나? 그렇게 부락원이 인간의 손에 몇 명 뒈져봐야 하나?”

“그건 아닌데, 우린 전사잖아.”

“크흐흐흐.”

곰같이 생긴 규르소모스가 웃었다.

“우린 사냥꾼이다. 녹색 도끼는 우리에게 타투를 주었다. 타투를 얻으려면 뭘 해야 하나?”

“사냥.”

“맞다.”

많은 오크들이 이것을 착각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냥꾼보다는 사실 전사가 멋지기 때문이다.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타투를 다 모은 오크 사냥꾼은 먹기 위해서만 사냥을 하고, 그 외에는 전사로서 단련에 임한다.

이것이 오크들의 무(武)의 경지를 자연스럽게 나누는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사냥꾼. 그다음에는 타투를 얻기 위한 사냥을 줄이고 전사로서의 단련. 그 후에는 목숨을 위협하는 사냥물을 잡으며 〈대전사〉를 꿈꾼다.

“인간들은 사냥감이다.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사냥감을 잡지는 않잖아. 그렇다고 타투를 주나? 뭘 주나? 제법 대단한 인간의 심장을 억지로 먹는게 아니라면, 타투도 얻을 수 없지.”

“음···그래도 평지에서는 토끼보다 못한 것들인데.”

오크 전사가 아쉬워했다. 인간 고기는 제법 맛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엉덩이와 허벅지가 일품이었다. 몇몇 오크 전사들은 눈알을 삶은 것을 즐기기도 했다. 별미 중의 별미였다.

〈브레이브 영지〉의 완전한 패전 소식은 북부 곳곳을 흔들어놓았다.

워낙 많은 오크 부락이 쳐들어왔기 때문에 서로 하나가 될 수 없이 오크들을 상대하던 북부군은 빠르게 후퇴했다.

강둑의 한 곳에 구멍이 뚫렸으니, 뒤에 어찌 될지는 뻔했다.

무너질 수밖에 없는 강둑을 손으로 받쳐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들은 많은 성을 버리고, 몽펠리에의 북부에 있는 전투요새인 〈쌍둥이 성채〉 혹은 파이룬 가문의 〈쌍둥이 언덕성〉으로 향하였다.

쌍둥이 언덕성이 반파되었다는 걸 파이룬 가문이 숨겼기 때문에, 북부 영주들이 그곳으로 향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파이룬 영지에 도달하면 다른 곳으로 향하게 되겠지만, 미묘한 방향 차이로 며칠 더 행군으로 체력을 소비할 것이 분명해졌다.

〈불파겐 영지〉

〈호수 마을〉

〈몽펠리에 목조저택〉

록시 몽펠리에는 방문자를 받아들였다. 평범한 행색이었지만, 잘 관리되고 있는 수염이 절로 돋보였다.

“센 도파민이라고 합니다. 길게이 왕자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미 이야기는 시녀에게서 많이 들었어요. 제법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하셨다던데.”

“다르다고 말하지만, 같은 게 외척 아니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서로 협력을 하고 싶어 하십니다. 물론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상관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셨다면 미안함 또한 지니고 있으며, 몽펠리에와 그만큼 조심스럽게 나아가고자 한다고 하셨습니다.”

조곤조곤 말하는 모습에 록시는 이 센이라는 고용인이 길게이의 집사 중 하나임을 알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원하는 바를 말해보세요.”

센이 입에 침을 묻혔다. 지금부터 중요했다. 이미 사전에 서로 고용인을 두고 이야기를 충분히 나누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그 의견교환이 쭉 순풍을 단 배처럼 순항하리라는 법은 없었다.

“파충류 초원에 건설될 목장에 대한 것입니다.”

“브릴리언트 가문을 견제하시려고요?”

“아니요. 어떻게 같은 아군을 견제하겠습니까? 그저, 그들에 대한 투자를 다른 좋은 곳에 쓰자는 것입니다.”

록시가 빙긋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미 불파겐 영지의 남쪽에 그렇게 큰 용광로가 들어섰는데, 목장까지 눈독을 들이시는 건가요?”

“이실레아 브릴리언트는 여장부 중에 여장부입니다. 그녀에게 날개라도 달아줄 생각이시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몰락하여 목장을 경영하는 브릴리언트 가문. 그들이 이실레아를 자유기사로 양성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작 10살 여자아이가 천 명의 군졸을 통솔할 역량이 있다면? 성인식을 열기도 전에서 다른 〈계승〉을 받은 자보다 한 수 앞선 군사적 역량을 지니게 된다면?

병사를 직접 통솔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그 카리스마는 능히 만 명의 병사를 홀로 감당할 수 있는 만인장(萬人將)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장 훈련도가 낮은 불파겐 영지의 정규군이 하는 짓만 봐도 알 만했다.

그런 자에게 대규모 목장을 크게 성장하게 만든다? 브릴리언트의 가풍을 생각한다면, 드낙 불파겐에게 날개 달린 호랑이를 붙여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매우 충성스러운 범 한 마리를 말이다.

〈센 도파민〉은 연거푸 말하였다.

“더군다나 그녀는 자신의 신랑감을 스스로 정했습니다. 평민이죠. 그 가문 내에 난동질을 할 껀덕지 하나 없습니다.”

안에서 흔들 수 없으니, 밖에서 흔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미 몽펠리에는 한 번 크게 대였는데, 여기서 더 했다간 완전히 눈 밖에 날 텐데.”

“직접 방해를 놓는 것도 아닌데,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또한 남쪽에 건설될 목장의 지분 6할을 드리겠다고 왕자 전하께서 약조하셨습니다. 몽펠리에는 투자만 하면 됩니다.”

늙은 시녀가 다가와서 록시에게 속삭였다. 그것은 제법 긴 대화였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죠?”

“뿌리 깊은 나무가 묘목에서 큰 나무로 되기 전에 가지 몇 개 부러뜨리는 일입니다. 그저 브릴리언트 가문의 성장 속도를 줄이는 것뿐입니다. 주도는 왕자 전하께서 하실 겁니다. 어차피 브릴리언트 목장에 대한 투자에 대해서 총관과 약조도 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몽펠리에의 투자는 불파겐에게 숨기고 싶습니다.”

그림자 속에 있기를 원했다. 이에 대해서도 센은 냉큼 대답했다.

“그러십시오. 계약서만 들키지 않는다면 걱정 없을 겁니다.”

“파이룬과도 맺었습니까?”

그 말에 집사 센이 부정했다.

“북부 귀족과 함께한다면 몽펠리에가 가장 으뜸인데, 저희가 뭣 하러 파이룬과 함께하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계약서가 만들어졌다.

파충류의 초원에 들어설 브릴리언트 가문의 목장에 대해서 큰 투자를 하지 않고, 불파겐 영지의 남쪽에 들어설 목장에 큰 투자를 한다는 계약서였다. 이것만으로도 브릴리언트 가문보다 목장에 있어서는 크게 앞서 나갈 것이며, 기병에 관련된 것 또한 그들이 가져갈 것이다.

밖으로 나온 센은 호수 마을을 떠날 채비를 했다. 수행원 세 명이 센을 보호하며 말을 타고 빠져나갔고, 4시간이 지나서 일단의 무리 또한 밖으로 나갔다. 그들의 차림새는 용병단이나 다름없었다.

밤이 저물어갈 때, 야영지에서 두 무리는 서로 합쳐졌다.

“센, 몽펠리에와의 일은 잘되었나?”

“문, 당연한 소리를. 파이룬과의 협정은?”

“코 푸는 것보다 쉬웠다네.”

모닥불을 하나 두고 있는 두 사람은 모습이 똑같았다. 서로 쌍둥이였으며, 똑같이 길게이의 집사들이었다.

“몽펠리에와 함께 브릴리언트 가문의 목장을 견제함과 동시에 목장 사업을 함께하고.”

“파이룬 가문을 통해서 식량에 크게 관여할 준비를 한다.”

불파겐 영지에 길게이는 말과 밀에 크게 관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바로 은광이었다.

“척박한 땅에 은광이라니. 불파겐 자작은 정말이지 운이 좋아.”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의 계략으로 불파겐은 길게이 왕자에게 먹혔을 것이다.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은광산이었다.

“게제라스 총관이 언제 알아차릴까?”

“알아차려도 기병을 크게 양성할 때나 알아차릴 것이다. 밀에 대한 것도 상단을 쪼개면 그만이다.”

그들이 숙덕거렸다. 불파겐이 만들어낸 안락한 곳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만드는 일은 벌써 진행 중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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