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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켜어! 비켜!”
눈에 붕대를 감은 남자가 크게 손짓했다. 울퉁불퉁한 돌산에 잔뜩 모인 피난민들이 너도나도 비켰다.
“이크.”
“헉, 헉! 더럽게 가파르네!”
그 남자의 뒤에는 들것을 든 남자들이 여럿 있었는데, 모두 침통한 표정이었다. 들것에 실려진 남자의 얼굴은 주변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보였다.
“자유기사잖아.”
“막센 페리어스···”
“오크에게 당한 것 같은데.”
수근거림은 곧 돌산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버팔로를 타고 다니는 오크 10마리에게 따라잡힌 피난민들은 돌산에 숨어들었다.
자유기사 막센 페리어스의 판단이었다. 몸을 추스르고, 역습의 때를 노리기 위함이었고, 기병을 상대로 평지전을 할 엄두를 못 냈다.
고작 10기의 기병이지만, 피난민을 상대로는 과분할 정도의 전력이었다.
타닥···
모닥불이 지펴진 곳에 자유기사 막센이 들어가 졌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어?”
“오크들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버렸잖아. 조금 주변을 돌아다닌다는 것이 그만, 기습을 당했지 뭐야. 다 죽어버렸고, 겨우 살아남았어. 도끼에 투구가 쪼개졌지만, 살아있어.”
사각! 사각!
칼이 막센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흉터는 깊지 않았다. 천만다행이었고, 하늘이 도운 것이 틀림없었다.
오크의 투척 도끼는 강철로 된 문에도 박힐 정도로 정신 나간 무기였다. 그것을 맞고 이 정도다? 평생 써도 모자란 운이 그때 쓰인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콸콸콸.
도수가 높은 술로 소독하고, 최대한 깨끗한 천으로 머리를 받쳤다.
그 날을 기점으로 돌산은 오크들의 맛집이 되어버렸다.
“컥!”
“아빠아아!”
오크 전사가 올가미로 제법 건장해 보이는 남자의 목을 그대로 묶어서 내달렸다. 형편없이 끌려갔는데, 누가 신발을 잡았지만 신발이 금방 벗겨져 버렸다.
버팔로의 힘을 사람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오크 새끼들아!”
몇몇 용감한 남자들이 여럿 덤벼들었지만, 오크 전사들은 그들을 죽이지도 않고, 그냥 무시하며 버팔로를 탄 채 물러났다.
“퉷! 이러다간 남자란 남자는 다 끌려가게 생겼어. 자유기사의 상태는 어때?”
“머리에 딱지가 졌지만, 일어나지 않는다더라.”
건장한 인간 남자는 오크들에게서 가장 가치가 높은 노예였다. 인간 여자 또한 가끔가다가 포획했는데, 인간들이 교미해서 새끼를 낳아 노예의 수급을 원했다.
지독한 짓이었지만, 오크들은 인간을 고블린과 비슷한 취급을 하고 있어서 그들에게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인간들은 돌산의 위로,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면서 뭉쳤다.
수레는 버려지고, 식량 또한 지켜내지 못했다.
아기 몇몇과 허약한 어린이들이 굶어 죽고, 여자도 하나 굶어 죽었을 때, 〈자유기사 막센 페리어스〉가 그제야 눈을 떴다.
“흐으으···”
그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눈을 계속해서 깜박이면서 흐린 시야를 회복하려고 애를 썼다.
“정신이 드십니까?”
뒤에서는 반말 찍찍하다가도 자유 기사 앞에서는 존대를 했다.
“며칠이나 지났나?”
“5일입니다. 물이 부족해서 죽는 이들이 많습니다.”
막센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죄책감이 깊게 스며들어왔는데, 자신이 이끈 피난민이라서 더더욱 그러했다.
기사로서, 몰락했지만 귀족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후벼 팠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지만 그런 막센은 죄책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힐 여유조차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음에도 자신을 의지하는 이들이 180명이나 되었다.
“오크와 싸우는 것밖에 답이 없다. 돌산의 밑을 파보았나? 지하수라도 안 나오던가?”
“오크들이 무서워서 돌산의 위에만 바글바글 모여있습니다.”
“하아···그런가.”
막센이 마른침을 삼키려다가 기침을 했다. 목이 뻑뻑할 정도로 바짝 말라 있었다. 조금 남아있는 물이 막센에게 쥐어졌다.
이 절망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유기사가 필요했다.
돌산 밖으로 나간 막센은 오크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분명 어디에 구덩이를 깊게 파고 숨어있을 터였다. 혹은 식량과 남자 여럿을 약탈한 것에 만족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럴 가능성은 작지.’
희망적인 생각이었다. 고갯짓한 막센은 서늘한 가을바람을 마주했다. 그는 남은 사람들을 모았다.
“싸워야 한다. 가만히 있다면, 모두 노예로 부려질 것이다.”
그는 수많은 악독한 짓거리들을 이야기하며 사기를 높였다. 사람들이 적어도 싸우기 전에 독기를 품기를 바랐다. 오크의 도끼에 그 독기는 쉽게 분질러지겠지만, 아닐 수도 있었다.
‘거기에 건다.’
밤 동안 돌산의 어수선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꺼먼 흙으로 만든 진흙을 몸에 바른 오크 전사들은 그것을 보면서 손을 비비적거렸다.
“인간 놈들이 내일 어떻게든 활로를 뚫으려고 하겠는데.”
“하여간, 자신들이 나약한 것을 잘 모를 때가 있다니까. 난 도저히 이해가 안 가더라.”
오크들은 서로 킬킬거렸다. 허약한 인간들은 왜 그렇게도 오크와 동등하게 서려고 하는지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할래?”
“하던 대로 한다. 돌산을 벗어나고, 더는 돌아가지 못할 때 모습을 드러내어서 추격하고, 저항하는 놈은 죽인다.”
“인간 수컷은 아까운데. 인간 암컷만 붙어두면 저항도 잘 안 하거든.”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 인간은 매우 수동적이 되어버린다. 그건 오크들에게 매우 좋은 노예였다. 고블린보다 노동력이 높고, 지능도 더 좋았기에 고블린보다 비싸게 거래되는 것이 인간 노예였다.
북부 순찰자 때문에 인간 노예는 매우 구하기 힘들었기에 이번에 최대한 많이 끌고 가고 싶은 것이 오크들이었다.
“통솔자부터 죽인다면 죽일 놈들을 줄일 수는 있겠지.”
순식간에 밤이 지나갔고, 새벽이 왔음에도 돌산은 조용했다. 고민 끝에 막센이 판단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기다려보자.’
오크들은 성 함락에 큰 힘을 투자하고 있어서 희망이 보였다. 잠을 자면서 조금이라도 생각을 더 할 수 있었기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막센은 순시를 돌며 돌산의 아래를 다시 한 번 차지했다. 오크들은 한 바퀴를 돌면서 위협을 했지만, 자유기사의 통솔을 받는 피난민들은 되려 고함을 지르면서 도발하였다.
“쯧.”
오크 약탈자들이 혀를 찼다. 일관되지 않은 인간들의 판단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인간의 사기는 그들이 봤을 때, 변덕스러움을 넘어서 정신병처럼 여겨졌다.
“어떻게 할래?”
한 오크 전사가 다른 오크 전사에게 물었다. 대답은 뻔했다.
“오히려 이득이다. 제풀에 쓰러질 때, 가서 모조리 쓸어담는다.”
정오 무렵, 경계를 서는 이가 부풀어 오른 배를 부여잡은 채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광대뼈가 앙상했고, 피부는 갈라져 있었으며 입은 메말랐다.
반짝.
눈이 찌푸려졌다. 울퉁불퉁한 언덕들 사이로 반짝이는 빛이 잠시 경계를 서던 초병의 눈을 괴롭히고 다시 사라졌다가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뭔가가 온다. 뭐지? 갑옷일까?’
가슴이 쿵쿵 뛰었다.
“까아아악!”
초병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태양 때문에 검은 그림자가 아래로 보였다. 이 때문에 검은색의 까마귀로 보이는 카이야가 돌산 주위를 맴돌며 소리를 냈다.
“작은 걸 보니 독수리는 아닌데.”
“매가 저렇게 돌았나?”
“지원군이 아닐까?”
웅성거림에 최대한 체력을 보존하며 벌레를 씹어먹던 〈자유기사 막센〉이 서둘러 나왔다.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먼 거리에 있음에도 드낙이 입은 전신갑주를 단번에 간파할 수 있었다.
‘말을 탔다. 점으로 보이지만, 분명 갑옷이다.’
기사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자신들에게 오고 있는 기사는 패배를 경험한 기사로 보였다는 점이었다.
‘〈기사 마차〉가 없어.’
기사에게 필수품이 바로 기사 마차였다. 메시지 마법을 통해서 가문에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고, 다양한 물약과 보조 마법 물품이 그득했다. 또한, 마차 자체에 다양한 마법이 걸려있었다.
그것이 없다는 것은, 기사마차를 버렸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패잔병인 셈이었다.
“후우···”
막센은 힘이 쭉 빠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는 이 기회를 통해서 다시 한 번 피난민 180명의 단합을 한층 더 높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기사가 온다면, 승산이 있다! 모두 나가서 싸울 준비를 하자!”
“와아아! 살 수 있어! 살 수 있다고!”
패잔병이라도 기사는 기사였다. 오크 1명은 너끈하고, 2명은 시간을 끌어줄 터였다.
‘어떻게든 도와서 오크의 숫자를 줄이고, 사람들을 흩어지게 도망치게 한다면···’
최대한 많은 사람이 살 수 있을 터였다.
‘쓸데없이 승세에 연연해 하지 말자.’
이길 생각은 애초부터 가지지 않았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한 일을 매듭짓자.’
그 매듭이 비록 피가 많이 묻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살린다는 마음가짐을 가졌다.
오크들은 돌산의 사람들보다 뒤늦게 기사의 존재를 파악했다. 거진 200걸음에서 확인을 했는데, 언덕을 이리저리 오갔기에 구덩이를 판 오크들의 시야는 낮을 수밖에 없었다.
“미친놈인가.”
“기사 마차를 약탈당한 기사네. 전신갑주의 마법도 다 썼을 수 있어.”
“방심하지마.”
오크들은 버팔로를 타면서 그대로 기사에게 향했다.
언덕 위에 오른 기사는 말에서 거침없이 내렸다. 그 모습에 오크 전사들이 의문을 띄웠다. 기병전에서 기병을 포기한다니? 더군다나 자신들은 버팔로를 타고 있었다.
그 충격량과 기동성을 가볍게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펄럭.
깃발 하나를 말의 엉덩이에 둔 기사가 방패도 없이 롱소드 한 자루만 빼 들었다.
이 세상에서의 병기는 매우 중요했다. 롱소드는 전쟁용으로 쓰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오크를 상대로 했을 때, 썩 좋은 무기는 아니었다. 오크의 뼈를 자르기 힘든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아! 저 깃발은!”
돌산을 서둘러 내려가며 기사를 도우려고 하는 막센이 탄성을 내질렀다. 〈드낙 불파겐〉이 수많은 명성을 쌓으면서 자연스럽게 불파겐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풀렸는데, 그중에서는 깃발과 인장에 대한 것도 많았다.
붉은색 바탕에 위로는 일곱개의 새하얀 별! 아래로는 검은색의 꽂힌 검이 있는 깃발은 절로 저 기사가 〈드낙 불파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부, 불파겐이 왔다! 불파겐이 토치라이트 가문과 메디오인을 위해서 검을 빼 들었다!”
긴 철퇴를 하늘 높이 들고, 소리를 외친 자유기사가 방패로 사정없이 메이스의 긴 부분을 때렸다. 철 소리가 크게 났다.
“불파겐!”
피난민들도 눈을 크게 떴다.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막센의 뒤를 마구잡이로 피난민 남자들이 따라나섰다. 그 수가 60명이 넘었다.
“큐랄! 쿰스! 오른쪽 오크 전사들은 인간 잡졸들을 상대해라! 저번에는 우리가 했잖아!”
“아, 이걸 놓치네!”
오크 전사 다섯이 역으로 돌아서 인간들의 피난민에게로 향했다. 기사와의 싸움을 뒤로하는 것에 큰 아쉬움을 가지는지 계속해서 드낙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포기했는지 거칠게 버팔로를 몰았다.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고, 저 강철을 두른 전사놈이 어떻게 싸우는지 구경이나 하자고!”
오크 다섯이 순식간에 피난민들에게로 향하자 막센이 기겁했다. 기사에게 죄다 어그로가 안 끌리다니, 예상한 것과 달랐다.
“모여라! 모여!!”
버팔로가 덤벼들고 있었다. 나무창이 땅에 박히고, 나무창을 앞발로 단단히 받쳐준 다음에 사람들이 나무창을 쥐고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중에는 농기구도 제법 보였다.
“으으···”
벌벌 떠는 이들이 많았다. 정규병과는 달랐다. 사기를 유지하는 게 매우 힘들었고, 기병 돌진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었다.
휘리릭!
오크 전사들이 도끼를 투척했다.
“컥!”
단번에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다. 변변찮은 방어구 하나 입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불파겐이 왔다! 우리가 저 오크들을 조금이라도 감당해야 한다! 그래야 가족들이 산다! 그래야 우리가 산다! 이 땅이 살 수 있다!”
막센이 고함을 내지르며 사람들을 계속해서 건들고 다녔다. 오크 전사들은 생각보다 인간들이 버티자 계속해서 돌면서 버팔로의 옆구리에 챙겨둔 투척 도끼를 던져대었다.
던지는 족족 사람들이 쓰러지기 바빴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순간 한계를 맞이했는데, 죽은 사람들을 엄폐물로 삼아서였다.
“돌진해서 인간들을 죽이자!”
“와아아야아알트!”
오크들이 고함을 지르면서 돌진하기 시작했다. 앞줄이 죽었기에 나무창은 삐뚤삐뚤했고, 도끼에 안 맞으려고 이리저리 움직여서 땅에 대충 박아넣은 나무창도 통일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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