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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마을〉을 거치려고 하는 드낙은 토치라이트 가문의 전령과 마주할 수 있었다.
촤락!
거칠게 친필 서한을 읽었다.
‘파죽지세로 밀리고 있군.’
초기대응에 실패했으며, 오크들이 토치라이트 영지 내로 들어왔다는 것이 적혀져 있었고, 도움을 요청함과 동시에 최대한의 대가를 주겠다는 것이 적혀져 있었다.
‘뭘 어떻게 했길래 이 정도로 약속을?’
〈야수 기사(Beast Knight)〉라 불리는 토치라이트 가문의 가장 강력한 기사인 〈그라돈 토치라이트〉라도 사망하지 않고서야 드낙만이라도 와달라는 소리는 괴이하게 여겨질 정도였으며, 일순 함정으로도 보였다.
불파겐의 시답잖은 짓거리에 당하는 토치라이트 가문 입장에서는 남부 왕국과 붙어먹을 가능성 또한 존재했다.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은 가야 한다.’
〈대산〉은 인간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드낙은 산길을 오르지도 않았다.
“도노오오오!!!”
그저 거칠게 소리를 내질렀다. 1시간도 안 되어서 도노가 도착했다. 어느새 푸른색의 털가죽을 지니고 있었다. 그만큼 대산의 정기와 드낙의 주력을 많이 받아먹은 증거였다.
“크릉.”
머리를 들이밀자 드낙이 쓰다듬어주고, 살짝 껴안았다. 서로 숨결이 목에 닿았다.
드낙은 늑대 무리를 모두 데려가지 않았다. 초장거리 여정이었고, 늑대의 식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보급을 늘리면 이동속도가 느려지기에 선택할 수 없었다.
‘늑대는 얼마든지 휘어잡을 수 있다.’
물론 까마귀 카이야는 언제나 드낙과 함께하고 있었다. 따로 부를 필요가 없었다. 대산의 정기를 받지는 못했지만 드낙의 주력을 독차지한 카이야는 새하얀 털을 지닌 까마귀가 되어있었다.
‘석지 마을로 간다.’
“깃발을 다오!”
또한 석지 마을에서 불파겐 깃발을 찾았다. 이스핀이 급하게 나왔지만, 드낙은 최대한 간결하게 말하고 바로 말머리를 돌려야 했다.
“영주님!”
“이실레아 경은 어디에서 활동하고 있는가?”
“주변 마을을 순시하고 있습니다. 발룬 때문에 저희가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워낙 지구력이 좋은 것이 발룬이었다. 생체 KTX라고 해도 무방했다.
“나는 홀로 토치라이트 영지로 향하겠다. 몽펠리에와 파이룬이 위험하다면, 병력을 그쪽으로 돌리라고 해라.”
오면서 잠깐 고민했던 것을 이스핀에게 말했다. 총관에게 말했던 것과 조금 달랐다.
‘불파겐의 깃발.’
붉은색 바탕에 위로는 일곱 개의 새하얀 별.
아래로는 검은색의 꽂힌 검.
그 깃발은 드낙 불파겐의 명성과 함께 모르는 자들이 없었다. 이것은 드낙이 홀로 움직이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이랴!”
말을 바꾸고 드낙은 토치라이트 가문의 전령과 함께 단번에 북서로 향하였다.
말을 거의 버리다시피 하며 보름 만에 토치라이트 영지에 도착한 드낙은 곧바로 전령에게 말했다.
“자네는 〈횃불 성채〉로 가게. 나는 나대로 움직이겠다.”
“예? 자작님! 하지만 친필 서한에는···”
“횃불 성채로 오라는 소리가 없었지. 더 말하기 귀찮으니, 서둘러 가게.”
전령은 감히 더 말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드낙과는 다른 길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피난민에게서 들었겠지? 이미 성이 다섯 개나 오크에게 함락되었다. 북쪽에 남은 것은 이제 〈횃불 성채〉 하나뿐이다. 나는 정반대 쪽에서 활약할 테니, 무조건 버티고만 있으라고 말해라.”
“예!”
드낙은 서북으로 계속 내달렸다. 가는 길은 평탄했는데,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 덕에 안심할 수 있었다. 때때로 피난민들이 보였지만 오크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자들이라고 했다.
‘세파리아스의 예상 안 중에 하나에 해당한다. 다행이다! 약탈이 목적이 아니야! 놈들은 진짜로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서 왔어.’
인간에게 중요한 성을 함락하는 데 많은 힘을 집중하고 있어 보였다.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뻗어 나가 마을을 파괴하거나 약탈하는 오크들이 적어서 그 여파가 느리게 진행되는 것이 분명했다.
드낙에게는 좋은 소식이었고, 토치라이트 가문에게는 안 좋은 소식이었다.
〈오크의 가을〉을 생각한다면, 성이 여럿 함락될 수밖에 없었다. 드낙은 〈검은 회의〉에서 세파리아스가 점지해준 것을 상기했다.
‘···이 경우에는 전략적인 패배가 계속해서 강요될 것이다.’
초동진압이 실패하고, 오크들의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면, 성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갈 것이다. 이렇게 급하게 드낙에게 전령을 1명만 보낸 것도 그런 배경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성은 포기한다.’
드낙은 거침없이 판단을 내렸다. 검은 회의 덕분에 답안지를 놓고 답을 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목적은 〈검은 산골 마을〉의 보호였지만, 오크들이 완전한 지배를 원하고 성을 함락하는 데 힘을 쓰고 있다면 이 영지를 포기하는 게 옳았다.
‘지킬 필요가 없다.’
드낙의 눈은 사람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토치라이트 영지의 혼란을 빌미로 삼아서 오크를 죽여서 업을 핥을 생각으로 가득 찼다. 동시에 피난민들을 최대한 남하시켜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나마 유지해준 가족에게 보답할 생각이었다.
해가 저물었다. 말이 더는 가지 못해서 드낙은 도노, 카이야와 함께 길의 옆에서 나무를 등지고 모닥불을 지폈다.
‘앞으로의 계획.’
드낙은 다시 한 번 정리했다.
1. 검은산골마을까지 진출하여 오크들의 피해를 최소화한다.
2. 토치라이트 가문은 손절한다. 오크들의 힘이 그곳에 집중될 수 있도록 방치한다.
3.혼란에 휩싸인 토치라이트 영지를 통해서 오크들의 업을 획득한다.
4.성이 아니라 광역으로 움직여서 많은 피난민들이 남쪽 혹은 자신의 영지로 향할 수 있게 한다.
‘···다섯. 결코 가족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보여도 딴 사람처럼 굴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신분의 벽이라는 것은 현대인의 상상보다 더 높고, 단단하며,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었다. 강하다고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인류〉 전체가 신분제라는 것에 물들어 있었다.
잘근.
드낙이 손톱을 깨물었다. 도노가 잡아온 사슴의 뒷다리가 나무 꼬챙이에 끼워져 있는 곳에 기름을 주르륵 흘려냈다. 그것을 보며 드낙이 잠깐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누구도 내가 평민이라는 걸 믿지 않겠지.’
당연하다.
어느 미친놈이 그딴 걸 믿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드낙이 아버지인 할다낙과 자신의 형인 세르낙을 끼고 돌 수는 없었다.
날 키워준 양아버지라고 했을 때, 들어오는 멸시는 결코 드낙이 보는 곳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고, 뒤로 돌 것이다.
평생을 그렇게 될 것이다. 드낙이 인간 사회라는 곳에 있는 이상, 황제로 등극해도 그 흠은 끝을 모르고 커져만 갈 것이다.
드낙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쇠심줄처럼 굵어질 터였다.
그가 명성을 높이면 높일수록 넝쿨처럼 엮어져서 그를 묶을 터였다.
그게 〈신분〉이라는 이름의 사회 모습이다.
왕도 사생아라면 치를 떨며 스트레스에 휩싸여 단명을 하게 만드는 게 신분이라는 놈이었다. 절대권력도 우습게 만들고 어린 애새끼처럼 욕하기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신분이었다.
‘물론 아닐 수 있겠지. 전혀 의심을 안 받을 수도 있고, 날 음험하고 질투하는 자들이 없을 수 있다.’
비전 하나 모르는 애비를 아버지처럼 모실 수 있다. 검술이 형편없는 형을 풍요롭게 살게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비전을 비롯한 여러 가지 〈계승〉이 이루어진 드낙인데 그 부모와 형제는 하나도 모른다?
‘리스크를 짊어질 수 없어.’
귀족사회는 지금 드낙에게 꼭 필요했다. 적어도 중립신이 뭔가 결단을 내려서 표면적으로 나올 때까지 세력을 일구는 것은 드낙이 해야 할 일이었다.
부모를 구한다? 사람이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드낙은 최소한 할 것은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드낙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박호훈의 자아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였다. 첫 번째 부모가 아니라 두 번째 부모였다. 그것도 한국처럼 희생적인 부모가 아니었다.
자식이라면 그냥 모든 걸 해주려고 노력하는 부모가 아니었다.
네 인생은 네 인생이라면서 적당히 다그치고, 적당히 훈계하고, 필요한 돈도 주지 않고 나중에 가서야 드낙이 해볼 만 하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돈을 한 번 준 것이 전부였다.
‘최소한 해줄 것은 해주겠습니다. 너무 날 패륜아로 보지는 마십시오. 나한테 있어서도 일등부모는 아니었으니.’
최대한 북서로 이동하며 〈토치라이트 가문〉의 영주성이며 전투요새이기도한 〈횃불 성채〉의 정반대에 있는 토치라이트 영지에서 활약할 뿐이었다.
‘오크들은 강하다.’
신체능력이 뛰어나고, 태어나자마자 전사라고 부를 특징들을 지니고 있었다. 놈들이 지닌 타투는 변수를 크게 창출해낼 수 있었고, 드낙은 그것에 대단히 조심해야 했다.
성보다 오히려 이런 야지에서 활동하는 게 생존율이 더 높았고, 활약도 마음껏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난 세파리아스가 아니니까.’
드낙이 횃불로 눈길을 돌려서 사슴의 뒷다리를 우악스럽게 잡아서 뜯었다.
‘개새끼. 회전 한 방이면 활로를 만들 수 있다고? 진짜 목숨 내놓고 사네.’
우적. 우적.
육즙이 줄줄 흘러내렸다.
탐욕스러운 식사를 하면서 드낙은 조용히 자신만의 싸움 계획을 점검했다.
사박.
수풀이 흔들리고, 풀 밟는 소리가 났다. 도노가 일어나서 냄새를 맡았지만 역풍이었다. 맡을 수 없었다.
“찍찍!”
붉은털에 뿔이난 〈핏빛쥐〉들이 여럿 수풀 밖으로 나왔다. 그들을 헤치며 11인의 원로 중에 한 마리인 〈한성질 쌍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성질 쌍쥐는 가죽방어구에 여러 가지 투척 무기와 대거를 혁대에 차고 있었고, 자기 상체를 가릴 만한 방패를 등에 매고 있었다. 다른 핏빛쥐들 또한 한손도검류에 방패로 무장하고 있었다.
흐흠흡!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드낙에게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뜨낙! 위대하신 분을 뵙습니다.”
대장쥐보다는 흥분하는 기색도 적었고, 눈에는 존경심보다는 의심이 깃들어있었다.
“뜨낙!”
다른 핏빛쥐들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어디의 누구냐?”
드낙의 말에 그가 대답했다.
“저는 한성질 쌍쥐라고 합니다. 이들은 제가 이끄는 〈굳은살 리전〉의 병사들입니다.”
“몇 마ㄹ···명이나 되느냐?”
“말씀만 하신다면 3만 명이라도 동원할 수 있습니다.”
드낙이 그 말에 물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아는 눈치인데.”
이에 한성질 쌍쥐가 붉은 눈을 작게 떴다. 아주 비열하게 보였다.
“말씀드리기에는 송구하오나 허접한 인간종족이 오크에게 형편없이 밀리고 있고, 위대하신 드낙님께서는 그들을 구하러 홀로 이곳에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드낙은 허접한 인간이라는 말에도 무덤덤했다. 자신과 이곳의 인간은 태생부터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오크의 숫자는?”
“못해도 3만은 됩니다.”
드낙의 눈이 커졌다. 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이 영지에만?”
“예. 닥치는 대로 성을 함락시키고 있습니다.”
드낙이 잠깐 고민하다가 한성질 쌍쥐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넌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한성질 쌍쥐가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드낙은 궁금하여서 물어보았다. 인간을 까내리는 것을 보니, 해결책을 나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무슨 고민을 하겠습니까? 인간종을 버리십시오. 위대하신 분이시여. 인간에게 지상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흐흠흐!
그가 거칠게 호흡했다.
“과분한 데다가, 자격도 없지요. 그들은 왜 살아있는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종족을 위해서 이바지하는 것보다는 서로 비교질이나 하며 살기 바쁩니다.”
“오크는 다르나?”
흐흠흐!
한성질 쌍쥐가 거칠게 호흡하며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인간보다 더 개인적인 자들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강합니다. 저희 핏빛쥐들이 몇십 마리가 달려들어도 하나를 죽이는 것도 버거웠습니다. 그리고 부락으로 하나 될 줄 압니다.”
“그래서?”
“지상은 오크가, 지하는 핏빛쥐들이 먹으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인간들은 하위 계층으로 삶을 도모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들은 덩치도 제법 있으면서 어떻게 그리 잘 도망을 치는지. 〈기사〉가 없으면 오합지졸입니다.”
규합할 존재가 없으면 아무리 긍지 높은 메디오인이라도 도망치기 바빴다. 드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그럴듯한 생각이었다.
‘오크들과 화친을 하는 핏빛쥐라···’
전황이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이용할 수 있어 보였다.
“일단은 지하에 숨어있어라.”
“예. 말씀만 하십시오. 저희들은 드낙 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드낙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하자 핏빛쥐들이 뜨낙을 외치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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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추코! 다양한 의견추!
내일 연재는 없을 수 있습니다. 최근들어서 연재가 늦어지는 이유는 나중에 마음을 추스리고 자세하게 독자분들에게 말씀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