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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전사-456화 (455/1,239)

456 <-- 오크의 가을 -->

백설산맥(白雪山脈).

남부 왕국과 제국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막인 이곳은 오크들의 세력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북부 순찰자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일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또 삽질하려나.”

3명에서 7명으로 유기적으로 인원변동이 심한 것이 순찰자의 조직도였다. 그 이유는 한 그룹의 노하우가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가게 하고, 급박한 상황 속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그룹과 잘 소통하기 위함이었다.

그놈이 그놈. 이놈이 이놈처럼 느껴질 때까지 그룹원이 계속 바뀐다고 보면 될 정도로 그룹 내 인원 변동이 심했다.

“너, 벤 조장을 잘 모르는구나?”

“〈순찰조장〉이라던데···”

어제 들어온 순찰자의 빈약한 말에 다른 순찰자들이 키득거렸다.

〈순찰조장 벤〉!

온갖 위험을 즐기며 함정의 설치도 하지만 그것은 그저 부업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순찰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자가 벤이었다.

순찰자 5명은 벤과 함께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여기는 전에 왔으니, 이번에는 이쪽으로 가자.”

“저번에 절로 갔으니 이번에도 이쪽으로 가자.”

명령 자체가 통통 튀었다. 그 덕에 그들의 순찰 루트를 오크들이 알 수가 없었다. 산양들이 다니는 절벽길을 옆으로 지나가면서 아래를 탐색하기도 하는 것이 벤의 무식한 방식이었다.

물론 그런 전술 행동을 다른 순찰자들이 소화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면서 오크들의 동태를 그 어떤 순찰자 그룹보다 먼저 파악할 수 있는 벤의 순찰대는 오크들의 준동을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었다.

“개새끼들. 요즘 좀 조용하다 싶었다.”

벤이 이를 갈며 보통 시기보다 빠르게 추수되고 있는 오크 나무를 확인했다. 무식하게 장대로 후려쳐서 열매를 떨어뜨리는 방식은 오크 특유의 방식이었다.

약재를 나무에 먹인 오크 나무의 열매는 햇볕에 두어도 1달 이상 신선도가 유지되는 판타스틱한 보존식량이었다.

“다 익지도 않았는데, 다 걷어가는 거 봐라. 뭐겠냐?”

“근데 하도 많이 심어서 저 정도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아니라고?”

벤의 말에 다른 순찰자들은 뭐라고 더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가볍게 여기기에는 제법 그럴듯한 의견이었다.

그들은 바로 복귀하여 이 정보를 다른 순찰조와 공유했고, 놀라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모든 오크 부락이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벤 덕분에 북부 순찰자들은 오크의 침공을 앞서 파악할 수 있었다.

시각적으로 순찰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숲에서 이야기가 오고 갔다.

“3일 뒤에 〈반대골 산〉에서 순찰자 조장들을 모두 모은답니다.”

“알겠다. 넌 그대로 다른 곳으로 향하나? 순찰자.”

“아닙니다. 이곳에서 벤 순찰조장의 그룹에 속하라고 들었습니다.”

벤의 순찰대는 7명으로 늘어났다. 벤은 홀로 〈반대골 산〉으로 향했다. 그곳은 백설산맥쪽으로는 급경사로 이루어진 산이었고, 반대편은 완만하여 나무와 수풀이 빼곡하게 자라나 있어서 모이기 좋았다.

가파른 골을 통해서 순찰자들이 경계를 하므로 능선 쪽은 오랜만에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끄러웠다.

“흐흐.”

벤은 그게 전혀 싫지 않았다. 그 또한 그곳에 합류해서 오랜만에 보는 순찰조장들을 만났다. 모두 제각각 직함이 크게 달랐고, 그냥 명성 있는 이름을 내세우기도 했다. 자유가 흘러넘치는 조직이 순찰자들이었다.

그렇기에 조직력이 낮았지만, 그걸 책임지는 것이 숭고한 희생이고, 순찰자라는 이름에 대한 자존심이었다. 그게 무너진 순찰자는 탈주하지만 그러지 않은 순찰자들이 대다수였다.

철창 없는 군대라는 모순 있는 말이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이번 오크의 가을은 유례 없을 규모다! 모두 블랙 스케일 와이번을 길들인 그 미친 오크 놈을 봤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연배가 높은 순찰자가 이야기를 진행해나갔다.

강력한 오크 지도자의 등장은 수십 개의 오크 부락을 하나로 결집했고, 오크들은 전쟁을 원하고 있었다.

그건 보통 오크의 가을이 아니었다. 부락 하나가 가을과 새로운 대전사의 지휘력을 위해서 약탈을 벌이는 게 보통의 오크의 가을이었다.

이번에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오크 부락이 오크 나무를 장대로 후려치면서 열매를 따고, 나무 안에 나무로 된 대롱을 달아서 수액을 채취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오크의 가을에는 국지전을 예상하여 지역적으로 움직이며 백설산맥을 무대로 싸웠지만, 이번 일 같은 경우에는 불가피하게 백설산맥을 포기해야 한다!”

단 하나의 부락이 날뛰면 다른 곳에서 암약하여 괴롭히면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전술을 사용할 수 없었다. 백설산맥 전체가 오크로 들끓을 것이다. 순찰자들은 어디를 가나 오크와 마주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곧 전면전을 뜻했다. 유격전이 성립될 수 없었다.

“기만전일 수도 있지 않나.”

벤이 이견을 내었다. 오크들은 겉으로는 호방해 보이지만 철저하고 냉철한 사냥꾼이었다. 영악하고 음험하지만 필요할 때는 맹수와도 같은 용맹성을 지녔다. 그렇기에 오크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백설산맥은 한 번 올라가면 지키기는 쉽지만, 한 번 내려가면 다시 점령하기 힘들다. 그래서 오크들이 백설산맥의 완전한 점령을 위해서 허튼짓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말 그대로 피하나 안 흘리고, 백설산맥의 완전한 지배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 음흉함에 다른 순찰자들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소같은 오크 전사들도 그 외면과는 다르게 내면에서 엄청나게 머리를 굴리는 걸 알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렇게 노골적으로 모여서 계획대로 물러난다면, 오히려 오크의 가을을 뒤로 미루고, 우리가 점령한 백설산맥에 만족할 수도 있다.”

급하게 순찰자들이 물러가면 오크들이 노골적으로 노선을 변경할 수도 있다는 위험도 있었다. 그들은 AI처럼 프로그래밍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순찰자들의 행보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절로 머리가 아파질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교전은 해야 한다는 말이군.”

“함정도 많은데, 한 번 붙어볼 만하지 않은가.”

“모든 오크 전사들을 상대로?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순찰조장들이 모여서 이 소리 저 소리를 해대었다. 하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들이 상대하는 것이 오크였기 때문이다.

전사라면 전사.

사냥꾼이라면 사냥꾼.

자연을 벗 삼고 살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타투를 통해서 초월적인 도전을 즐기는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상대로는 정신적으로도 지고 들어간다.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그러고 나서 빠져나가자.”

“북부의 영주들에게 전령을 보내겠다.”

결국 판단은 순찰조장들 각자의 판단으로 남았다. 적당히 싸우고, 적당히 빠지기로 했다. 애매한 판단이었지만 서로 간의 유대감이 강했기에 물 흐르듯이 진행이 될 터였다.

순찰자들의 장들은 다시 흩어졌다. 그 사이에 오크들은 추수를 마무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슥슥!

땅에서 그대로 뿌리를 빻은 것으로 피부를 가린 순찰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멀리서보면 그냥 수풀로 보일 정도로 위장을 잘한 상태였다.

벤은 자신의 그룹에서 5년 동안 함께한 견습 순찰자에게 돌돌만 붉은천이 감긴 것을 던졌다.

“뭡니까?”

“뭐긴 뭐야. 〈팬크리스 영주〉에게 오크의 가을이 왔다고 알리라고 주는거다.”

“그건 후방에 있는 순찰자 훈련생들도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5년을 함께하며 겨우 순찰자 노릇을 하게 된 〈순찰자 수반〉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반대했다.

“이딴 삼각깃 휘날리며 백설산맥을 벗어나려고 전 순찰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조장님.”

“시끄럽다. 네 마음도 이해하지만, 우린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다. 우리들이 얻은 노하우를 아는 놈 하나는 살아서 가을이 끝나면 훈련병들에게 가르쳐야 하지 않겠어?”

“끙.”

수반이 앓는 소리를 냈다. 반박을 하기에는 동료들에게서 배운 것이 많았다. 그것이 계승되지 않고, 그저 먼지처럼 사라진다면, 죽은 이들에게 어떤 말조차도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렇게 리액션을 취하면서도 손가락이 간질간질했다.

‘이렇게 갈 수는 없는데···’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반은 머뭇거렸다.

“X같은 오크들 면상이 그렇게 보고 싶으면 나랑 바꾸던가. 임무를 가려서 받는 새끼한테 뭔 말이 더 필요하냐? 그냥 오크랑 싸우다가 죽어라. 그냥.”

긴 머리를 땋은 〈말괄량이 데릭스〉가 이죽거리면서 말했다. 그 말에 수반이 동글동글한 붉은 천을 품 안에 챙기며 일어났다. 하지만 어깨가 다른 순찰자들에게 잡혔다.

“왜요? 또.”

“무기도 다 놓고 가. 우리 자주 모이는 나무 있지? 가죽 포대에 넣어서 땅속에 파묻어놓을게.”

“에이. 이건 진짜 아니다. 맨손으로 어떻게 산에서 내려가요?”

수반이 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요새끼. 요거. 포기 못하는 건 여전하다니까. 놓고 가. 안 그러면 부러뜨린다.”

벤이 몸을 일으키자 수반이 활에서 손을 뗐다. 다른 순찰자가 수반이 지닌 모든 무기를 회수했다.

단검 하나 지니지 않은 수반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막내한테?”

“원래 막내가 가장 힘든 거야. 빨리 꺼져. 우리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있다.”

“젠장할···”

수반이 발로 바닥을 한 번 차고는 이내 숲 속으로 사라졌다. 몸을 낮추고 순식간에 시야에서 벗어났다.

남은 순찰자 중 하나가 벤에게 말했다.

“팬크리스 영지는 병사 수가 적습니다. 민병들이나 자유 기사가 모일 정도로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트롤 토벌 당시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가주가 죽었고, 가주의 여동생은 농지 개혁을 위해서 검을 놓은지도 오래되었다. 17살에 불과한 늦둥이가 가주가 되어서 영지를 이끄는 상황이었다.

“팬크리스 영주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얻고 있다. 5일만 우리가 버텨주면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풍 자체가 약간 공산주의와 비슷한 것이 팬크리스 가문이었다. 다른 곳에 비해서 민병대의 숫자와 자유 기사의 숫자도 많았다.

“5일이라···”

순찰자들이 혀를 찼다.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벤은 턱을 문지르면서 킬킬 웃었다.

누구도 그 웃음의 진짜 의미를 알지 못했다.

“우리가 걱정해봤자 뭐가 바뀌겠냐. 오크들의 부락이 각개전투를 할지, 하나가 되어서 어느 한 곳으로 쐐기처럼 박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계획대로 할 뿐이었다. 못해도 북부는 내륙전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게 최선이었다.

‘지금까지 계속 보고를 올렸으니, 더 많은 이들이 규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맹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크들의 대규모 준동을 순찰자 혼자서 막을 수 없었기에 순찰자들이 후퇴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순찰조장 벤은 순찰자들을 이끌고 백설산맥의 숲으로 들어갔다.

“보통보다 더 깊이 들어간다. 오크 전사들이 예상치 못했을 때, 효과를 볼 것이다.”

함정 없이도 기습의 힘을 빌린다면 능히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2일 뒤, 오크들의 대규모 공격이 백설산맥을 뒤흔들었다.

벤의 그룹에도 그들은 들이닥쳤다. 험지에서도 보이는 것만 오십이 넘었고, 그 뒤로 오크 전사들이 줄줄이 엮어져서 산을 순식간에 타고 있었다.

나무 위에서 벤이 수신호를 사용했다.

“후우우우웅! 후우우우우웅!”

거친 숲바람 소리에 아래에 있던 순찰자들이 고개를 내려서 표시된 곳에 왼발이 있는지 재차 확인한 다음에 허공에 화살을 쏘았다.

피피핑!

하늘 위로 순찰자들의 화살이 쏘아졌다. 미리 나무 위에 나뭇가지들을 쳐대어서 구멍이 뚫려있었고, 화살을 볼 수 없도록 우거진 곳에서 쏘았기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쏘아진 화살은 그대로 오크들을 무작위로 타격했는데, 워낙 많이 몰려오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고 동시에 순찰자들이 오크들이 갈 법한 곳, 손을 짚을 만한 곳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경험에서 우러러 나오는 산에서의 곡사!

“빌어먹을 순찰자놈들!”

오크 전사 하나가 사위를 살피면서 곧바로 엄폐를 시행했다. 거친 손이 나무 등치를 훑으면서 위에 있는 나뭇가지를 자신의 머리 위에 놓았다.

뚝.

뭔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독가루가 팡하고 터져 나왔다.

“······!”

물론 오크 전사 또한 녹녹한 상대가 아니었다. 소리만으로도 함정인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숨을 참고, 눈을 질끈 감으면서 네발 달린 짐승처럼 뒤로 물러났고, 정확히 그곳에 벤의 저격이 감긴 눈을 꿰뚫었다.

“크악!”

“저쪽이다!!!”

오크 전사 하나가 애꾸눈이 되었지만 동시에 오크 전사들은 화살이 쏘아진 방향을 정확하게 인지했다. 무시무시한 인지력이었다.

순찰자들은 사방팔방 도망쳤다. 달리던 벤은 자신의 손으로 손바닥에 칼집을 내어 피냄새를 풍겼다.

‘5일을 버티려면, 오크들의 사냥감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사냥꾼이었다. 뒤가 불안한 상태로 결코 싸움에 나설 수 없었다. 하지만 벤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 다른 순찰자들 또한 〈팬크리스의 어린 영주〉를 위해서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이다.

오크들의 습성을 잘 알기에 그들은 백설산맥의 더욱 깊은 곳으로 도망쳤다. 오크들은 결코 이것을 무시하고, 내려가지 못할 것이다.

이 행동은 비단 벤의 그룹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정확하게 절반의 순찰자가 시간을 벌기 위해 백설산맥의 깊은 곳으로 자진하여서 들어갔다. 모든 순찰자가 가장 북부스러운 영주들을 강하게 신뢰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6222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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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대구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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