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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파리아스 불파겐〉은 눈을 떴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열었다. 새벽바람은 쌀쌀했지만 드낙의 괴물 같은 육체는 추위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인간보다 체열이 높기 때문이었다.
“하아아, 후우우.”
크게 숨을 들이키며 숨 쉬는 기쁨을 즐긴 세파리아스는 새벽 수련을 했다.
‘인간을 이미 초월한 육체다.’
트롤에 신성력까지 생각한다면 그 어떤 행위 속에서도 전투를 지속할 수 있었다. 세파리아스는 드낙이 자신 때문에 패왕의 길을 걷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내가 반면교사라고? 그렇게 생각하다니, 하여간 짜증 나는 놈이라니까.’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그 당시 세파리아스의 영향력은 이미 플래티넘 왕가를 뛰어넘은 상태였다. 엘프들의 〈개입〉 내지는 〈수습〉만 아니었어도 승리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별 따위에 두려워해서는.’
까드득.
드낙답지 않은 흉포한 기세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드낙이 범으로 보이는 인간이라면, 세파리아스는 범 그 자체였다. 아무리 인간이 무서워도 산길에서 마주친 범과는 못하는 법이었다.
엘프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업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놈들이 또 온다, 이거지.’
마음 같아서는 엘프들을 모두 죽이고 싶었지만, 세파리아스는 참았다. 엘프는 거의 영생을 살아갔고, 그 축적된 힘은 너무나도 높았기 때문이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그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이번에 드낙을 대신해서 눈을 뜬 것이다. 엘프들을 기만하기 위함이다. 드낙의 무골은 수재에 불과했다. 수재도 뛰어났지만, 천재보다는 못하는 법이다.
쉬익!
뱀처럼 롱소드가 휘어졌다. 그 검 끝은 정확하게 세파리아스의 턱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앞으로 휘둘렀음에도 완전히 검이 뒤로 꺾여지는 모습을 보며 세파리아스가 자세를 고쳐잡았다.
‘정말 엄청난 근력이야. 트롤이라는 놈들은 체격과 체중 때문에 그 근력을 백분 활용하지 못했어.’
드낙은 다른 인간종보다 척추뼈가 하나 더 많았고, 거기서 나오는 코어의 힘은 상상 이상의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체중을 지탱하면서 더 편한 것이 가장 큰 무서움이었다.
물론 앞으로 마주하게 될 엘프들의 앞에서는 숨겨야 할 힘이었다. 중립신은 엘프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 사실상 이 세상의 주인이었고, 큰 힘을 가지지 못한 중립신에게 위협적인 종족이었다.
‘중립신도 참 답답한 신이란 말이야.’
세파리아스는 강자인 엘프에게 약자인 중립신이 강자처럼 행동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중립신은 엘프에게 선택권을 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이번 일이 중요한 것이겠지.’
엘프를 얼마나 잘 속이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대계가 잘 되느냐 마냐를 가를 정도였다. 그만큼 엘프라는 종족은 강력한 종족이었다.
‘그런 자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텐데, 무슨 선택지를 내어주나. 부질없는 짓이다.’
세파리아스가 그렇게 생각하건 말건, 중립신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는 중립신의 말을 떠올렸다.
[엘프는 불멸자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필멸자다. 어중간한 존재이지.]
영생을 살아가는 엘프는 불멸자라고 부르기에 충분했지만, 동시에 언제든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필멸자이기도 했다. 신은 죽어도 영원불멸하지만, 엘프는 그러지 못했다. 그들은 죽으면 끝인 존재였다.
[앞으로 나아가서 신이 될 수도 없고, 뒤로 물러나서 부족한 그릇이 될 수도 없다.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가.]
중립신의 피를 받았기에 완전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고정되어버린 자들이었다. 그들은 발전하고 있지만, 그건 외적인 측면에서의 발전일 뿐이었다. 내적으로 그들은 이미 진화도 퇴화도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인간과 똑같은 기회를 주지는 못하겠지만, 그에 상응하는 기회를 줘야 한다. 엘프들은 곧 선택하게 될 것이다. 자신들이 불멸자인지, 필멸자인지를 스스로가 결정하여 나에게 보여줄 것이다.]
엘프들이 자신을 신과 동등한 존재로, 불멸자라 칭하는 행동을 한다면 중립신은 그들을 버릴 것이다. 〈테라〉에 있어야 할 존재는 모든 필멸자들이었고, 엘프들은 자신들을 불멸자로 여기기 때문이다.
엘프들이 자신을 필멸자로 생각한다면, 그들은 테라에 남게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테라의 주종족이 될 터였다.
이미 고정되어 완성된 그릇이기에 중립신의 명을 이행하는 종족으로 가장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인간이 변칙의 짐승이라면, 엘프는 고정된 짐승이었다.
어느 쪽이 더 우월한 것이 아니라, 서로 성질이 달랐다.
‘귀쟁이 새끼들. 지들이 잘난 줄 알아. 너희들은 안 봐도 어떻게 할지 뻔히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세파리아스는 엘프를 하찮게 보았다. 우월하다고 해서 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은 그렇게 간단한 곳이 아니었다.
새벽 수련을 통해서 세파리아스는 그 짧은 순간에 드낙의 육체를 모두 이해하고, 완급조절을 할 수 있었다. 생전 자신의 신체스펙만큼 움직이기로 했다.
“흠.”
거울을 보면서 빛에 눈을 반사했다. 녹색빛이 감돌았지만 완벽하게 녹안은 아니었다. 드낙은 엘프의 녹안의 인자를 얻어내는데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리고 있었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구나.’
세파리아스는 드낙이 누구보다 먼저 〈엘프의 녹안〉을 빨리 개화시킬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변화무쌍한 드낙의 심성은 엘프와는 대척점에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법 똘똘한 것 때문에 드낙이 엘프의 녹안을 빨리 얻어낸다는 것은 다른 면을 보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간신배와 박쥐의 상! 음험한 암살자와 노련한 사냥꾼! 그 어떤 곳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태세전환을 가진 생존마스터가 바로 드낙이었다.
이익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버리고 빤스입고 대로를 내달릴 정도로 일신의 안위에만 큰 관심이 있는 것이 드낙이었고, 그건 선민사상에 찌든 엘프와 완전히 반대되는 사상이었다.
세파리아스는 역지사지를 잘하지 못하는 천재였기에 드낙과 엘프라는 극명한 비교 대상을 서로 비교하고 나서야 드낙에 대해서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결코 좋은 건 아니었다. 동시에 중립신이 왜 드낙을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강자에게 결코 반기를 들 수 없으면서도 여러 가지 면에서 적당히 뛰어나다.’
세파리아스 불파겐은 때를 기다렸다. 곧 중립신이 예언한 엘프들의 원정대가 알아서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평화롭구나.’
동시에 세파리아스는 드낙의 대저택의 높은 곳에 배치된 테라스에서 호수 마을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남들에게는 일상에 불과하지만, 세파리아스에게는 또다시 맛보고 싶은 삶의 냄새가 절로 풍겨왔다.
후각을 잃고 나서야 후각이 얼마나 매력적인 것인지 깨달은 요리사처럼.
시각을 잃고 나서야 시각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깨달은 사수처럼.
죽고 나서야 삶이 얼마나 재미난 것인지 깨달았다.
그게 하늘마저도 내 손으로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대영웅이 중립신이라는 신에게 굴복한 이유였다.
*
엘프 원정대(Elda Andawaita)를 이끄는 〈고위 집정관 에아로테 게이아(Ealote Gaear)〉는 조용히 호수 마을에 도착했다. 그들은 조금 이상한 말투를 사용했지만 누구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것에 의심하기에는 자신들의 삶이 바빴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수많은 향신료를 첨가한 맛있는 사슴고기가 일품입니다!”
“마차를 보관할 곳을 찾으십니까! 바퀴 청소가 무료입니다!”
여기저기서 호객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부분 나이대가 어렸는데, 큰돈을 못 받기 때문이었다. 또한 대부분이 요리를 배우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식당에 취직하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호객 일이었다.
칼 하나 잡기 위해서 5년을 잡일만 하는 게 기본인 세상이었다. 산골 마을은 서로가 서로 다 잘 알아서 〈애송이〉 시절을 빠르게 끝낼 수 있지만, 호수 마을은 큰 마을이었고 그런 인심 내지는 텃세가 잘 없었다.
사람이 많으면 그 가치가 자연히 떨어지는 법. 호객하는 아이 중에 요리를 정작 배울 애들은 극히 드물 것이다.
엘프 원정대는 한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들은 불파겐에 대해서 귀동냥을 하고 다녔다. 술 한 잔이면 못 들을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물론 대부분이 아는 이야기에 불과했지만, 그것조차도 엘프들에게는 귀중했다.
‘불파겐다운 전공들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동시에 수많은 이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신전과 돈독한 사이라는 것까지 듣자 엘프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포악스러운 불파겐에게 인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렇다니까! 거의 게제라스 총관이 왼팔이지, 왼팔! 농지부터~ 저수지까지 문제가 일어나면 대부분을 총관이 다 한다니까.”
게제라스 총관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불파겐은 내정에 거의 손을 안 대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덕을 보고 있다는 걸 엘프들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호랑이가 발톱을 드러내지 않으니, 영지가 제법 돌아가는 것이다.
‘그럴듯하다.’
예성이 드낙에게 있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엘프들의 큰 착각이었지만, 그들은 별의 선택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오해할 만했다.
이들은 총 5일을 더 이곳에 머물며 최대한 데이터를 끌어모았고, 드디어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쉬익! 쉭!
바람 소리가 거칠게 엘프의 긴 귀로 들려왔다. 거침없이 움직이는 엘프들은 가히 서커스를 방불케 했다. 그 기괴한 움직임은 제자리 높이뛰기로도 높은 담벼락을 그대로 손과 발을 짚으면서 뛰어넘을 정도였다.
단번에 드낙의 저택에 들어온 엘프들은 사위를 살피지 않았다.
그 어떤 마법적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드낙의 대저택은 엘프들에게 있어서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그 어떤 어려움 없이 대저택의 심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드낙의 신변을 확보 혹은 데이터를 수집하여 돌아가는 것이 엘프 원정대의 최종 목표였다.
환경 조사를 실시하지 않았기에 그 수순이 매우 빨랐다.
아주 위협적이었다. 그렇기에 중립신은 드낙 대신에 세파리아스를 보냈다. 자신을 담보로 한 연기는 드낙보다는 세파리아스가 월등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드낙 또한 엘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 세파리아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과정에 아주 중요한 열쇠고리가 된 것이 엘프들이었다. 무서워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오히려 엘프에 대한 막연한 상상 때문에 다른 인간보다 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우릴 기다리고 있었나?”
완전무장한채로 있는 세파리아스를 보며 고위 집정관 에아로테 게이아가 물었다. 직책에 차이가 있어도 존대하는 엘프들과는 다르게 하등 종족에게 거침없이 말을 놓았다.
“그래. 의문은 풀렸나?”
“두 가지 의문이 남아있다. 하나는 저주성을 어떻게 획득했느냐이며, 다른 하나는 대형에 속하는 몬스터인 〈구울 묘지기〉를 어떻게 홀로 토벌했느냐는 것이다.”
“저주성은 그램린 때문에 익힐 수 있었다. 형식이 없어서 더 쉽게 배울 수 있었지. 감각만 뛰어나면 되니까. 구울 묘지기는 운이 좋았다.”
엘프들은 그 말을 들었음에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괘씸한.’
당연했다. 세파리아스의 두 눈에는 두려움과 공포라는 것이 없었다. 그것이 엘프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찍어누르면 누르는대로 죽어나자빠지는 벌레같은 종족이 완전무결한 종족인 엘프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다니···공포와 두려움에 말을 술술 내뱉는 놈들과 같은 취급을 하기 어려웠다.
불만을 품었지만 그 어떤 엘프도 직접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규율 있는 자들이었다. 고위 집정관 내지는 집행관 혹은 법무관의 명령이 있어야지만 움직일 수 있었다.
“진위여부고 자시고, 이러고 있을 상황이 아닐텐데. 제국에 대한 것을 듣지 못했나?”
“무슨 말이냐.”
세파리아스가 거침없이 몸을 돌려서 지하로 내려갔다. 고위 집정관은 잠깐 고민했지만 일단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세파리아스도 아니고, 직계도 아니며, 방계 따위에게 겁을 먹을 수가 없었다.
내려가서 본 것은 진열된 3벌의 제국 전신갑주였다. 또한 그 앞에는 유리관이 보였다. 푸른색의 슬라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꿈틀.
엘프들의 표정이 움직였다.
마법의 대가이며 태어나자마자 마력을 사용할 수 있으며 동시에 영혼적으로도 완성된 엘프은 보기만해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확인해봐라.”
세파리아스가 거침없이 유리관을 던졌다. 고위 집정관인 에아로테에게 던졌지만, 그녀는 그것을 받지 않고, 부관이 대신 받았다.
그 모습에 세파리아스가 혀를 찼다.
‘기분 더럽네.’
엘프들은 거침없이 제국 전신갑주에도 손을 대었다. 그들은 절로 표정이 굳어졌다.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렸다. 인간의 그 불안정한 영혼을 마력에 접목시키려고 하다니. 미친거냐?”
“내가 아니다. 제국이 한 일이다.”
“너 또한 인간이다.”
그 말에 세파리아스는 비웃음을 날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엘프들은 제국 전신갑주 3벌을 그대로 챙겼다. 그 어떤 수정도 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제국 전신갑주였다. 강탈이나 다름없었지만 애초에 인간의 사유재산을 인정해줄 엘프들이 아니었다.
스르릉.
또한 〈고위 집정관 에아로테 게이아(Ealote Gaear)〉가 검을 뽑았다. 그녀는 오만하게 불파겐 가문의 방계로 보이는 인간에게 말하였다.
“단 3합이다. 전력으로 맞부딪쳐야 할 것이다. 불파겐의 찌꺼기야.”
세파리아스는 내키지 않았지만 전력으로 선수를 취했다. 그 모습에 에아로테가 가소롭게 웃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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