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 <-- 여름의 끝 -->
〈길게이 플래티넘〉을 중심으로 뭉친 〈볼레티안 기사단〉 300명은 불파겐 영지에 들어섰다. 그들은 동부의 남쪽에서 들어왔다. 아직 호수 마을은 물론이고, 몽펠리에의 장원에 도착하기에는 한참이나 남았다.
햇빛은 강렬했지만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다. 말을 몰고 있는 길게이가 눈을 찌푸렸다.
광활한 대지가 펼쳐졌다.
“이곳이 동부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넓다. 이 평야는 대체 무엇인가. 지도에서는 그저 작은 골로 나와 있는데.”
이에 〈불릿 발레아르〉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진실을 말하였다.
“그만큼 세파리아스 불파겐의 그림자가 크다는 뜻입니다.”
명석한 길게이는 그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힘이 강한 국가는 지도에 땅을 더욱 크게 그리고 작은 국가는 그 그림을 받아서 쓰기 마련이다.
‘동부의 버려진 땅이 이렇게 넓은 줄 알았다면···’
길게이는 자신이 더 많은 것을 직접 확인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 후회했다. 만약 이것을 알았다면 일찌감치 공왕(共王)이 될 준비를 했을 것이다. 왕족임에도 공작의 작위를 하사받아서 이곳에 땅을 내렸을 터였다.
‘400년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그 그림자 때문에 동부가 버려진 땅이 되었구나.’
동시에 길게이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렸다. 백금 왕가는 양적, 질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고, 1만 원정대 또한 겨울에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여름에는 그 3배는 기본이었다.
마수와의 침공은 경우가 조금 다른 것이 정규병보다는 훈련도가 낮지만 마수의 공격에서 버티는 게 가능한 징집병의 비율이 높았지만 그건 상대가 상대였기 때문이다.
그 토벌도 실패했지만 백금왕가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냥 마신장 발라쿠가 보통 오우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300명으로 이 땅을 소유한 불파겐에게 환영을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길게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구불 골〉이 사실은 엄청난 대평야였기 때문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북부 기사〉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기사가 300명 아닙니까.”
불릿 발레아르 경이 길게이를 다독였다. 하지만 길게이는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본래는 600명이었지만 300명이 튀어버렸기 때문이다.
북부 기사들과는 다르게 남부 기사들은 사리에 밝은 면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국처럼 마법이 발달하며 자연스럽게 몬스터와 야수의 위협에서 벗어난 삶을 살면서 인류애라는 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인간을 강하게 묶어주던 쇠사슬이 벗겨졌으니, 다른 욕망이 드글드글 한 것이 당연했다.
이들은 가는 내내 공격을 받아야했다. 버려진 영지에서 이제 갓 벗어난 불파겐 영지의 남쪽은 몬스터와 야수의 땅이었다.
“쿠워어어아아악!!!!”
거칠게 포효하는 황색털의 거대 원숭이가 포효했다. 젖꼭지는 흥분해서 크게 발딱 서있었고, 평야의 코뿔소의 가죽을 산채로 뜯어서 사타구니에 두른 것이 거칠게 휘날렸다.
이마에서 튀어나온 뿔은 영락없이 이 거대 야수가 일각수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철그물과 올가미에 꽁꽁 묶이고, 상체에 창만 74개가 꽂히고 나서야 무릎을 꿇었다.
쒸이익! 쒸익!
거친 숨결을 내뱉으며 콧물이 삐져나온 3m에 달하는 원숭이가 길게이를 노려보았다.
“처리하십시오. 전하.”
불릿 경이 대검을 내어주었다. 하지만 길게이는 그것을 그에게 양보했다.
“내가 죽여서 어디에 쓰겠나? 강골인 그대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기사의 혈통! 그것은 수없이 죽여서 얻는 성질과도 같았다. 드낙처럼 당장 하나 죽인다고 뭐가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불릿 경은 3번을 권하였고, 길게이가 모두 거부하자 이내 자신의 검에 피를 묻혔다.
“원숭이는 제법 똑똑할텐데 왜 덤볐는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은가?”
“인간을 본 적이 없으니, 일단 덤벼들었을 겁니다. 알지 못하면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길게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딱 내 상황과 똑같구나. 불파겐에 대해서 많은 조사를 할 걸 그랬다. 이럴 줄 알았다면, 레이시아에게 시녀와 보석함이라도 넉넉하게 줄 걸 그랬다.”
“후회한다고 해서 늦은 것이 빨리 찾아와줍니까? 지금 있는 것을 소중히 하십시오.”
“항상 지금부터. 경은 언제나 그렇게 말을 끝냈지.”
길게이가 불릿 경이 할 말을 자신이 말하자 불릿 경이 송구스러워하였다.
“귀에 딱지가 붙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해체해서 가져가세. 뭐라도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등에 난 털이 예쁘고 부들부들하니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볼레티안 기사단 300명과 몰락 남부 귀족의 용병 200명 그리고 마법사와 연금술사, 대장장이까지 총 30명을 이끌고 그들은 〈석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막색의 〈킹슬레이 전신갑주〉를 입은 이스핀이 병사 둘과 함께 마중을 나왔다. 병사들은 하나같이 독기가 서려 있었는데, 그들을 교육한 기사인 이실레아 경의 특징을 고스란히 받은 모습이었다.
‘숙련병은 아닌데, 제법 기세가 있어.’
보는 눈은 있는 길게이가 정확하게 병사의 실력을 꿰뚫어보았다. 싸우면 다른 정규병에게 열세를 피하지 못하는 것이 불파겐의 병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병사로 복무한 기간을 생각하면 오히려 압도적인 성장률을 보였다.
“이스핀 롤레온이라고 하오! 어디에서 오시는 자들이시오!”
길게이는 플래티넘 왕가의 깃발이 하나 없었다. 대신 원색적인 삼각깃과 길게이 자신의 깃발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모를 수밖에 없었다.
무리에서 불릿 발레아르가 모습을 드러내서 외쳤다.
“우리는 길게이 플래티넘 왕자 전하의 군대다! 자작과 만나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다!”
천천히 불릿 경이 홀로 말을 몰고 다가왔다. 이스핀 또한 병사들을 대기시키고 거리를 좁혔다.
“자작님께서는 부재 중이지만, 게제라스 총관이라도 불러오겠소.”
“그렇게 말을 해주시니 고맙소.”
이스핀은 먼저 총관을 부르겠다고 말했다. 버티기엔 적의 군세가 너무 대단했다. 드낙 없이는 막을 수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세력이었다.
병사 하나가 말을 몰고 돌아갔고, 이스핀은 병사 하나와 함께 무리 안에서 길게이와 만날 수 있었다.
“자작에게서 성씨를 하사받았다고. 축하할 일이다.”
“감사합니다.”
이스핀은 상투적인 표현을 썼다. 길게이는 이것저것 물었지만 이스핀은 모호한 말로 피해 나갔다.
‘덩치는 산만한 놈이 사기꾼처럼 말을 제법 하는군.’
길게이가 이스핀의 여우같은 화법에 인상을 찌푸렸다. 천박하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이득에 밝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그만큼 실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면이 강한 게 길게이였다.
이스핀 또한 여러 가지를 물어봤지만 길게이가 누구인가? 3왕자에 외척도 도와줄 수 없을 정도로 몰락한 상태에서 2강 1약 후계체제를 만들어낸 자였다. 자신의 처지를 말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이스핀의 속을 살살 긁었다.
“호수 마을을 보니 아직도 전부 목책이던데. 벽돌을 만들 수가 없나?”
“벽돌이나 나무나 내구력이 비슷비슷하지 않습니까.”
“아하. 근데 그래도 영주성 하나 없는 게 참 이상하네.”
“그렇지요. 내성벽도 없습니다. 아직 부족한 게 많은 영지입니다.”
도렌이라면 정직하게 맞받아쳤겠지만 이스핀은 작은 미소를 띠면서 길게이의 의견에 한 번 변명하고 그다음에는 아예 길게이의 의견에 수긍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재미를 못 보겠다.’
길게이는 그런 대응을 보자 입을 싹 닫고 일어섰다.
“게제라스 총관이 자작의 왼팔이니, 나한테 오고 있다는 것이겠지?”
“예.”
게제라스의 영향력을 물어보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석지 마을의 밖에서 주둔지를 꾸렸다. 이스핀은 식수를 비롯한 몇몇 보급품을 은화와 거래하여 받았다. 불파겐 영지의 시세가 다른 영지보다 비싼 것을 보고 술 빼고는 크게 거래한 것이 없었다.
‘몰락 귀족들이 좋아하겠어.’
차익을 노리면 큰돈을 만질 수 있어 보였다. 용병단 중에 몇몇은 이 시세차익의 정보를 매우 귀중하게 여기는 듯 벌써부터 입단속을 한다는 보고를 길게이는 들을 수 있었다.
5일이 지나서 게제라스 총관이 마차를 타고 도착했다. 그것을 통해서 호수 마을과 석지 마을의 거리를 유추할 수 있었다.
‘말로도 2일 반이 걸린단 말이지. 그리고 여기도 또 평야다.’
동부가 나라의 이름을 바꾸려고 시도할 수 있는 이유를 길게이는 알 수 있었다. 잉여생산물의 발생이 너무나도 쉬울 수밖에 없었다.
전형적인 문인의 복장을 한 게제라스가 길게이에게 큰 예의를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여기까지 언질 없이 찾아오시다니, 대단히 급하신 일이 생기신 듯합니다.”
물론 행동이 곱다고 말까지 곱지는 않았다.
“오우거 토벌은 실패하고, 둘째 형님께서 볼모로 잡혔다. 보통 오우거가 아니었지. 인간에 대해서 잘 아는 오우거였어.”
그 말에 게제라스가 침을 삼켰다.
‘망명을 왔구나. 그것도 누구보다 한 발 빨리!’
길게이의 판단력과 추진력에 감탄했다. 게제라스 또한 길게이의 말과 그 행동을 역추적했기 때문에 망명을 쉽게 판단한 것이다. 그만큼 길게이의 행보는 시작하면 노골적이었다.
“저희 영주님이 부재중이라서···”
“어디로 갔는가?”
“몽펠리에와 파이룬 가문과 영지전을 하러 떠나셨습니다.”
“뭐? 결혼 동맹을 하지 않았나?”
길게이가 놀란 척을 했다. 속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뒤통수 치는 건 역사에서 수없이도 있는 일이고 뒤통수를 먼저 치는 건 항상 플래티넘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는 백금왕가의 편이었다.
〈진짜 역사〉를 교육받는 건 왕자들뿐이었다.
플래티넘 왕가가 지우지 못한 역사는 세파리아스 불파겐 하나뿐이었다.
불규칙한 유전자와 오랫동안 지속하는 가문의 힘이 하나 되어서 만들어진, 인간 종(種)의 극한에 이른 것이 그였다. 그런 그가 지나온 길을 단순한 왕가 하나가 지우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했지만, 민감한 문제가 하나 생겨서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게제라스가 더는 말해주지 않자, 길게이는 더욱 흥미가 생겼지만 깔끔하게 포기했다. 지금 그는 사실 불파겐에게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인원과 강함만 믿고 동부의 남쪽에 무단으로 자리를 펴면 드낙이 돌아오고 나서 다시 쫓겨날 것이 분명했다.
길게이에게는 불파겐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절절하게 있었고, 북부의 경우에는 성향 자체가 용맹했기에 서로 판단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도움을 줘도 되겠나?”
“음···사실 너무 갑작스러워서···”
게제라스의 목소리가 절로 작아졌다. 하지만 그 모습은 길게이에게 적극성을 부여하는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다 생각하고 왔으면서, 일부러 길을 열어주는 것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제법 문인이 생각을 할 줄 알았다. 드낙을 도와줘서 공을 얻고 알아서 자기 자리를 만들라는 소리였다.
‘총관의 충성심이 생각보다 높네.’
게제라스는 그 어떤 확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매우 무례했지만 길게이는 그것을 기쁘게 받았다.
갈 곳을 잃는 것보다는 지금 상황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불릿 경! 기사단 250명을 이끌고 출병하게.”
그 말에 불릿 발레아르가 게제라스를 보며 말했다.
“보급은 어떻게 하고 싶으시오. 총관.”
길게이가 그걸 말렸다.
“무슨 소리인가. 판을 깔아준 것만 해도 고맙다고 여겨야 하는데. 물론 그 이상의 무례는 용서하지 않겠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게제라스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길게이가 자신의 생각을 고대로 읽었기 때문이다.
‘왕자가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가장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용병들을 모두 보급으로 돌리게. 가져온 은화로 식량을 사고.”
“예. 왕자전하.”
불릿 경이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길게이는 이후에 50명의 기사단원 중에서 10명을 가려 뽑아 레이시아의 호위를 맡겼다.
총관은 10명의 기사를 추가로 얹어서 호수 마을로 되돌아갔다.
“지내실 곳은 병사들이 안내해줄 겁니다.”
“공주가 거주하는 곳의 바로 옆집을 줬으면 좋겠소.”
볼레티안 기사의 말에 게제라스가 웃었다.
“공주 전하께서는 신전에 있습니다. 사제들에게 지낼 곳을 부탁하십시오.”
“알겠소.”
기사들이 우직하게 움직였다. 그걸 보며 게제라스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 짧은 평화도 벌써 끝이구나.’
레이시아 공주가 불쌍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생각으로만 끝났다. 공주가 가지는 가치는 게제라스에게 있어서 큰 부분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난 환영해야겠지.’
감정적으로 생각하면 동정심이 일어났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번 일은 크게 환영해야 할 일이었다. 그 때문에 게제라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외청으로 향했다. 문인들을 모아놓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계획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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