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전사-433화 (432/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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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불라온 경. 아무래도 며칠 걸릴 것 같은데, 방이라도 하나 잡고 여독을 푸시오.”

“···실례가 안 된다면, 아크온 님의 보좌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아크온은 그 말에 고개만 돌렸다. 이에 불라온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이라도 조언을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투구를 벗고 들어왔기에 불라온 경의 표정은 그대로 드러났는데, 조급함. 아쉬움 그리고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버팔로 나이트>의 명성은 남부 왕국 수도를 중심으로 크게 휘몰아쳤고, 그 태풍은 조금 가라앉았지만, 지금도 여전했기 때문이다.

아크온의 아버지인 <젝팔론 몽펠리에>이자 <몽펠리에 52세>가 두려워하여 불라온 경을 보내어 미리 서신을 보낸다는 것부터 그의 명성을 알려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말은 가주 직을 받지 않겠다고 하지만, 하는 짓을 보면 절대 그렇지 않아.’

불라온 경의 눈이 반짝였다.

호탕하고, 명예를 중시하며 인간관계에 있어서 항상 양지바른 햇빛과도 같은 아크온이지만, 그가 걸어온 행보를 종합하여서 본다면 그는 황금으로 자수된 붉은 양탄자가 펼쳐진 길을 걷고 있는 후계 1위였다.

“동생에게도 이 서한이 갔는가?”

“아닙니다. 불파겐과 연을 맺은 것은 아크온님 뿐입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지. 용병이 어떻게 불파겐의 후손이겠는가. 하하하.”

아크온이 시원하게 웃었다. 얻어걸렸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아님을 아크온 자신도 잘 알았다. 아는 것만큼 세상이 보인다는 말은 실로 진리와도 같았다.

때로는 운에 파묻혀서 많은 이들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파도가 휘몰아칠 때마다 뻘 속에서 햇빛에 반짝이는 보석처럼 빛나는 것이 지식이었고, 경험이었다.

저벅, 저벅.

아크온은 그대로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촛불을 켜고, 양피지를 폈다. 양쪽에 금속두루마기가 달려있었으므로 따로 고정대를 놓을 필요가 없었다.

‘미쳤군.’

그의 평가는 한 마디로 끝났다. 분명 <트롤 토벌전> 이후 100마리가 넘는 트롤 부산물을 오롯이 들고간 드낙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것을 봤고, 그를 대영웅이라고 추켜세우기 바빴다.

북부 귀족들의 드낙과의 결혼동맹은 필수적으로 여겨졌을 정도였다. 하지만 결혼하고 1년이 지날까 말까 한 시기에 문제가 터졌다.

‘어리석은 것은 아니지만, 위험한 길을 선택했구나.’

물론 그런 위험한 일을 한 번에 추진시키지는 않았다. 그저 판단이 그렇게 정해진 것뿐이었다. 되돌리려면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었다.

‘드낙은 마탑을 세우고 싶어 하지.’

외척에 마법사 전력을 달라고 아내들에게 요청한 적이 있었다. 더울 땐 시원하게, 추울 땐 따뜻하게 지내기 위한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일이 추진력을 받았다.

‘불파겐 영지에는 지금 마법적 지식을 지닌 이가 없다.’

있었다면 드낙이 외척에게까지 그런 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당연한 추론이었고, 그렇기에 <제국 전신갑주>에 대한 수작질을 생각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몽펠리에의 첩자인 대장장이 또한 몽펠리에를 위해서 일할 것이므로 드낙에게 들킬 수가 없었다.

치밀하고 완벽한 계획으로 보였다.

‘또한 일이 틀어져도 변명거리가 있다.’

그게 서한이 아크온에게 간 이유이기도 했다. 몽펠리에 가문을 위해서 드낙과의 우정을 사용하라는 뜻이었다. 어디에도 그런 소리는 없었지만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정황이었다.

상황이 크게 틀어지려고 할 때, 아크온보고 나서라는 뜻이었다.

<호구 드낙>이라면 받아들일 것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크온은 비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말을 해도 못 알아먹고. 어처구니가 없군.’

드낙은 대단히 세속적인 인물이었다. 명예욕을 따지는 것처럼 보이고, 식량 같은 것을 베푸는 면이 있었지만,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무조건 이득을 취했다.

‘토치라이트에서부터 일관성 있지.’

아크온은 다시 한 번 양피지를 훑었다.

드낙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마법사를 드낙에게 보내어 마탑 건설에 일조하며 자연스럽게 드낙에게 마법 지식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수작질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하고 있었다.

‘노련하긴 노련한데. 어찌 될지.’

아크온은 양피지를 다시 말아버리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가 판단해야 할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성공했을 때, 다른 건 실패했을 때다.

‘성공하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없다.’

몽펠리에는 유례없는 군사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한 불파겐은 도움닫기를 할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것이다.

‘드낙의 강함은 인간 외적인 것이 많다. 고꾸라뜨리는 것이 맞다.’

위험을 감수하고 진행할 정도였다. 그만큼 신문물격인 <제국 전신갑주>의 온전한 유입은 무시무시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을 드낙이 다룬다면, 힘의 논리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놈들은 병신이지.’

아크온은 그 결정을 잘 알면서도 그것이 헛된 일인 것을 짚었다. 당연했다. 드낙은 지금까지 끝없이, 정말이지 일관되게 친귀족적인 성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배신할 생각을 하다니···상대가 불파겐이라서 때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불명예스러웠다.

이득, 정황, 정치 등을 고려해서도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크온은 양피지를 처음 봤을 때, 얼굴을 들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드낙이 보여준 신의(信義)를 정면으로 부수는 격이 아닌가.’

그 믿음과 의리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인지, 너무나도 정치적으로 판단했고, 지나칠 정도로 가문적인 결정이었다. 그러므로 아크온은 오히려 드낙에게 서한을 쓸 생각을 가졌다.

‘이르지만, 때가 온 것이겠지.’

“후우.”

아쉬움이 절로 남았다. 그의 대계(大計)는 아직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주 직을 받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면서 가문 내에서의 분란을 야기시켜서 썩은 밀알들을 골라내고.

남부를 돌아다니며 백금 왕가에게 도움을 주고, 몰락한 남부 귀족들과 인연을 맺고.

다시 몽펠리에 령으로 돌아와 주변을 시찰하며 부패한 잡것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그것을 단 한 번에 휘몰아쳐서 몽펠리에의 썩은 피를 뱉어내게 하고, 부패한 살을 잘라내려는 것이 아크온의 대계였다.

‘하지만 이번 일이 큰 문제가 되면 폭풍처럼 휘몰아칠 수 있다.’

유례없는 몽펠리에의 위기 속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용서가 되기 마련이었다. 아크온은 촛불 하나가 켜진 곳에서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서한을 보내는 것은 하지 말아야겠다.’

깊은 고민 끝에 아크온은 드낙에게 서신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 드낙이 자신을 믿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우정이라는 말로 맹신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세속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아크온은 하루를 더 머물며 생각을 단단히 정리한 다음에 불라온 경과 함께 <몽펠리에 성>으로 향했다.

덜그럭. 덜그럭.

토치라이트 영지에서 불파겐 영지로 가는 길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덜컹거리며 길을 따라가는 짐마차 한 대는 매우 느릿느릿했다. 빨리 갔다가 바퀴가 박살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덥다.”

위에 덮개가 없는 마차에는 사람들이 14명이나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중에는 6살난 애에게 부채질을 하는 여자의 모습도 보였다. 마부는 밀짚모자를 쓴 채 하품을 했다.

“푸르륵!”

잘 가다가 말 한 마리가 푸레질을 하며 멈추어서자 옆에 있던 말 또한 멈추어섰다.

“아! 요놈들, 빨리 가자!”

마부가 소리를 한 번 내며 얇은 나뭇가지로 톡톡 말을 쳤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가진 재산이 말 두 마리가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 두 마리는 더욱 배짱을 부렸다.

“여기서 오늘은 쉬어야겠소.”

“아니, 좀 쎄게 때려야지. 숨도 차보이지 않는데.”

“덩치도 큰 말놈이 하루에도 이렇게 자주 서는 게 말이 됩니까?”

마차에 탄 사람들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마부는 마차에서 내려서 굽신거리면서 마차에 탄 이들 중에 부풀러 있는 로브를 입은 마법사에게 사죄를 했다.

“죄송합니다. 마법사님.”

“괜찮아요. 전 돈도 안 내고 탔잖아요? 마음 안 쓰셔도 됩니다.”

말끔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사 페리에 러셀(Perrie Russell)>의 눈과 마부의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 색이 빛이 비칠 때마다 바뀌는 모습에 마부가 움찔했다.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에, 헤헤···”

마부가 절로 비굴한 웃음소리를 냈다. 겁을 먹은 것이 절로 보였다. 눈의 색이 매번 바뀌는 인간이라니, 괴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더니. 하나같이 기괴해. 괜히 태웠나···’

마부가 몸을 돌리며 더운 날에도 몸이 으슬으슬하자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알버트 스펜서의 괴짜같은 행보 때문에 토치라이트 령에서 사는 이들 중에 그 이름을 모르는 자들은 드물었다.

잠시 쉬고 물도 먹여주고 말들을 쓰다듬어주면서 사정사정을 한 마부는 다시 짐마차를 끌었다. 사람들이 냉큼 올라탔다.

이들은 토치라이트 영지에서 불파겐 영지로 이주하려는 자들이었고, 마부는 그들을 통해서 돈을 벌고 있었다. 지켜줄 용병 하나 없었기에 위험천만했지만, 돈 한 푼 아끼려고 이런 무리한 짓을 하는 것이었다.

마차에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머릿수가 많으면 도적들도 함부로 못 덤볐다. 그들 또한 제대로 된 전투 하나 겪지 못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야아아!!!”

낮은 곳에 있는 나무와 무성한 수풀이 있는 곳에서 더러운 행색의 강도가 여섯 명이나 튀어나와서 말 앞을 가로막았다.

“히힝!”

비싸게 팔아먹고,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말이라서 위협해도 말을 죽이지는 않았다.

인간보다 비싼 게 말이었다.

“어어엇!”

마부가 엉거주춤한 채 눈만 크게 떴다.

“이 새끼가, 내려!”

강도 하나가 칼을 뒤로 크게 뺀 상태로 왼손만 뻗어서 팔을 잡아당겼다. 마부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그 어떤 것도 판단하지 못한 채로 패대기쳐졌다.

“움지기지마! 움직이지마!”

혀가 꼬이면서 제대로 말을 못했지만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강도 2명이 마부를 경계하고, 나머지 4명은 뒤로 향하며 나무창으로 푹푹 허공을 찌르면서 소리를 지르고, 몽둥이로 마차의 나무 부분을 후려치기도 했다.

퍽퍽 파손되는 마차의 소리 때문에 모두가 패닉에 빠졌다.

펑!

동시에 충격음이 크게 나면서 강도 하나가 그대로 날아갔다. 푸른색의 강렬한 빛을 내는 사람 상체만 한 지팡이를 쥔 페리에 러셀이 몸을 일으켰다. 로브에도 문양이 생겨나며 푸른 마력을 강하게 토해냈다.

“마법사다!”

뭔가 주워들은 것이 있는 강도는 그렇게 소리를 치며 그대로 물과 돌을 통해서 잘 갈아서 뾰족하게 만든 투척 돌을 던지며 달려들었다. 마법사는 근접에서는 맥을 못 춘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기사>나 <정규병>에 한한 일이었다.

깡!

돌에 맞은 로브가 금속음을 냈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현상이었다. 동시에 푸른빛을 내는 지팡이가 달려오는 강도에게 향했다. 강도가 미끄러지듯이 멈추어섰다.

펑!

충격파가 터지며 그대로 강도가 날아가면서 땅을 구르더니 철퍼덕 엎어져서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순식간에 나머지 강도들이 도망쳤다.

“허억! 헉헉!”

마부는 전력질주를 한 것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페리에 러셀이 다가가서 마부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마부가 감사를 표하자 다른 이들 또한 똑같이 그녀를 칭송했다.

다시 마차에 올라탄 페리에 러셀은 로브를 더욱 여미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너무 척박한 곳인데. 내가 괜히 온 걸까.’

독립을 한 그녀는 자작의 직위를 받은 불파겐 영주의 인장과 게제라스의 인장을 받은 서신을 받았고,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다. 게제라스의 스카우트를 받은 것이다.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는 있을까? 물론 트롤 부산물은 많겠지만···그게 나한테 오긴 올 수 있을까.’

걱정을 가졌다. 드낙과 일면식이 있었기에 일말의 기대감 또한 가지고 있었다. 물론 썩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페리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짐마차가 호수 마을로 꾸준히 향했다. 가면서 게제라스와 불파겐 영주의 인장이 찍힌 것을 보여주자 병사가 다섯이나 붙었다. 그 덕에 사람들은 페리에를 아주 상전 모시듯이 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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